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전대통령 서거> 장례 형식ㆍ절차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갑자기 서거함에 따라 장례 형식과 절차에 관심이 쏠린다. 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장이나 국민장으로 거행될 수 있고, 유족들이 이를 거부하면 가족장으로 치러질 수도 있다. 역대 대통령들의 사례를 보면 현직에 있다가 서거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장, 최규하 전 대통령은 국민장, 이승만 전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따라서 노 전대통령의 장례도 국민장이나 가족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관측된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유족들의 의사를 존중할 것이다. 청와대와 총리실, 유족측이 긴밀한 협의를 통해 조만간 장례 형식과 절차를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이 국민장을 원하면 서거 직후에 기획재정부.국방부.행정안전부 등 관계국무위원 간담회와 임시 국무회의를 잇달아 열어 확정된다. 국민장이 결정되면 장의위원회가 구성되고 부처간 업무 분담과 소요 재원 등을 논의한다.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당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680명 규모의 장의위원회가 구성됐고 총 3억3천700만원의 예산이 소요됐다. 국민장의 법정 장의 기간은 7일 이내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 때문에 유족들이 가족장을 희망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사회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가족장으로 진행된다면 모든 장례 일정과 정부의 비용지원 여부는 전적으로 유족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 /연합뉴스

<정치권, 盧전대통령 서거에 침통.충격>

정치권은 23일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수사를 받아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등산도중 서거한 것으로 확인되자 침통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 등 각당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다”고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날 주요 당직자들이 참석하는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한나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향후 정치권에 미칠 파장에 촉각을 세우면서도 아직은 서거의 원인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만큼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오후 3시 여의도 당사에서 긴급 최고위원회를 소집했고, 현재 호주를 방문중인 박희태 대표도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24일 급히 귀국하기로 했다. 조윤선 대변인은 구두 논평을 통해 “큰 충격이다. 말할 수 없는 깊은 애도를 표한다. 유족들에게도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큰 충격에 빠졌다.특히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무리한 전직 정권 수사가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불러왔다며 비판했다. 민주당은 오전 11시 여의도 당사에서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소집,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당 차원의 대응책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세균 대표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믿어지지 않는다”며 “일단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자유선진당은 오후 2시 이회창 총재가 참석하는 당 5역회의를 긴급소집했다. 박선영 대변인은 구두 논평을 통해 “너무 충격적이고 안타깝다”면서 “비록 최근에 박연차 회장 사건과 관련해 국민에게 실망을 줬지만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으로서 의미있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구두 논평을 통해 “우리는 누차 살아있는 권력에대해서도 조사해야 한다고 말해왔다”며 “노 전 대통령이 비록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이 최근에 안타까운 조사를 받았지만생전에 정치개혁 등에 있어서 상당한 공이 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서거 소식을 듣게돼 대단히 안타깝다”며 “정중한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경찰 노전대통령 뒷산 부엉이바위서 투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저 뒷산(봉화산)에 있는 일명 ‘부엉이 바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지방경찰청은 23일 노 전 대통령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밝혔다. 경남지방경찰청과 김해서부경찰서는 소속 경찰관 20∼30명을 봉화산에 보내 노 전 대통령의 투신 당시 행적을 조사하고 있다. 부엉이 바위는 사저 뒷편에서 경사 40도 정도의 비교적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오른 해발 100여m 지점에 있다. 사저와 직선 거리는 200여m다. 봉하마을에서 ‘사자바위’로 불리는 봉수대에(해발 130m)서는 440m 정도 떨어져 있고, 봉화산 정토원과도 250m정도 떨어져 있다. 경찰은 봉화산에 있는 ‘사자바위’와 ‘부엉이바위’ 중 사자바위에는 새벽에도 인적이 있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어렵지만 부엉이바위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드문 곳인 만큼 이곳에서 뛰어내렸을 개연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부엉이바위는 바위 위에 서면 발밑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20~30m 정도 펼쳐져 있다. 주민들은 오래전 이 바위에 부엉이가 많이 앉아있다고 해서 ‘부엉이 바위’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은 등산객이 많지 않은 이날 새벽 봉화산 등산로를 통해 이 바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살 충격으로 인한 혈흔 등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경찰은 노 전 대통령의 정확한 등산경로와 사고경위 등을 조사중이다./연합뉴스

盧전대통령 봉화산서 투신해 서거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아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김해 사저 뒤 봉화산에서 투신해 오전 9시30분께 서거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 시신이 안치된양산 부산대병원에서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등산 중 바위로 뛰어내려운명하셨다”며 “노 전 대통령은 가족 앞으로 간단한 유서를 남기셨다”고 발표했다. 문 전 실장은 또 “노 전 대통령은 오전 5시45분께 사저에서 나와 봉화산에서 등산을 하던 중 오전 6시40분께 바위로 뛰어내리신 것으로 보인다”며 “노 전 대통령은 8시13분께 병원에 도착했으나 상태가 위중해 9시30분께 서거하셨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사고 직후 사저에서 가까운 김해시 세영병원으로 먼저 옮겨졌으나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으며 의료진은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다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이송했다. 세영병원측은 “병원도착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의식이 없고 머리를 심하게 다쳐외상이 심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직접 사인은 머리 손상이라고 백승완 양산 부산대병원장이 밝혔다. 백 병원장은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8시23분께 인공호흡을 하며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도착 당시 의식이 없었고 자가호흡도 없었다. 두정부에 11㎝ 정도의 열상이 발견됐으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회복이 안돼 오전 8시30분 중단했다”고 말했다. 백 병원장은 또 “뇌좌상이 확인됐는데 두부 손상이 직접 사인으로 확인됐다”고말하고 “이외에도 늑골 골절, 골반 등 전신에 다발성 골절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권양숙 여사는 오전 9시25분께 양산 부산대병원에 도착, 시신을 확인한 후 실신, 입원실로 옮겨져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권 여사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온 문 전 비서실장은 병원에서 사고 경위 등을 파악하고 있다. 경찰과 경호 요원들은 외부인의 병원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한편 노 전 대통령이 등산을 하다 숨진 것으로 알려지자 노 전 대통령의 사저가있는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주민들은 당혹감과 함께 침통함을 감추지 못하고있다./연합뉴스

청문회 스타서 대통령… 피의자 신분으로

실패와 시련, 정치적 부침 속에서 성공을 일궈온 노무현 전 대통령이 또 다시 쓰러졌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일생은 ‘오뚜기’와 같았다. 어려운 가정환경, 상고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서의 순탄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1988년 정치권에 뛰어들면서 역경의 반복은 시작됐다. ‘인권 변호사’라는 수식어를 달고 제도권 정치에 투신한 노 전 대통령의 첫 출발은 성공적이었다.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발탁, 배지를 단 노 전 대통령이 그 해 5공청문회에서 송곳 질문으로 증인들을 거침없이 몰아세움으로써 일약 ‘청문회 스타’가 된 것. 노 전 대통령의 대표 가치인 ‘원칙과 소신’이 처음으로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원칙과 소신’은 커다란 자산이면서도 노 전 대통령을 비주류의 길로 이끌었다. 노 전 대통령은 90년 3당 합당 때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 권유를 뿌리친 이후 92년 총선 패배, 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96년 서울 종로 패배 등 ‘삼수’를 맛봐야 했다. 특히 2002년 노 전 대통령의 대선 도전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때만 해도 노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선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개혁과 변화의 바람을 내건 노 전 대통령은 광주에서 진행된 경선에서 ‘광주의 선택’이라 불리는 경선 1위를 차지한데 이어 그 여세를 몰아 ‘노풍(盧風)’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제16대 대통령에 당선, 정상에 우뚝 섰음에도 원칙과 소신에 기인한 노 전 대통령의 시련은 이어졌다. 재신임 선언, 급기야 2004년 탄핵에 이르기까지 고비고비의 연속이었다. 그 때마다 노 전 대통령은 예외없이 정공법을 선택해왔다. 정책에 있어서,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소신에 바탕을 둔 승부수는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의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권력기관 중립화를 비롯한 권위주의 해체, 헌법만큼 바꾸기 힘든 부동산제도, 한미관계 재정립, 자주국방, 햇볕정책 승계에 따른 남북 정상회담, 대연정 선언 등은 엇갈린 평가 속에서도 ‘노무현다움’의 결정판이었다. 이는 정치적 자양분인 소신의 결과물인 동시에 ‘정치적 부채’가 없는데 따른 도덕성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퇴임후 1년 만에 자신을 지탱해 준 기둥인 ‘도덕성’의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노 전 대통령과 검찰 사이의 진실공방의 결과를 뒤로 하더라도 30일 피의자 자격으로 검찰에 출두, 도덕성의 기반이 허물어진 셈이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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