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문화적 도시재생 유감

문화예술정책이 중앙정부 주도에서 지역 주도로 변화를 시작한 지 어언 30년에 가깝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문화기본법과 지역문화진흥법의 제정은 문화자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반이 됐다. 이에 따른 괄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로 지역문화재단이 전국적으로 촘촘하게 설립됐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현재 17개 광역지자체 모두에 문화재단이 설치돼 있으며 기초자치단체 226곳 중 절반이 훌쩍 넘는 143곳이 문화재단을 보유하고 있다. 지역문화재단은 각 지역에서 문화의 생산과 향유, 전문인력 양성, 문화공간 운영 등을 담당하는 중추적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역의 문화재단이 그동안 일궈온 성과는 혁혁하다는 표현이 모자를 정도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한편에서는 재단 간 사업 구조와 운영 방식 그리고 사업의 결과물이 점차 동질화되는 문제 또한 제기되고 있다. 생활문화사업을 비롯해 법정문화도시에서 이름을 바꾼 대한민국문화도시도 지역별 특성화 측면에서만큼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문화적 도시재생사업도 마찬가지다. 근대유산, 역사시설, 학교, 군유휴시설, 폐산업시설 등 산업화 시대를 지나며 버려진 유휴공간을 문화적으로 되살려 보자는 것이 문화적 도시재생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용도폐기되면 흔적도 없이 철거되고 전혀 새로운 건물을 지음으로써 장소성과 정체성이 훼손된다는 반성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문화적 재생의 경우 수익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보니 아무래도 민간보다는 공공이 주체가 될 수밖에 없고 그 중심에는 대부분 문화재단이 있다. 수원의 ‘111CM’, 부천의 ‘아트벙커B39’, 김포의 ‘보구곶 작은미술관’ 등 공공에 의해 추진되는 경기도내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지는 전국 최다 수준이다. 장소나 건물마다 가진 역사와 정체성을 살리겠다는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이러한 시설이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다는 데 있다.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당초 기대와 달리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고 관심에서 멀어지는 곳들도 적지 않다. 빵이나 호두과자 같은 공산품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지역의 문화, 특히 시설은 그 지역만의 특별함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지역문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찍이 조직사회학자 디마지오와 파월은 이렇게 조직이나 사업이 유사해지는 현상을 제도적 동형화(institutional isomorphism)라 이름 붙였다. 이들이 파악한 원인은 예리하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조직이 생존하거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른 제도와 유사한 구조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동형화는 때로는 강압적으로, 모방에 의해, 규범에 따라 이뤄진다. 중앙정부의 정책 지침, 공모사업, 평가 체계 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강압에 해당한다. 모방은 타 지역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거나 중앙정책의 모범 모델을 차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전문가나 연구기관의 조언 및 컨설팅은 일종의 규범으로 작동한다. 그러고 보면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을 비롯해 지역문화재단의 사업이 유사해지는 걸 문화재단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자율성의 결여, 평가시스템의 획일화, 전문가들의 안일함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지역문화가 특성화되는 길은 자명하다. 지역문화재단에게 자율성을 좀 더 부여하고, 평가시스템을 유연하게 하며, 전문가나 연구기관이 엄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조언하면 된다.

[기고] 따뜻함을 지키는 것, 난방 아닌 우리의 관심

날씨가 부척 추워지는 계절이다. 새벽 공기는 한층 매서워지고 출근길 사람들은 옷깃을 단단히 여민다. 아이들의 숨결이 하얗게 흩어지는 모습을 보면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난방기기와 전열제품 사용도 자연스럽게 늘고 그만큼 따뜻함 뒤에 숨어 있는 위험 또한 함께 커지고 있다. 작은 부주의가 가족의 삶을 흔들 수 있는 만큼 이 시기는 우리 모두의 관심과 점검이 필요하다. 최근 5년간 경기도에서 발생한 전체 화재는 4만1천826건에 이르며 이 중 겨울철 화재는 연평균 2천338건(27.7%)으로 봄철 다음으로 많다. 인명 피해 역시 연평균 196명(30.8%)으로 계절 중 가장 높게 나타난다. 특히 겨울철 화재 원인 중 ‘부주의’가 43%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되는데 이는 작은 실수가 위험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은 일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기장판이다. 구조상 접힌 부분에 열이 집중되기 쉬워 과열 위험이 크며 여기에 라텍스처럼 열이 잘 빠져나가지 않는 소재와 함께 사용하면 내부 열이 쌓여 위험성은 더욱 높아진다. 난로와 히터 주변에 쌓인 먼지, 종이, 의류 같은 생활용품 역시 문제다. 처음엔 그저 주변에 놓여 있던 물건이지만 난방기기의 열기가 더해지는 순간 순식간에 불씨로 변할 수 있다. 오래된 전선 또한 마찬가지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내부 피복이 갈라지거나 끊어져 스파크가 발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취약점들이 어느 순간 서로 맞물리면서 큰 화재로 이어지곤 한다. 문제는 이러한 위험 요소들이 대부분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 평소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위험들은 생활 속 작은 습관만으로도 충분히 줄일 수 있다. 첫째, 난방기기를 켜기 전 주변을 정리하고 전선·플러그 상태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험을 크게 낮출 수 있다. 특히 탄 냄새가 나거나 플러그가 평소보다 뜨거우면 즉시 사용을 멈추고 점검을 받아야 한다. 둘째, 인증되지 않은 값싼 제품보다 KC마크가 있는 안전 인증 제품을 선택하는 것도 기본이다 셋째, 실내에서는 문어발식 콘센트나 여러 난방기기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피해 과부하와 과열을 방지해야 한다. 넷째, 외출 시에는 반드시 전원을 차단하고 사용하지 않는 플러그는 뽑았는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가까운 곳에 소화기를 비치하고 특히 노약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난방기기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필수다. 겨울철 화재는 작은 부주의에서 시작되지만 그 피해는 결코 작지 않다. 난방기기 점검, 주변 정리정돈 같은 기본적인 습관만으로도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 따뜻함을 위한 열기가 위험으로 바뀌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난방 습관을 다시 돌아봐야 할 때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경기만평] 급발진...

[사설] 이준석, ‘출마해도 연대 안 한다’로 국힘에 '선공'

‘이준석 단일화 화두’는 재연될 것인가. 작금의 선거 때마다 화두였다. 국민의힘 측에는 특히 그랬다. 승리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능성만은 매번 출렁거렸다. 최근 기억은 제21대 대통령선거다. 김문수 후보 측의 구애가 투표 당일까지 이어졌다. 후보 등록 전, 사전 투표일 전, 본 투표 전.... 이재명 후보 측은 ‘단일화 임박’으로 견제를 이어갔다. 그때마다 이준석 후보는 ‘단일화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단일화는 없었다. 6월3일 결과에 단일화 위력이 드러났다.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했다. 김문수·이준석 후보 득표율은 41.15%·8.34%였다. 단일화로 계산하면 49.49%가 된다. 단순하게 더해보면 승자가 바뀔 수 있었다. 경기도에서도 이런 추세는 확인됐다. 이재명 후보 우세가 강한 지역이다. 이 후보가 52.20%를 득표했다. 김문수 후보 37.95%, 이준석 후보 8.84%였다. 단일화했다면 이곳도 훨씬 긴박했을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지역에 돈 추론이 있었다. 이준석 대표의 경기지사 출마설이다. 이 가능성을 우리도 한 차례 논평했다. ‘가능성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랬던 출마 가능성이 스멀스멀 나온다. 다름 아닌 본인 입이다. 20일 라디오에서 직접 말했다. “동탄 주민들이 그걸(경기지사 출마를) 원하는 상황이 오거나, 더 다른 역할이 필요하다면 제가 하겠다.” ‘아직 아니다’라는 토를 달았지만 언론은 ‘출마 시사’로 풀었고 옮겼다. 23일에는 국민의힘의 아픈 곳도 찔렀다. 모든 선거때마다 애태우던 ‘단일화·연대 불가 선언’이다. ‘경기도, 필승 결의대회’에서 ‘국힘에 변화 쇄신이 없다’며 “함께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사실 국힘에는 대선 실패 이전의 또 다른 추억도 있다. 2022년 경기지사선거다. 단일화 실패로 패배한 선거다. 김동연 후보가 49.06%로 당선됐고 김은혜 후보와 표 차이는 0.14%였다. 범보수 강용석(0.95%)이 있었다. 경기도지사선거는 늘 숨막힌다. ‘소수점’으로 승부가 나는 곳이다. 출구조사가 뒤집힌 게 두 번이나 된다. 2014 선거(김진표 예상·남경필 당선)와 2022 선거(김은혜 예상·김동연 당선)다. 이준석 대표의 대선 경기도 득표율이 8.84%였다. 역대 어떤 ‘제3후보’보다 비중이 크다. 경기지사 선거판 전체를 흔들 수 있다. 정치적 함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 단일화를 역으로 요구할 수도 있다. 시쳇말로 ‘꽃놀이패’다. 이런 때 사흘 상간으로 발언을 쏟아냈다. ‘지사 출마 시사’와 ‘연대 불가 선언’다. 경기지사 판에 존재감을 던진 것 같다. 그 상대가 국민의힘 같은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사설] 지방선거 공천 후보자 공약 평가제도 도입해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앞으로 6개월여 있으면 실시된다. 내년 6월3일 경기지사, 인천시장을 비롯한 광역단체장, 수원특례시장 등 기초단체장, 경기도의회 등 광역의원, 수원특례시 의회 등 기초의원, 경기교육감 등 교육감선거를 비롯한 지방화시대를 이끌어 갈 다양한 분야의 지역 대표자를 선출하게 된다. 내년 2월3일부터 광역단체장, 2월20일부터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 후보자 등 지방선거 입후보 희망자들은 예비등록을 하게 되며, 이들은 주민들을 상대로 선거운동 할 수 있다. 실제로 각 지역에서는 정당 현수막 등을 통해 지방선거운동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방선거 분위기는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등 주요 정당들은 ‘지방선거TF팀‘ 등 다양한 형태로 준비단을 구성, 가동하고 있다. 지방선거의 중요성은 새삼 언급할 필요성이 없을 정도로 일상생활과 밀접하다. 지방자치가 도입된 지 금년은 30주년이 됐을 정도로 지방자치는 상당한 수준 정치적 제도화됐다. 내년은 한국의 선거문화를 구태의연한 패거리 선거를 지양, 정책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매니페스토(Manifesto)가 도입된 지 20주년이 된다. 이미 매니페스토 관련 조항은 선거법에도 규정돼 있을 정도로 후보자는 선거공약을 제출하게 돼 있으며 선거운동 시 후보자는 물론이고 유권자들도 이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활용하고 있다. 경기도지사, 인천시장을 비롯한 단체장들은 당선 후에도 해당 지자체 홈페이지에 ‘공약이행현황’이라는 명칭 등으로 공개돼 있어 평가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문제는 지방의회 의원들의 경우 대부분 당선 후 공약 평가를 할 자료를 찾아보기 어려워 사실상 공약 평가가 힘들다. 특히 광역의원의 경우 전국적으로 870여명에 이르고 이들은 내년도에만 247조원 규모의 시·도 예산심의권을 쥐는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들에 대한 공약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평가제도 역시 부재한 실정이다. 광역의원은 국회의원과 같이 후원회도 구성돼 있으며, 정책지원관의 지원도 받는 등 각종 특권은 누리면서 자신들의 의정활동 평가에는 인색하다. 시대정신은 지방화시대다. 내년 지방선거가 지금과 같이 국민에게 피로감만 누적시키는 중앙정치 행태를 탈피하려면 패거리 선거가 아닌 정책경쟁을 위한 선거가 되기 위해서는 현역 지방의원을 비롯한 모든 공천 희망 후보자의 공약 평가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지지대] 샤인머스캣의 추락

포도 품종 중에 샤인머스캣(Shine Muscat)이 있다. 반짝인다는 뜻의 형용사 ‘Shine’과 단맛이 나는 백포도주를 의미하는 명사인 ‘Muscat’이 합쳐졌다. 고향은 일본 히로시마이며 태어난 해는 1988년이다, 익는 시기는 8월 중순이다. 포도알이 크고 씨가 없다. 일반적인 포도보다 달다. 국내에는 2006년 묘목이 들어왔다. 이후 2010년대 초반부터 재배가 시작했다. 명절 선물 세트에 나오기도 했을 만큼 인기가 엄청났다. 값도 비싸다. 유럽 명품 브랜드 이름을 따 ‘과일의 에르메스’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젠 그 명성이 옛말이 됐다. 2020년까지만 해도 2㎏ 한 상자에 3만~5만원대에 팔렸지만 현재는 1만~2만원대로 가격이 뚝 떨어져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집계에 따르면 샤인머스캣 2㎏ 평균 소매가격은 1만1천572원으로 평년보다 54.6% 싸다. 지난해보다 19.1% 하락했다. 지난달 2㎏당 평균 소매가격은 1만3천314원으로 5년 전인 2020년과 비교해 3분의 1 수준이다. 매년 10월 평균 가격을 보면 2020년 3만4천원, 2021년 3만3천원, 2022년 2만4천원, 2023년 2만1천원, 지난해 1만5천원 등으로 매년 가파른 내림세를 보이면서 추락하고 있다. 지난달 평균 소매가격을 다른 품종과 비교해도 그 추세는 확연하다. 샤인머스캣이 2㎏당 1만3천314원인 반면 거봉은 2㎏당 2만2천952원으로 샤인머스캣보다 72% 비쌌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선 가격이 떨어진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 원인은 수요공급의 법칙에서 비롯된다.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알려지자 많은 농가가 뛰어들면서 가격이 몇 년 만에 곤두박질쳤다. 거기에 많은 소비자들이 당도도 낮아지고 껍질도 질겨졌다고 지적한다. 품종별 재배면적을 보면 지난해 기준 샤인머스캣 비중이 43.1%로 캠벨얼리(29.3%)과 거봉(17.5%)의 2~3배다. 이 과일의 추락을 지켜보면서 서양 속담이 떠오른다. 무릇 이 세상엔 영원한 건 없다.

[이슈&경제] 쿠팡의 일용직 퇴직금 논란에 대하여

최근 쿠팡 물류 자회사에서 발생한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논란이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회사는 지난해 일용직 근로자가 4주 평균 주 15시간 미만 근무한 경우 계속근로가 단절된 것으로 간주해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취업규칙을 운영해 왔다. 국회와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결국 이를 원상 복구했지만 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규정의 해석이 아니라 노동을 비용으로만 인식하는 기업의 경영 태도에 있다. 근로기준법과 퇴직급여보장법은 ‘1년 이상 계속근로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또 대법원 판례는 단기간의 공백이 있더라도 실질적으로 동일한 업무를 반복 수행했다면 계속근로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쿠팡의 ‘15시간 미만 단절 규정’은 법률의 취지와 명백히 배치된다. 그럼에도 검찰은 고의성 부재를 이유로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이는 법철학적 관점이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 측면에서 ‘노동존중’이라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쿠팡은 미국계 자본이지만 한국 유통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주도해온 대표적 혁신 기업이다. 인공지능(AI) 기반 물류시스템과 초고속 배송체계는 소비자 편의성을 극대화했고 고용 창출에도 기여해 왔다. 그러나 산업의 기술적 혁신 속도에 비해 노동정책은 여전히 비용 절감과 수익 극대화 중심에 머물러 있다. 자동화된 시스템 속에서 근로자는 단순한 노동 단위로 취급되고 기본적 근로권조차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적 불균형은 결국 유통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 온라인 유통의 경쟁력은 로봇이나 AI, 디지털 물류 등 첨단 기술에만 있지 않다. 그 기반에는 현장에서 상품을 분류하고 배송을 관리하는 근로자들의 숙련된 노동이 있다. 따라서 유통산업이 미래 국가전략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 인프라뿐 아니라 노동 인프라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돼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 근로기준법상 ‘계속근로기간’의 정의를 명확히 해야 한다. 단시간·일용직이라도 동일 업무를 반복 수행하는 경우에는 계속근로로 인정해 퇴직금 보장이 가능하도록 제도적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 둘째, 대기업의 취업규칙이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될 경우 노동청의 사전심사나 통보 의무를 강화해 행정적 통제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셋째, 영국 및 호주처럼 일정 근로시간 이하라도 누적 시간 기준으로 퇴직급여를 산정하는 ‘누적제’를 도입해 비정규직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이는 미래 노동시장의 비정규직화 추세를 고려할 때 유용한 복지 대안이 될 수 있다. 넷째, 산업별 노동복지 수준을 ESG 평가와 연계해 관리하는 ‘근로안정지수’ 제도의 도입도 검토할 만하다. 노동복지 수준이 높을수록 기업의 사회적 책임지수와 신용평가를 상향 조정하고 금융 및 세제 혜택에도 반영토록 하는 것이다. 한편 온라인 유통의 확산으로 배달 근로자의 임시고용이 일반화되면서 과로로 인한 사망 사고도 지속되고 있다. 그 핵심 원인은 성과급 중심의 과도한 경쟁 구조에 있다. 정부는 배달 건수의 상한제 등 안전장치를 법제화해 근로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해야 한다. 쿠팡 사례가 던지는 교훈은 명확하다. 산업의 디지털화가 가속화할수록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경영은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기술 혁신이 효율을 높이는 수단이라면 지속가능한 성장은 노동존중에서 비롯된다. 노동존중은 비용이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이자 국가의 핵심 자산이다.

[천자춘추] 세계 철학의 본산 ‘파주’

언제부턴가 전통문화는 고리타분한 ‘노인문화’이고 현대문화는 화려한 멀티미디어로 무장한 ‘젊은이문화’라는 그릇된 인식이 자리 잡았다. ‘전통’이 부지불식간에 부정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현상은 지역사회에서 더욱 심하다. 지역마다 조상 대대로 면면히 내려오는 고유한 습속(習俗)과 문화적 뿌리가 있지만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전통 문화유산이 사라져 가는 일이 빈번하고 문화적 성장 기반이 다른 사람들이 일시에 몰려 살다 보니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문화는 옛것을 통해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전통문화가 예부터 전해 오는 고유 문화를 말한다면 지금 이 시대의 문화는 전통을 기반으로 더 발전시키고 더 아름답게 가꿔 나가야 하는 창조된 문화다. ‘지역문화’는 지역 사람들 손에 의해 가꿔지고 다듬어진 문화를 말한다. 전통은 이 땅을 지킨 선조들이 만들었고 창조는 이 땅을 지킬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 따라서 전통이 독창성에서 왔다면 창조는 다양성에서 온다. 독창성과 다양성이야말로 ‘지역문화’의 원동력이고 정체성을 지키는 에너지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 한다. 파주는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으로 대표되는 ‘파산학파’의 본산이고 우리나라 철학계를 대표하는 기호학파의 중심이다. 율곡, 우계, 구봉, 휴암, 남계 선생 등 기호 유학의 중심인물이 모두 파주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조선 성리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향교와 서원이 6개소에 이르고 동방 18현 중 여섯 분이 파주분 또는 파주를 거쳐 간 분들이다. 경기도내 서원에 주·배향된 123분 중 100여분이 기호 유학자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와 파주는 한국학의 중심뿐 아니라 동양철학, 나아가 ‘세계 철학의 본산’으로 재조명돼야 한다. 파주는 매년 율곡, 우계, 방촌문화제를 통해 위대한 선현들의 학문적 전통을 지켜 나가고 있지만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창조적 문화를 고유 브랜드로 육성해 지역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 도시의 문화적 품격은 박물관, 공연장, 갤러리, 도서관을 통해 드러난다. 파주문화원이 ‘율곡문화진흥원’과 ‘시립박물관’ 설립을 서두르는 이유다. 이미 보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전통문화 유산과 ‘헤이리 예술마을’, ‘출판도시’ 등과 연계한 대한민국 대표 문화도시의 탄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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