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소식통

[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고양이와 함께 세미화를 그리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 풍경
고양이 시선으로 관찰하며 ‘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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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노작홍사용문학관장

‘걷는 것이 쉬는 것이다.’ 출간을 앞둔 여행 작가의 책 제목을 고민하다 며칠 궁리 끝에 붙여준 제목이다. 걸음의 동작과 쉼의 상태를 분리하지 않고 활동하는 명상으로서 몸과 마음이 그리고 일과 휴식이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보니 책은 품절된 지 오래다. 작명가로서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생각까지 품절이 된 것 같아 심란하다. 마음의 복잡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잠자코 지켜보다 늪처럼 고이지 않고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읽던 책을 접고 산책을 나서기로 한다.

 

산책이야말로 문자 너머의 책이다. 내 요즘의 독서는 길에서 만난 고양이의 눈을 빌려 읽은 골목을 다시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고양이가 어디에 주목하고 있나를 살펴보면 틀림없이 명문장을 만날 수 있다. 평소엔 볼 수 없는 풍경이나 그늘 속의 사물들이 그 자체로 경이로운 사건이 돼 드러난다. 최근 내 노트에는 고양이의 두 눈을 호동그래지게 한 숲길의 작은 지진이 추가됐다. 바람도 없는데 바닥의 낙엽이 꿈틀대고 있었다. 누가 굴착공사를 하고 있나. 검불과 땅을 뒤흔들다가 바깥으로 살짝 흙 묻은 코를 내민 뒤 킁킁거리다가 낌새가 수상쩍은 걸 알아차리고 얼른 숨어버린 주인공은 앙증맞은 두더지였다. 나로선 미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장면들과 만날 때 걷기와 읽기와 쉼이 하나의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악기의 공명음을 일으킨다. 일상의 시간과 속도로부터 놓여난 나는 그렇게 나만의 시간과 속도를 창조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늘 오가는 길의 풍경들을 읽던 중 하루는 길고양이를 따라 대로변까지 화분을 늘어놓은 농원 앞에서 멈췄다. 소음과 먼지의 한복판에 수선화 화분들이 나와 있었다. 그 앞에 멈춘 건 고양이와 나만이 아니어서 꽃 앞에서 누군가 한참 구애의 몸짓을 하고 있었다. 정지비행 중인 박각시나방이었다. 도돌이표처럼 돌돌 말려 있는 더듬이가 화촉을 밝힌 노란 꽃잎 속으로 뻗어들어가고 있는데 이 과정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는 듯 박각시나방은 사뭇 골똘하게 겨눈 더듬이가 꽃잎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날갯짓의 속도를 조절하느라 꽤나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지한 자세를 함부로 방해할 수 없다고 느꼈던지 고양이도 침묵을 지켰다.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 수선화 속에 마침내 조바심을 하던 더듬이가 곧게 펴져 안착할 때 꽃잎이 간지럽게 떨리는 듯했다. 그때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신혼의 첫날밤을 훔쳐보듯 내 눈에 장난기 어린 생기가 감돌았을까.

 

이처럼 현미경을 들고 세미화를 그리듯 주변 세계와 관계할 때 매일같이 마주치는 일상은 신화나 여행이나 꿈이나 사랑이나 축제 같은 비일상의 영토가 된다. 편견과 선입견의 더께를 벗고 생생한 생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대도시의 소음에 시달리며 깊은 몽상의 세계를 탐닉한 이미지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성실하게 살아진 세미화는 나를 주위의 세계로부터 떼어내고 내가 그 주위 세계의 해체작용에 저항하는 것을 돕는다’.

 

그러고 보니 박각시나방과 수선화의 밀애 장면에 몰입해 있는 동안 질주하는 바퀴들의 소음과 먼지가 한결 견딜 만해진 것 같기도 하다. 기껏 책 제목 하나에 사납게 아우성이던 마음의 불편도 조금은 유순해져 들끓던 마음에 싸리비로 정갈하게 비질을 한 마당 같은 고요한 여백이 머무는 듯도 하다. 이 마당을 콕 찍고 가는 새와 볕과 구름이 그냥 스쳐가길 멈추고 그들만의 문장을 건네온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가며 받아쓰기를 하던 아이로 돌아가 나는 그들의 말을 받아적기에 바쁘다. 경청했으나 개중에는 늘 놓친 말들이 더 많다. 뒤늦은 자각으로부터 주변의 작고 희미한 눈짓들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겸허한 자세가 간신히 가능해진다.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지만, 이 꽃나무는 깊은 산속에 스스로 피었다가 지는데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왕양명은 답했다. ‘당신이 이 꽃을 보지 않을 때 꽃은 당신처럼 외로워지지만 당신이 이 꽃을 바라보는 순간 꽃의 빛깔이 선명해지니 꽃은 당신의 마음 밖에 있지 않다’고.

 

봄이 오고 또 와도 늘 새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봄은 반복 속에 차이를 만든다. 같지 않으니까 낯설고, 낯선 것은 일상 속에서 눌려 지내던 다른 감각을 깨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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