천장에 닿을 듯이 높고, 두 팔 가득 보다 훨씬 넓은 거대한 흑백 스크린을 둘러싸고 수많은 관중과 취재진이 서 있었다. 설렘과 긴장감으로 공기는 사뭇 무겁기까지 했다. 오래된 텔레비전 스크린에 나타난 과거의 영상과 백남준의 모습에서부터 로봇의 이야기가 들리더니 2026년 현재 이 공간에서 펼쳐지는 누군가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치기 시작했다. 과거를 지나, 로봇의 언어를 지나,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딘 곳의 모습이 스크린에 비치자, 관중 가운데 옅은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달 28일과 29일 오후 백남준아트센터의 공기는 수많은 관중과 취재진의 긴장감과 설렘으로 가득 찼다. 백남준의 기일인 1월 29일을 기념해 28~29일 센터에서는 추모 행사 ‘AI 로봇 오페라’가 펼쳐졌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전시장 한가운데서, 고장 난 로봇을 수리하는 장면으로 퍼포먼스는 출발했다. 전선을 꽂고, 팔을 들어 올려보는 손길.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 상태 그대로 로봇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느린 시작은 이번 공연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분명히 드러내는 신호였다.
이날 다시 걷기 시작한 로봇 ‘K-456’은 백남준이 1960년대 뉴욕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이 로봇을 거리로 내보내 연주자와 협연하게 했고, 콩을 배설하거나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는 장면까지 포함했다. 백남준이 이를 ‘21세기 최초의 참사’라 불렀던 이유는 분명하다. 기술이 완벽해질수록, 인간은 기계 앞에서 무엇이 되느냐는 질문 때문이다.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이번 로봇 재가동의 의미를 “작동하지 않던 것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데서 끝나는 복원이 아니라, 백남준이 남긴 질문을 지금의 기술 환경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로봇을 수리하던 남성을 비추던 스크린에 이번엔 또 다른 풍경이 담기기 시작했다. 긴 다리를 휘청이고 바닥에 몸을 낮추며 오체투지를 반복하고 있는 로봇. 권병준 작가는 이 느린 수행을 ‘의도된 불완전함’으로 설정했다. 효율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 자체가 로봇의 서사가 되도록 한 것이다. 그는 28일 리허설 중 로봇이 쓰러지는 사고마저 수리 퍼포먼스로 끌어안았다. 즉흥과 오작동을 배제하지 않는 태도는, 완벽한 기계를 향해 질주하는 오늘의 로봇 기술과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었다.
또 다른 쪽에서는 가면을 쓴 로봇이 손바닥만 한 키보드를 두드리며 기괴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작가는 이를 일종의 주술적 장면으로 설정했다. 로봇과 연주, 몸짓을 통해 백남준을 다시 불러내는 의식에 가깝다. 이 공연에서 로봇은 도구가 아니라, 호출되고 수행하는 존재였다. 음악 역시 AI와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졌다. 작가의 설명처럼,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이 공연의 또 다른 협연자였다.
마침내 관객들 사이로 들어온 로봇 K-456은 한 발 한 발 문턱을 향해 나아갔다. 출입문 앞에서 로봇은 잠시 멈춰 커피콩을 배설했다. 관객들 사이로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로봇은 문턱을 넘었다. 그 장면은 기계가 이동한 순간이라기보다, 인간과 로봇 사이에 놓여 있던 경계가 잠시 열리는 장면처럼 보였다. 인간이 달에 첫발을 내디뎠던 장면처럼 어색하지만 분명한 ‘넘어섬’이었다. 눈코입을 가진 로봇, 뻥 뚫린 몸체 사이에 자리한 배꼽. 다시 뛰게 된 심장은 무엇이 인간이고, 로봇인지 경계를 되묻는다. 분명한 건, 백남준이 현재의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의미함’이나 ‘허무함’이 아닌 공존은 아닐까. 그리고 그 속엔 가치에 대한 존중, 존엄이 있을 테다.
로봇은 다시 스크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전처럼 갇힌 존재는 아니다. 화면 안과 바깥, 인간과 로봇 사이의 경계는 느슨해졌고, 마치 금방이라도 말을 걸 것 같은 표정으로 관객을 응시했다. “인간은 기계를 닮아가고, 기계는 인간을 닮아가는 공진화의 회로 속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를 묻는 장면”이라고 박남희 관장은 설명했다.
29일엔 김은준의 음악 퍼포먼스 ‘시퀀셜’도 함께 열려 로봇의 감정과 취약함을 소리로 확장했다. 지난 이틀의 시간은 ‘로봇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대신 ‘인간은 무엇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느림과 실패, 불완전함, 질문하는 태도. 백남준이 60년 전 뉴욕에서 던진 이 질문은, 다시 한 번 우리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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