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6.여주 세종릉과 효종릉
[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16.여주 세종릉과 효종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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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명당… 조선 왕조 500년 역사를 만나다
서울서 예종때 옮겨진 세종릉, 많은 업적 사후 편하게 보낼 자격있어
현종때 여주에 자리잡은 효종릉, 이완 묘 등 주위에 조신들 묻혀 눈길
세종릉. 조선 왕릉 가운데 정남향의 건원릉과 함께 진정한 명당으로 꼽힌다.

■ 천하제일 명당 여주 세종릉
경기도 여주의 두 영릉(발음은 모두 영릉이나, 한자 표기는 英陵과 寧陵으로 다르다. 혼돈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세종릉과 효종릉으로 쓴다.)은 모두 명당자리에 있다. 특히 세종릉은 천하 명당으로 꼽힌다. 풍수가들은 말한다. 뒤에서 생기지맥(生氣地脈)이 흘러내려 오고, 앞에서 주작상무(朱雀翔舞)라 상상 속의 붉은 새 주작이 춤추며 날아오른다. 주위 산들이 봉황처럼 품어주니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며 멀리 왼편 황학산과 연하산, 오른편 북성산이 서로 겹쳐 노니니 양봉상락형(兩鳳相樂形)이라 한다. 정면의 가까운 뭇산이 굽히고 순종하는 형세니 ‘군신조회격(群臣朝會格)’이며, 먼 산은 높고 날카로우니 창검이 옹위하는 형세 즉 ‘기치창검형(旗幟槍劍形)’이라, 듣기 좋은 말은 모두 가져다 붙인다. 덕분에 조선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됐다까지 말한다. 모르는 사람도 봉분 앞에 서면 가슴이 확 트이고, 몸과 마음이 청신해진다.

헌법 교과서를 보면 국가의 조건으로 영토, 국민, 정부를 든다. 다음으로, 독립국은 독자적인 화폐와 언어와 문자가 있어야 한다. 세종대왕은 사군육진을 개척해 오늘의 대한민국 영토를 확정하고 조선통보를 주조했으며 한글을 창제해 우리가 히라카나를 욀 필요 없게 하신 분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6대 기본 조건 중 두 가지가 세종 몫, 그밖에 업적은 나열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좋은 자리 누워 좋은 물 맑은 공기 마시며 사후를 편하게 보내실 자격이 있다.

세종릉은 원래 지금의 서울 서초구 헌인릉 자리에 있었는데, 예종 때 물이 든다는 논란이 있어 옮긴 것이다. 세종의 장남 문종이 일찍 죽고 차남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켜 동생 둘과 장손 단종을 죽였다. 수양대군의 장남은 19살에 죽으니 차남 예종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주 명당에 옮기고도 예종은 즉위 1년 만에 19살로 죽고, 예종의 원자도 3살에 죽는다. 증손부인 성종비 윤씨가 폐비가 되고, 고손인 연산군이 쫓겨나는 것을 보면 제아무리 명당이라도 한계가 있다. 후손이 덕업을 쌓지 못한다면….
 

효종릉 재사. 조선 왕실의 재사를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 혼군(昏君) 인조의 유산… 효종릉과 좌절한 북벌
효종(孝宗)은 10년 재위 기간이 모자랐다. 나라와 백성의 원수를 갚겠다고 북벌을 준비했고 국고를 채우고자 대동법을 실시하고 산업 진흥을 위해 상평통보를 발행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변죽만 울렸을 뿐, 명분론에 치우친 노론으로는 국력을 배양할 수 없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혼군(昏君) 인조는 죽으면서도 화근을 남겼다. 소현세자 부부와 어린 자녀까지 죽이는 대학살극 음모의 주역 소용 조씨를 살려주라고 유언한 것이다. 조 씨가 살려준 은혜를 모르고 김자점과 역모를 꾀하니 효종은 결국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었다. 즉위 10년 만에 붕어하니 만사휴의(萬事休矣)였다.

살아 보람이 없었던 효종은 죽어 여주에 옮겨 묻히고 나서는 부러움을 살 만하다. 효종릉은 원래 동구릉의 건원릉(태조릉) 옆에 있던 것을 현종 때 이 자리로 옮겼다. 부부가 합장도 아니고 나란히도 아니고 일렬종대의 특이한 동원이릉이다. 심양에 같이 끌려가 고생을 같이했던 탓에 의좋은 왕비 인선왕후 장씨가 바로 눈앞에 묻혔다. 또 함께 북벌을 준비한 훈련대장 이완의 묘, 효종을 보필한 홍명하, 원두표의 묘가 모두 여주에 있어 죽어서도 문무 조신들의 보필을 받는다.
 

효종릉. 곡장이 효종릉을 감싸고 인선왕후릉은 그 앞에 배치된, 조선 왕조 최초의 특이한 동원이릉 형식이다.

■ 전제군주 시대, 산릉 역사(役事)의 민폐… ‘계몽’군주? 역시 전제군주일 뿐!
세종릉, 효종릉 천장(遷葬)에는 왕조 시대, 군주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얽혀 있다. 현재의 명당 능자리가 모두 남의 조상묘를 파헤치고 밀고 들어간 만행의 결과기 때문이다. 예종은 광주 이씨 묘와 한산 이씨 묘를 파내고 할아버지 세종릉을 그 자리에 들였다. 묻혀 있던 이에게는 길지를 내준다며, 연을 띄우고 줄을 끊는 쇼도 했다. 묘 자리 부근에 사패지를 내리고 여흥을 여주목(驪州牧)으로 승격해 민심을 달랬다.

숙종도 진주 유씨 묘를 파내 정터(원래 능터로 잡아둔 곳)으로 보내고 거기에 할아버지 효종릉을 옮겨 모셨다. 그것만이 아니다. 능의 기맥을 보존한다며 민가 수백 채에 관아니 성곽이니 모두 허물었으니, 민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만행을 세종이나 효종이 살아서 저지른 것은 아니다. 후세 왕들의 소행이지만, 만행이 반복된 것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만행은 또 얼마나 많을까. 왕조시대의 이런 만행을 알지 못하는 일부 평론가는 ‘계몽군주’라 아첨한다.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나치 히틀러, 이라크의 후세인, 리비아의 카다피조차도 18세기 유럽 기준으로는 훌륭한 ‘계몽’ 군주였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아직도 한일합병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숭앙한다. 그러나 계몽이건 뭐건 아무리 그럴싸한 수식어를 붙여 봐야 21세기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전제군주며 독재자요, 침략주의자며 반인륜 범죄자일 뿐이다. 지하에 누워계신 세종도 이런 논쟁 들으시면 마음 불편하실 것이다.

세종릉과 효종릉 사잇길.
세종릉과 효종릉 사잇길.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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