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수많은 무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현악 사중주가 연주되지만 프란츠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만큼 연주자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불태우는 작품은 흔치 않다. 깊은 병마와 절망의 끝에 서 있던 스물일곱의 슈베르트가 완성한 이 거작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대상인 ‘죽음’ 앞에서의 고뇌를 압축해 놓은 듯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슈베르트가 1817년 작곡한 가곡 ‘죽음과 소녀’에서 가져온 것이다. 독일 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를 바탕으로 한 이 노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녀와 그녀를 조용히 달래는 죽음의 대화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죽음이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요한 안식처럼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죽음과 소녀가 시대를 넘어 걸작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죽음과 시련 앞에서 흔들리고 저항하며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인간 내면을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동안 여러 번 이 작품을 연주했음에도 첫 음을 시작하는 순간은 늘 새롭다. 마치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에너지와 마주하는 느낌이다. 1악장의 처절한 저항, 2악장의 성찰, 3악장을 스치는 한 줄기 빛을 지나 음악은 마지막 4악장에서 운명을 껴안는 수용의 춤으로 나아간다. 필자는 자주 음악과 인생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죽음과 소녀가 그려내는 저항과 성찰, 수용의 여정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성장의 과정과 놀랍도록 닮았다. 살아가며 예기치 못한 시련과 상실, 실패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먼저 세상과 치열하게 싸운다. 분노하고 저항하며 버텨내는 이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삶이 뿜어내는 가장 뜨거운 에너지의 순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러한 치열한 저항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문을 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네 대의 악기가 서로의 숨결을 맞추듯 우리 또한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더 깊은 이해에 이르게 된다. 치열한 저항과 깊은 성찰을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수용은 평온함의 경지다. 그래서 수용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삶을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힘이다. 이렇듯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악기와 씨름하고 호흡하며 고민하는 시간들이 있기에 나에게 음악은 단순한 소리의 나열이 아니라 값어치 있는 삶 그 자체다. 삶이 그러하듯 음악 역시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여정이다. 그 안에는 인간과 삶에 대한 깊고도 아름다운 진실이 담겨 있다. 얼마 전 이 곡을 연주하던 그 무대에서 네 대의 현악기가 만들어낸 치열한 서사 속에서 필자는 다시 한번 느꼈다. 사람마다 마음 깊이 사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예술과 테마가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은 음악일 수도, 미술이나 문학일 수도, 혹은 묵묵히 가꾸는 작은 정원일 수도 있다. 그렇게 온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우리는 시련을 견디는 힘을 배우고 삶의 깊고 아름다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음과 소녀’의 여정을 살아간다. 두려움과 마주하고, 고뇌하고, 성찰하며, 삶을 더 깊이 이해해 간다. 예술은 그 여정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소중한 동반자라고 믿는다.
국민적 분노가 어디를 향하고 있다고 보나. 젊은 영화감독의 죽음이어서인가. 일부분일 것이다. 묻지마 폭행에 의한 참변이어서인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장애 있는 아들 앞에서 당한 폭행이어서일까. 안타깝지만 다는 아닐 것이다. 이런 충격에 더해진 분노가 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경찰 수사 과정이다. 용의자 입건이 갈팡질팡했다. 구속영장이 검찰·법원에서 기각됐다. CCTV 동영상, 목격자 진술 수사도 엉성했다. 김창민 사망을 향한 분노의 핵심이다. 그 분노를 풀어줘야 할 발표가 있었다. 감찰조사 실시 및 시민감찰위원회 개최 결과다. 경기북부경찰청이 27일 언론에 공식 발표했다. 전체 감찰 대상은 11명이었다. 6명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5명은 경고 및 주의 조치를 받았다. 단일 사건의 징계 처분으로 그 수가 적지 않다. 경찰이 “초동조치 및 수사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그 ‘부실’의 내용은 빠졌다. “감찰 사안이라 (내용) 공표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실망이다. 국민이 알고 싶은 건 징계 숫자가 아니다. 어떤 부실인지가 알고 싶은던 것이다. 부실 항목의 윤곽은 이미 유족, 목격자들이 제기했다. 초기 피의자 미분리 문제, 치사 사건의 중대성 미인지, 늦어진 추가 입건 등이다. 영장 기각으로 이어진 수사 부실 지적도 많다. 이런 의혹의 진실을 밝혀줄 감찰이었다. 이 부분을 하나도 밝히지 않았다. “초동·수사 문제 확인했다”면서도 거기서 끝냈다. 사건 처리·수사가 부실이 있는데, 이러면 감찰 발표까지도 부실이다. 참작해볼 제도가 있다. 수사 중인 피의자의 신상 공개 제도다. 특정 중대범죄를 저지른 피의자가 대상이다. 피의자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를 거친다. 경찰청장 또는 검찰총장이 구성·운영을 주관한다. 2024년 1월25일 특별법으로 발효됐다. 범죄 예방을 위한 무죄추정의 제한이다. 일반 범죄 예방이라는 입법 취지가 있다. 이번에 감찰에 요구됐던 취지는 경찰의 신뢰 회복이어야 했다. 때마침 수사 전권을 맡은 경찰이다. 이번 사건에서 잃어버린 신뢰가 크다. 그 신뢰 일부가 검찰로 갔다. 송치받은 의정부지검이 전담팀을 구성했다. 보완수사를 통해 2명을 구속했다. 정성호 법무장관이 검찰의 보완수사를 평가했다. “검찰 보완수사의 성과”라며 치켜세웠다. 경찰의 수사 부실을 전제하고 있다. 경찰에는 위기다. 그래서 요구됐던 게 개혁의 모습이었다. 그 증명이 돼줄 게 ‘진솔한 감찰 결과 발표’였다. 그걸 보여주지 못했다. 무더기 징계를 발표하면서 정작 부실 내용은 덮었다. 국민 불신이 커지는 대목이다. 징계 경찰관의 신상을 밝히라는 게 아니잖나. 이름, 얼굴, 직책, 아무것도 밝히지 말아라. 국민 분노는 처음부터 ‘누가’에 있지 않았다. ‘어떤’ 부실이 유족에게 한을 남겼는지가 관심이었다. 그 부실이 내 일일 수도 있다는 걱정이 컸다. 그걸 밝혀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 굳이 왜 인가. 혹시 감찰에 자신이 없어서였나. 아니면 징계자의 개인 입장을 걱정해서였나. 아니면 ‘무더기(11명) 회부’로 끝내려고 했는가. 이런 추론도 감찰 내용을 덮으니까 나오는 것이다.
경기도가 도민의 반도체 목소리를 잘 전달했다. 반도체 특별법 시행령에 대한 의견 요청이다. 산업통상부가 마련한 시행령안 제15조 제1항이다. 반도체 지원 대상에 ‘수도권 외의 지역’이라는 규정이 있다. 이 조항을 삭제해 달라는 것이 도의 요구다. “특별법의 제정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쉽게 풀면 이는 반도체 역차별이다. 반도체 산업의 70%가 있는 수도권을 빼는 반도체 지원법이다. 이런 도민 우려를 완곡하고 정확하게 전달한 것이다. 수원·용인·성남·화성·안성·평택·오산·이천 등 8개 시·군은 ‘반도체 클러스터’의 핵심이다. ‘반도체 벨트’로 묶는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다. 이런 지역을 배제하는 반도체 역차별 시행령인 셈이다. 해당 시∙군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역할도 주도하고 있다. 28일에도 시∙군과 관련 회의를 열었다. 시행령에 대한 입장을 전하고 듣는 자리였다. 모든 시가 ‘시장 없는 선거 대행 체제’다. 반도체 대응의 구심점이 부재한 상황이다. 그래서 도의 중심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경기도민을 위한 기본 방향은 역차별 철폐다. 하지만 이런 입장도 선거에 들어서면 달라진다. 27일 경기도지사를 뽑는 방송 토론회가 있었다. 조응천 후보가 포문을 열었다. “비수도권에 반도체 산단을 주려는 것”이라며 추미애 후보 의견을 물었다. 양향자 후보도 시행령 우려를 표했다. “수도권 배제는 반도체 경쟁력 약화”라며 역시 추 후보 의견을 물었다. 반면 추 후보는 “수도권과 지방의 상생 차원”이라며 “시행령이 확정된 것도 아니다”라며 맞섰다. 후보 누구라도 반도체는 지킬 것이다. 경기지사가 되면 방향이 같아질 것이다.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걱정은 지금이다. 정치가 행정을 마비시켰다. 이 공백을 경기도가 메우고 있다. 산업통상부가 보도자료를 냈다. 시행령이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했다. 이게 17일이다. 그런데 시행령안은 이미 11일 경기도에 와 있었다. 이를 두고 정치는 싸운다. 경기도는 차분하다. 내려온 시행령안에 의견을 냈다. “수도권 배제 조항 삭제하라”고 명시했다. 반도체 벨트 지역민의 목소리다. 옳게 전했고 잘 전했다. 혼란의 정치 속이어서 더욱 돋보이는 경기도정이다.
인천시교육감선거에는 도성훈·임병구·이대형 후보 세 명이 본선 레이스를 달리고 있다. 3파전으로 흔치 않은 구도다. 그런데 인천시민 중 후보 이름을 모두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각 후보의 교육철학은커녕 이름 석 자조차 낯선 이가 훨씬 많을 터다. 이번 인천시교육감선거 풍경은 처음부터 씁쓸했다. 선거 초반 내내 후보들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교육 공약이 아니라 단일화 협상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네거티브 공방이 난무했고 결국 축제여야 할 선거는 이미 이전투구로 얼룩졌다. 진보와 보수 양 진영 모두 단일화 논의에 매몰되면서 정작 교육 정책 등의 공약은 뒷전으로 밀렸다. 교육감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다. 인천 학생 수십만명이 어떤 가치관 속에서 배우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할지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기초학력 정책 하나를 바꾸면 교실이 바뀌고, 교원 처우 정책 하나를 변경하면 아이들이 만나는 선생님 사기가 달라진다. 교육감 임기 4년은 우리 미래의 희망인 학생들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도 시장선거, 군수·구청장선거, 의원선거에 가려 교육감선거는 늘 뒷전이다. 3파전은 오히려 기회다. 후보가 셋이면 선택지가 넓어지고 단일화 논란 역시 한숨 돌린 지금, 정책 경쟁은 활발해질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그 기회 역시 유권자가 경쟁을 지켜보며 관심을 가져줘야만 살아난다. 기초학력 정책이나 학생인권조례, 교원 처우, 사교육 대책까지 모두 교육감 의지에 달렸기에 유권자들은 우리 아이의 미래에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교육감 투표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후보들도 진영 논리나 단일화 명분 뒤에 숨는 대신 인천 교육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내놓고 검증받아야 한다. 내가 행하는 한 표가 교실 온도를 결정한다. 우리 학생들은 투표권이 없으니 6월3일 어른들은 좀 더 신중하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교육감 투표에 임해야 한다.
우즈베크의 오래된 도시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3곳이다. 오늘은 28㎞ 떨어진 부하라로 갈 예정이다. 부하라로 출발 전 시내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디젤유를 가득 채워야 한다. 우즈베크는 액화된 메탄가스를 자동차 연료로 사용하는 나라다. 우리나라 택시들이 사용하는 액화천연가스(LNG)는 액화메탄가스보다 안정적이라고 한다. 우즈베크와 인접한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풍부한 반면 우즈베크는 경제성이 떨어지는 메탄가스만 많다.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면 액화메탄가스 충전소는 많지만 디젤유를 파는 주유소는 대도시 주위에만 있다. 휘발유나 디젤유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액화메탄가스 가격은 휘발유 가격의 7분의 1이라고 한다. 화물차, 트럭은 물론이고 경차(기아차 마티스)도 엔진을 개조해 차체 아래에 빨간 메탄통을 달고 있다. 가이드는 메탄가스 폭발 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여서 외국인 상사 주재원이나 관광객은 디젤유나 휘발유 차량을 사용한다. 부하라로 가려면 키질쿰사막의 남쪽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도로 주변에 평야는 적어지고 사막형 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튀르크어로 키질쿰은 ‘황색 사막’이라는 뜻이다. 우즈베크의 남쪽 나라인 투르크메니스탄에는 ‘검은 사막’이라는 카라쿰사막이 서로 붙어 있다.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와 함께 중앙아시아의 오래된 실크로드 거점도시이고 유서 깊은 역사적 도시다. 부하라는 13세기 초반 몽골족 침략 당시 완전히 파괴됐고 현재 성은 600년 전 티무르가 재건한 성이다. 부하라성은 벽돌로 쌓은 20여m 높이의 성이다. 최초의 성곽은 기원전 4세기 이전에 축성됐다고 한다. 나라의 위치가 좋거나 자원이 많으면 강대국의 침략 목표가 된다. 동서양 교역의 관문이고 풍요로운 곡창지대인 우즈베크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땅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 침략, 페르시아(이란) 침략, 튀르크족 지배, 이슬람과 아랍군, 몽골족, 근현세에는 러시아와 소련이 지배했던 비운의 지역이다. 도시가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해서 부하라성은 ‘불사조의 성’으로 불린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러시아의 식민 지배 상태로 있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세 도시가 주축이 돼 우즈베키스탄은 독립 국가가 됐다. 현재도 우즈베크는 지역별로 언어와 인종이 다르니 국민 통합이 힘들다. ‘티무르’를 정신적 국부로 숭상하는 것도 이질적 민족과 문화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함이다. 부하라는 8세기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소그드인 ‘안록산’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수천㎞ 떨어진 당나라에 와서 당 현종과 양귀비에게 아첨을 잘해 6개 절도사 중에서 3개 절도사를 겸직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부하라도 인구의 70%가 이란계 타지크인이고 언어도 이란어 계통인 타지크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즈베크 사람은 최소한 우즈베크어, 타지크어, 러시아어를 3개 국어를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일하는 오는 노동자 등이 한국말을 쉽게 배우는 것은 우즈베크인에게 선천적인 언어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는 13세기 초 북쪽에서 키질쿰사막을 종단해 부하라로 쳐들어왔다. 이슬람 왕조의 지배에 있던 부하라는 맹렬하게 저항했다. 부하라 함락 후 몽골 군대는 아무도 살려주지 않았다. 성인 남자와 여성뿐 아니라 어린아이들, 가축 등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죽였다.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다른 도시들이 금세 항복하도록 만드는 고도의 전략이다. 부하라성 내부는 칭기즈칸 군대가 폐허로 만든 모습을 그대로 남아 있다. 부하라는 도시 재건 시 폐허가 된 부하라성 내부는 방치하고 성 바깥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이슬람 첨탑은 12세기에 건설된 칼론미나렛이다. 칭기즈칸의 지시로 파괴를 면한 부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 탑의 높이는 48m로 중앙아시아 미나렛 가운데 가장 높다. 칭기즈칸이 말 위에서 높은 미나렛 꼭대기를 보려다 모자가 떨어졌다고 한다. 모자를 주우면서 자기가 유일하게 머리를 숙인 곳이니 탑을 파괴하지 말고 보존하라고 지시해 현재까지 보존된 행운의 탑이라고 전한다. 미나렛의 주된 용도는 이슬람교 예배시간을 알리는 것이다. 과거 어두운 밤중에 탑 꼭대기에서 불을 밝혀 멀리 사막을 건너오는 상인들에게 등대 역할도 했다고 한다. 칼론미나렛 양옆의 건물은 마드라사(대학)로 현재도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다. 옅은 회색과 하얀색의 마드라사 건물, 아름다운 첨탑과 광장이 잘 어울린다. 인간사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듯이 문화 유적도 운이 있어야 오래 간다. 칼론미나렛은 칭기즈칸의 떨어진 모자 때문에 800년 이상 존속하고 유네스코 세계 유적으로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소래산의 마애상은 서 있는 모습의 부처를 얇은 선으로 새긴 것으로 장군바위라고 부르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무늬가 새겨진 모자 모양의 둥근 보관을 쓰고 있으며 가슴에는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꽃무늬가 새겨진 옷과 띠매듭이 보인다.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었는데 가슴 밑에서부터 반원을 그리며 규칙적으로 흘러내린 주름은 볼륨감은 없으나 유려한 선으로 이어져 있다. 반원으로 둥글게 흘러내린 상의자락 밑 양쪽으로 발을 벌렸는데 발가락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 균형 잡힌 신체에 사각형의 각진 얼굴, 양어깨를 덮은 옷, 원통형 보관에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는 점 등이 특징적이다. 특히 무늬를 새긴 원통형의 화려한 보관과 양어깨를 덮은 옷의 형태는 고려 전기 석조상의 특징으로 조성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시흥소래산마애상은 5㎜ 정도의 얕은 선각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며 기법이 우수하고 회화적인 표현이 뛰어난 세련된 작품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최근 스타벅스를 둘러싼 논란은 단순한 기업 마케팅 실패를 넘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론장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전후 등장한 이른바 ‘탱크데이’ 표현과 세월호 참사 10주기 당시의 ‘사이렌 머그’ 논란은 기업 비판을 넘어 불매운동과 정치적 공방으로까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기업과 브랜드는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 태도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나이키가 미국프로풋볼(NFL) 선수 콜린 캐퍼닉을 광고 모델로 기용한 이후 거센 정치적 논쟁에 휘말렸고 최근에는 일론 머스크의 정치적 발언 이후 테슬라 차량 로고를 제거하는 소비자들까지 등장했다. 소비 행위 자체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드러내는 정치적 신호로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스타벅스 논란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광주에서 5·18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폭력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지켜낸 공동체의 살아 있는 기억이다. 세월호 참사 역시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와 집단적 기억을 남긴 비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적 폭력이나 사회적 참사를 연상시키는 표현들이 상업적 맥락 속에서 소비될 때 시민이 이를 단순한 실수 이상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데는 역사적 기억에 기반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기업은 더 이상 단순한 경제 주체에 머물지 않는다. 기업의 광고와 언어, 이미지와 상징은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문화적 행위가 됐다. 특히 민주주의의 희생과 공동체의 아픔이 담긴 역사적 기억을 다룰 때 기업은 시장논리 이전에 공공적 책임과 사회적 감수성을 고민해야 한다. 무심한 표현 하나가 오래된 상처를 다시 현재로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역사적 상처에 대한 시민적 공감과 공분은 민주주의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감수성이다. 다만 그 공분이 온라인 공간의 즉각적 감정 구조 속에서 혐오와 배제의 언어로 변질되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최근에는 특정 브랜드를 소비하는 행위 자체를 정치적 입장의 증거처럼 해석하거나 상대를 조롱과 낙인의 대상으로 삼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정치권 역시 감정의 흐름에 올라타 상대를 향한 비난과 규탄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소비의 영역마저 진영 대립의 언어로 재편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정보보다 반응이 먼저 움직이고 맥락보다 진영이 앞서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디지털 공간은 공감을 빠르게 확산시키는 동시에 분노 역시 증폭시킨다. 문제는 그 속도 속에서 성찰의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분노는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힘이지만 숙고 없는 분노는 쉽게 또 다른 적대의 언어가 된다. 공론장이 설득의 공간이 아니라 단죄의 공간으로 변질될 때 민주주의 역시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버마스는 민주주의를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민주주의는 동일한 생각을 강요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억과 입장을 가진 시민이 끝내 대화를 지속하려는 노력 속에서 유지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거센 감정 경쟁이 아니라 역사적 기억에 대한 깊은 공감 위에서 공론장의 책임과 절제를 회복하려는 시민적 성숙이다. 민주주의는 분노만으로도, 무관심 속에서도 유지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느냐만이 아니라 그 분노를 어떤 언어와 태도로 사회 속에 남기는가다. 공분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절제를 잃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배제와 대립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분노의 크기가 아니라 그 분노를 공존의 언어로 바꾸는 능력 속에서 드러난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칙을 지킨 교사가 학교와 갈등을 빚는다. 학교 측에서 일상 털기로 불이익을 준다. 조직 내에서도 따돌리기와 무시가 이뤄진다. 참다 못해 학교 측 비리를 상부 기관에 고발한다. 이후 학교 측 보복은 노골적이고 잔인해진다. 결국 해당 교사는 모든 걸 잃고 세상을 등진다. 사학 비리 영화에서나 봄 직한 장면이다. 이 상황을 옮겨 놓은 듯한 실제 사건이 생겼다. 아니, 영화보다 더 참담했던 현실이다. 지난 주에 발생한 어느 교사의 죽음이다. 전체 사건의 발단이 된 일을 살펴보자. 2011년 이천시 한 사립학교다. 학교에서 내려오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었다. 수능 준비생은 정규 수업에 빠져도 됐다. 그래도 수행평가는 만점을 부여했다. 하지만 A교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업에 불참한 학생에게 원칙대로 최하 점수를 줬다. 학교가 말하는 현실적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분명한 게 있다. A교사의 선택이 옳고 바른 길이다. 그러나 현실은 탄압의 시작과 참담한 죽음이다. 초기에는 학교 측이 감봉 처분을 내렸다. ‘위치 이탈 및 의무 위반’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3년간 휴직을 했다. 복직했으나 학교는 A교사에게 업무를 주지 않았다. 참다 못한 A교사가 학교의 비리를 당국에 고발했다. 경기도교육청이 수십억원대의 횡령을 밝혀냈다. 학교 측 인사는 징역 7년을 선고받기까지 했다. 반성하고 개선해야 할 학교 측이 꺼내 든 것은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책상 창고에 두기, 인터넷·사내 전화 끊기 등 조치였다. 도의적인 측면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감정적 대립을 평할 필요도 없다. ‘교사¯학교’ 갈등이 십수 년간 이어졌고, 불법에 대한 고발이 사실로 확인됐고, 도를 넘는 사력구제가 계속해서 벌어졌다. 무법 지대이고 치외법권 아닌가. 그런데 교육당국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사립학교 자율성이 보장되는 영역이다. 합법적 울타리를 친 것이 사립학교법이다. 15년간의 부당 대우, 감사권 남용 등에도 손댈 수 없었다. 종단에는 사람이 죽었다. 교육감선거가 한창이다. 교권에 대한 후보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안민석 후보는 “무너진 교권 회복”을 말하고, 법적·제도적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임태희 후보는 “현장 안정 정책”을 말하고, 교권 보호 정책의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다 좋은 취지다. 하지만 지금은 구체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 “사학 감사권 확대”, “공익제보 교사 보호”, “교권 침해 시 교육청 직권조사권” 같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의향이 있나. 있다면 발표해야 한다. 15년을 고통받던 교사가 세상을 등졌다. 교육을 책임지겠다는 교육감 후보들이다. 관심을 갖는 것이 도리이고, 대책을 내는 것이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