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용의 더클래식] 남기지 않았지만 파가니니로 인해 남은 것
[정승용의 더클래식] 남기지 않았지만 파가니니로 인해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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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가 연주를 통해 본의 아니게 영향을 주게 된 음악가는 많았지만 실제로 그는 단 한 명의 제자밖에 두지 않았다. 그는 형식과 구속을 싫어했으며, 연주회에서도 즉흥적인 연주를 즐겼다. 이러한 이유로 정작 파가니니가 훗날에 남긴 음악은 많지 않지만, 그의 작품을 토대로 다른 위대한 음악가들이 새롭게 만들어 낸 작품들이 많다. 리스트의 <파가니니의 ‘캄파넬라’ 주제에 의한 화려한 대환상곡>, 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라흐마니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연주를 잘하면 할수록 파가니니에게는 이상하게도 난봉꾼, 수전노, 도박꾼 등등 나쁜 소문들이 하나 둘 늘어만 갔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무시무시한 소문은 바로 그가 ‘살인자’라는 것이었다. 소문의 내용은, 파가니니의 그 현란한 기교가 애인을 살해하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완성되었다는 것이었다.

파가니니는 일찍부터 흉흉한 소문에 시달려 왔던 터라, 오히려 그런 소문이 자신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여 그저 웃어 넘겼다 한다. 그러나 이내 소문은 이탈리아를 넘어 빈, 파리, 런던 등 그가 순회하는 유럽의 많은 도시로까지 번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해명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사실 파가니니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거나 혹은 살인을 하고 음악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혹독한 가르침과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이다. 그의 이런 아름다운 노력의 결실을 사람들이 해괴한 소문으로 엮어서 참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40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온갖 병이 파가니니의 몸을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니스에서 58년 생을 마감한다. ‘악마’라는 이미지 때문에 니스에서도, 그의 고향인 제노바에서조차도 그의 시신 매장을 반대했다. 어디에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 그의 시신은 오랫동안 떠돌다 이탈리아 파르마 묘지에 겨우 묻힐 수 있게 되었다.

1954년부터 파가니니의 고향 제노바에서 열리는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를 통해 사람들은 그를 추억하며 또 다른 파가니니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1위 입상자들에게는 그와 늘 함께 했던 ‘캐논(대포)’란 별명이 붙은 바이올린 ‘과리넬리 델 제수’로 연주할 수 있는 특전을 주고 있다. 바이올린이 가진 갖가지 아름다운 비밀들을 사람들에게 꺼내 보여주고자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이런 진실 때문에 헛된 소문의 전설 속에서도 파가니니는 빛나는 연주자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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