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판이 아니라 열 판이다. 물러설 수 없는 승부, ‘십번기’. 바둑에서 기량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동일한 상대와 열 번의 대국을 치르는 이 형식은 그 자체로 끝장을 보는 싸움에 가깝다. 다시 도전할 기회도 없다. 패배한 쪽은 실력 차를 인정하고 등급을 내려야 하는 냉혹한 승부다.
수원시립공연단이 오는 4월3일부터 사흘간 정조테마공연장에서 선보이는 제29회 정기공연 연극 ‘십번기’는 바로 이 구조 위에 청소년의 성장과 감정을 얹는다. 작품은 1987년 수원을 배경으로, 바둑을 유일한 쉼터로 삼던 중학생 소년 ‘훈’과 시골에서 전학 온 소녀 ‘연희’가 열 번의 대국을 통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연패 속에 흔들리는 소년과, 묵묵히 자신의 길을 두는 소녀. 승부는 반복되지만 그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은 점점 깊어진다.
“제 10대 시간은 거의 바둑판 위에서 피었다가 시들었어요.”
원작 소설을 쓴 해이수 작가에게 ‘십번기’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자신의 청춘을 옮겨놓은 기록이다. 그는 십대 시절 대부분을 기원에서 보냈다. 교과서보다 바둑책이 더 많았고, 하루의 대부분을 돌을 두며 보냈다. 크리스마스 기도마저 “포석을 잘 두게 해달라”고 빌 정도였다.
기원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매일 찾아오던 중절모의 노인, 승부를 앞두고 일부러 상대를 도발하던 중년 남성, 대학 교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오갔다. 작가는 “그때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 기억들은 소설과 무대 위 인물로 다시 살아났다.
■ “실력이 있으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 바둑이 준 첫 깨달음
바둑에 빠져든 이유는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승부의 세계가 가진 ‘공정함’이었다. 실력을 갖추면 상대가 누구든 이길 수 있는 게임. 어린 시절, 늘 패배하던 아버지를 처음으로 꺾었던 순간은 그에게 강렬한 깨달음을 남겼다. 나이나 지위, 신체적 조건이 아닌 오직 실력으로 평가받는 세계. 바둑은 그에게 처음으로 ‘존중’을 경험하게 한 공간이었다.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삶과 창작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바둑은 계속 플랜을 세우면서 싸우는 게임입니다. 내가 이 수를 두면 상대는 어떻게 대응할지, 인내심을 가지고 열 수 앞까지 내다보며 읽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계획하고, 구조화하고, 실행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이 글을 쓰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소설 역시 치밀한 구조 위에서 전개된다. 하지만 바둑이 가르쳐준 것은 계획의 중요성만이 아니었다.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요. 바둑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한 수를 두면 상대가 반드시 방해를 하죠.”
아무리 치밀하게 대비해도 삶에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는 바둑과 인생의 공통점을 ‘응전’에서 찾는다.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상황에 대응해 나가는 것. 그것이 삶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기, 그것이 인생”…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된 수원
이러한 인식은 작품 속 인물 관계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십번기’에서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주고받는 감정이다. 열 번의 대국을 이어가는 동안 두 주인공은 경쟁자를 넘어 서로의 상처와 외로움을 이해하며 성장한다. 바둑은 이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마주 보고 기다리는 시간이 된다.
작품의 또 다른 축이자, 작가의 십 대 시절을 구성한 또 다른 존재는 ‘수원’이다. 남문중학교, 매교다리, 서장대 등 구체적인 공간은 작가의 기억이 깃든 실제 장소다. 이는 연극 무대에도 생동감 있게 구현되며 관객에게 그 시절의 정서를 전한다.
“수원이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의미일까 스스로 많이 물었어요. 젊은 시절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우리 세대에게는 세상을 이해하는 창 같은 곳이었더라고요.”
1980년대 팔달문 일대는 극장과 서점이 밀집한 번화가였다. 그는 그곳에서 책과 영화를 통해 세계를 접했고, 기원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삶을 배웠다. 고향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자신을 형성한 공간이었다. 여기에 더해, 10년이 지나 자신의 소설 작품이 무대 위에 오르는 경험은 또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글로 썼던 이야기가 배우들의 몸짓과 호흡으로 구현되는 모습은 그에게도 낯설고도 황홀한 경험이었다.
■ 십 대, “가장 치열하고 용기 있는 존재”
“10대는 어쩌면 가장 순도가 높은 마음을 가진 시기예요. 가장 격렬하게 사랑할 수 있고, 가장 뜨겁게 절망할 수 있는 나이죠.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 아무 대책 없이 아파할 수도 있는 시기예요. 저는 그 10대를 인생에서 가장 많은 감정이 오가는, 가장 격렬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작가는 10대를 ‘미숙한 시기’로만 보지 않는다. 두려움 없이 가장 용기 있고, 순수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기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감정. 연극으로 다시 만난 ‘십번기’를 통해 그는 그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어떤 마음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대로이더라구요. 엔딩을 보는데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때의 순수하고 치열했던 그 마음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함에 말입니다.”
빠르고 자극적인 이야기에 익숙해진 시대, ‘십번기’는 가장 느린 방식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한 수를 두기까지의 고민, 상대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받아들이는 결과. 그 시간의 중심에는,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냈던 우리 모두의 ‘그 시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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