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하남 이성산성…신라에 의한 신라를 위한 ‘신라만의 城’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하남 이성산성…신라에 의한 신라를 위한 ‘신라만의 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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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만든 성으로 여겨져 왔으나
신라인들이 세우고 요긴하게 사용
산성둘레 1천925m 내부면적 16만㎡
삼국시대 산성 중 가장 큰 규모
철제 무기류 등 3천300여점 유물 출토
아래에서 올려다본 동문지와 복원된 동문지 전경. 모두 4개인 문들은, 모두 방어에 편리하게 사다리를 걸어 오르내리는 현문(懸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문은 대개 능선보다는 경사 급한 골짜기에 설치하니, 배수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하며 그래서 배수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동문지와 복원된 동문지 전경. 모두 4개인 문들은, 모두 방어에 편리하게 사다리를 걸어 오르내리는 현문(懸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문은 대개 능선보다는 경사 급한 골짜기에 설치하니, 배수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하며 그래서 배수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이성산성은 신라인이 세우고 쓰고 버렸다. 화재 흔적도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도 거의 없으니, 전쟁이나 화재가 아니라 옮겨 나가고 나서 자연 붕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후삼국이나 고려, 조선은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전성기 신라인들만, 이성산성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참으로 요긴하게 썼다. 목간과 영조척, 요고와 암수 기와, 철제 무기류와 농·공구류, 대형 시루, 동이ㆍ자배기류, 항아리나 옹·단지류 합(盒)과 뚜껑, 사발, 굽다리접시, 나무빗, 뼈빗, 바가지, 칠기, 인형, 나무망치, 짚신, 버들고리, 천 조각 등 모두 3천300여 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양대학교 발굴팀에 따르면, 아직도 전체 면적의 3분의 1도 채 발굴하지 못했다.

저수지가 보물단지였다. 무늬 기와, 벼루, 굽다리접시, 영조척과 목간 등 귀중한 유물들이 대량 출토됐다. 민무늬[無文], 문살[格子], 선조[線條], 생선뼈[魚骨] 등의 기와가 암수로 나왔다. 당시 기와는 왕궁, 사찰, 고급 관아에 사용되던 귀한 건축 소재로, 산성에 위상 높은 대형 건물이 많았음이다. 벼루 40여 점은 기록의 수요를, 영조척(營造 尺)은 토목과 건축의 수요를 알려준다. 네모난 초기 건물에 쓴 1자 35.6cm의 고구려자, 후기 다각형 건물에 쓴 1자 30cm의 당나라 자[唐尺]가 모두 저수지에서 나왔다. 합(盒)과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 등은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우 비슷하다. 황룡사 불사가 시작된 553년, 신라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무진목간’이 결정적이었다. 「무진년 정월 십이일 붕남한성도사 수성도사촌주 전남한성 <戊辰年正月十二日 朋南漢城道使 須城道使村主 前南漢城….>」, 이성산성의 연대를 608년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시 지명 ‘남한성(南漢城)’과 ‘도사(道使)’, ‘촌주(村主)’ 등 관직명은 신라의 지방 지배체제를 이해하는 열쇠다. 그밖에 나무팽이는 팽이놀이 수입의 연대기를 앞당겼고,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요고(腰鼓), 욕살 목간, 다리며 몸통이 부러진 철마와 토마 등도 특기할 만하다.

6세기 중엽, 산성 축조와 동시에 산성 내 남쪽 계곡을 막아 조성한 제1 저수지. 처음에는 타원형으로 만들었다가, 후에 안을 파내고 네모나게 석축을 쌓고 물이 새지 않도록 바깥에 2m 두께로 점토를 다져 넣었다. 18×27m에 깊이가 2m를 넘는다. 바로 위에는 우물이 있어 수원이 된다. 저수지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목간(木簡)이다. 후한 중기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 중국은 대나무 조각인 죽간(竹簡)을 썼는데, 대나무가 귀한 한반도에서는 목간을 썼다.
6세기 중엽, 산성 축조와 동시에 산성 내 남쪽 계곡을 막아 조성한 제1 저수지. 처음에는 타원형으로 만들었다가, 후에 안을 파내고 네모나게 석축을 쌓고 물이 새지 않도록 바깥에 2m 두께로 점토를 다져 넣었다. 18×27m에 깊이가 2m를 넘는다. 바로 위에는 우물이 있어 수원이 된다. 저수지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목간(木簡)이다. 후한 중기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 중국은 대나무 조각인 죽간(竹簡)을 썼는데, 대나무가 귀한 한반도에서는 목간을 썼다.

산성은 둘레 1천925m, 내부 면적 16만㎡으로 삼국시대 산성 중 가장 큰 규모다. 산의 경사에 기대 안으로 기울어진 편축 내탁 방식이나, 계곡을 가로지르는 남, 서 일부는 안팎에서 쌓고 가운데를 채우는 내외 협축(夾築)이다. 초축 성벽은 가로 50㎝, 두께 20㎝의 편마암을 너비 7∼8m, 높이 7m로 쌓았다. 뾰족한 마름모꼴로 다듬은 뒷채움돌을 맞물리게 쌓고 점토를 다져 넣어 물이 스며들지 않게 막았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물과 토사에 밀려 초축이 무너지자 바깥쪽으로 4m 떼서 다시 성벽을 쌓았다. 1차 성벽은 기울기 81°~84°로 거의 수직인데, 2차 성벽은 69°로 아름답고 웅장하며 안정적이다.

북·서남·동·남에 문지 4개가 보이는데, 모두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현문(懸門)으로 바닥 아래 배수 시설이 있다. 대개 현문은 경사 급한 골짜기에 만드니, 빗물이 몰려 하수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 20미터로 매우 넓은 치(雉), 수비병이 성벽 위에서 몸을 숨기고 활을 쏘기 편리하게 만든 여장(女牆) 즉 성가퀴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성내 도로망은 성벽 안쪽에 성문을 연결하는 회곽(廻廓) 도로가 너비 2∼3m로 시설되었다.

산성 안의 건물은 병영, 장대, 창고 등 군사용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성산성의 건물지(建物址)는 기능적인 장방형 건물뿐 아니라 행정, 의례적인 8각, 9각 건물까지 20기 이상이다. 9자가 완전무결함을 상징하는 하늘의 숫자이므로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壇), 8은 땅의 숫자이므로 50m 거리의 8각 건물은 사직단(社稷壇)으로 추정된다. 제천의식을 올릴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니, 군사는 물론 행정 즉 신주(新州), 후대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였을 것이다.

12각형 건물지. 구체적인 용도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12각형 건물지. 구체적인 용도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한반도 지도를 펴놓고 임진강 어귀에서 원산만까지, 또 아산만에서 경북 영덕으로 직선을 그어보라. 경기도와 강원도, 그리고 황해도, 충청도, 함경도 일부를 포함하는 옆으로 세운 사다리꼴이 그려질 것이다. 사다리꼴의 북쪽선은 임진강, 추가령 통곡이고, 남쪽선은 낮은 구릉을 가로지르다 남한강과 만난다. 사다리꼴은 동쪽이 넓고 서쪽이 좁은데, 사다리꼴의 남북 경계면은 일찍부터 고을이 발달하고 성이 들어서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 백제에서 고구려, 다시 백제에서 신라로…. 하남 이성산성, 사다리꼴의 꼭짓점을 떠받치는 입지(立地)와 정교한 축성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성이다. 한강 수운과 중부 내륙의 입구로, 천험의 요새 남한산성을 업어 배후의 곡창을 보호하고 강 건너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유리하다. 이성산성의 내력도 대부분의 사다리꼴 고을처럼 백제로 알려져 왔다. 백제의 두 왕자가 살아 이성산(二聖山)이 됐다는 전설, 서쪽 십리에 있는 백제 왕도(王都)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그렇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 홍경모의 중정 남한지(重訂 南漢志) 등이 이성산성을 백제의 고도로 비정했고, 일제 시대 일본인 사학자 금서룡이 이를 확인하고, 해방 후 많은 친일, 반일 사학자들이 이를 답습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14차례에 걸친 한양대학교 팀의 발굴조사 결과 이성산성은 백제성이 아니라, 신라의 성임이 밝혀졌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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