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행복예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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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관(禮節館)은 예의범절 즉 모든 예의와 절차를 가르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예절관이란 명칭 앞에는 지역의 이름, 이를테면 평택예절관, 안양예절관 또는 용인예절관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안산만은 행복예절관이라고 칭한다. 행복 즉 Happiness라는 말은 지칭이 아닌 추상명사여서 내가 행복예절관을 처음 들었을 때 한참이나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한 행복예절관의 대문을 아침저녁으로 드나들어도 행복은 내게 착 안기는 맛이 없었다. 왠지 행복은 남의 동네 이야기 같기만 하고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뒤에 숨어서 잘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인색하고 욕심이 높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어쩌다 예절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라면 예절이란 단어에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끔 요즘 같은 시대에 관혼상제를 배워서 어디다 쓰느냐고 그것도 공부까지 해가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묻는다. 또 어느 여성분께 이번 학기에 예절관 프로그램을 새롭게 단장했으니 신청해보시라고 권유했다가 “제가 예절이 없어 보여요?”라는 난감한 답을 들은 적도 있다.

그렇다면, 예절은 왜 하는가. 예절에서는 마음속의 생각(意思)을 실제(實際)라고 한다. 이러한 실제인 생각을 막히지 않고 상대방과 잘 통하게 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하는데 의사를 소통하는 데에는 격식(格式)이 있다. 이 격식에는 어휘와 어법으로 하는 언어 예절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행동 예절이 있는데 이 언동(言動)의 일치를 가리켜 참 예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언동의 일치가 그리 쉬운 일인가.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말라(非禮勿動)’했던 것은 그 오래전에도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있었기에 이런 내용을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잘 아는 ‘이솝’의 우화에, 늑대는 부리가 긴 두루미에게 국물을 접시에 담아 대접하고 두루미는 늑대에게 목이 긴 병에 담아 대접한 것은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기 처지에서만 상대를 대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절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늑대와 두루미는 물론 망설이다 때를 놓쳐버리는 벙어리가 돼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절의 본질은 결국 마음속의 생각을 격식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다워지려고 끊임없는 자기관리(修己)와 원만한 대인관계(治人)를 형성하고자 부단히 공들이고 또 공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리를 보라, 얼마나 자유로운가. 공공장소나 직장에서 편하게 풀어놓고 격식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며 제멋대로 자세를 취해도 누구 하나 지적하지 않고 지적하면 오히려 공격당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격식을 법도대로 배우고 익히도록 하는 곳이 요구된다. 바로 해피니스예절관의 몫이기도 하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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