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현장체험]수원소방서 119구급대원

일상 생활을 영위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사고는 물론이고 질병에 따른 위급함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이때 머리 속에 스치는 것은 119라는 익숙한 숫자의 조합이다. 때로는 혹자에 의한 장난 전화에 곤혹을 치루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생명을 책임지며 365일 24시간 출동대기 상태에 있는 이들이 바로 119다. 어느덧 여름을 연상케 할 만큼 포근하다 못해 조금은 더운 지난 1일, 수원소방서 119 구급대원의 삶 속에 빠져 봤다. 근로자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직업전선에서 뛰고 있는 기자와 소방대원들과의 조금은 처량한(?) 공통점을 위안 삼으며 수원소방서로 향했다. 몇 시간을 있어야 하나? , 혹시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속에 수원소방서에 도착, 119구급대원들과의 짧지만 의미있는 1일 동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교상 소방장(41)을 비롯해 대원들과 간단히 통성명을 나눈 후 구급대원 복장으로 환복하기 위해 탈의실을 찾았다. 주황색 바탕의 긴 티와 검은색 조끼를 걸친 후 검정색 모자를 눌러쓰고 조금은 기대에 차 전신거울로 기자의 모습을 들여다 봤다. 정리가 안된 덥수룩한 머리, 유난히 까메 보이는 피부는 시민을 지키는 용감한 구급대원의 모습이 아닌 배고픔에 허덕이다 빵을 훔치다 걸린 장발장을 연상케 했다.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가운데 청내 방송을 통해 귓가를 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구급 출동!, 구급 출동! 송죽동 노상에 20대 후반 여성 길가에 쓰러진 채 방치 김도혁 소방사(34)와 박지현 구급대체원(23)이 신속히 자리를 박차며 차고탈퇴 시간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0초. 그들과 대조적으로 어리바리 멍 때리고 있던 기자는 누구를 쫓아가야 할 지 몰라 허둥지둥 주변을 멤돌자 김 소방사가 기자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구급차에 올라타자마자 눈에 보이는 것은 작은 응급실을 연상케하는 구급품목들. 바닥 한가운데는 환자를 위한 침대가 놓여져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병원 응급실에서나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이 정리정돈 된 채 자리잡고 있었다. 응급 구급함과 산소통, 혈압계를 포함해 임산부를 위한 분만도구 등 처음 접한 구급차 내부는 아무생각 없이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호기심이 발동돼 질문을 시도했지만 손과 얼굴에 장갑과 마스크를 끼며 전화 상으로 신고자로부터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는 그들에게 기자의 질문이 들릴리가 만무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20대로 추정되는 한 여성이 피를 토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대원들은 신속히 활력증후(혈압, 맥박) 측정 후 심전도 모니터링을 실시를 마친 뒤 환자를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후 소방서로 복귀한 대원들은 출동한 신고자의 상세 주소를 포함해 발생유형, 현장 도착까지 걸린 시간 등을 꼼꼼히 소방방재청 구조구급활동일지에 기록했다. 이렇게 첫 출동이 마무리 됐지만 정작 기자는 차량에 타고 내린 기억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오전 11시30분 점심을 먹기 조금은 이른 시간에 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점심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네요라는 질문에 김 소방사는 당연하다는 답을 했다. 김 소방사는 12시 점심시간은 인구 이동이 많아 사고의 위험도 높을 뿐더러 조리 시 화재사고가 발생해 출동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며 식사도 출동을 대비해 30분도 채 되지 않아 마치는 것이 일상이다고 답했다. 식사를 마치고 3층 심폐소생실에 가 응급환자에 대한 응급조치 요령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익숙한 상황에 재빨리 기억을 되감아보자 10년도 지난 군 시절 당시 찌는 듯한 무더위에 연병장에서 푸른 군복을 입은 채 휴가증을 얻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심폐소생술을 배웠던 과거 모습이 오버랩됐다. 기억을 더듬으며 마네킹을 대상으로 한 실습이 시작됐지만 시작 10초도 되지 않아 너무 세게 하시면 오히려 환자가 다칩니다라는 핀잔이 들려왔다. 박 구급대체원의 도움 속에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10여분간 소생술을 시연하자 등뒤와 이마에 구슬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교육을 마치고 쇼파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정자동 한 아파트에 학생 7명이 옥상에 올라가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앞 상황과는 달리 구조대원까지 가세하며 현장으로 출동했지만 직감적으로 별거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새빨간 구조차가 아파트 단지 내 들어서자 이를 본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느덧 현장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심호춘 구조대원(36)을 포함한 4명의 대원들은 허리에 데이지 체인과 구조용 장갑을 낀 채 혹시나 발생할 구조상황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내려오며 오히려 이런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의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심 구조대원은 정말 위급한 순간인지 아닌지는 현장을 와 봐야 안다며 단순히 별일 아니라는 안일한 생각이 위급상황에 처한 시민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고 말했다. 오후 4시께, 본 기자의 마지막 출동이 될거 같은 신고가 접수됐다. 장안구 영화동 거북시장에서 한 남성의 낙상사고가 발생, 신속히 현장으로 이동했다. 이번에야 말로 뭔가를 보여주리라는 다짐했지만 현장에 도착해 안면에 피범벅이 되어 얼굴이 찢겨진 한 남성을 본 순간 다짐했던 각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취상태로 얼굴에 피를 흘리는 남성은 자신의 흰 티셔츠가 붉은 핏빛에 젖는 것도 모른 채 대원들을 상대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풀풀 풍기는 술 냄새, 피로 얼룩진 얼굴에 손을 갖다대는 것 자체에 알러지 반응이 왔지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거부감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환자에게 다가갔다. 평소 인내심과 참을성이 많은 본 기자는 상대의 온갖 협박과 욕설에도 차분히 얼굴에 거즈를 갖다댔다. 씩씩거리던 취객도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히며 경계를 풀었고 인근 응급실로 환자를 이송시키는데 성공했다. 하루 종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유일한 순간이었다. 혹시나 칭찬을 받을까 하는 기대감에 강혜진 소방교(32)를 쳐다봤지만 의외의 대답이 날아왔다. 대원이 그렇게 까탈스러워서 어떡해요, 피가 묻으면 물로 닦으면 되는데 평소 까탈스러운 성격이 위급상황에서도 무의식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황 종료 후, 1층 안전센터 사무실에서 대원들과 식당에서 가져온 누룽지를 함께 먹었다. 이제 슬슬 가야 되나? , 도움이 되긴 됐나?라는 생각을 하며 퍽퍽한 누룽지를 삼키려니 속이 더부룩하게 느껴졌다. 구급 증명서를 발급받으러 온 60대 노인으로 보이는 민원인이 옆에 다가와 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나?라는 웃음섞인 질문을 던졌다. 누가 봐도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년까지 근무한 타 대원들과는 같은 복장을 해도 왠지 모를 어수룩한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오후 5시가 되어서야 하루의 체험이 끝나고 일상으로의 복귀 시간이 왔다. 환복 전, 생전처음 입어본 대원복이 어느새 친숙하게 느껴졌다. 구조대원의 내용을 담은 어느 영화에 나오는 남자 배우처럼 대원복이 잘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체험기간 동안 제대로 된 구급활동 한번 펼쳐보지 못했지만, 근로자의 날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구조대원 역할을 마무리졌다. 양휘모기자 return778@kyeonggi.com

[1일 현장체험]돼지고기 전문업체 ‘아이포크’ 육가공

돼지가격 폭락으로 양돈농가들이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화성시에 위치한 돼지고기 전문업체 아이포크 영농조합법인을 찾았다.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묵묵히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는 비법이 궁금했다. 아이포크영농조합법인은 수입개방과 FTA로 어려워진 국내양돈산업을 지키고 안전한 돈육생산유통으로 농가소득증대를 하고자 지난 2002년 경기도양돈연구회원을 중심으로 설립, 브랜드 아이포크를 탄생시킨 곳이다. 봉독으로 돼지의 질병을 예방하고 정수된 물과 한약재를 첨가한 사료를 먹여 육질이 부드러운 것이 아이포크의 특징. 이를 바탕으로 아이포크는 경기도지사 인증 G마크와 HACCP 인증 등을 획득했으며, 현재 수도권 농협유통센터에 전문 판매점을 운영하는 한편 경기도내 105개 초중고교의 학교급식에도 참여하고 있다. 기자는 각 학교에 공급될 고기를 가공하고 포장하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작업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위생을 위해 완전무장을 해야 한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가운을 입고 그 위에 앞치마를 맨 뒤 위생모와 마스크, 고무장화, 장갑과 팔토시까지 껴야 했다. 이 상태에서 에어샤워로 소독을 거쳐야만 작업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힘겹게(?) 들어간 작업장에서는 작업대 앞에서 4명의 직원이 기계를 이용해 쉴새 없이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카레용 고기가 깍둑썰기로 썰려나오고 있고 비닐에 일정량을 넣고 저울에 달아 무게를 맞추는 작업이 반복됐다. 작업장 너머 발골실에는 통돼지들이 매달려 있었고 10여명의 직원들이 고기를 해체하고 뼈를 발라내는 발골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하루 평균 180마리 가량을 발골하고 있다고 한다. 엄청난 양의 고기들에 압도당해 눈이 휘둥그레진 기자에게 박부규 생산부장의 특명이 내려졌다. 앞다리살을 크게 토막내보라는 것. 기계에 들어가기 전 너덜한 부분을 잘라내야 일정한 형태의 고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3㎏이 넘는 고기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칼을 쥐고 있으니 어디에 칼을 대야 할지조차 난감했다. 잘라낸 부분은 불고기용으로 따로 모아놓고 정리된 덩어리는 다시 절단기에 밀어넣어야 한다. 기계 속에는 수십개의 칼날이 일정간격으로 배치돼 빠른 속도로 돌고 있었다. 고기들은 칼날에 살짝만 닿아도 바로 빨려들어갔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지 긴장이 풀어졌다가는 다치기 십상일 것 같았다. 박 부장은 막노동보다 더 힘든 게 이 일이라며 건설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하루 일하면 안 온다고 말했다. 매일 납품 시간에 맞춰야 하다보니 쉬는시간 없이 하루종일 서서 고기를 만져야 하기 때문이다. 막노동보다 더 힘들다는 말에 잠시 고개가 갸우뚱해졌지만 그 말이 이해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기를 썰다보니 허리가 뻐근해지고 다리가 저려오면서 손목도 시큰거렸다. 낮은 실내온도 탓에 시간이 지나자 몸에 한기가 스며들었고 냉장실에서 갓 나온 고기를 계속 만지다보니 고무장갑 위에 목장갑까지 꼈는데도 손이 시려웠다. 앞다리살 썰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삼겹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둥근 덩어리 형태의 앞다리살과 달리 삼겹살은 네모반듯한 모습이었다. 네 토막 정도로 자르고 마찬가지로 기계에 넣어야 했다. 앞다리살은 고기의 갈라진 부분을 썰면 돼 큰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삼겹살은 두께가 일정한데다 두껍기까지 해 한번에 썰리지도 않았다. 무게도 7~8㎏에 달해 일단 고기를 들어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낑낑대는 기자를 보더니 박 부장은 장수도 칼을 잘 써야 명장이 될 수 있다면서 재차 시범을 보였다. 칼끝만 사용할 게 아니라 칼 전체를 이용해 칼날을 밀어넣은 뒤 앞으로 당겨야 한다는 것. 설명을 듣고 다시 도전해보니 한결 쉬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박 부장은 삼겹살의 단면을 가리키며 돼지비계는 무조건 안 좋은 것인 줄 알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돼지 지방은 불포화산이라 건강에 나쁘지 않고 이렇게 지방이 적당히 붙어야 맛도 있다면서 마트에서 시식해보니 맛있어 사왔는데 집에서 먹으면 맛이 다른 이유도 시식용에는 지방이 많이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이번에는 기계에서 나오는 고기를 포장비닐에 담는 작업을 했다. 써는 것보다 훨씬 쉽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빠르게 기계에서 나오는 고기를 속도에 맞게 담아야만 하기 때문에 역시 어렵기만 했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고기들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고 위생상 한번 떨어진 고기를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어 당황스러웠다. 중량을 맞춰 담은 고기는 이물질 검색대를 통과한 뒤 진공포장돼 박스에 담긴다. 진공포장지에는 소비자가 믿고 먹을 수 있도록 학교명, 중량, 원료, 원산지, 등급, 영업허가번호, 도축장 등 세부정보가 빠짐없이 적혀있었다. 박 부장은 33년간 이 업에 종사했지만 정직함과 사명감이 없으면 하지 못 한다며 내가 시작할 때만 해도 대우가 좋아 일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은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런 그에게 아이포크 직원들은 회식할 때 돼지고기를 잘 먹냐는 엉뚱한 질문을 던져봤다. 온 종일 고기와 씨름하다보면 고기 냄새도 맡기 싫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돼지고기를 즐겨 먹고 심지어 구내식당 반찬에 고기가 안 나오면 직원들이 서운해 한다며 돼지고기는 먹을수록 더 먹고 싶은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또 여기서 일하다 보면 어떤 고기가 좋은 고기인지, 어떤 부위가 맛있는지 고기맛을 더 잘 알게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포장작업이 마무리된다고 끝이 아니다. 작업장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와 소독을 해야 한다. 작은 고기 찌꺼기와 먼지라도 남아있으면 곰팡이가 슬어 병균이 침투할 수 있기 때문에 직원들이 가장 신경쓰는 부분이다. 청소가 끝난 뒤 김종필 대표와 생햄 제조실로 자리를 옮겼다. 유럽에서 즐겨먹는 생햄은 아직 국내에 대중화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와인안주로 각광받으며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아이포크는 수입산이 대부분인 생햄의 국산화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십개의 돼지 뒷다리가 거꾸로 매달려있었다. 꼭 썩은 것처럼 색깔은 거무튀튀했고 꼬릿한 냄새까지 풍겼다. 제조일자에는 2010년, 2011년이 적혀 있었다. 생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간수가 충분히 빠진 천일염을 돼지 뒷다리에 뿌려 3개월간 덮어놨다가 소금을 털어내고 세척해서 2~3년간 매달아놓아야 된다. 이 때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춰야 유충이 생기지 않고 발효가 잘 된다. 김 대표는 딱딱한 겉부분을 잘라낸 뒤 붉은 속살을 얇게 저며 먹어보라고 내밀었다. 한 조각 입에 넣어보니 육포 맛이 나면서 씹을수록 고소하고 향이 느껴졌다. 김 대표는 생햄은 일반고기의 10배에 달하는 부가가치를 갖고 있다며 앞으로 시장성만 생긴다면 농가 소득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돈업계의 위기 속에서도 새 시장을 개척해가고 있는 그에게 요즘 무엇이 가장 힘드냐고 물었다. 김 대표는 학교급식이 지난해부터 최저가 입찰제로 바뀌어 업체 간 과당경쟁으로 생산비도 안 나올 정도라며 장기적으로는 돈 많은 기업이 독점하고 우수축산물을 생산하는 중소규모 업체와 농가는 도산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축산물은 가격경쟁이 아닌 품질경쟁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김 대표와 아이포크 직원들을 보면서 품질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업체가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제 길을 갈 때 양돈업계가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예리기자 yell@kyeonggi.com

[1일 현장체험]산후조리 전문 간호사

그들에게 나는 무용지물이었다. 사회 생활 10년차에 나름 잔뼈 굵었다 생각했는데, 최소 경력 10년인 그들 앞에서 그렇게 모자란 놈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들의 공간에 들어서기 전 나는 몹쓸 바이러스균이 됐다. 온 몸에 99.9% 천연살균력을 보유한 알코올을 뒤집어쓰고, 그것도 모자라 입 속까지 강한 바람으로 소독한 후에야 간신히 한 발 들여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끝없이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든 이들은 갓 태어난 아기와 산모를 돌보는 산후조리사다. ▲소독에 또 소독 일일 현장체험을 위해 이른 아침 수원 쉬즈메디 병원의 산후조리원 프라우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연신 자기체면을 걸었다. 잘 할 수 있노라고. 이제껏 태어난 지 한달도 안 된 그 작은 생명을 품에 안아보기는 커녕 제대로 쳐다본 적 없던 나였으니, 당연한 긴장감이었다. 맘을 다잡으며 힘껏 조리원 문을 밀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유리문 저 너머에서 신원을 확인한 후 문이 철컥 열렸다. 드디어 시작인가 했더니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김행미 산후조리원장이 다가와 내 손에 소독제를 뿌렸다. 손을 비비며 인사말을 건네려는 데 또 다시 분무기에 담긴 투명한 살균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뿌리는 2차 소독이 시작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 원장으로부터 산후조리사의 전반적인 일과와 업무를 들은 후 드디어 절대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신생아실로 들어서기 전 밀폐된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바람에 온 몸에 혹여 남아있을 균 하나까지 털어내는 에어커튼을 거쳐야 했다. 이렇게 공항 검색대보다 꼼꼼하고 엄격한 소독 과정을 거친 후 환한 미소가 마치 천사같은 산후조리사들과 아기들을 마주했다. 온화한 분위기와 달리 신생아실에서 오가는 대화는 빠르고 신속했다. A산모가 젖몸살때문에 밤새 잠을 못잤다는데 모유 수유가 가능한 지 확인해보죠., B산모는 꼬리뼈가 아프다고 호소해서 우선 찜찔을 했어요,, 아기 C가 몸무게가 하나도 안늘었네요, 모유 얼마나 먹었죠? 등. 최대 26명의 아기를 돌볼 수 있는 신생아실에서 산후조리사 5명이 차트판과 아기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눈 이야기 일부분이다. 쉬즈메디 프라우디 산후조리원에는 산부인과 근무 경력 최소 10년에서 30년 이상인 간호사 20여명씩 24시간 3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산후조리사는 산모와 아기를 관리해주는데, 그 역할을 분담해 놓은 상태였다. 신생아실에서 만난 산후조리사는 아침 7시30분부터 오후 2시30분까지의 근무조로 밤샘 근무자들로부터 아기와 산모의 상태를 들은 후 다시 한 번 꼼꼼히 확인하는 중이었다. 산모 상태에 따른 처치를 한 후 아기가 똥은 잘 싸는지, 몸무게는 늘었는지, 젖은 얼마나 먹는지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라를 거듭 체크했다. 이어 8시 40분쯤 쉬즈메디 소아과 의사가 신생아실로 들어와 다시 한 번 아기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밤새 떨어져있었던 엄마들 품으로 아기를 보냈다. 이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용히 서서 듣는 것 뿐이었다. 자리만 차지하는 무용지물, 우울해지려는 찰나 드디어 임무가 주어졌다. 모든 신생아가 엄마방으로 간 사이 빈 공간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청소기는 대졸자가 돌리는 것이라며 유쾌한 유머와 밝은 미소로 청소 시작을 알린 최영숙(59) 간호사를 따라 소독제와 손걸레 하나를 들고 아기들이 누웠던 통부터 이불, 침대 바퀴하나까지 빈틈없이 뿌리고 닦기 시작했다. 이 같은 소독을 신생아를 담당하는 산후조리사들이 직접 1일 2회 실시한다고. 아기와 산모만 돌보는 줄로 알았던 산후조리사들의 청소 업무는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소가 아니라 소독이에요. 신생아실에는 청소하는 사람도 못들어오니까 우리 간호사들이 직접 청소하죠. 이 소독제는 99.9% 살균해주는, 먹어도 되는 비싼 거에요.(웃음) 최영숙 간호사의 청소 아닌 소독이라는 표현에 갓 태어난 생명을 돌보는 간호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수긍이 갔다. 시간이 흘렀나보다. 산모들이 자신의 아기를 맡기러 신생아실로 찾아왔다. 잠시 이별인데도 애틋한 지 침대에 눕힐 때까지 바라보다가 돌아간다. 방으로 돌아간 산모들은 마사지와 아기 물건 만들기 등 산후조리원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분만 후 자신의 몸 상태를 회복시키는 과정 중 하나다. 미모를 자랑하는 최재경(45) 산후조리사는 냉장 보관한 모유는 엄마젖과 같은 온도를 만들기 위해 중탕해야하고 남았다고 다시 냉장 또는 냉동해서는 안돼요라며 젖병 하나를 건넸다. 신생아실로 돌아온 작은 아기들을 두 손으로 받아들어 각 침대에 눕히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모유를 먹지 못한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는 등 동작 하나하나가 긴장되고 조심스러운 돌보기가 시작된 것이다. 긴장해서인지 아기를 안았던 어깨가 결려 온다. 잠이 든 아기를 발가락 하나까지 힘줘가며 조용히 눕힌 후, 다 먹은 젖병은 바로 씻어 소독기에 넣는 등 도통 스트레칭 한 번 크게 할 짬이 나질 않는다. 이 생초보 기자가 안쓰러웠던지, 최미섭(58) 간호사가 긴장 풀어요. 우리 하는 일이 원래 짬이 없어요라며 위로해 준다. 최미섭 간호사는 간호대학 졸업 후 산후조리 자격증을 땄는데 산부인과 경력만 30년에 조리원 근무 경력도 10년 이상이란다. 베테랑 중 베테랑이다. 10여년 전 IMF 터진 후 가정 주부들이 갑자기 산후조리원으로 몰려 매뉴얼조차 없었는데 이제 많이 바뀌었죠. 조리원에도 전문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근무 매뉴얼과 역할도 정립됐고. 최 간호사의 말에 생각해보니 50대 이상 부모세대만 해도 산후조리원이 따로 없어 집에서 부모나 스스로 몸을 돌봐야했었을 터. 지금의 산후조리사들은 당시 산모의 엄마이자 마을의 경험 많은 어르신이자 산파이자 아기에겐 할머니까지 한 번에 여러 역할을 맡은 셈이다. 예상보다 일의 깊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던 찰나, 이원희(45) 산후조리사가 등장했다. 국제 공인 모유수유 자격증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같은 자격증의 존재 자체도 놀라운데 그를 따라 산모들의 방을 돌며 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산모들이 산후조리원에서 마냥 쉬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아기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모유를 잘 먹이는 지 앞으로를 준비하는 중요한 과정이거든요. 이 간호사는 한 산모의 방에 들어가 유축 시간을 확인한 후 가슴 마사지를 실시하고 조언했다. 산모가 밤새 눌러도 나오지 않던 젖이 그의 손길 몇번에 흘러내리는 등 수심 가득했던 산모들이 웃기 시작했다. 놀라움도 잠시, 나는 산모들에게 젖을 먹이면서 흘러내린 땀과 모유에 젖은 옷 대신 입을 새옷을 배달하느라 종종걸음을 쳤다. 앉을 틈 없이 다시 신생아실로 향하자 이번에는 또 아기들을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든 아기를 다시 눕히는 데 반장이라는 표시가 눈에 들어온다. 의미를 묻자 퇴실을 앞둔 가장 나이 많은(?) 신생아 침대에 붙여주는 것이란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씩 반장하면 부모가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부모의 마음을 읽은 섬세한 배려였다. 이처럼 산후조리 간호사, 그것은 전문 직업인이기 이전에 모든 산모와 아기들에게 가족이었다. 류설아기자 rsa119@kyeonggi.com

[1일 현장체험]인천공항본부세관 여행자휴대품검사

직업체험이다. 나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을 소개한다는 것에 어깨가 무겁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기왕 하는 거 평생 못해볼 체험을 해보자!라는 의욕이 앞서 직업선택에만 1개월이 넘게 걸렸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내가 태어나 30년을 살았던 인천에서 내가 못 가본 곳이 어디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부터 먼저 출발했다. 인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다와 공항이다. 올해로 개항 130주년을 맞은 인천의 바닷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릴 적 친구들과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철제 펜스를 넘어 항구에서 뛰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공항이 떠올랐다. 영종도의 인천국제공항은 분명히 내 어릴 적엔 없었다. 다 큰 후에나 비행기를 타려 이용했던 게 전부다. 몰래 담을 넘어 심층탐사(?)하는 어릴 적 경험도 공항에선 없다. 한 차례 더 고민했다. 공항 안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장소가 있었다. 공항세관, 말 그대로 기자라는 직업이 아니고서는 출입할 수 없는 특수한 곳이다. 여행도중 Custom(세관) 이라는 글귀가 적힌 제복을 입은 사람 앞에 서면 괜스레 위축됐던 기억이 스쳐간다. 고가 밀수품이나 마약도 안 들고 있으면서도 X-ray 검색대를 통과하면 나는 삐~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던 기억. 원인은 벨트에 붙어 있는 쇠붙이였지만, 안도감에 지금도 매번 한숨을 쉬곤 한다. 드디어 검색을 받기만 했던 입장에서 검색하는 입장으로 바뀌는 날이다. 입장이 뒤바뀐 느낌에 신바람이 나면서도 뭔가 긴장감이 엄습했다. 꽃샘추위가 살짝 물러가 따사로운 3월 중순, 그래도 공항 가는 일은 언제나 설레기만 하다. 룰루~랄라~ 여유를 부리며 인천대교를 달리는 차량의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오전 10시께. 인천국제공항청사 지하 1층 인천공항본부세관 휴대품과. 오늘 내가 체험할 직업은 여행자의 휴대품을 검사하고 통관하는 일이다. 내가 여태껏 살면서 접했던 세관 업무인 바로 이 일이 세관 업무 전체에서도 극히 일부분이었다. 생각보다 세관에서 하는 업무가 많다. 수출입 물품의 통관, 밀수부정 무역불법 외환거래 단속, 불법 총기류마약 반입 차단 등 미처 보지 못한 일들이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전국 공항 입출국 여행객의 77%(4천100여만 명)와 특송화물 반입건수의 99%를 처리하는 인천공항의 위용에 걸맞게 인천공항세관은 무려 999명의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 반갑습니다. 자, 가볼까요? 휴대품 2 검사관실 조진용 계장, 말로만 듣던 오늘 내 사수가 도착했다. 부드러운 미소에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의 모습은 인자한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올해로 28년차 말 그대로 베테랑이다. 꽁꽁 뭔가를 숨겨 들어오더라도 촉(觸)으로 적발한다는 명성을 지닌 조 계장의 뒤를 쫓았다. 오전 11시께 공항 1층 C 구역 입국장. 삐~ 등 뒤로 식은땀이 또 흐른다. 내가 입은 Custom이라고 적힌 세관 전용 점퍼가 머쓱하다. 공항공사 직원이던, 세관직원이던 가차없다. 1층 보세구역으로 들어가기 전 신분증과 소지 물품을 X-ray 검색대에 올려놔야 한다.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어쨌든 여권 없이 내가 이곳에 서 있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캐로셀)에 수십 개의 짐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뭔가를 체험하겠다는 설렘도 잠시 갑자기 수십 명의 사람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러시아 하바롭스크(Khabarovsk)에서 출발한 SU 4650편 여행객들이다. 시간은 한정돼 있다. 이번 여행객을 놓치면 다음 편 여행객을 맞기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첫 임무는 입국하는 여행자들이 꼭 내야 하는 종이 카드, 세관 신고서를 출구에서 받는 일이었다. 지루하기만 할 줄 알았지만, 여행객이 든 짐에 표식(씰)이 붙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처음 알았다. 휴대품 검사는 크게 3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우선 중앙 X-ray 검사대에서 걸러진 짐에 대한 검색이 있다. 모든 수하물은 비행기에서 나오자마자 중앙 X-ray 검사대에서 일차적으로 판별한다. 이곳에서 뭔가 확인이 필요한 물품이 검색됐을 때 해당 짐에 표식을 붙이고 추가 확인에 들어간다. 이 표식 확인은 출구에서 세관 신고서를 받으며 이뤄진다. 이밖에 사전에 등록된 서류를 바탕으로 여행객의 이전 체류지, 체류기간 등을 분석해 지정검사 대상자를 선정, 검색하는 방식과 사람의 심리와 행동, 가방 형태 등 동태관찰을 통한 일명 즉석 검색이 있다. 내가 직접 해볼 수 있는 일은 극히 적었다. 여행객을 상대로 직접 휴대용 X-ray 검색기를 휘두를 수도, 봐도 모르는 X-ray 판독기를 다룰 수도 없었다. 직업체험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견학을 온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세관 업무를 단 몇 시간 만에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만큼 위안을 삼았다. 반가운 대원이 도착했다. 마약탐지견 리카(8세수컷)다. 공항세관엔 모두 13마리의 마약탐지견과 총기류 전담, 폭발물 전담 탐지견이 각각 1마리씩 있다. 리카는 공항세관 마약조사과 소속 15년 베테랑 이근석 탐지조사요원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 하드 케이스를 눌러보세요. 이근석 요원이 손으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는 짐 중 단단한 재질의 가방을 빠른 속도로 누르고 지나간다. 그저 가방을 가리키면 리카가 냄새를 맡는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손으로 눌러 가방 내부 공기를 밖으로 새나오게 하는, 리카의 후각 정확도를 현저히 높이는 방법이었다. 리카의 훈련도는 가히 최고다. 지난해 말 아프리카에서 온 한 남성의 바지 주머니에 있던 소량의 대마초 가루를 후각으로 발견하기도 했다. 힘껏 달리는 리카에게 목줄을 잡은 손은 물론 내 몸 전체가 뒤뚱뒤뚱 이끌리면서 얼떨결에 마약탐지 체험이 마무리됐다. 갑자기 입국장 한편이 소란스럽다. 러시아 국적 여성 여행객 2명의 가방에 표식이 붙어 있다. 가방 속에 뭐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커터 칼로 조심스레 가방을 싼 비닐을 제거했다. 가방을 열자 신문지로 싼 보드카가 여러 병 나오기 시작한다. 휴대품 면세범위인 주류 1병 초과다. 이윽고 신문지와 비닐로 감싼 이상한 물체가 손에 잡혔다. 안에는 두꺼운 러시아식 훈제 소시지가 있었다. 검역 대상물품이다. 심각한 위반행위는 아니지만 어쨌든 적발은 적발, 이들은 면세 초과한 물품에 대한 가산세(납부세액의 30%)를 추가로 내야 한다. 적발할 때 사실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온갖 욕설을 듣는 것은 기본이지요. 미사일 등 각종 탄약이 저장된 부대의 검문소에서 군 복무를 했던 내게 검문검색 업무는 단순했다. 그저 규정대로만 하면 됐다. 당시 말이 통하지도 않던 덩치 큰 미군이 덩치 큰 차량을 몰고 들어와도 일단 다 내려! 위협감 있는 목소리로,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기 싸움을 하곤 했다. 상대방의 불평불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를 위해 철저하게 무시했었다. 하지만, 세관 검색 업무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바로 기분 좋게 여행하는 즉, 민간인을 상대로 검색하는 것이다. 아무리 안전도 좋지만, 예전의 나처럼 기 싸움을 시도했다간 여론의 뭇매를 맞기 딱 좋았다. 그저 적발에만 신경 쓸 거라는, 나마저도 세관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조진용 계장은 여행자 대부분이 선량한 사람이다. 소수를 가려내고자 다수에게 최대한 양해를 구하고 있다.라면서 세관업무도 일종의 서비스직인 만큼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인천공항에서 지난해 고가의 핸드백, 시계, 양주 등 여행자 면세범위(미화 400달러)를 초과한 물품을 자진 신고하지 않고 반입하려다 적발된 건수는 7만 1천875건. 징수된 가산세만 해도 12억 원이다. 세관 1층과 지하 유치물품 창고에는 이 같은 보관 물품 수백 개가 쌓여 있다. 특히 대리 반입 수법으로 밀수입하려다 적발된 건수도 215건으로 지난 2011년의 2.5배에 달하고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세관 업무를 체험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국외여행이 대중화된 시대, 창과 방패의 싸움보단 제도에 대한 여행객들의 인식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적어도 내 다음 국외여행에선 더는 세관 직원을 보더라도 움츠러들진 않을 것 같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하루 10만여 명의 인간군상 속에서도, 날이 갈수록 지능화되는 수법에도 세관 직원들은 매의 눈과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동민기자 sdm84@kyeonggi.com

[1일 현장체험]시각장애인활동보조인

장애인활동보조인의 역할은 장애인에게 손ㆍ발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 활동보조인 1일 체험에 나선 나에게 선배(?!) 활동보조인이 가장 먼저 당부한 말이다.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는 외출이나 외부활동 등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학습 및 의식 수준이 높아 기회와 여건만 준다면 다양한 능력을 펼칠 수 있다. 활동보조인은 이러한 시각장애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선배의 조언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의 가장 가까이에서 생활하고 있는 활동보조인의 일상으로 들어가 봤다. 대한안마사협회 경기지부와 장애인생활자립센터 등의 도움을 얻어 활동보조인 1일 체험에 나서면서 장애인분들을 만나뵙기 전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혹시 그들이 싫어하는 말투와 질문이 있지는 않을까 등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생각해 보면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삼촌 할아버지 역시 시각장애인이셨다. 아주 어렸을 때 뵈었던 삼촌 할아버지에 대해 나는, 항상 방안에서만 앉아계시며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천원짜리와 만원짜리를 정확하게 구분해 용돈을 많이 주시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을 나섰던 기억은 없다. 할아버지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많은 고민을 머릿속에 담고 지난 28일 오전 10시30분께 안산시 월피동에 거주하고 있는 1급 시각장애인 김재홍씨(54) 집을 방문했다. 김씨의 집에는 기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놀러 온 친구 김기홍씨(55ㆍ1급 시각장애인)가 함께 있었다. 우리나라는 시각장애인을 장님, 맹인, 시각장애우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어떻게 부르는 것이 시각장애인들이 듣기 좋은 표현인지 고민이 됐다. 그런 나의 고민을 김재홍씨가 단번에 해결해 주셨다. 그냥 편하게 불러요. 시각장애인은 그냥 시각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듣기도 편하다고 했다. 현재 대한안마사협회 경기도지부 복지분과 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재홍씨는 김 위원장님으로, 친구 분인 김기홍씨는 김 사장님으로 부르기로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 활동보조인은 출근하면 먼저 카드 리더기에 출근 체크를 해야 한다.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해 임금을 정산하려는 것인데, 김 위원장은 한 달에 96시간을 지원받는다. 규정대로 하면 활동보조인은 부부 장애인을 제외하고는 1인당 1명밖에 보조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김 사장까지 2명의 활동을 돕기로 하고 출근 체크 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나의 미션은 ▲산책하기 ▲은행 업무보기 등이다. 한달에 96시간이면 하루 약 3시간 남짓이다. 활동보조인을 지원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한정돼 있어 우리는 서둘러 산책을 나섰다. 오전 11시께 두 분은 내가 챙겨 드린 신발을 신고, 내 양쪽 팔을 한쪽씩 붙잡은 채 인근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분이 내 손을 잡는 순간 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보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등 많은 생각에 긴장됐다. 잔뜩 긴장한 것을 느꼈는지, 김 위원장은 우리보다 반보 앞에서 그냥 편하게 걸으면 되요. 이 기자가 걷는 속도와 몸의 움직임으로 앞에 장애물이 있는지, 계단인지 평탄한 길인지 알 수 있어요라며 오히려 나를 리드했다. 그렇게 공원을 향하던 우리는 8차선 도로 횡단보도에 섰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보행자신호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나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리기 시작했고, 바로 옆에 보행자신호 버튼을 누르라는 안내표지를 보게 됐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안내표지를 보지 못하는 이분들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채 누군가 도와주기 전까지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 안내표지가 아닌 음성으로 보행자신호 버튼을 누르라는 안내가 나왔으면 시각장애인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됐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에 도착하기까지 15분가량의 동네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시각장애인들을 괴롭히는 장애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곳곳에 설치된 볼라드(차량 진입방지용 말뚝)와 최근 성능이 좋아져 소리없이 다가오는 자동차들. 또 공원에는 큰 배수로가 있어 자칫 시각장애인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도 있었다. 어렵사리 도착한 공원에서 잘 포장된 산책로를 따라 한 시간가량 걷기 운동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두분이 시력을 잃게 된 이야기, 김 위원장님의 아내가 4개월 전 지병으로 돌아가신 이야기, 자녀와 떨어져 살게 된 이야기 등을 함께 나누면서 조금이나마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은 현 정부는 손자를 돌보는 노인들에게는 보육수당을 준다고 하면서 장애인의 직계가족들이 직접 활동보조인으로 돌보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도우미 지원 시간 역시 1급 시각장애인은 3급 지체장애인 수준밖에 지원받지 못한다. 또 돈을 주는 주체가 장애인이 아닌 복지관이다 보니 일부 도우미들은 복지관 눈치만 보고 장애인을 위하지 않는다. 돈을 지급하는 주체를 복지관에서 장애인으로 바꿔야 한다며 활동보조인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말했다. 김 사장도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불법 마사지 업체가 너무 많이 생겨 안마를 통해 먹고사는 시각장애인들이 일터를 모두 빼앗겼다며 돈을 주는 지원보다는 장애인들이 직접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토로했다. 산책을 모두 마치고 나니 오후 1시가 됐다. 우리는 시내 은행으로 이동하고자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려 했지만, 장애인 콜택시는 최소 하루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일반 택시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택시에서 내리자 길 건너편에 은행이 보였다. 시내는 정말이지 시각장애인들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길 곳곳에 볼라드가 설치돼 있을 뿐만 아니라 불법 주차된 차량,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오토바이 등으로 정말 위험천만했다. 기자는 긴장감과 걱정 속에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사리 은행에 도착한 일행은 김 위원장의 새 통장을 만들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렸다. 통장을 만들기 위한 신청서 작성을 도왔다. 본인 이름과 서명은 직접 작성을 해야 한다고 해 김 위원장이 내 손을 잡고 서류를 함께 작성했다. 시각장애인이 은행 계좌를 만들 때는 별도의 규정이 있어 통장을 발급받기 조금 까다로웠다. 아마도 시각장애인들을 속이려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을 것이다. 김 위원장의 통장을 만들고, 김 사장님 통장 잔액을 확인하는데만 2시간가량이 소요됐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까다로운 절차들이었음에도 불구, 너무나 감동적으로 끝까지 친절하게 업무를 도와준 SC제일은행 안산지점 김민화 대리와 이경이 팀장께 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드리고 싶다. 은행업무를 마친 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인근 분식집을 찾아 김밥과 만두 등 비교적 먹기 편한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난 후 김 위원장의 집에 도착하니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산책하고 은행 다녀오고 김밥을 먹는데 무려 5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활동보조인의 평균 근무시간이 3시간인 것을 생각하면 보조인 지원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드 리더기에 퇴근을 체크하고 오늘 일과에 대해 기록지를 작성하면서 체험 일정을 마쳤다. 활동보조인의 시급은 8천850원이며 이중 2천여원은 자립센터 회비로 내고 6천500원이 남는다. 이 6천500원에서 또 4대 보험료를 내고 나면 5천원 가량이 남는다. 오늘 6시간을 일했으니 3만원 가량을 번 셈이다. 하루종일 긴장을 해서인지 몸은 천근만근인데 3만원을 벌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했다. 김 위원장이 돌아서는 내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머릿속에 아직도 맴돈다. 이 기자, 우리 시각장애인들이 편견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까? 이번 1일 체험를 마치면서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인식이 개선되는 것은 물론 활동보조인에 대한 처우도 하루빨리 현실화되기를 바라본다. 이호준기자 hojun@kyeonggi.com

[1일 현장체험]국민연금공단 장애인활동지원 방문조사원

재작년 즈음인가.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려다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왼쪽 발목이 접히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어찌나 아프던지, 발목이 부러졌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는데, 다행히 그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발목은 물론이고 발등까지 퉁퉁 부어올라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기브스를 하고 발목을 집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무려 5개월동안 말이다(!). 30여년간 살아오며 처음했던 기브스와 발목 때문에 그동안 운동에 게을러 물러졌던 팔힘은 좋아졌지만,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5개월 동안 발목에 의지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장애는 다른 것이 아닌 불편한 것일 뿐이라고. 그런데 장애에 따른 불편함은 비장애인이 생각하는 만큼의 불편함을 넘어선다. 이 때문에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국민연금공단, 장애인활동지원에 나서다 1천100만명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경기도 속에는 50만명의 장애인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20명 중 1명 가량은 크던 작던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은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지난 2007년 장애인복지법에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가 규정돼 2009년부터 2011년까지 1ㆍ2차 시범사업을 거쳐 2011년 1월 14일 장애인활동지원에 관한 법률이 공포됐다. 이에 2011년 10월 5일부터 장애 1급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장애인활동지원제도가 시행됐으며, 올해 1월1일부터는 장애 2급을 가진 이들도 이 제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간단히 말해 장애인에게 활동보조인, 간병인 등을 국가에서 일정 시간동안 지원해 주는 제도다. 그렇다면 활동보조인과 간병인 등을 지원해주는 시간은 어떻게 정해질까? 바로 국민연금공단의 방문조사를 통한 기본자료 수집과 이 자료를 통한 각 지자체의 수급자격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다 바뻐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위치한 국민연금공단 경기지역본부(수원지사) 3층 장애인지원센터는 아침부터 계속되는 전화와 상담에 정신이 없었다. 국민연금공단하면 보건복지부를 대신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연금을 책임지는 기관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와는 별개로 장애인에 대한 활동지원 정책도 펼치고 있는 것. 아직은 정책 시행 초기단계로 담당 직원이 많지 않아 업무량이 버거워 보일 정도로 많은 전화와 상담이 끊이지 않았다. 개인정보가 많기 때문에, 방문조사 전 사전준비 할 때 개인정보 보호를 신경쓰고 있어요. 김태우 장애인지원센터 과장은 방문조사원 체험을 나온 기자에게 방문조사 사전준비시 개인정보가 많아 직원들이 개인정보보호에 항상 유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공단에서는 장애인 또는 가족이 활동지원제도를 신청하면 이에 따른 안내와 접수를 지원하고 방문조사를 벌인다. 수급자격이 있는 장애인들은 2~3년 마다 갱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갱신에 대한 방문조사도 함께 해야 한다. 부당지급과 이의신청에 대한 조사도 해야하며 활동지원사업에 대한 연구와 홍보,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해야 한다. 더욱이 직원 3명이 수원지역에 거주 중인 장애인을 대상으로 방문조사를 해야하다보니 숨 돌릴 틈도 없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전날 사전준비를 모두 마쳤다는 김 과장을 따라 방문조사 차량에 몸을 실었다. ▲야외활동을 하고 싶은 시각장애인 A4지 6매 분량의 방문조사서를 들고 처음 찾아간 곳은 수원시 장안구에 거주 중인 시각장애 1급 A씨의 거주지였다. 10㎥ 남짓한 원룸에서 홀로 살고 있는 A씨는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외출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방문 당시 활동보조인이 A씨를 도와 가사일을 해주고 있었다. A씨는 수급자격 갱신이 당초 지난해 11월 이었는데, 국가에서 6개월 일괄 연장해줘 오는 5월 31일이 만료에요. 그 전에 다시 한번 조사를 하러 나왔습니다. 김 과장의 조언(?)을 받아 A씨에게 방문조사의 취지를 설명한 뒤, 방문조사서에 적힌 질문들을 하나씩 질문했다. 대소변은 혼자 볼 수 있나요, 식사는 혼자 가능한가요, 옷을 혼자 입고 벗을 수 있나요 등의 기본적인 질문부터, 장애는 언제 시작됐나요, 점자는 어느정도 읽을 수 있나요, 안마는 배우셨나요, 별도의 소득은 얼마나 되나요, 현재 장애와 관련해 복용 중인 약은 있나요 등 구체적인 질문까지 약 30가지 질문에 답변을 들으며 방문조사서에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기자의 기계적인 질문이 마음에 걸렸던지 김 과장은 A씨에게 예전에는 사회활동이 많은 장애인의 사회활동은 고려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장애인 단체 등의 건의로 사회활동 참여 등을 확인하는 사회환경 고려 영역이 확대되었다"고 조언했다. 질문을 모두 마치자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A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집에만 있으면 너무 답답해서 외출을 자주 하고 싶은데, 활동보조인을 더 많이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 달에 1번씩 안마봉사를 다니고 등산과 컴퓨터(시각장애인용) 배우는 것이 취미라는 A씨는 지팡이를 이용해 집 근처는 나갈 수 있지만, 그 외에는 활동보조인이 없이 움직이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특히 횡단보도에 설치된 볼라드(일명 무릎지뢰)에 다치는 경우가 다반사라 자꾸만 행동이 소극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 과장은 조사서를 모두 작성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거에요. 매달 21일께 수급자격심의위원회가 열리고 이달 말 즈음이면 구청에서 통보가 올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감사하다는 A씨의 인사에 몸조리 잘하세요라는 말을 남긴 채 다른 방문조사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증 와상장애인 다음에 찾은 곳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B씨(여)의 거주지였다.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 아파트단지가 밀집한 곳이라 찾기도 어려웠지만, 엘리베이터마저 고장으로 운행이 중단,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힘들게 걸어올라와 B씨의 거주지에 도착하자 어린조카가 배꼽인사로 김 과장과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지난 2006년 교통사고로 척추와 골반 등을 크게 다친 B씨는 현재 친오빠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무려 8년이란 시간동안 병원에서 생활하다 지난주 퇴원한 것. 의료용 침대에 누워있는 B씨는 움직이지도, 말도 하지 못하는 중증 와상장애를 안고 있었다. 목에는 의료용 호스가 달려있었다. 잠시나마 B씨에게 인사를 한 우리는 B씨의 올케언니와 간병인과 함께 방문조사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질문 드리기가 애매하긴 하지만이라고 운을 뗀 김 과장은 빠르게 질문지를 읽어내린 뒤 올케언니의 답에 따라 아니요에 체크를 했다. 방문조사서를 덮은 김 과장은 대신 올케언니에게 활동지원제도에 대한 설명을 하고 B씨는 최대 107시간까지 활동지원제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장애인의 생활환경에 따라 추가급여도 받을 수 있으므로 가까운 동사무소 또는 국민연금지사 등에 문의를 하라는 세심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의사를 용서한 지체장애인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고관절 수술 휴유증으로 왼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지체장애인 C씨(여)의 집이었다. 보조기구 없이는 혼자 일어날 수 도 없는 C씨는 지난 2004년 한 대학병원에서 고관절 수술을 한 뒤 휴유증으로 왼쪽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김 과장의 조언대로 방문조사서를 작성하면서 C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C씨는 의료사고 당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큰 고통이 계속됐지만, 그보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이 올라 잠도 못 이뤘다고 말했다. 이어 몇해전 해당 병원과 의사를 마음 속으로 용서한 뒤 한결 편안해졌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방문조사서를 작성하는 동안 C씨는 활동지원제도에 대한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국가에서 이런 제도를 만들어줘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 왼쪽 다리 외에도 몸이 성한데가 없는데, 활동보조인이 가사일 등을 도와줘 한결 편안하다는 것이다. C씨 역시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더욱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대해야 방문조사는 형식적인 조사가 아닌 가슴으로 장애인을 이해라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예, 아니요를 체크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이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들어야 이 사람에게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김 과장은 한집 한집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하루는 금방 지나가 버린다면서 아직 정책 시행 초기라 전문인력이 부족하지만, 앞으로는 많은 사회복지사들이 이 일에 참여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봄이 다가온 성큼 3월에 때아닌 추위가 찾아온 날이었지만, 가슴 한켠은 따스해지던 그런 하루였다. 안영국기자 ang@kyeonggi.com

[1일 현장체험]한국석유관리원 수도권본부 검사팀

평소 가짜석유 단속에 대한 보도자료를 받아 기사를 쓰면서 단속반원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에 현장체험리포트 차례가 돌아왔다. 솔직히 순대공장, 고속도로순찰대, 얼음공장 등 현장체험도 할 만큼 했고 기자 중에 고참인데 좀 빼주지는 몰할 망정 이르다 싶은 순번에 요즘 유행하는 대뇌 전두엽까지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지면 담당이 후배 여기자 중 평소 까칠하기로 유명한 이모 기자인 관계로 이의를 제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심 불편했지만 그래도 현장체험은 기자가 아니면 아무나 도전해 볼 수 없다는 의미를 부여하며 체험거리를 찾았다. 번뜻 한국석유관리원 가짜석유 단속반원의 활동이 생각났다. 이번 도전 미션은 가짜석유 단속반원이다 라고 정하자 이내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설레임이 온 몸을 자극시켰다. 기름값이 비싸도 너무 비싸다 보니 주유를 할 때면 가짜석유를 주입하는 것이 아닌지 주유량을 속이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지난 2011년 9월 수원의 한 주유소에서는 가짜석유를 보관하는 비밀탱크가 폭발하면서 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하는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국민의 가짜석유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됐고 석유제품에 대한 신뢰 역시 땅에 떨어졌다. 석유제품을 유통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한국석유관리원의 입장에서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터. 곧이어 가짜석유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대대적인 단속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석유관리원 홍보실을 통해 현장체험 협조를 요청한 뒤 12일 오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한국석유관리원을 찾았다. 가짜석유 단속의 최첨병인 한국석유관리원 수도권본부 검사2팀에 배속됐다. 팀장님은 회의에 들어가셨고 A 과장님께서 석유관리원 현황과 석유제품 검사업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런데 헉~ 서울과 경기남부지역 석유판매업소 등을 담당하는 수도권본부 검사2팀의 인원은 고작 10명, 팀장과 과장, 행정 인력 등 차포 떼면 실제 단속 인원은 5~6명에 불과했다. 통상적으로 처음 만나면 명함을 주고받고 인사를 나누는데 A과장과 B직원 등은 아예 명함이 없다고 했다. 그럼 휴대전화 번호라도 알려달라고 했더니 단속 전용 휴대전화기를 사용한다고 그 번호를 알려줬다. 무슨 국가정보원 직원도 아니고 극도로 신분 노출을 꺼렸다. B직원은 주유소나 판매점에서 검사팀원들의 얼굴과 전화번호 등을 미리 알면 단속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얼굴 사진이 지면을 통해 나가면 안 된다며 검사 차량도 노출 차량과 비노출 차량으로 구분하는 등 신상과 휴대전화, 차량 등에 대한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현장 단속에 앞서 거래상황기록부 등 서류 분석을 통해 검사 대상 주유소를 선정했다. 단속에 나설 지역은 수원, 안산, 광주, 용인. 이 지역을 하루에 다 돈단다. 단속에 함께 동행하게 된 8년차 B직원과 신참 C직원이 차량에서 검사 장비를 점검했다.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 시료를 채취할 용기와 비밀탱크를 찾는 데 사용하는 내시경 등 확인해야 할 장비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장비에 대해 설명해 주던 B직원은 검사 중간에 소비자 신고나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계획한 대로 검사를 마칠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또 주유소 직원들과 실랑이라도 벌이게 되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조언했다. 첫 번째 검사 대상 주유소는 수원이었다. B직원은 주소를 적어주고 근처에 와서 연락하면 같이 해당 주유소에 들어가자고 했다. 주유소에 들어서 점장에게 B직원은 석유관리원에서 정품, 정량 검사를 나왔으며 주유기와 탱크 등을 점검하겠다고 고지했다. 예전 같으면 주유소 직원들이 검사 자체를 거부하면 경찰이나 해당 지자체 공무원을 불러야 했는데 지금은 그래도 3회 이상 거부 시 과태료가 부과돼 순순히 검사에 응했다. 유종별로 한 개 주유기에서 2개의 시료를 채취했다. C직원은 하나는 검사용이고 하나는 해당 주유소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다시 재검사할 수 있도록 2개의 용기에 시료를 채취해 봉인한다고 설명했다. 휘발유는 1.5리터씩 2개, 경유와 등유 기타 석유제품은 1리터씩 2개를 채취해 점장의 확인 사인을 받은 뒤 봉인했다. 정품(가짜석유 여부 확인) 검사를 하기 위한 시료를 확보하는 것이다. 다음은 정량 검사를 실시했다. 주유기에서 7리터 가량을 먼저 뽑아낸 뒤 20리터를 측정기에 주유해 정량 주유 여부를 확인했다. 정량 확인 결과 20리터에는 조금 모자랐지만 기준 오차 범위 이내여서 다행히 정량 주유 위반은 아니었다. C직원은 주유량을 조작하는 주유소에서는 20리터까지는 정상적으로 주유하고 20리터 이상 주유하면 기름을 적게 들어가게 조작하는 경우가 있어 보통 5~10리터 정도를 먼저 뽑아낸 뒤 정량 확인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량 확인에 이어 주유기 내부를 확인했다. 주유기 내부를 조작해 리모컨 등으로 주유량을 조절하거나 가짜석유가 유입될 수 있는 다른 주유 배관 등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손 드릴을 들고 주유기 뚜껑을 열고 내부를 열심히 살폈지만 사실 뭐가 잘못된 건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B직원은 자주 다니다 보면 처음 직원들이 검사팀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가짜석유 취급 업소인지 알 수 있게 된다며 입사 당시 대부분이 화공학 전공자지만 단속을 하려면 전기 장치도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주유기도 특별한 이상이 없고 이번에는 가짜석유 단속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탱크 내부 내시경 탐색을 실시했다. 비밀탱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내시경을 탱크 내부에 넣어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내시경으로 탱크 내부를 확인하는 것도 요령이 필요했다. 신참 C직원과 기자는 B직원의 지시에 따라 내시경을 돌렸다, 뺐다를 반복했고 정상적인 탱크로 확인되자 작업을 마쳤다. B직원은 마지막으로 점검 사항에 대한 결과와 석유제품 판매 시 유의사항 등을 주유소 점장에게 설명하고 확인 사인을 받았다. 검사에 소요된 시간은 1시간여 남짓, 기자가 없었다면 좀 더 빠르게 진행됐을 것이다. 이같이 3곳을 더 검사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B직원은 하루에 200km이상 운전하는 경우가 많다며 평택에서 검사하다가 소비자 신고가 들어오면 서울이나 여주, 이천 같은 지역으로 이동하는 돌발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고 말했다. 검사 차량을 타고 안산으로 이동하는데 차안이 석유 냄새로 진동해 머리가 속도 메스껍고 머리도 아파져 왔다. 매일 이 차량을 타고 장거리 운행을 하는 직원들은 오죽하랴. 불평을 내 놓을 사이도 없이 다음 주유소를 향해 검사 차량은 내달리고 있었다. 다른 주유소에서도 검사 방식은 동일했다. 주유소 직원들과의 별다른 마찰도 없어 순조롭게 모든 검사가 진행됐다. 이들 주유소 직원들은 정품ㆍ정량의 석유제품을 판매하고 있어 석유관리원 직원들의 검사에 응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B직원은 검사할 때마다 가짜석유를 적발해 낼 수는 없지만 단속 활동을 벌이는 자체가 석유제품 판매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가짜석유 유통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최소의 인력으로 가짜석유 근절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석유관리원 직원들은 특별한 사명감으로 일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조차 얘기하지 않는다는 이들은 주ㆍ야는 기본이고 주말도 잊은 채 고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가끔 석유관리원에서 가짜석유 적발 보도자료를 보내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도 있었는데 이번 경험을 통해 좀 더 관심을 두고 이날의 경험을 되새기며 기사를 작성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일당백의 석유관리원 검사팀 직원들이 있기에 석유제품에 대한 의심의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졌다. 최원재기자 chwj74@kyeonggi.com

[1일 현장체험]인천항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 체험

8개월이라는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새내기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이한 치한을 취재하고자 입김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영하 20도의 얼음공장 안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환경미화원의 애환을 알아보고자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 쓰레기 분리수거 차량 뒤에 위태롭게 매달려 보기도 했다. 화재 현장 등 각종 사건사고 현장에 나가는 것은 이제 일상생활에 가깝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은 사회 문제를 눈으로 확인하고, 간적접으로 알아보고자 했던 체험에 불과했다. 그 일을 직접 체험하고 느껴봤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 체험 삶의 현장(?)은 앞으로 기자 생활을 이어가면서 쉽게 경험하지 못할 정도로 독특하고,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그 무엇인가를 찾아서 해보고 싶었다. 원양어선 체험, 제주도 해녀 체험 등 온갖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때, 문득 신문에서 하나의 기계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인천항에 접항한 배에서 컨테이너를 옮기는 거대한 기계, 바로 컨테이너(갠트리) 크레인이었다. 태어난 이후 줄곧 인천에서 자랐고, 인천항운노동조합 노동자들이 40여 년간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설립한 인항고등학교를 졸업했기에 인천항에서 해볼 수 있는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 체험은 그 어떠한 일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수십m 상공에서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극한의 체험을 기대했다. 체험일 오후 3시께 인천 남항에 있는 선광 인천컨테이너터미널. 이곳까지 가는 길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대형 화물트럭과 트레일러가 가득 메우고 있어 마치 트럭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아침 내내 자욱한 안갯속에 배들이 입항하지 못했던 컨테이너터미널은 오후부터 안개가 걷히면서 항만 특유의 분주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컨테이너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진 긴장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여객터미널 등 일부 시설을 제외하고는 항만 자체가 보안시설로 구분돼 컨테이너터미널 입구부터 경비원의 경계가 삼엄했다. 다행히 인천항만공사와 ㈜선광 측에 미리 취재와 촬영 협조를 구해 간단한 신원확인 후 바로 출입증을 받을 수 있었다. 순조롭게 컨테이너터미널에 들어온 이후 ㈜선광 운영팀의 성호용 부장을 만나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의 체험 일정을 상의했다. 당장에라도 부두까지 뛰어나가 컨테이너 크레인에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입항 예정이던 선박의 엔진이 고장 나 하역작업이 연기된 탓에 가장 먼저 체험한 것은 크레인 기사의 휴게실이었다. 하역작업을 할 선박의 입항이 연기됐다면,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들도 배가 입항할 때까지 휴게실에서 쉬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들어갔다. 컨테이너 크레인을 이용한 하역작업은 작은 실수가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들의 휴식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휴게실에서 만난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 김재천 씨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반겨줬다. 김씨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략적인 컨테이너 크레인 구조와 운전할 때 주의점 등을 설명했다. 미리 인터넷을 이용해 어느 정도 공부를 해뒀지만, 수박 겉핥기에 불과해 김씨의 설명 중 태반을 이해도 하지 못했다. 용어 대부분이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는 전문용어이기 때문이다. 설명을 듣는 내내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자, 김씨는 차라리 직접 크레인을 보고, 하나둘씩 설명을 해드릴게요.라며 어차피 배 들어오려면 시간이 더 걸릴 듯하니, 미리 크레인에 올라가 봅시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수십 m 상공으로 올라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컨테이너 크레인이 설치된 부둣가까지 가는 길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많은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외국으로 밀항하려는 조직폭력배와 이를 쫓는 열혈 강력계 형사의 멋진 액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나 컨테이너 숲을 지나자마자 등장한 컨테이너 크레인의 압도적인 모습에 사로잡혀 잡생각은 말끔히 지워졌다. 뉴스에서 매번 경상수지, 무역흑자적자 등을 얘기하며 배경으로 나오던 컨테이너 크레인의 실제 규모는 크다 못해 웅장하기까지 했다. 김씨의 뒤를 따라 컨테이너 크레인으로 올라가는 동안 시종일관 어우라는 감탄사만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현기증이 났고, 점점 바람도 거세져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체험을 포기한다고 말한 뒤 주저앉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씨는 이러한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수년째 크레인에 올라가고 있지만, 저 역시 아직도 올라갈 때마다 무서워요.라고 위로해 주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올라간 뒤에는 운전실이 있는 캐빈(Cabin)까지 이어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었다. 캐빈은 3평 정도의 규모로 생각보다 넓었다. 건설 현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타워 크레인의 운전실은 기사 한두 명이 들어갈 정도지만, 컨테이너 크레인의 캐빈은 4명 이상이 들어가도 괜찮을 만큼 넉넉했다. 그러나 문제는 멀미였다. 컨테이너를 집어 올리는 스프레더(Spreader) 장치가 캐빈 아래로 연결돼 있어 운전석 아래는 땅바닥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로 돼 있었다. 순간 아찔함에 현기증과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앞만 본 채 애써 30m 이상을 올라왔더니, 땅바닥이 내려다보이는 운전석이 대신해 큰 두려움을 선사했다. 당장에라도 내려가고 싶었지만, 저 멀리 예선(예인선) 2대에 이끌려 입항하고 있는 7천t급 화물선박을 보면서 돌이키기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선의 힘으로 접항에 성공한 선박에 사람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정박부터 검역까지 모든 작업이 분업화돼 순식간에 진행됐고, 컨테이너 하역작업에 앞서 안전조회가 열렸다. 작은 사고에도 사람이 크게 다칠 수 있는 컨테이너 하역작업이기에 안전수칙을 다시 체크하는 안전조회는 시종일관 엄숙한 분위기였다. 안전조회가 끝난 뒤 컨테이너 크레인 위로 길게 뻗은 28m의 붐(Boom)을 선박 위로 천천히 내렸다. 캐빈과 스프레더가 앞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레인이 설치된 붐은 선박의 마스트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위를 향해 접어뒀다가 선박이 접항한 이후에 다시 내린다. 붐이 길게 수평을 그리자 캐빈과 스프레더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전석 양쪽에 작은 레버를 조작해가며 컨테이너를 지상으로 옮겨갔다. 컨테이너의 무게와 풍향, 선박의 기울기 등이 표시된 계기판과 스프레더를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매우 섬세한 작업이 이뤄졌다. 아주 간단한 조작 외에는 전문 기사인 김씨가 모든 작업을 대신했지만, 나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됐다. 그제야 캐빈에 에어컨이 왜 설치돼 있는지 이해가 갔다. 김씨는 한겨울에도 한창 작업을 하다 보면, 식은땀 때문에 덥다고 느껴질 정도라며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는 단순히 경력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차분한 성격까지 요하는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캐빈은 조작에 맞춰 수백 번 앞뒤, 좌우로 움직였고, 스프레더도 컨테이너를 집었다 놓았다 셀 수 없이 위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작업이 세 시간째 이어지면서 멀미도 어느새 씻은 듯 사라졌고, 선박에 가득 쌓여 있던 컨테이너도 모두 지상으로 옮겨졌다. 풋내기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가 아무 사고 없이 일을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작업을 끝내고 내려온 지상은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컨테이너 크레인 기사 체험을 도와준 김씨는 작업이 끝났지만, 여전히 긴장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수년간 같은 작업을 해왔을 그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인듯했다. 그러나 절대 헛된 긴장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컨테이너 크레인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그 사람의 실수 여하에 따라 대형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컨테이너터미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하역작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긴장으로 시작해 작업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집중과 긴장감을 이어간다. 그들의 긴장은 오히려 일에 집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건강한 기운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긴장하는 만큼 사고 없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게 항만 노동자들이라는 김씨의 말을 계속 되새겨 본다. 김민기자 suein84@kyeonggi.com 사진= 장용준기자 jyjun@kyeonggi.com

[1일 현장체험]안양 경기남부아동일시보호소

아기를 마지막으로 안아본 게 언제였지?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분유를 탔던 것보단 입에 몰래 털어 넣었던 기억이 먼저 스쳤다. 똥 기저귀는 갈아봤던가, 목욕시키기는? 머리를 굴려봤자 답이 나오지 않아 그만뒀다. 하루 동안의 직업체험으로 아기를 보기로 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본다는 점이다. 많이 울거나, 손을 타거나. 버려지고 학대받은 아이들은 조금은 다를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아동학대가 아이들에게 이렇게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나하는 나름의 메시지를 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잘 웃고, 잘 먹고, 장난도 잘 쳤다. 일반 아이들과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다.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창피해졌다. 2월 마지막 주, 안양에 있는 경기남부아동일시보호소를 찾았다. 열흘 전 아동학대 취재차 찾았던 기관이었지만 느낌이 사뭇 달랐다. 유기사건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취재차 방문해 아이들도 만났었지만, 단순한 취재에서 벗어나 온 종일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체험은 그 마음가짐부터 다소의 불안감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렇지만 닥치면 하게 돼있다는 평소의 신념(?)에 따라 일단 무작정 들어섰다. 오전 9시. 보호소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으로, 사회복지사들이 출근하고 교대하느라 분주했다. 경기남부아동일시보호소는 경기지역 아동일시보호소 두 곳 중 한 곳으로 유기, 실종, 학대받은 아동을 3개월 이내로 보호, 양육한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부터 초등학생까지 현재 54명이 입소해있으며 직원 29명 중 조리와 청소를 담당자를 뺀 27명이 사회복지사로 전문적인 보살핌을 제공한다. 대기실에서 20여 분 간 기다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동학대 취재 당시 현장에서 느끼는 갖가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줬던 유복순 소장이었다. 유 소장은 보호소가 개소구성원으로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본 지 24년째에 접어든 베테랑이지만 다소 엄한 타입이었다. 저희 선생님들과 똑같이 시킬 거에요 인사말보다 먼저 날아드는 엄포에 몸이 움찔했다. 유 소장은 신생아부터 돌이 안된 아이들을 돌보는 영아방으로 안내했다. 미리 준비해 온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질끈 묶고 영아반으로 향했다.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양말 바람으로 영아반에 들어서려 하자 아이고, 큰일나요라는 꾸중이 들려왔다. 유 소장은 재빨리 실내화를 꺼내오며 복도에서는 반드시 실내화를 신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도의 먼지를 방 안으로 끌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바깥 외출이 없는 탓에 아이들이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에 위생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다소 머쓱했지만 아쉬운 대로 발바닥을 털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서 있자 유 소장은 선생님 하시는 일 똑같이 하게 해주세요라고 재차 강조한 후 자리를 떴다. 영아방 담당인 오선영 사회복지사가 아이를 안은 채 눈인사를 건넸다. 이곳에서 근무한 지 올해로 4년째 접어들었다는 오 복지사는 차분히 아이를 돌보면 된다고 간단히 말했다. 그러나, 자는 아이, 노는 아이, 분유 먹는 아이 등 오 복지사가 보살피는 아기들만 무려 7명이었다. 그때였다. 바닥에 엎드린 채 한 아이가 올려다보며 잘 좀 부탁할게라고 말하듯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네댓 평 남짓한 널찍한 방에 양쪽으로 나무로 된 아기 침대 4개씩이 놓여 있었고 방문과 마주한 창가 쪽에는 책상과 선반이 있었다. 침대마다 자리가 정해져 있는지, 윗편 벽에는 아기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입소일시가 적힌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책상 주변에 붙어 있는 각종 일지와 잔뜩 쌓인 서류, 분유와 기저귀, 보온병 등이 눈에 띄었다. 방문에 들어서 오른편 안쪽으로는 싱크대가 있는 작은 주방이 있었다. 간단한 설거지와 아기 목욕을 시키는 공간이었다. 분유 한 번 먹여보시겠어요? 오 복지사가 한 아기를 안겨주며 말했다. 조카는 한 명도 없고, 가장 어린 사촌 동생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기억을 재빨리 되감았다. 7년 전? 8년 전? 아기를 안아본 기억이 아득했다. 다치면 어쩌나 불안감을 알아채기나 하듯이 오 복지사가 아기 목이 꺾이지 않는 것만 유의하면 된다고 친절히 알려줬다. 9시30분이 되자 자원봉사를 하는 주부 3명이 들어왔다. 매일같이 아이들 목욕을 시키는 봉사자들로 오 복지사는 목욕만 도와줘도 수월하단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목욕은 끝내 내차례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목욕을 마친 아기들을 한 명씩 안아 들고 분유를 먹였다. 뽀송뽀송한 아기가 품에 안겨 가만히 쳐다봤다. 옆에선 목욕할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바닥에 깔아둔 담요 위에 배를 깔고 파닥거렸다.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 미소가 번졌다. 7명의 아기를 목욕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여. 간단한 청소까지 마친 자원봉사자가 돌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분유를 먹이고 있었다. 아기들은 예상외로 순하고, 잘 놀았지만 일곱 명은 역시 수월치 않았다. 한 아이가 자면 다른 한 아이는 바닥에서 헤엄을 쳤고, 한 아이가 분유를 먹으면 한 아이는 울음보를 터트렸다. 분주하진 않았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아기들의 하루일과가 빼곡히 적힌 일정표는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하루 수유만 6번, 기저귀는 한 명당 10번씩 갈아야 했다. 아기 두 명은 하루 두 번 이유식을 먹었다. 표는 안 나는 데 손가는 일이 많죠?. 아기들 돌보는 게 그래요 오 복지사가 웃으며 말했다. 11시30분. 오 복지사가 점심을 하러 가면서 혼자 남았다. 수유도 마쳤겠다, 여유가 생겨 잠시 쉬려는 찰나 생후 2주 된 남자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아기를 들어 올려 안고 토닥였다. 아기 냄새가 참 좋구나 하는 찰나 담요 위에서 배를 깔고 잘 놀던 아기 둘이 느닺없이 칭얼대기 시작했다. 잽싸게 안고 있던 아기를 침대에 누이고 우는 아이를 달래려는 찰나 나머지 다른 아이가 울음보를 터트렸다. 돌림노래 하듯 울어대는 아기들을 한 명씩 번갈아 안아 올리고, 나중엔 두 명을 한꺼번에 무릎에 앉혀 토닥였다. 열이 후끈 달아올랐다. 등에서는 식은땀까지 흐러 내렸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오 복지사가 식사를 일찍 마치고 돌아왔다. 너무나 반가웠다. 아기가 일제히 울 때 제일 힘들어요. 그렇다고 당황하면 더 힘들어지니까 차분히 하나하나 해야 해요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며 아기들을 이내 진정시킨 오 복지사가 여유 있게 말했다. 오후에는 침대청소가 이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청소로 마른 수건에 오일을 묻혀 목재 침대 구석구석을 닦았다. 둘이 하는 데도 30분이 넘게 걸렸다. 문득 아기들의 사연이 궁금해져 물어보니 오 복지사에게서는 잘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불륜, 미혼모, 장애부모 이렇게 아이들의 출생에 얽힌 사연을 하나씩 들어보면 안타깝지 않은 게 없어요. 무책임한 부모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요. 그런데 구체적인 사연을 알기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아기들에게 접목시키게 되거든요. 어느 순간 편견이나 선입관이 생기기도 하죠.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아기는 아기일 뿐이 잖아요.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 돌보느라 정신없었던 반나절이 떠올랐다. 장난감을 물고 빨고, 장난치면 웃고, 쉬를 하면 울고. 그렇지, 아기는 아기지 도대체 다른 뭘 기대했던 걸까, 조금 숙연해 졌다. 오 복지사는 24시간씩, 격일제로 근무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우는 새벽 시간에는 다소 지치지만 아기를 워낙 좋아하고, 생활리듬이 익숙해져 재밌다고 한다. 미혼모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요.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많이 들어오거든요. 좀 더 실질적인 성교육이 필요해요 오 복지사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후 5시, 7시간 동안의 일과를 마쳤다. 딱히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쉴 틈 없었던 하루였다. 머리가 몽롱하고 팔이 저려왔다.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의 의미가 이런 거였나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일과를 마치자 유 소장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오늘 돌본 아이들은 친부, 계부, 10대 엄마, 성매매 여성에게서 태어나거나 버려진 아이들이에요. 단순한 경제적 이유로 들어온 아이들은 없죠. 마냥 불쌍하다거나 가끔은 미운 감정이 들기도 해요. 오히려 반대로 신경이 더 쓰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과 감정이 쌓이다 보면 선입관이 되고 아이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게 되죠. 그래서 사연을 일일이 알리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봐줘야 하니까요 유 소장이 수십 년간 공고히 쌓아온 아이돌봄의 가치를 설명했다. 어른에 의해 생겨난 분쟁을 아이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있는 그대로 보는 건 어떤 걸까, 뜻밖의 고민을 안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성보경기자 boccum@kyeonggi.com

[현장체험 리포트]가천대길병원 중앙공급실

개인적으로 병원은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 들어 장시간 머물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래도 의료 담당인 탓에 본보 기자체험 타자로 지명되면서 개인적인 선입견도 바꿀 겸 가천대길병원 홍보팀에 진짜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체험일 오전 8시, 사전에 구체적인 언질도 없이 몸만 오라는 홍보팀 최보경 선생님(29)과 찾은 곳은 응급센터도, 재활병동도, 암센터도 아닌 중앙공급실. 최 선생님은 이곳이 병원의 속살이자 심장이에요라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병원 내부를 보고 싶다면 여기가 제격이라고 뒷걸음질 치는 내 팔을 이끌었다. 단순하게 병원에서 쓰는 물품을 세척해 다시 쓰는 줄만 알았는데, 거의 모든 물품과 도구, 장비 등이 이곳에서 수십가지의 멸균 과정을 거쳐 다시 병원 곳곳으로 공급된단다. 통제구역인 중앙공급실(CSR, Central Supply Room) 문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공급실을 총괄하는 이막달 수간호사(48)가 신발부터 수술용 가운, 헤어 가운까지 새로운 복장을 나에게 건넸다. 엉거주춤한 행동으로 생전 처음 수술용 가운을 입다 보니, 가운을 거꾸로 입은 내 모습을 보고 같이 교육을 받던 20대 초중반의 신입 간호사들이 꺄르르하며 한바탕 난리가 났다. 때아닌 굴욕을 한바탕 겪은 후 신입 간호사들과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후 처음 배정받은 일은 각 병동에서 사용한 물품을 다시 중앙공급실로 수거하는 작업이었다. 일반 병동으로 가기 위해 겨우 갈아입었던 수술용 가운을 벗고 13층, 8층, 6층 그렇게 수거 목록에 적힌 대로 병동을 차례대로 찾아갔다. 내 키만한 수거용 카트를 끌면서 각 병동에서 핀셋, 캔, 소독용 도구 등 수거 물품을 차곡차곡 수거함에 담아 수거목록과 일치 여부를 확인한 후에야 중앙공급실로 가져갈 수 있었다. 다른 직원과 내가 각각 수거한 물품을 가져간 곳은 빨간색 바닥이 인상적인 세척실. 바닥 색깔이 예쁘네요라고 물었더니 빨간색 바닥은 오염 구역, 파란색 바닥은 준 청결구역, 초록색 바닥은 청결구역으로 각 멸균 정도를 나타내며, 서로 분리돼 병균의 이동을 막는 곳이란다. 세척실에서는 오염된 구역이라며 균의 이동을 막기 위해 1회용 가운과 마스크, 장갑, 신발을 착용해야 했다. 대부분 물품은 대형 자동세척기가 해결해 주지만, 일부 캔이나 다른 물품들은 구석까지 깔끔하게 씻으려면 직접 해야 한다기에 집에서도 하지 않는 설거지를 했다. 특수용액으로 깔끔하게 하나하나 닦아 세척실 임무를 마치고 나니 이번에는 준 청결구역으로 이동해 포장 및 멸균 작업을 했다. 준청결구역에 들어가기 위해 또다시 수술용 가운 등으로 복장을 다시 갈아입고 손 세척과 눈 세척을 거친 뒤 들어갈 수 있었다. 스태플러, 호스, 마스크 등 세척과 건조 작업이 끝난 물품을 종류대로 나눠 멸균하기 위해 진공 포장 작업을 한 후 별도로 구분된 방으로 이동해 천으로 된 린넨류를 멸균하기 전에 곱게 개어 포장하는 일을 했다.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일은 포셉(Forcep)과 트레이(Tray)로 드레싱 세트를 포장하는 작업이었다. 각 병동에서 곧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포셉 1개와 트레이 1개를 묶어 특수 천으로 포장하고, 특수 테이프로 마무리하면 끝이다. 평균 10년 경력을 자랑하는 다른 간호사들은 1개 드레싱 세트를 포장하는데 10초 정도면 뚝딱 해냈지만, 초짜에다 손 큰 남자인 나는 왜 이리 일이 더딘건지 일이 손에 익지 않았다. 처음 몇 개는 합격 판정을 받았지만, 이내 작업이 반복되면서 버벅대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불합격 판정을 받아 다른 간호사가 다시 포장하는 민폐를 끼쳤다. 맞은 편에서 같이 포장하던 정미연 간호사(42)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잘해봐요라며 힘들면 나가서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해도 괜찮아요라며 능숙한 밀당(밀고 당기는) 솜씨로 나를 이끌었다. 작업이 계속되면서 느낀 의문점은 이곳에서 일하는 28명의 간호사와 직원이 모두 여성이란 점이다. 요즘은 남자 간호사도 많고, 일반 병원 직원 중에는 남자 직원도 많이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기대 이상의 답이 돌아왔다. 이전에는 남자 간호사나 직원들도 들어와서 같이 일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꼼꼼히 세척하고 포장해서 멸균 후 반출하는 이 세밀한 작업이 남자에게는 잘 안 맞나봐요. 덕분에 새로 단장한 이후 이곳을 찾은 남자는 기자님이 처음이에요. 그렇게 계속된 작업이 한 시간여 흐르는 동안 포장된 물품들은 바세린오일류는 건열멸균기, 린넨기구세트류캔류는 스팀멸균기, 내시경호흡기 관련 장비미세수술기구 등은 저온멸균기, 카메라PVC 및 거울 부착기구는 EO가스(Ethylene Oxide Gas) 멸균기로 나뉘어졌다. 특히 EO가스는 열과 습기에 약한 제품 멸균에 사용되는 인체에 유해한 가스로 EO가스 멸균실에는 일부 제한된 인원만 들어가 외부와 차단된 환경 속에서 멸균 작업이 이뤄진다는 말에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들어 저 것만은 시키지 말아줬으면 하고 기원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의 유무를 알기 위해 정기적으로 멸균검사를 진행하고, 각 물품마다 포장재 겉에 표식지를 붙여 멸균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멸균실을 거쳐 이동한 곳은 중앙공급실의 백미인 청정구역이다. 이 곳에서는 멸균된 물품을 각 수술실과 병동으로 반출되기 전까지 보관하는 곳이다. 멸균된 물품은 종류에 따라 2주에서 최대 6개월까지 이 곳에서 보관되며, 물품별로 유효기간은 포장지에 별도로 부착돼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보관실은 그야말로 특수설계된 구역으로 온도는 24도 이하, 습도는 35%~60%, 시간당 10회 이상 환기가 이뤄지며 각 보관대도 천장, 바닥, 벽과 일정 간격 떨어져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곳에서는 수간호사의 지시로 멸균된 물품을 조심스레 보관대에 놓는 작업을 했다. 앞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멸균된 제품이 내 손 위에 놓이자, 이 물품이 곧바로 환자에게 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혹시라도 바닥에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단순한 운반작업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수술 재료 반출실이었다. 이 곳에서는 수술 시 쓰이는 각종 도구를 수술실별 상황에 맞게 미리 포장해 별도의 가방으로 만들어준다. 이러한 수술재료 가방이 있음으로서 긴급 수술은 물론 하루 10건이 넘는 병원 내 각종 수술에 재빠르게 대처하고 수술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다. 다음 날 수술을 집도할 정형외과에서 수술재료 주문서가 미리 들어온 탓에 다른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어려운 의학용 영어를 해석해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10여 가지 물품을 가져와 겨우 가방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수간호사는 이렇게 과정별로 구역을 나눠 최첨단 과정을 진행하는 우리 병원의 중앙공급실은 전국에서 최고 수준이라며 우리가 없이는 모든 병원이 진료나 수술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막중한 각오로 중앙에서 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중앙공급실 작업을 체험하면서 무엇보다 신기했던 점은 이렇게 복잡한 과정이 분업화돼 누가 소리치거나 지시하지 않아도 톱니바퀴 돌듯이 작업이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가운을 벗고 중앙공급실을 나오면 든 생각은 이곳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흘리는 땀방울이 무엇보다 값지고 고귀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갖고 있던 허무맹랑한 생각 대신 안전하고 우수한 진료로 명성을 얻은 병원의 뒷편에는 이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에 병원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박용준기자 yjunsay@kyeonggi.com

[현장체험리포트]안양교도소 '교도관 24시'

당신이 작은 약속 하나만 지켜준다면 8년이 아니라 80년이라도 기다릴께요. 살인죄로 8년형을 선고받았던 장해진씨(55)에게 그의 아내가 건넨 말이다. 그 작은 약속은 바로 장씨가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장씨의 노력은 힘든 수형생활을 이겨내는 지름길이 됐다. 어느덧 안양교도소에서 생활을 한 지 5년째에 접어드는 그는 현재 수용자들 사이에서도, 교도관과의 관계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수형자가 됐다. 그는 천주교 거실에서 생활하며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 밤 9시 기도로 하루를 마감한다. 사회에서 기타를 치며 무명가수로 전전하다가 라이브카페를 운영한 것도 교도소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천주교 성가대장으로 지휘를 맡고 있으며, 매주 자살위험자 등의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노래교실에서 반주 등을 하며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작업반장은 교도관은 물론 동료 수형자로부터 신뢰로 얻은 또 하나의 훈장이다. 점심식사 후 오후 1시20분부터 시작된 고충처리반의 업무를 맡으면서 시작된 면담은 어느덧 30분이 훌쩍 넘었다. 그는 매순간이 소중하다는 것과 사람과 사람간에 믿음과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 곳에 와서 깨달았다며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기에 더 열심히 생활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교도소에 있는 가족 만남의 집에서 1박2일로 아내를 보고 싶은 소원이 있다고 얘기했고, 본 기자는 즉시 이같은 면담 내용을 정리해 그의 고충을 상급자에게 보고했다. 그의 바람이 이뤄진다면, 교도관으로서의 일일 체험에서 결과물을 내는 것이기에 더욱 간절히 기원해본다. 장씨의 얘기를 듣는 동안 오전내내 정신없이 역할을 부여받으며 몸으로 체험한 안양교도소 교도관으로서의 시간이 함께 겹치며, 불현듯 최근에 본 영화 7번방의 선물이 떠올랐다. 영화이기에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허구가 가미됐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것은 바로 휴머니즘이었다. 교도관과 수형자간의 끈끈한 교감, 수형자들간의 믿음, 수형자와 가족간의 사랑, 교도관들간의 신뢰와 배려 등 영화에서 감동을 준 휴머니즘은 안양교도소라는 현실에서도 보일듯 보이지 않게 체감됐다. 지난 13일 오전 9시 신입 교도관으로의 역할을 위해 안양교도소를 찾았다. 곧바로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교도관 모자와 교정이란 글자가 새겨진 점퍼을 입은 모습은 조금은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마음은 경건해지면서 발걸음도 달라졌다. 제복의 힘이다. 그렇게 향한 첫번째 행선지는 안양교도소장실. 유승만 안양교도소장에게 2013년 2월13일부로 경기일보 이명관 기자는 안양교도소 일일체험을 명받았습니다라는 신고를 시작으로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시작됐다. 첫 임무는 교도소 담장 밖에 있는 중간처우 시설인 소망의 집에서 생활하며 세차장 업무를 맡고 있는 중간처우 수형자들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5명이 한 조로 역할 분담을 통해 자동차 스팀세차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본 기자도 걸레를 들고 세차업무에 동참했다. 이 곳에서 만난 임영달씨(57)는 휴게소 운영과 관련해 사기죄로 입소한 경위와 수용생활 초기의 어려웠던 점, 오는 7월 출소를 앞두고 중간처우 대상자로 선정된 점 등의 이야기를 쉴새없이 풀어갔다. 교도소의 배려인 듯 싶다. 일을 마치고 난 뒤 본격적인 업무를 위해 교도소 담장 안으로 들어갈 차례가 됐다. 교도소 내 정문에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휴대전화와 담배를 맡기고 전산시스템에 등록했다. 교도소 내로 들어서자 건물을 잇는 복도 사이사이에는 철문이 이어졌고 그 곳을 지날때마다 끼익, 철커덩소리가 반복됐다. 교도소 내에서 맡은 업무는 종교 행사를 위해 이에 참가하는 수용자들을 계호하는 일이었다. 수용자들을 교회당 건물까지 이동하게 하고 불교 행사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했으며, 30여분간 진행된 행사가 끝난 뒤 일인당 두덩이의 떡을 나눠주기까지가 업무의 끝이었다. 이어 3명의 미결 소년수가 한자 인성교육을 받도록 인도한 뒤, 옆에서 수업에 참관했다. 경험이 많아보이는 한우동 강사는 아이들이 조금 지루해하자, 수업 중간에 하모니카를 꺼내 조용필의 친구여를 불었다. 너무나 구슬픈 가락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짖?은 표정으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던 한 소년수의 눈빛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연주가 끝날 무렵에는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소년수는 밖에 있는 친구들이 생각나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며 연신 큰 박수를 쳤다. 긴장을 해서인지 배가 고프던 순간 점심시간이 왔다. 그러나 식사시간은 30분에 불과했다. 4명이 교대로 식사를 해야하기 때문으로, 점심시간은 30분씩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까지였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교대를 위해 정신없이 간 곳은 수용동. 건강이 안 좋은 수용자들이 있는 2동 수용동에서는 식사를 마친 수용자들이 방 안에서 신문과 TV를 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방 안 한켠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모습도 보였다. 20개 가량의 방이 이어진 치료거실의 방을 한 차례 둘러보고 인원체크 등 점검을 마쳤다. 이어 조사ㆍ징벌ㆍ독거거실을 근무를 명받고 갔지만, 1963년에 준공된 안양교도소의 노후된 시설이 여실히 드러났다. 독방의 길이는 175㎝에 불과했다. 빈 방을 찾아가 누워봤지만 똑바로 누울 수 조차 없어 쪼그려 옆으로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옆 방에 있던 한 수용자가 안양시랑 무슨 소송을 한다나, 교도소에서 증개축을 하려고 하는데 시가 허가를 안내준대라며 그래도 우리도 인권이 있는데라고 안타까워했다. 이후 도자기 직업훈련장과 원예작업장, 자동차부품 생산작업장 등에서 업무를 맡아 일하다보니 어느새 작업 마감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수용자들의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가슴 한켠에서는 웬지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까지도 세인들이 거부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교도소에서의 정신없는 하루는, 본 기자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줬다. 이 곳이야말로 가장 끈끈한 휴머니즘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이명관기자 mklee@kyeonggi.com

[현장체험 리포트]푸드뱅크&푸드마켓

해누리 푸드마켓. 별 생각 없이 보면 마켓이라는 표현 탓에 골목이나 도로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마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994-1번지에 위치한 이곳 해누리푸드마켓은 나누는 사람의 배려와 받는 사람의 행복이 어우러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뿜어지는 온정으로 추운 날씨를 녹이고 있었다. ■못 팔게 된 빵과 떡, 누군가에게는 일용할 양식 6일 오전 9시. 푸드뱅크 및 푸드마켓 시설 종사자로 일일체험을 하기로 한 기자는 시간 맞춰 현장을 방문했다. 직원들과 인사하기가 무섭게 재빨리 푸드뱅크 트럭에 탑승해 음식물 수거에 나섰다. 이날 기자와 함께 제과점과 떡 가게를 돌며 음식을 수거하기로 한 동행자는 수원 우만종합사회복지관 소속 정재현 사회복지사(30)로, 3년 전 이곳에서 사회복지사로 첫 근무를 시작한 이후 줄곧 업무를 담당해 온 베테랑이다. 오전에는 정 복지사와 함께 사전에 푸드뱅크에 음식물 방문을 요청했던 수원시 팔달구와 영통구 내 위치한 제과점과 떡집 등을 돌며 음식물을 거둬들이는 업무가 주어졌다. 일일체험을 시작하기 전 기부되는 식품의 양이 얼마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했던 우려는 방문 리스트를 보는 순간 기우로 전락했다. 이날 오전에 수거를 해야 하는 업체만 20곳에 달할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우만동에 있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이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은 푸드뱅크 트럭이 주차하는 모습을 유리벽 너머로 보고 기자가 상점으로 들어가자마자 항상 그래 왔다는 듯이 기부할 빵이 쌓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아르바이트생들이 가리킨 빵 상자에는 어제 미처 다 팔지 못한 빵과 케익이 포장된 채 담겨 있었다. 우만동 일대에 이어 다음은 영통동 일대였다. 영통동에 있는 하이몬드 제과점은 대기업 중심의 제과점 틈바구니에서 굳건히 살아남아 운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 복지사는 다른 어떤 곳의 빵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빵의 맛이 가장 좋다고 귀띔했다. 어제 재고된 빵이 없자 방금 구워낸 빵을 싸주면서 기부에 보태겠다는 업주 이세옥씨(47)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더 훌륭한 일을 하는 분들도 많은데 자신이 할 수 없다며 끝내 사양한 채 맛보라며 따뜻한 소보루빵만을 건넸다. 인근에 있는 프랜차이즈 떡 가게의 점주 김도현씨(50)는 3년 전 이곳에 가게를 내기 전부터 이미 푸드뱅크에 음식을 기부해 왔던 열성 기부자였다. 음식 기부를 하는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김씨는 갓 뽑아낸 커피와 쌍화차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김씨는 밀려 있는 주문과 매일 생산해야 하는 분량 때문에 바쁜 나머지 오늘 생산한 떡을 기부하지 못하고 전날 생산한 떡을 기부하는 것이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된다면서 하지만 이렇게 재고라도 기부를 한다는 것이 생활의 활력소와 행복의 조건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음식 수거 막바지는 경기도청 주변에 있는 수원역 일대 제과점이 대상이었다. 평소 기자가 가끔 방문해 빵이나 케익을 샀던 제과점도 푸드뱅크에 기부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날 기부된 음식은 모두 법인세법시행령 제19조와 소득세법시행령 제55조에 의해 기탁물품 전액에 대해 100% 손비처리 또는 기부금 영수증이 발급됐으며, 이를 통해 기부자들은 연말정산 시 법률에 의해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고마움 이날의 오후 일정은 오전에 거둬들인 빵과 떡을 비롯해 대형업체들이 기부한 음료, 식료품 등을 사회복지시설에 배달하는 순서였다. 출발하기에 앞서 푸드마켓에 물품을 구매하러 찾아온 손님들을 맞는 업무도 맡아서 해봤다. 푸드마켓에는 다양한 기부자들이 기부한 곡식류, 음료, 레토르트 식품 등을 비롯해 의류, 제화류, 분유 등 다양한 생활물품이 배치돼 팔려나가고 있었다. 정부가 인정한 긴급지원대상자와 기초생활수급탈락자, 차상위 계층 등은 매주 월~금요일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 사이에 이곳을 방문해 회원으로 등록하면 지급되는 카드를 이용해 매월 1차례씩 일정량(약 2만5천원 가량)을 구매할 수 있다. 이날 푸드마켓을 찾은 손님 대부분은 50대 이상이었으며 푸드마켓 관리 업무를 하는 공익근무요원에게 상품 설명을 듣고 계산도 부탁하면서 연방 고마움을 표시했다. 지팡이를 짚고 어렵게 찾은 할머니와 구부정한 허리로 걸어오신 할머니는 푸드뱅크에 비닐봉지와 같은 포장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는지 보자기와 배낭, 손수레를 미리 준비해 챙겨 오셨다. 추운 날씨 속에 할머니들의 가시는 길이 걱정돼 마켓 밖까지 짐을 내다 드렸는데 조그마한 배려에조차 할머니들은 고마워 고마워라는 말을 연이어 건네셨다. 오후 2시부터는 기증된 음식을 사회복지시설에 전달하는 시간이었다. 음식을 전달하기에 앞서 분류작업이 이뤄졌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유통기한 초과 식품을 골라내기 위함이었다. 드문 경우지만 이따금 유통기한이 초과한 음식이 기부되면 인체에 큰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전달하기에 앞서 골라내는 작업은 필수였다. 선별 작업이 끝나자마자 저소득층이 밀집 주거하는 지역에 있는 시설을 돌면서 가가호호 전달될 수 있도록 시설의 사회복지사에게 물품을 배달했다. 푸드뱅크 트럭이 도착하자마자 반가운 기색에 짐 나르는 것을 돕는 봉사자들의 눈빛에서 주변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보였다. 지동에 위치한 한울마을 복지관의 수녀님의 눈에서, 화서동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엠마우스 복지관의 복지사의 눈에서 설을 앞두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음식이 생겨 다행이라는 안도와 감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평소같으면 무겁게 느껴졌을 음료나 식료품 상자가 이날따라 가볍게만 느껴졌던 것은 상자 안에 음식만 담긴 것이 아닌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마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과가 마무리될 즈음, 정 복지사에게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저소득층에게 제공될 선물꾸러미 160상자가 배달될 것이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설 명절을 앞두고 각 가정에서 따뜻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고기나 떡 등이 담긴 상자가 전달됐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퇴근도 미뤄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 짐을 나르는 복지사나 공익근무요원 중 누구 하나 불만을 내놓지 않았다. 명절 연휴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아 어떻게 전달을 해야 각 가정에서 빨리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할 뿐 자신들의 퇴근시간이 늦어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게 됐다고 해서 볼멘소리를 하지 않을까 했던 기자의 고민은 어리석은 걱정이었다. 단 하루 체험하는데 그쳐 큰 힘이 되진 못했지만 이날 일을 하는 시간 동안 마주쳤던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배려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기자의 가장 큰 역할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체험이 종료됐다. 푸드뱅크는 식품제조기업 또는 개인에게서 식품을 기탁받아 결식아동, 독거노인, 재가장애인, 무료급식소, 노숙자쉼터, 사회복지시설 등 소외계층에 개한 식품지원 복지서비스를 전달하는 식품나눔제도이다. 푸드뱅크 운동은 1967년 미국에서 Second Harvest(제2의 수확)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됐으며 현재는 캐나가(1981년), 프랑스(1984년), 독일(1986년), 유럽연합(1986년) 등 주로 사회복지 선진국을 중심으로 보편적 운동으로 발전했다. 경기도내에는 54개 푸드뱅크와 17개 푸드마켓이 운영되고 있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푸드뱅크를 통해 기탁된 기탁가액은 450억원이 넘었으며 6천여 시설과 8만5천명이 넘는 소외계층에 전달됐다. 경기도는 올해 전국 최초로 푸드뱅크마다 인건비를 연간 2천200만원 지원하는 등 활성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정진욱기자 panic82@kyeonggi.com

[현장체험 리포트]택배상자 옮기기... 앉았다 일어났다 30분만에... “아이고, 허리야~”

■ 새벽 5시. 택배 시작 따르릉 자명종 파장에 기자가 흔들리듯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새벽 5시였다. 전날의 비장함 보다는 귀찮음(?)이 살짝 앞섰다. 뒤척이다 보니 어느 덧 30분이 지났다. 대충 세면을 한 뒤 집을 나섰다. 40분을 달려 장대일 소장과 만나기로 한 화성시 안녕동 현대택배 수원지점 집배센터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전 6시 40분. 이른 시간임에도 센터 안은 진입도 힘들 만큼 택배차로 가득했다. 간신히 주차를 하고 장 소장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후 택배차량 사이로 장 소장이 나타났다. 그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기자는 하루 동안 입게 될 유니폼을 지급받고 바로 분류장으로 향했다. 분류장 안에는 20여명의 택배기사들이 흩어져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전 7시. 인사를 하려는 데 멀리서 경적이 울렸다. 탑차다. 구석구석 흩어져 있던 택배기사들은 담배를 끄고 하나 둘 차량 옆으로 모여들었다. 11톤 탑차의 옆문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사이 택배기사들은 30m가량 되는 조립식 컨베이어를 탑차 옆문에 연결했다. 도킹(?)에 성공하자 이윽고 짐칸에 실려 있던 천여 개의 택배 물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먹 하나 들어가기 힘들 만큼 빡빡했다. 컨베이어 위로 택배가 하나 둘 올랐다. 빠른 속도로 벨트가 돌자 택배기사의 손놀림도 바빠졌다. 여기서 할 일은 주소지를 보고 각자 구역에 맞는 택배를 골라내는 작업이다. 경험이 없는 기자에게는 라벨지에 깨알 같이 적힌 주소를 찾는 일조차 버거웠다. 기자가 무사통과 시킨 택배가 컨베이어 끝에 쌓일 무렵 결국 기자에게 다른 일이 떨어졌다. 탑차에서 택배를 내리는 하역작업이다. 물량이 워낙 많은 터라 이 작업도 수월하진 않았다. 앉았다 일어나기를 수차례. 삼십분도 채 지나지 않아 허리 감각이 점차 무뎌왔다. 그렇다고 해서 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 시간가량 아무 생각 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 덧 바닥을 보였다. 다음 탑차가 오기까지 휴식이 주어졌다. 잃어버린 허리 감각을 찾기 위해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장 소장이 다가왔다. 도착 2시간이 지나서야 오늘 하루 동행 할 택배기사 김대기 사장(41)을 소개받았다. 처음에는 사장이라는 호칭이 의례적인 인사 쯤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택배기사 대부분은 정말 사장이다. 법적으로 그들은 회사소속이 아닌 지입차주, 이른 바 특수고용 노동자기 때문이다. 김 씨는 매달 4050만원 소요되는 유류비는 물론 통신요금과 차량 유지비 모두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10년 째 몰고 다니는 1톤 탑차도 본인 차량이다. 심지어 차량에 회사 로고를 새길 때 드는 비용도 본인 부담이다. 기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홈쇼핑 화물을 실은 5톤 탑차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물량이 적어 직접 물건을 내린 뒤 각자 짐칸에 적재했다. 할당량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물량을 동선에 따라 요령껏 실어야 한다. 단순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기자가 도울 일도 제한적이었다. 그저 화물을 짐칸에 올려놓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오전 10시가 됐다. 첫 배송지는 공군아파트. 이곳은 단지와 단지 사이가 짧아 수월한 편에 속한다. 그래도 개당 35분가량 소요된다. 고객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다면 메모를 남기거나 경비실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부분 집에 있는 관계로 20여개를 1시간에 끝냈다. 그것도 잠시뿐 이곳 택배기사 사이에서 배송지옥으로 통하는 아이파크시티 단지 배송이 다가왔다. ■ 들어갈 수 없다구요? 아이파크는 단지만 6개에 달할 정도로 큰 규모의 아파트다. 문제는 안전 상 문제로 차량 진입이 불가능 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높이제한에 지하주차장도 이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사고와 분실위험이 따라도 인근 도로에 정차해 놓고 물건을 배송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곧 돈인 택배기사로서는 여간 골치가 아니다. 힘은 힘대로 들고 돈은 돈대로 벌지 못한다. 그나마 단지 안에 무인택배보관함이 있지만 이것마저 신청하지 않은 집이 많아 수 백m 떨어진 경비실을 왔다 갔다 뛰어다니기 바쁘다. 김 씨는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 대부분 범죄나 사고발생 등을 이유로 택배차량 진입을 막는 곳이 많은 데 이 문제로 부녀회장과 시비가 붙어 아예 퇴출 당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이날 이곳 배송물량은 50여개. 사는 사람이 많아 물량도 많다. 기자도 비교적 작고 가벼운 물건로 10개를 골라 직접 배송을 해봤다. 2단지 2XX호, 1XX호 제 집 드나들 듯 익숙한 김 씨와는 달리 초짜에게 이곳은 미로나 다름없다. 단지 곳곳에 있는 배치도를 이정표로 힘겹게 주소를 찾아갔다. 주인 허락 없이는 출입을 할 수 없어 입구에 설치된 인터폰으로 주인을 호출했다. 띠-띠-하는 부저가 울리자 주인 목소리가 들렸다. 김 아무개씨 맞죠? 택뱁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그러자 그냥 경비실에 맡겨줘요라는 말만 남기고 퉁명하게 인터폰을 끊었다. 택배기사라도 믿을 수 없다는 의미다. 슬슬 짜증이 밀려 왔다. 경비실은 또 어디지? 혼자 구시렁대며 두 블록이나 떨어진 경비실로 뛰어가 물건을 맡겼다. 이런 식으로 택배 10개를 배송하는 데 3시간 가까이 걸렸다. 시간은 점심을 훌쩍 넘겨 오후 2시를 가리켰다. 밥 달라며 요동치는 배를 달래고자 김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2단지 쪽문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김 씨 역시 고픈 배를 담배로 달래고 있었다. 담배가 다 타들어 갈 때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점심 전까지 배송을 부탁했는데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느냐는 항의 전화였다. 오늘 단지 물량이 많아서 조금 늦어졌습니다. 4XX호 맞으시죠. 10분만 기다려주, 지금 나가야 하니까 바로 갖다 주세요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김 씨의 한 숨소리가 단지를 맴돌았다. 그렇게 남은 물량까지 배송을 마치고 오후 3시쯤 돼서야 늦은 점심을 할 수 있었다. ■ 특수고용인 처우 4년째 요지부동 김 씨가 택배업에 뛰어든 것은 10년 전 일이다. 젊을 때는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복지사 일을 하기도 했다. 가정 형편 문제로 일을 그만 둘 때 까지만 해도 택배업은 일의 강도나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택배 초기에는 하루 80개를 배송해도 벌어드리는 수익은 220만원정도 됐어요. 지금은 물량이 배로 늘어도 그 만큼 못 법니다. 대형업체간 저가경쟁으로 애꿎은 택배기사만 나가떨어지고 있는 거죠 지난해 6월부터 김 씨 같은 택배기사에게도 산업재해가 적용됐지만, 다쳐도 돈 나올 구석 없는 이들에겐 빛 좋은 개살구다. 식사를 마치자 김 씨는 금세 트럭에 다시 탔다. 배송은 끝났지만 화물 수집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집을 끝내고 물건을 탑차에 다 태운 시각은 오후 5시. 출근한 지 11시간 만에 김 사장님의 일과가 끝났다. 그나마 물량이 적은 월요일이라 일찍 끝난 거다. 평소라면 밤 10시가 되도 마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렇게 일한 김 씨의 이날 일당은 4만2천원, 기자가 번 돈은 6천원도 되지 않는다. 그동안 대형 택배업체는 가격 덤핑을 통해 배송료를 낮췄고, 중소업체는 대형업체를 핑계로 현장 택배기사에게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지난 2009년에는 이 같은 현실을 고발코자 한 택배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현재 택배업계는 사상최대 물동량 실적을 올렸다. 그럼에도 택배 노동자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박광수기자 ksthink 사진=추상철기자 scchoo@kyeonggi.com

[현장체험 리포트]일일 집배원 체험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눈이 많이 오던 날 할머니 댁 근처 언덕에서 만난 아저씨 한 분이 있었다. 비료 포대를 이용해 썰매를 타는 나에게 다가와 짚을 넣어주고 잘 타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리고는 할머니한테 편지 왔다고 이야기하고, 썰매 조심히 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서 오토바이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20년이 지나도록 따뜻함과 고마움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는 집배원 아저씨가 바로 그 주인공. 꼬맹이 시절 삼촌처럼, 동네 아저씨처럼 다가왔던 그분 때문인지 지금도 우체국입니다라며 우편물을 배달해주는 집배원을 만날 때면 남 같지가 않다. 이런 우연한 인연이 나의 발길을 우체국으로 끌어당겼다. 집배원 일일체험에 나서게 된 것. 집배원 아저씨를 고마워했던 초등학생이 집배원 이모로 변신하는 그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바쁘다 바빠! 일일 집배원이 되기 위해 찾은 수원우체국 집배실. 오전 8시도 되지 않았는데 집배실은 그야말로 사람 반, 우편물 반이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찰나 사모님, 거기 계시면 택배로 한 대 맞아요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저도 집배원이에요라는 대답에 분주하게 우편물을 나르던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됐다. 그 민망함(?)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때 마침 전날 통화했던 홍성혁 집배실장이 기자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줬다. 오늘의 근무지는 일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권선구 곡반정동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7팀에 배정돼 하루를 함께 할 정효진씨(38)를 만났다. 첫 만남은 서먹서먹했지만 7년차 베테랑인 그는 업무에 대해 자세히 알려줬다. 오늘의 첫 임무는 우편물과 작은 택배들을 번지수별로 나누는 것. 주소를 보고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소별로 잘 나눈 우편물을 산타할아버지가 들고 다닐법한 빨간 자루 4개에 잘 챙겨 담았다. 다행히 내 구역에는 일명 똥짐(사과박스 정도 되는 크기의 택배)이라 불리는 우편물이 없어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우편물을 엘리베이터에 싣고 지하에 도착한 순간 우와!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나 많은 오토바이를 한 자리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6679 번호판을 단 오토바이에 짐을 넣고 곡반정동으로 향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초보 집배원, 원룸촌에서 무너지다 곡반정동 503-1~527-5번지 하루 동안 내가 책임져야 할 구역이다. 늘 스치듯 지나갔던 이곳에 원룸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일반 우편물은 우편함에, 등기와 택배는 직접 수취인에게 전달했다. 원룸촌이라는 특징 때문인지 빈집이 3분의 2였다. 우체국입니다. 돌아오는 반응은 그런 사람 안 사는데요. 계단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한 것이 무색하게 주인을 만나지 못한 우편물은 상자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춥고, 다리가 아파왔다. 오토바이를 탈 줄 몰라 원룸촌을 쉼 없이 걸어다녔던 것. 오토바이를 못 탄다는 답답함 때문에 학창시절 좀 놀아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이런 잡생각도 잠시 위기를 맞닥뜨렸다. *블록 *로트? 이게 뭔가! 아직 도로명주소도 적응 못 한 새내기 집배원에게 너무나 가혹한 주소였다. 택지 개발 당시 부여됐던 블록ㆍ로트가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번지수에 도로명주소까지 총 3개 형식의 주소가 한꺼번에 사용되면서 집배 작업이 더욱 어려워졌다. 여기에 주소를 쓰다 만 반토막 주소 우편물까지 발견되면서 그야말로 멘붕(멘탈붕괴)이 왔다. 정씨는 내공이 쌓여 그거 저 집 거예요하며 주소가 제대로 적혀 있지도 않은 우편물을 정확하게 배달했지만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편물 보내기 전 주소 확인필수라는 말을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전하고 싶어진 순간이다. 또 주소가 있더라도 가건물인 경우에는 우편함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 등기도 아닌 우편물을 직접 배달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3분이면 끝날 일이 15분이나 걸렸다. 점점 다리 힘도 풀려 갔다. 우체국을 나선 지 4시간여가 지났을까. 점심시간이다. 사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곡반정동 구역 집배원 6명이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다. 정씨와 나는 배달지와 정반대 방향인 밥집으로 향했다. 끼니는 5천원에 해결해야 했다. 점심식비 지원이 5천원 밖에 되지 않았던 것. 멀리까지 이동해서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밥을 먹는 동안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갓 한 달 된 신입 집배원부터 10년이 다 돼가는 능력자까지 고통과 보람이라는 양면성을 모두 갖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집배원이 왜 힘든지,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왜 점점 줄어드는지 십분 깨닫게 됐다. ■아파트 우편배달은 양반이더라 점심 식사 이후 쉬는 시간도 없이 원룸촌 배달을 후다닥 마치고 옆 동네인 아이파크시티 3단지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는 동별로 들어가 우편물을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따뜻해서 좋았다는 말이 내 진심인 것 같다. 15개 동을 정씨와 함께 순서대로 돌았다.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어 정씨는 등기와 택배를 전달하러 각 가정으로, 나는 1층 우편함에서 호수별로 우편물을 꽂았다. 설이 다가오긴 했나 보다. 각 식품사, 홈쇼핑, 대형마트 등에서 보낸 설 선물 판매와 관련된 카탈로그가 무척 많았다. 다음 주가 되면 우편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 집배실에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을 일주일 먼저 실감할 수 있었다. 원룸촌보다 일은 백배, 천배 쉬웠지만 말 못 할 고통도 있었다. 급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점심시간 때 상가 건물, 주민센터를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차마 갈 수가 없었다. 일일 사수였던 정씨가 화장실을 가는 걸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이다. 온종일 밖에서 일하는 집배원들의 생리현상 해결도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던가. 난 참을 인을 3천번쯤 그리며 바지에 실례하는 실수를 막았다. 그렇게 위태했던, 아찔했던 집배 업무가 드디어 끝났다. 작별 인사를 하는 마지막 순간 하루 동안 정든 집배원들과의 헤어짐이, 씨름을 했던 우편물과의 헤어짐이 못내 시원섭섭했다. 그렇게 일일 집배원 이모의 하루도 막을 내렸다. 사실 기자라는 본업으로 돌아온 다음 날 등이 가려워도 긁을 수가 없었다. 우편물을 들고 있었던 왼쪽 팔에 알이 배겨 팔이 올라가지 않았던 것. 하루 일한 게 이 정도인데 주말 근무는 물론 여름 휴가마저도 가기 어려운 집배원들의 몸 상태는 오죽할까. 스마트폰이 있어서, 휴대전화가 있어서 줄었으리라 생각했던 우편물은 여전히 많았다. 역시나 기계가 사람의 자리를 전부를 대신하지 못했다. 소식을 가득 담은 그들의 오토바이는 눈이 오는 오늘도, 비가 오는 내일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모레도 우편물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거침없이 달려간다. 우편물을 받았을 때 마음을 전달하는 다리가 돼 준 집배원들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전할 줄 아는 이들이 많아지길 간절히 바라본다. 장혜준 기자 wshj222@kyeonggi.com 사진=전형민기자 hmjeon@kyeonggi.com

[현장체험 리포트]계사년 맞이 뱀 사육체험

그를 만나기로 한 아침. 극도의 긴장과 흥분으로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솔직히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 그가 차가울까봐, 나를 경계할까봐 만남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대면한 뒤에는 부드럽고 촉촉한 살결(?)의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름 아닌 뱀이다. 뱀은 성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동물이다. 성경에서 뱀은 이브를 유혹해 금단의 열매를 따 먹게 함으로써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특히 여자들은 뱀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2년 만에 부활한 경기일보 기자체험의 첫 타자로 지명되면서 고민 끝에 계사년(癸巳年) 맞이 뱀 사육 체험을 결정하기까지 나도 그랬다. 생각만 해도 징그러워 소름이 끼치는데 감히 어떻게 사육을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날 만큼은 여자이기 이전에 기자여야 했다. 뱀을 찾아 도착한 곳은 용인 에버랜드의 아프리카관. 알록달록한 사육복으로 갈아입은 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여우로 알려진 사막여우와 사막의 보초병 미어캣 등 귀여운 동물들과 계절을 무색케 하는 나비들이 가득찬 공간을 지나고 나니 뱀의 공간이 나타났다. 동물이 좋아 사육사가 됐다는 5년 경력의 강혜윤 사육사(30)의 지도 하에 드디어 뱀 사육사로서의 하루가 시작됐다. 물지는 않죠?라는 우문에 물 수도 있죠라는 현답이 돌아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보살펴야 할 알비노 버마비단구렁이와 볼파이톤, 보아뱀 등 3종류의 뱀들이 독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신 먹잇감을 질식시켜 삼킬 정도로 또아리를 트는 힘이 어마어마하단다. 입 쪽에 야콥슨 기관이라는 감지기관이 있어서 열로 주변을 파악하니까 머리쪽만 조심하면 괜찮을 거에요. 3종류 총 9마리의 뱀이 특별전시관에서 관람객들을 맞는데 이들의 컨디션을 확인하고 상태에 따라 방사를 하는 것도 사육사의 몫이었다. 뱀들은 한달 주기로 탈피와 성장을 반복하는데, 먹이를 먹고 난 뒤 일주일 후 배설을 하고 탈피 전 블루단계(에너지를 끌어올려 탈피를 준비하면서 눈색이 탁해지는 시기)를 거쳐 허물을 벗는데까지 걸리는 과정을 살피고 기록하는 것도 뱀 사육에서 매일 필요한 과정이다. 또 뱀 사육에서 가장 중요한 온도와 습도를 맞춰주기 위해 자외선을 공급해주는 UV전등과 열을 공급하는 전등을 수시로 확인하고 분무기로 물도 뿌려줘야 한다. 강 사육사로부터 간단한 주의사항을 들은 뒤에 신입의 주요임무 중 하나인 청소부터 시작했다. 뱀이 방사되는 관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자연의 분위기를 내도록 넣어 두었던 깔집을 긁어내고, 부드러운 새 나무껍질을 깔고, 걸레를 사용해 벽면과 유리도 닦으며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내 방을 청소한게 언제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열심히 청소를 마친 뒤에는 사육장에 있는 뱀을 모시러 갔다. 가장 먼저 방사할 뱀은 알비노 버마비단구렁이. 길이가 2m가 넘고 무게는 20㎏이 넘는 거대한 뱀이다. 이 거대한 뱀의 이름은 슬기이고, 나이는 10살쯤 됐는데 한달에 한번쯤 3㎏ 정도를 먹는다고 한다. 주로 토끼나 기니피그 등을 주면 질식시켜서 한번에 삼킨다고 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먹이를 주는 때가 아니라 그 광경을 볼 수는 없었다.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먹이를 통채로 삼킬 수 있는 이유는 아랫턱이 양옆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멜라닌 색소가 없는 알비노 종류는 눈도 빨갛다. 몸통에 비해 작은 얼굴에 눈도 작아 붉은 눈을 마주치니 위협적이다. 그나마 몸통은 상큼한 노란색이어서 두려움을 상쇄해 줬지만 아무래도 슬기의 몸에 손을 대기는 무서웠다. 몇번 꼬리쪽이라도 잡아보려 애쓰다 시간만 낭비했고, 결국 목도리 감듯 목에 둘러 방사장으로 빠져나가는 강 사육사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강 사육사는 슬기야, 가자고 뱀에게 말까지 걸었다. 바라보는 눈빛이 애인을 보듯 다정하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전시관에 들어간 슬기는 이내 스르륵 미끄러지며 새로운 환경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배와 몸통은 땅에 붙여둔 채 머리쪽만 높이 쳐들고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다. 이어 슬기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볼파이톤과 보아뱀까지 총 3마리를 옮겨 방사하며 뱀을 만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데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뱀의 가죽이 매우 부드럽고 촉촉했다.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뱀을 닦아줄 때는 뱀이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누군가와 친해지는데 가장 빠른 방법은 스킨십이 최고다. 꿈틀거리며 내 팔목을 휘어감던 뱀의 결을 따라 쓸어내리자 슬기는 온순한 모습으로 가만히 목욕을 즐겼다. 몇번 반복하고 나니 친근감이 생기고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 매력도 느껴졌다. 급기야 나중에는 아기 다루듯 뱀을 안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강 사육사에게 물어보니 뱀이 사육사를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이동하거나 닦아주거나 만져줄 때 사육사 특유의 손맛을 기억하기는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이런 매력 때문에 뱀 사육 마니아층이 다수 존재한다고. 오후가 되니 뱀을 담당하는 사육사들의 일정은 더욱 바빠져 나도 덩달아 바빠졌다. 계사년을 맞아 내장객들에게 사육사가 직접 들려주는 상서로운 뱀 이야기라는 스토리텔링을 하루 3차례 직접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일인데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 찾아온 가족단위 관람객이 꽤 많았다. 사육사는 이들에게 사악함, 파괴 등 뱀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깨고 원래 뱀이 지혜와 다산, 풍요를 상징한다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특성 때문에 재생과 불멸을 상징하기도 하며 강한 생존력을 졌다는 점을 알려주고, 독의 유무에 따라 구분되는 독사와 구렁이의 생활방식 차이도 설명했다. 또 구렁이과에 남아있는 퇴화된 발톱을 보여주며 뱀에 발이 있었다는 것과 냉혈동물이라고 알려진 뱀이 사실은 변온동물이라 주변 온도에 따라 따뜻해지기도 한다는 설명이었다. 이같은 스토리텔링에 어린이 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귀를 기울이며 뱀에 대한 인식을 바꿔갈 무렵, 포토타임이 시작됐다. 한명씩 나와 뱀을 만져보거나 가까이서 사진을 찍으며 뱀과의 친밀감을 높이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사육사로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질문하자 강 사육사는 동물도 생명인데 손님들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는 등 소중히 대하지 않을 때가 많아 속상하다며 뱀 뿐만 아니라 동물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뱀 사육 체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허물이었다. 수차례 탈피하며 성장하는 뱀처럼 계사년을 맞은 우리의 한해도 한꺼풀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지현기자 jh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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