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시간 사이 놓인 서양미술의 장면들…'수련과 샹들리에' [전시리뷰]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와 중국 출신의 사회 비평적 현대예술가 아이 웨이웨이(1957~)가 100년을 뛰어넘어 한 공간에서 만났다. 지난 10월 2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원형전시실에서 진행중인 MMCA 해외 명작 ‘수련과 샹들리에’는 시대적으로 양 끝에 있는 두 작품 사이에 국제미술 소장품 44점을 엄선해 전시하고 있다. 천장에 검은색 샹들리에가 달려있다. 무광의 검은색은 빛을 발산하는 대신 흡수하고 있지만 언뜻 보기엔 평범한 조명 기구와 다름 없다. 가까이 갈수록 그 실체가 드러난다. 척추, 두개골, 손가락 뼈 마디, 심장과 콩팥 등 인간과 동물의 장기로 구성된 이 물체는 샹들리에 모양을 한 죽음의 상징이다. 중국 출신의 현대예술가로 사진, 영상, 건축, 회화, 공공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비판적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아이 웨이웨이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작업한 ‘검은 샹들리에’는 빛을 밝히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샹들리에를 통해 화려한 삶 이면에 공존하는 죽음을 암시한다. 원형 전시실 내벽 너머엔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이 배치돼 있다. 넓은 전시실을 벽으로 나눈 외딴 공간이 연못 같고 모네의 작품이 그 위에 떠 있는 수련 그 자체 같다.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이 작품을 위한 독립된 공간이 주는 한가로움이 ‘수련'과 ‘샹들리에’가 갖는 100년의 시대적 간격만큼 아득하다. 가장 상반되는 전시 제목의 두 작품 외에도 미국의 대표적인 개념미술가 바바라 크루거의 사진 ‘모욕하라, 비난하라’(2010)가 전시장 입구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하는 바바라 크루거 특유의 작업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날카로운 바늘이 눈을 찌르려는 순간은 담은 이미지 위에 '모욕하라 비난하라(Shame it, Blame it)는 문장을 배치했다. 이는 미디어와 시각적 이미지가 개인에게 가하는 위협과 폭력을 표현한 것으로 크루거의 문장은 온전한 진실과 고정관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풍만하고 둥근 형태, 과장된 비율의 신체 표현 등 독특한 스타일로 알려진 콜롬비아 출생의 페르난도 보테로(1932~2023)는 서구 중심의 미술사와 문화적 기준, 고정된 미적 기준에 대해 도전하며 다양성을 추구했다. 이번에 전시된 ‘춤추는 사람들’(2000)은 다양한 색의 조명이 비추는 실내에서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라틴댄스를 즐기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보테로 특유의 풍만한 인체 표현과 활기찬 분위기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이 지닌 열정을 느끼게 한다. 보테로는 춤, 음악, 놀이 등 다양한 삶의 형태를 화폭에 담아 자신의 배경인 라틴문화와 정서를 알리고자 했다. 이외에도 2021년 이건희컬렉션 수증을 통해 미술관에 소장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등 19~20세기 인상주의 대표 화가의 작품 16점과 국재 최초 미술품 물납제를 통해 소장된 중국 현대미술의 대표작가 쩡판즈의 ‘초상’(2007) 2점을 포함해 소장 이후 최초 공개작 4점 등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해외 거장 33명의 작품을 한 곳에 모았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특별한 주제나 연대기적 분류 대신 44점의 작품 한 점,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국제미술 소장품을 엄선해 마련한 전시”라며 “약 100년의 시간 사이에 놓인 서양미술의 장면들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2027년 1월 3일까지.

“장국영의 청춘, 두 나라 잇는 ‘자유찬가’” 연극 ‘굿모닝 홍콩’ [공연리뷰]

젊음은 짧지만, 마음이 살아 있는 한, 청춘은 끝나지 않는다. 반대로 젊음의 소중함과 찬란함을 알지 못하는 이는 그 나이에 상관없이 청춘이 지나간다. 만우절 날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나버린 홍콩 영화배우 장국영은 한때 국내 초·중학생부터 20~30대에게 ‘영웅’이자 ‘우상’이었다. 영원할 것 같던 그는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영화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한때 ‘미래의 도시’로, 누아르 액션 영화의 메카로 국내 젊은이들에게 ‘별도시’처럼 여겨졌던 도시는 1997년 중국에 반환되며 끝없는 내홍을 겪었다. 지금의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유’, ‘주권’, ‘민주주의’를 외치던 수많은 홍콩의 젊은이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편입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2025년 현재, 홍콩은 거대한 참사로 무거운 슬픔이 가라앉았다. 지난 29일 마지막 투어를 진행한 연극 ‘굿모닝 홍콩’의 무대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 이유다. 각기 다른 시대, 나라를 가로질러 청춘, 젊음, 자유 등 우리가 잊고 살았던 가치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작품은 만우절 날 떠난 한 스타처럼 웃음 속에서 가슴 아픈 역사와 동질감, 눈물을 흘리게 했다. 정동극장과 극단 명작옥수수밭이 공동 제작한 연극 ‘굿모닝 홍콩’이 11월 28~29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마지막 순회공연 무대에 올랐다. 객석은 다양한 세대, 국적으로 구성됐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모인 다양한 관객들은 두 시간 동안 함께 추억여행을 떠난 듯했다. 장국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장사모’ 회원들이 홍콩으로 그의 추모 영화를 찍으러 떠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은 어느새 그의 나이만큼 커버린 누군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10~20대 젊은 관객은 그 시절 홍콩, 장국영이 살던 시대를 궁금해했고 객석 중간중간 들려오는 홍콩어는 이날 자리에 자국의 이야기를 먼 타지에서 감상하기 위한 홍콩 관객들의 존재를 짐작하게 했다. 이번 무대는 안산문화예술의전당이 중장년층을 겨냥해 50~70세대의 굳어버린 감정선을 재미와 감동으로 다시 팽팽하게 들어 올린다는 ‘ASAC 리프팅’ 기획 가운데 하나였다. 기획 의도처럼 이날 중장년의 관객들은 곳곳에 ‘영웅본색’, ‘천녀유혼’,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등 명작들을 패러디한 장면에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특히 ‘영웅본색’에서 총상을 입은 자걸(장국영)이 마크(주윤발)와 함께 공중 전화박스를 향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딸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명장면을 패러디한 장면은 관객들을 웃음을 짓게 만들기 충분했다. 웃음은 때로 슬픔으로 바뀌었다. 1980~90년대,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불안했던 도시의 분위기는 거친 액션, 우정과 배신 등 누아르 홍콩 영화로 탄생했다. 웃음기 가득하던 객석은 현대의 홍콩과 겹치며 먹먹함으로 바뀌었다. 송환법에 반대하며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던 홍콩의 젊은이들은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도 우산을 쓰고 최루탄을 피하며 거리로 나섰다. 특히 ‘장사모’ 부회장의 처남이자 시위에는 가장 관심이 없어 보이던 유튜버 ‘기찬’이 잃어버린 나이키 운동화를 찾아 홍콩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주한 시위대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시위대 중 한 명이 피 묻은 기찬의 운동화를 다시 돌려주는 장면은 객석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연대’. 장국영의 추모 영화를 찍으러 왔다는 한국인 여행객과 한국 아이돌 노래를 함께 부르고 이번엔 ‘월량대표아적심’을 따라 부르는 모습은 그 언젠가 최루탄 연기 속에 행진했던 우리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장국영, 오랜 톱스타이자 ‘별’이 남긴 유산은 스크린에서 무대로 홍콩에서 한국으로 시대를 넘나들며 여운을 남겼다.

“미시의 조각,작은 감각이 관통한 사회” 경기도미술관 경기작가집중조명 ‘작은 것으로부터’ [전시리뷰]

‘인간’이란 존재는 나를 둘러싼 ‘사회’라는 거대한 철근 구조 속에 놓여있다. 반대로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물은 ‘개인’이라는 수많은 미시적 존재가 집합한 결과다. 하나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그를 둘러싼 구조를 살펴봐야 하고, 반대로 하나의 구조물이란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를 구성하는 철근 조각, 즉 각각의 개인을 들여다봐야 한다. 경기도미술관에서 지난 19일 개막한 2025 경기작가집중조명 전시 ‘작은 것으로부터’는 작은 것으로부터 이를 둘러싼 사회 구조와 제도, 시대를 읽어 나간다. ‘2025 경기작가집중조명’은 경기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중견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집중 조명하고자 경기문화재단의 ‘경기 시각예술 집중조명’ 사업과 협력으로 마련된 기획전이다.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 박혜수, 최수앙. 이 세 팀의 합은 ‘작은 감각’이란 공통점에서 출발한다. 그들의 작업 세계가 태동한 1990년대에 미술은 이념적 대의에서 벗어나 미시적 일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작은 것’은 단순한 물리적 크기나 대상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는 감각적 전략이 됐다. 관람객은 조각에서 출발한 작가들이 20여 년간 다양한 매체로 확장하며 갱신을 거듭한 모습을 살펴보며 비교하는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이질적 장면에서 가능성을 엿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하나의 갤러리에 들어선 듯한 공간이 펼쳐진다. 김나영&그레고리의 신작 15점과 킴킴 갤러리의 첫 공공미술관 전시 프로젝트다. 김나영과 그레고리 마스가 2008년 시작한 킴킴 갤러리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식의 예술 작업을 선보이는 창작 주체로 이번 전시에선 독일, 미국,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한국 등 다양한 국적의 43명의 작가의 작업물을 만나게 된다.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구조물은 신작 ‘사이코빌딩 No. V’(2025, 경기문화재단 제작 지원)이다. 연두색, 분홍색,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의 철근 구조물은 마치 거미줄처럼 지상에 다리를 내리고 서로 손과 손을 맞잡은 듯 상하좌우로 손을 뻗어나간다. 김나영 작가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질적 요소들이 한 공간에 공존하며 예상치 못한 의미의 탄생에 주목했다”고 설명한다. 하늘 높이 솟아 위태로운 공사장의 철근 구조물은 지상에 내려와 관람객의 시선과 맞닿는다. 작업에 쓰일 빨간색의 천 장갑, 페인트통, 물건을 싣고 날랐을 카트의 바퀴 등이 놓여있다. 그 위에 자리한 앙증맞은 모습의 강아지 인형 조형물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전시장 곳곳에는 다국적의 작가들이 참여한 ‘킴킴 갤러리: 트라우마 자랑’(2025, 경기문화재단 제작 지원)이 배치돼 있다. 그레고리 마스 작가는 “개인의 고통이 경쟁적으로 소비되고, 트라우마가 사회적 자본으로 활용되는 현상을 드러냈다”고 표현했다. ■ 박혜수, “당신이 꿈꾸는 나라는 무엇인가” 두 청년에게 던지는 질문 박혜수 작가는 ‘포기한 꿈’에 관해 물으며 발화되지 않은 미시적 감정과 구조화되지 않은 개인의 이야기를 수년간 수집하고 분석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선 그가 탈북민 50명과 한국인 3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시작해 10여년 간 이어지는 연작의 흐름 속 두 점의 대형 설치 신작을 선보인다. 작가의 작품은 예술과 사회가 교차하는 접면에 질문을 던지며 ‘나’를 이루는 구성요소에 대한 타인의 시각을 통해 다시 ‘나’와 ‘나’를 둘러싼 총체를 돌아보는 계기를 던진다. 그의 공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전시장 벽면을 차례로 비치는 서치라이트의 불빛에 눈을 가리게 된다. 탈북하는 누군가를 쫓아왔을 불빛은 관람객을 따라오며 그들의 감각을 경험하게 만든다. 그의 신작 ‘나라없는 사람 Ver. 25’(2025, 경기문화재단 제작 지원)는 벽화 앞 언덕을 이루는 분쇄 화폐와 두 종류의 모빌, 돌아다니며 목소리를 내는 확성기와 설문 벽으로 이뤄져 있다. 모빌에 매달린 스피커에선 6개의 서로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탈북민이 ‘가장 상처 받았던 말’에 관한 음성, 광장 집회의 수많은 혐오 연설이 뒤섞여있다. 그 앞에 자리한 분쇄 화폐로 이뤄진 언덕에는 이들 꿈꿨을 한국의 모습과 현실이 담겨있다. ‘풍요’를 꿈꾸며 이곳에 당도했지만, 자본 앞에 한계를 느꼈을 현실을 그려냈다. 작품 ‘지상낙원’(2025, 경기문화재단 제작 지원)에선 사막을 지나 탈북민이 꿈꾸는 낙원을 묘사한 벽화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탈북민은 남한을 ‘하늘의 별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남한 청년들은 그 별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현실이다”고 말한다. ■ 최수앙, 반투명함에서 총체를 읽다 최수앙은 신작(2025, 경기문화재단 제작 지원) ‘괴물원’과 ‘UFO’를 통해 인체의 조각을 해부하고 재조합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각각의 작품은 대퇴골이나 견갑골 등 신체의 주요 뼈들을 소재로 늑간극, 심장 근막, 전거근 등 피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근육의 형태들을 형태화하고 결합한 구조로 된 반투명 조각들이다. 어떤 신체의 조각은 빨간 꽃잎의 모양으로 펼쳐진 모습이 마치 귀 한쪽을 내밀고 관람객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새로운 생명력이 느껴진다. 마치 외계의 생명체가 사는 공간에 온 듯하다. 작가는 “화폭 안의 여러 요소가 어우러지며 자연이라는 하나의 총체를 형상화하는 초충도에 영감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그는 인간을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신체의 조각들에 주목한다. 작가는 매일 같이 반복되지만, 겉으로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노동에 주목한다. 작가는 “우리는 늘 무언가의 결과물만 보게 된다. 조각도 마찬가지다. 중간의 과정은 생략되고 우리는 결과물의 전시만 마주하게 된다”며 가려진 조각들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유지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투명과 불투명에 걸친 반투명의 상태는 한 총체와 조각을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선사한다. 다음달 6일과 13일에는 연계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6일에는 킴킴 갤러리와 협업한 구민자 작가의 ‘정통의 맛: 매운 해물맛 라면’ 퍼포먼스와 사라 벨라스 작가의 ‘벨라슬라바세이 파노라마’ 시연 퍼포먼스가 열린다. 13일에는 박혜수와 사운드 아티스트 ABOPF의 ‘클라우드 드림’ 사운드 퍼포먼스, 최수앙과 콘노 유키 비평가의 아티스트 토크를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내년 2월22일까지.

“기타 리프 위 곡예, 광대들의 인생 한 바퀴” ‘조선유랑연희: 탈의 문, 산대의 혼’ [공연리뷰]

‘둥둥둥’. 고요한 어둠 속에 심장 박동을 떠올리게 하는 기타의 울림만이 공간을 채운다. 일렉 기타 특유의 전자음은 날카로우면서 묵직하게 바닥을 울리며 공간을 채워 나갔다. 리듬에 맞춰 손바닥 두 뼘 크기의 장구 모양 죽방울이 천장에 닿을 듯 솟아오른다. 죽방울이 이내 아슬아슬하게 실 위로 착지하자, 숨죽이듯 지켜보던 관객들은 탄성을 지르며 그제야 숨을 내뱉는다. 지난 25일 정조테마공연장에서 열린 기획공연 ‘조선유랑연희: 탈의 문, 산대의 혼’은 퍼레이드와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조선의 놀이동산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공연은 수원문화재단과 지역 기반 예술단체 ‘청류’가 함께 만든 창작 공연이자, 청류의 ‘산대도감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랜 세월 여러 곳을 유랑하며 거리 위 민중을 위해, 때로 궁중의 임금을 위해 기예를 펼치던 광대들의 신명 나는 ‘놀이’는 전자음 가득한 서양의 ‘일렉 기타’와 만나 신선한 충격을 선물했다. 동서양, 과거와 현재의 융합은 맵지도 짜지도 않은 알맞은 ‘간’이었다. 현장에서 펼쳐지는 연주자의 기타 선율은 요리의 한 끗 차이를 만들어내는 한 방의 ‘킥’이었다. 또한 “산대에서 미친 듯이 놀아보자”라는 탈들의 흥을 끌어올리는 모습은 광활하고 먼지 가득한 도로 위를 미친 듯이 달리는 영화 ‘매드 맥스’를 떠올리게 했다. 이날 공연은 전통이 현대에 어떻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 한 가지 방향성을 보여줬다. “돌고 도는 인생, 수 많은 ‘탈’ 뒤의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조선 후기 큰 길가나 빈 터에 마련된 무대 ‘산대’에서 탈을 쓰고 춤과 노래를 하던 이들의 집합체인 ‘산대도감’의 유랑 정신과 연희 문화를 현대로 소환한 이날 공연은 ‘삶’은 무엇인지, 진짜 ‘나’는 누구인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기예’의 향연은 종합 선물센트였다. 죽방울, 버나(사발이나 대접 따위를 막대기 등으로 돌리는 묘기), 살판(광대가 몸을 날려 공중에서 회전한 후 바로 서는 재주), 판굿(풍물놀이) 등 전통 연희엔 철학이 담겨 있었다. 실은 너무 팽팽해도 느슨해서도 안 된다.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느슨하면 죽방울은 아래로 떨어진다. 비움과 채움의 장단을 맞추는 인생사와 같다. 실체 없는 허공임에도 자신 있게 발차기를 내뿜으며 살판을 선보이는 기예자는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땅을 하늘 삼아 이번엔 거꾸로 일어나 걸음을 내디뎠다. 객석과 무대 위 경계가 없는 공연장의 형태는 관객과 주거니 받거니 함께 어우러지는 그 옛날 산대의 매력을 그대로 살려냈다. 돌고 도는 버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기둥은 우산대가 되기도 낚싯대가 되기도 했다. 관객과 함께 이번엔 버나를 주고 받으며 객석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이날 객석의 가장 많은 박수갈채를 이끈 것은 변검 무대였다. 수줍은 여인이었다가, 지팡이 짚은 노인으로 변하더니, 어린 아이처럼 웅크렸다가 익살 가득한 모습으로 탈은 한 겹 한 겹 모습을 바꿔나갔다. 객석 중앙으로 자리 앉아 애간장을 태울 듯 탈을 뒤바꾸며 관객에게 한 바탕 웃음을 선물하던 이는 마침내 모든 탈이 벗겨지고 진짜 맨 얼굴이 드러나자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장내는 밝음에서 어둠으로 전환하고 바다 위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사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묻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회귀한다. ‘조선유랑연희: 탈의 문, 산대의 혼’은 광대들이 펼친 곡예 한 바탕 뒤, 인생은 무엇이며 진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전한다. 마침내 사내가 다시 일어나 한 겹의 탈을 썼다, 벗었다 할 때 객석은 안도와 위로의 박수를 건넸다. 모든 기예자, 배우, 소리꾼이 탈의 문의 열리기 직전 처음의 모습으로 모여 앉아 마지막으로 각자의 움직임을 펼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많은 것은 변화했다. 어떠한 탈을 쓰건, 탈의 모습이 어떠하던, 그 탈이 사라지든 아니든 그 뒤편의 ‘나’는 영원하다는 것을 산대도감의 연대 속에 이들은 진정한 ‘자유’를 알게됐음을 일러준다. “전통의 동시대성을 드러내고, 연희와 함께 ‘삶’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향후에는 일렉기타뿐만 아니라 바닥의 울림까지 전하는 드럼 등 보다 색다른 시도로 확장하고 싶다”고 밝힌 임영호 연출가의 의도는 명확하게 공연에 녹아들었다. 공연은 11월 21~22일 구리아트홀에서도 만날 수 있다.

“문학, 회화, 사운드로 감각한 ‘공생’” 수원시립미술관 10주년 동시대미술전 ‘공생’ [전시리뷰]

‘초연결’ 사회는 역설적으로 또 다른 차원의 ‘단절’을 가져왔다. 기술의 발전이 야기한 기후 위기와 언제 올지 모르는 팬데믹의 공포 등 각종 재난은 우리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는 우리에게 서로 다른 존재와 어떻게 살아가고,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그 후, ‘포스트 휴먼’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수원시립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이해 지난달 26일부터 선보이고 있는 동시대미술전 ‘공생’은 앞선 질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답을 제시한다. 전시는 회화, 음향(사운드), 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 예술의 언어로 ‘해체’와 ‘융합’을 통해 관객에게 오늘날 인간과 비인간, 자아와 타자 등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전시는 입장부터 실험적이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왼쪽에 자리한 회색빛 철제 선반에 놓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얇고 작은 소설책 ‘서로에게 겨우 매달린 사람들처럼’(민병훈作)을 한 권 들고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인 소리가 관객을 맞이한다. 묵직하면서도 낮은 음향과 함께 푹신한 카펫에 발을 내디디면 마치 진공 상태의 우주선에 온 듯 이전의 감각과는 단절된 다른 차원의 시공간에 방문한 듯하다. 주인공은 관객이다. 전시는 50분마다 80명의 관람객을 제한한 방식으로 마치 하나의 극장에 극막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듯하다. 때로 기둥에 기대어 앉아 민병훈 작가의 소설집을 읽거나, 바닥에 누워 천장에 걸린 윤형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거나 공간마다 다르게 들리는 유지완 작가의 사운드 작품을 감상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여백을 채우면 된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을 지나면 윤향로 작가의 작품 ‘오이스터’(2025)를 만나게 된다. 캔버스의 굴곡에 따라 빛이 반사되며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감각은 달라진다. 그저 평면으로, 객체로만 소비되던 캔버스의 천은 무언가를 품어내고 굴곡을 드러내며 존재감을 내뿜는다. 암흑의 상태일 것 같았던 뒤편으로 향하면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8.8m의 천장에 매달린 작품은 굴 껍데기의 형상에서 안과 밖, 비움과 채움의 경계가 공존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작품은 굴이 모래알을 감싸 진주를 빚어내듯, 관계의 ‘수용성’과 ‘생명력’을 은유한다. 윤향로 작가는 기존의 프레임을 깨는 실험으로 회화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작품엔 자녀와의 사랑이 담겨 있다. 윤 작가는 “점을 그리며 층층이 겹을 쌓는 과정에 아이가 함께한 경험은 ‘눈으로 보지 못했던’ 반딧불이를 찾아가는 과정과 같았다”고 말했다. 전시장 곳곳에선 소리가 울려 퍼진다. 때론 벽을 타고, 때론 천장에서, 내가 어느 위치에 발을 딛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를 경험할 수 있다. 천장으로는 100년 전 어느 순간에 존재했을 목소리가 들리고, 바닥에선 현재의 소리가 공간을 이끌며 시간의 차원을 넘어선 음향은 관객 앞에서 교차한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 따라 소리는 유령처럼, 혹은 향기처럼 나를 따라오고 때로 멀어진다. 마치 소리를 주제로 한 한편의 ‘꿈’이자 ‘영화’와 같다. 유지완 작가는 ‘그 밤 꿈’과 ‘통로’라는 두 사운드 작품을 통해 사라진 존재를 현재로 불러낸다. 관객은 과거와 현재, 찰나와 영원의 ‘공존’을 새로운 차원으로 감각한다. 이번 작업에서 그는 무성영화 시절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대사를 전달하던 ‘변사’의 목소리와 주변부의 잡음을 수집·재조명하며 소리의 잔향을 공간으로 불러냈다. 유 작가는 “100년 전 녹음된 소리가 지금의 소리와 공존하면 어떨지 고민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매 시간마다 관객은 다른 소리를 듣게 되고, 어느 공간으로 유랑하느냐에 따라 공간의 여백이 채워지는 경험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병훈 작가는 문학을 전시 공간으로 불러오며 만난 적 없는 수많은 시공간의 ‘너’라는 타자에서 ‘나’를 읽고, ‘우리’로 세계의 확장을 제시한다. 작가가 실제 여행 중 집필한 작품은 그가 여러 도시를 오가며 다양한 공간에서 포착한 장면을 소설적 이미지로 전환했다. 작가는 완결된 서사가 아닌, 파편적인 장면과 사건을 나열한다. 비선형의 이야기 속에서 타자의 존재는 나와 맞닿아 있든 아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결돼 있음을 드러낸다. 장편소설 ‘어떤 가정’(문학동네, 2025), ‘달력 뒤에 쓴 유서’(민음사, 2023) 등 장·단편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온 작가는 주로 주변과 과거를 대면하는 자전 소설을 펴냈다. 작가는 “‘공생’을 고정된 의미가 아닌 끊임없이 흩어지는 사유와 장면의 흐름에서 경험하길 바랐다”며 “독자가 스스로 다른 존재와 접속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뒀다”고 말했다. 세 작가의 총 7개 작품은 수원시립미술관 커미션으로 신작됐다. 기획 단계부터 창작, 전시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장르와의 교류는 작가들에게도 ‘공존’을 통한 세계의 확장을 선물했다. 전시는 내년 3월2일까지이며 전시 연계 프로그램 ‘릴레이 소설쓰기: 너를 찾기’이 상시 운영될 예정이다. 네이버 사전 예약 또는 현장 방문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강렬한 런던필, 우아한 손열음…18일 경기아트센터서 선보인 최상의 협연 [공연리뷰]

2011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는 ‘한국의 날’로 불릴 정도로 한국 신예 음악가들의 수상이 줄을 이었다. 성악·바이올린 분야에서 3명의 한국인이 수상했고,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꽃’인 피아노 부문 2위에 당시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 재학 중이던 25세 손열음이 이름을 올렸다. 파이널 무대에서 연주한 곡은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당시 손열음은 이미 국내외 무대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정상급 피아니스트였지만 좀더 많은 연주 기회를 보장받기 위해선 차이콥스키 수상이 절실했다. 그런 그녀의 굳은 의지와 절실함이 응집된 연주였기에 차이콥스키 콩쿠르 실연은 지금도 ‘레전드’ 영상으로 꼽힌다. 18일 오후 5시 경기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손열음의 터치는 20여년 전 자신을 보듬는 듯한 완숙하고 깊어진 음색이었다. 무대 위에서 언제나 당차고 여유있는 손열음이지만 20대의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능숙하게, 그러면서도 여전히 완벽한 음색과 터치, 연주를 선보였다. 세계 무대를 향해 마지막 도움닫기를 하듯 온 몸으로 피아노 위를 뛰어다니듯한 모습도, 폭발하는 에너지에 집중하기 보단 쉼 없이 전환되는 곡의 흐름에 올라탄 수를 읽는 고수처럼 변모했다. 2021년부터 런던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에드워드 가드너와 손열음은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게 서로를 배려하며 음량과 템포, 음색을 조절해나갔다. 런던필은 첫 곡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 3번’에서 보여주며 드라마틱한 시작을 알렸던 응집력과 음색은 잠시 넣어둔 채 협연자와 청중을 우선 순위에 둔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아껴둔 에너지는 마침내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에서 단단하고 강렬하게 치솟아 올랐다. 차이콥스키 본인도 “이 성취는 저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작곡가 스스로 만족감을 드러낸 이 곡은 현존하는 교향곡 중 걸작으로 손꼽히며 연주회장에서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다. 가드너와 런던필은 자칫 너무 슬프거나 격렬해서 감정적으로 지칠 수 있는 이 곡에 비장함을 넣어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동력을 선사했다. 1부 서곡과 협주곡에서 못 다한 서사를 쏟아내듯 거침없이 그러나 섬세하게 관객을 이끌었다. 특히 첼로, 더블베이스 등 낮은 음역대의 현파트는 연주의 드라마틱함을 조종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탕이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으니 바이올린 파트는 물론 목관·금관도 제 소리를 마음 놓고 자신 있게 뽑아내고 있었다. 마침내 도달한 엔딩 이후 수차례 이어진 커튼콜은 무대 위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느낀 그 어떤 감동에 서로 환호하는 시간이었다. 앵콜곡으로 연주한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중 오제의 죽음’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갖는 여러 감정 중 비장함, 그 하나 만으로 열기를 잠재웠다. 런던필의 연주를 듣는 내내 어떤 장면, 그림이 떠오르는 건 그들이 ‘반지의 제왕’ ‘호빗: 뜻밖의 여정’ 등 블록버스터 영화의 배경음악 녹음에 참여한 단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소리 자체만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었다.

“오랜 벗 물고기, 도자에 시대를 담다” 한국도자재단 ‘도어지교’展 [전시리뷰]

물고기는 인류의 가장 오랜 벗 중 하나로 때로는 인간의 배고픔을 견디게 하는 고마운 식재료이자, 때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는 즐거움의 존재가 됐다. 인간과 물고기의 공존은 그 옛날 선사시대 벽화에도 새겨져 두 존재가 함께했던 풍경을 짐작케 한다. 그런가하면 물고기는 도자기를 장식하는 오랜 소재 중 하나로 인간과 물고기, 인간과 자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 달 30일부터 경기도자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도자재단의 ‘도어지교(陶魚之交): 물고기 만난 도자기’는 고려에서부터 조선 전후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물고기 문양의 의미와 변주를 조명하며 시대별 가치관과 사상, 덕목, 자연에 대한 시선, 소망을 살피게 만든다. 고려청자, 조선시대 청·백자, 근현대 공예품 등 51여 점을 다룬 전시에서 과거 사람들이 물고기와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아보면 자연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진 요즘, 인간과 자연·생명이 공존하는 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부 ‘자연이치를 찾아서’에선 푸르면서도 오묘한 빛깔을 풍기는 ‘청자’와 물고기의 만남을 통해 고려시대를 안내한다. 연못을 연상케 하는 연꽃잎의 문양 안쪽으로 두 마리의 물고기가 대칭을 이루며 헤엄친다. 주변엔 한 쌍의 원앙이 버드나무와 갈대, 물풀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누비고 있다. 고려인의 서정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청자상감 포류수금문 대접’은 고 이건희 회장이 기증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작품으로 자연의 순환과 조화를 중시한 고려인의 세계관과 미의식이 담겨있다. 고려시대엔 궁중이나 귀족을 중심으로 고기잡이를 구경하거나 물고기를 감상하는 ‘관어’가 유행했다. 문인들은 관어대에 올라 물고기의 천성이나 유유자적함을 노래하며 ‘무위자연’의 이상향을 노래했다. 물고기는 시, 그림 등 문학의 소재로 많이 활용됐는데 도자기는 그림이 많이 남아있지 않던 고려시대의 풍경을 살펴볼 수 있게 만든다. 2부 ‘군신화합을 위하여’는 분청사기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를 다룬다. 1부에선 고려시대의 도교적 사상과 자연에 대한 흥취를 살펴봤다면 2부에선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성리학과 유교 등 규범을 통해 만백성을 다스리는 조선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조선 500년간 군신화합은 중요한 과제로 임금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관료, 즉 신하였다. 역대 왕들은 궁궐의 연못에서 연회를 열고 신하들과 술을 나누고 태평성대를 논했는데 이는 고려시대와는 또 다른 풍경이다. 분청사기는 고려의 청자에서 조선의 백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예술이다. ‘분청상감 어문 매병’은 그 태에서부터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데 공처럼 둥근 어깨에서부터 서서히 잘록해지며 내려가다 바닥에서 반전되는 곡선미를 자랑한다. 그런가하면 ‘분청조화 어문 병’에선 꽃가지를 문 쏘가리는 충신을 뜻하는 궐어를, 새우를 문 붕어는 출세를 상징하며 조선 사대부들이 지향하던 유교적 가치를 담아냈다. 3부 ‘지식탐구를 향하여’는 조선의 상징인 ‘백자’를 통해 실학을 중심으로 한 ‘실용’의 조선후기를 안내한다. 조선후기엔 사물과 자연을 관찰에 지식을 체계화하는 박물학적 관심이 성행하는데 물고기는 과학적이고, 사실에 기반해 관찰하는 대상이 된다. 3부에선 도자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 실학자이자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가 있다. 1814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흑산도에 서식하는 풍부한 물고기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며 이를 본격적으로 정리한다. 다양한 어류와 갑각류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어해도’의 유행은 도자기에도 반영됐는데 ‘백자청화 파어수금문 병’에선 쏘가리, 메기, 오리, 새우, 조개 등 다양한 생물이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마지막 4부는 ‘민간’이 중심에 자리한 조선 19세기를 다룬다. 이 시기는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과 신분 질서가 변화하며 예술의 상품화가 활발했다. 이와 함께 입신양명, 부부금슬, 자손번성 등 민중의 취향을 반영한 일상적이면서도 세속 형태의 물고기 그림이 유행했다. 투박하면서도 강인함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백자청화철화 어문 호’는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한 황해도 해주지방에서 입신양명을 염원하는 물고기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등을 소재로 중상류층 가정에서 실용성과 장식성을 겸한 저장용기로서의 용도를 짐작케 한다. 전시와 연계된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옛 선비들의 편지지인 시전지(詩箋紙)를 제작하는 ‘유영: 소원을 헤엄치다’, 인근 하천 민물고기를 관찰하는 생태 교육 프로그램 ‘도자기x생태 탐사대’, 청년 대상 ‘연못의 속삭임: 관어로 물든 교감’ 등이 마련된다. 전시는 내년 2월22일까지.

“돌이 품은 신비로운 지구 이야기”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아이돌’

이토록 ‘돌’을 오래 들여다보고, 자세히 관찰해본 적이 있을까. 전시장에 들어서면 자연이 만든 예술품 돌을 오감으로 느끼고, 알아가는 공간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수백만 년 뜨거움과 차가움을 견디며 때로 화산에서 탄생하고, 파도와 바람으로 깎여나간 돌은 저마다 특별한 무늬, 색깔, 질감이 있다. ‘아이’와 ‘돌’의 만남을 주제로 한 동두천의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기획 전시 ‘아이돌’은 동심의 눈높이에서 돌을 관찰하고, 돌을 예술로 승화한 작품을 통해 아이들에게 일상을 낯설고, 새롭게 관찰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박물관과 맞닿은 경기북부의 명산이자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소요산은 가을철 단풍과 자재암, 폭포 등 다채로운 풍경이 특징으로 추석 연휴에 전시와 함께하는 온 가족 나들이를 떠나기에도 좋다. 아이들에게 ‘돌’은 가장 친숙한 존재이자 오래된 친구 중 하나다. 놀이터에서, 길가에서, 가족과 함께 놀러 간 계곡에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장면엔 ‘돌’이 있다. 너무 흔해서, 언제든 접할 수 있어 오히려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던 돌에는 지구와 자연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돌 속엔 하양, 검정 등 반짝이며 빛나는 작은 광물 알갱이가 숨어있는데 이것이 돌의 알록달록한 색을 만들어낸다. 감람암에 들어있는 광물 감람석·각섬석·휘석, 화강암에 자리한 석영·백운모·장석을 마치 움직이는 현미경으로 밀어서 관찰하면 동심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릴 테다. 이번엔 화산에서 태어난 돌을 만져보는 순서다. 어떤 돌은 화산에서 태어나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가 식으며 돌이 됐다. 어떤 돌은 딱딱하고, 어떤 돌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도 하다. 유리와 비슷한 물질인 규소가 많이 들어가 매끄럽고 반짝이는 흑요석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현무암, 마그마로 만들어진 화강암 등과 마주한다. 구석기의 대표 돌이자 연필의 재료이기도 한 ‘흑요석’은 겉보기에 단단하지만 다른 돌과 달리 유리처럼 쉽게 깨지는 반전의 특성이 있다. 투명한 유리 상자 너머 각각의 돌에 손을 갖다 대면 상자 안에 불이 켜지며 감각을 깨운다. 돌이 만들어낸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는 시간도 마련돼 있다. ‘편경’은 돌로 만든 우리나라 전통의 악기로 전시장엔 김형곤 악기장이 제작한 편경을 직접 연주할 수 있다. 맑고 청아한 종소리 같기도 한 악기는 위치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데 어린이 관람객에게 인기다. ‘돌’과 ‘사람’이 함께한 시간을 다룬 작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김성문 작가는 ‘소중한 추억이 담긴 돌’에서 고인돌을 주제로 이를 만드는 과정과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3차원 실물 모형(디오라마)으로 표현했다. 작품은 단순한 권력자의 무덤을 넘어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그 시절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서로가 믿고, 협동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고인돌의 탄생 과정을 떠올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거칠고 단단했던 돌은 시간이 지나 잘게 부서진다. 흙은 물을 머금으면 말랑한 반죽이 됐다가, 인간의 무언가를 담는 도자기가 된다. 도예가인 장유정 작가는 ‘새롭게 태어난 돌’에서 돌이 흙이 되고, 사람의 손길과 불을 거쳐 도자기로 태어나는 과정을 소개하며 돌에 담긴 시간의 흔적과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했다. 수능을 앞두고 합격을 기원하며, 아픈 자식의 건강이나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돌을 쌓는 경험을 해보거나, 손바닥만한 크기부터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돌탑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품은 돌’에서 진귀원 작가는 소원을 빌며 돌로 탑을 쌓는 놀이를 투명한 색의 레진으로 구현했다. 검정 혹은 회색의 단단할 것 같은 돌이 주황, 노랑, 파랑, 초록 등 영롱하면서도 투명한 색으로 쌓아올려진 모습과 함께 소원을 비는 벽이 어린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진귀원 작가는 “돌을 쌓는 행위는 전 세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다”며 “돌은 쌓는 것은 원초적인 놀이이기도, 바벨탑이나 신전처럼 간절한 마음을 보이며 무언가를 염원하는 건축물이 되기도 했다. 인류의 공통 경험을 공유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마무리는 조용히 돌이 품은 지구와 자연의 소리를 돌아보는 순서다. ‘바람과 파도를 담은 돌의 방’에서 하석홍 작가는 미생물로 숙성한 종이(펄프)라는 색다른 소재로 현무암을 연출하며 시각적 자극을 넘어서 돌, 자연, 지구가 살아 숨쉬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현무암의 모습을 한 조각품은 공중 위에 마치 구름처럼 떠 있으며 무게를 무색케 하고, 벽면에 자리한 조각품은 종이라는 소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낯설면서도 거친 표면을 표현했다. 그는 “돌은 지구의 뼈대이자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라 표현했다. 전시는 내년 7월 19일까지.

“사진첩에 담긴 비극과 희극” 수원시립미술관, 한국근현대미술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전시리뷰]

“사실 파리는 비가 올 때 가장 아름다워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명대사인 이 말에는 누군가에겐 안타까움, 불편함으로 느껴졌을 ‘비’가 사실은 그 도시의 진정한 정체성이자 매력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파리를 여행하던 주인공은 1920년, 1890년대로 우연히 시간여행을 떠나게 되며 그곳에서 동경하던 예술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살바도르 달리 등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주인공이 동경해 마지 않던 예술가들과, 예술의 황금기로 상상하던 시간대에 당도하지만 그곳 역시 지금의 현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걸 드러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시대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은 반대로 평범해 보이거나 비극적인 일상이 희극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수원시립미술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한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전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학가이자 철학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예술인 나혜석(1896~1948)의 유일한 유품이던 사진첩을 중심으로 우리를 그녀의 생애로 안내한다. 전시는 관람객을 격동의 시대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나혜석을 매개로 박수근, 이응노, 천경자 등 한국근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13인의 작품 55점도 함께한다. 한 사람이자, 예술가의 생애를 뒤따라 가며 그녀가 머물렀던 장소와 그녀가 만났던 사람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파헤치다 보면 나혜석의 삶이 마냥 비극적이지도, 화려하게 빛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기쁨과 환희, 비극과 슬픔, 평범함과 독특함이 공존했던 삶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사진첩에서 채 해독되지 못한 공백의 순간들은 미완으로 남아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이 채워나갈 몫으로 남아있다.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이란 제목엔 정지 상태로 머무르는 나혜석의 삶 속 소중한 순간들과 그곳을 유영하는 감정들이 담겨있다. 전시는 총 4장으로 구성돼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유족의 기증품이자 전시의 출발점인 사진첩이 놓여있다. 1부 ‘한 예술가의 사진첩’은 나혜석이 노년에 제작한 사진첩과 101점의 사진을 만날 수 있다. 사진첩은 나혜석이 직접 선택하고 배열해 제작한 것으로 전시에선 사진첩이 전면 공개, 사진에 관해 그녀가 남긴 자필 설명도 함께 기재돼 있다. 심하게 흔들린 필체는 그녀의 수전증을 드러내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노쇠하던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유추하게 만든다. 사진은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지 않고 명확한 범주도 없다. 이는 노년의 그녀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했던 흔적이라 짐작케 한다. 전시의 구성 역시 그녀의 사진첩에 배열된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며 사진첩을 만들었을 나혜석의 순간을 뒤따라 간다. 주요 촬영 시기는 남편이던 김우영의 유학 시기부터 나혜석이 해인사에 머물던 1930년까지 분포된다. 사진의 대부분은 가족과 관련돼 있는데, ‘나의 가족’이란 사진에 담겨 있는 그녀의 자녀들은 평생을 그리워했던 자식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 마냥 자유로이 혼자의 몸으로 유랑했을 것 같은 나혜석의 자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랑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사진첩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진이 촬영됐을 맥락을 해석하는 과정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 나혜석 부부가 도움을 줬던 의열단원 이현준의 얼굴, 영친왕 부부에 관한 나혜석의 스크랩 자료, 동경했던 프랑스 시기의 모습 등이다. 상당한 고화질로 촬영된 사진은 들여다볼수록 인물들의 얼굴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 1부에는 최근 2년간 진행됐던 사진첩의 상태 조사, 보존처리, 영인본 제작, 기초 해제 연구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상물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전시를 담당한 이채영 학예사는 “처음 사진첩을 기증 받았을 땐 겉표지와 속지 등이 모두 분리돼 있었고,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듯한 상태였다”며 “이를 해제하는 과정과 함께 사진 속에 나온 인물들과 서사를 해석하는 과정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고 설명했다. 2부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평범한 순간으로부터’는 ‘가족’을 중심으로 박수근, 배운성, 이중섭 등 근현대 작가들의 가족에 얽힌 작품들을 소개한다. 식민지와 분단의 시대에 가족은 이들에게 창작의 출발점이자 영원한 지지자이자, 동시에 상실과 그리움의 대상이며 가족의 복원은 고단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임군홍의 ‘가족’(1950)은 6.25전쟁 발발 보름 전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으로 끝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전쟁이란 비극사로 운명이 흔들린 임군홍의 생애는 남다른 여운을 남긴다. 그런가하면 수원 출신인 백영수가 프랑스 체류 시기에 제작한 연작 ‘모성의 나무’(1998)은 그의 일평생 주제였던 ‘가족’과 ‘이동’의 이야기가 녹아나 있다. 밀착한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은 한없는 사랑이자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그리움을 담았다. 피란길 마주했던 힘없는 어느 아이의 모습에서 착안해 고개가 90도 기울여진 모자상은 그의 작품 특성이기도 하다. 3부 ‘여정의 어딘가에서’는 나혜석의 여정 속에 등장한 장소들을 매개로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했던 배운성, 백남순, 이종우, 서진달, 이응노 등 인물들을 조명한다. 사진첩에 등장한 다양한 장소는 그녀가 머물렀던 공간이자 동경의 대상이자 창작의 동력이었다. 1927년 김우영과 함께 떠났던 세계 여행은 당시 많은 미술가들이 꿈꾸던 세계 예술의 중심인 파리를 포함했는데, 나혜석은 유럽에서 유학하던 이들과 교류하며 서양미술의 정수를 경험하고, 동시에 서양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했다. 찬란했던 세계일주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외면했던 시기 전국 명승과 사찰을 돌아다니며 연을 맺었던 서진달, 이응노 등의 모습은 사진첩 속에도 남아있으며 이들의 대표작도 만나볼 수 있다. 마지막 4부 ‘나를 잊지 않는 행복’은 나혜석의 삶에서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여행’을 키워드로 전시를 마무리한다. 여행이란 낯선 세계를 탐험하고 자유를 체험하는 동시에 축적된 지식을 외부의 경험과 나누는 과정이었다. 나혜석을 비롯해 박래현, 천경자는 식민지 시대 드물게 일본에서 유학한 여성 미술가였다. 여행지의 경험은 창작뿐만 아니라 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여행에서 만난 드넓은 세계와 여류화가가 마주한 사회적 한계, 가족사에 얽힌 비극 등 천경자의 삶은 특히 나혜석과 매우 닮아있다. 전시는 여행이 이들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단련하고 행복을 향해 나선 길이었음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는 그룹 몬스타엑스(MONSTA X)의 민혁이 작품을 직접 소개하는 오디오가이드가 운영되며 전시장 QR코드를 스캔해 누구나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민혁은 2023년 성수동 개인전 등 전시를 개최한 미술 작가이기도 하다. 남기민 수원시립미술관 관장은 “미술관 소장 자원을 매개로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이자, 여러 소장처의 협조로 개최될 수 있던 전시”라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행궁에서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11일까지.

“실험은 통했다”…‘토이’의 국내 상륙전 펼친 ‘어반브레이크 2025’ [전시리뷰]

‘좋은 예술’은 한 마디로 재밌다. 고전 예술이 주는 우아함과 숭고미가 있는가 하면 어떤 예술은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준다. ‘어반브레이크 2025’가 선보인 ‘새로움’과 ‘도전’은 인공지능(AI)이란 신기술의 역습에도 여전히 예술의 주인공은 ‘창작자’란 것을 증명했다. 패션과 기술, 음악 등 각기 다른 영역도 하나의 예술로 결합할 수 있음도 보여준 무대였다. 전 세계 15개국, 300여 명의 예술가 참여한 국내 최대 규모의 글로벌 아티스트 페스티벌 ‘어반브레이크 2025’가 지난 7일 서울 코엑스에서 개막해 나흘간 이어졌다. 올해로 6회를 맞이한 어반브레이크는 예술·패션·음악·기술 등 다양한 영역을 융합해 이를 전시, 공연, 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선보였다. 올해 관람객의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토이콘 서울’이었다. ‘어반브레이크 2025’에서는 10개국 100여 팀의 아티스트와 브랜드가 참여한 국내 유일의 글로벌 디자이너 토이페어로 ‘토이콘 서울’이 동시 개최됐다. 단순한 ‘장난감’을 넘어서 ‘토이 아트’가 새로운 예술의 영역으로 자리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 “장난감을 넘어 짜릿함을 더하다”… ‘토이콘 서울’ 전시 현장은 세계 1위 아트토이 기업이자 국내외를 휩쓴 ‘라부부’로 유명한 글로벌 캐릭터 지적재산 기업 팝마트(POP MART)와 한국의 아트토이 대표 작가인 쿨레인 등이 한정한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제품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어떤 상품이 나올지 모르는 일명 ‘랜덤박스’를 판매하는 부스에는 곳곳에 여러 연령대의 관람객이 가득했다. 기대하는 제품이 나올까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엔 온통 즐거움과 짜릿함이 가득했다. 현장에는 이미 잘 알려진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이제 막 아트 토이의 세계에 발을 내민 젊은 국내 작가들의 모습도 눈에 뜨였다. 부천 출신의 전용국 작가(27)는 브로콜리, 무, 감자 등 일상 속 사물을 사람의 얼굴로 의인화한 독특하고 유머 넘치는 작품으로 관람객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전씨는 “이렇게 큰 전시장에서 작품을 선보인 건 처음이다”며 “매일 단 한개씩 주어지는 ‘왕 감자’ 토이를 뽑는 관람객을 지켜보는 것 자체도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트웰브닷의 임현승 작가는 토이, 피규어가 단순한 장난감을 넘어선 예술의 영역으로의 가능성을 선보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속 술래인형 피규어를 제작하기도 한 그는 개구리를 소재로 한 회화, 조형물 등 다양한 작품으로 특히 해외에서 큰 사랑을 받는다. 그는 자연을 대변하는 개구리와 어린 인간의 교감을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 ■ 패션, 기술, 음악의 융합… “우리만의 세계관 느끼길” ‘Play With Artist(예술가와 함께 놀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어반브레이크 2025’ 답게 전시장 곳곳은 예술가들의 개성과 철학, 세계관이 묻어나는 부스로 보는 예술의 깊이를 놀이로 자연스럽게 느끼게 했다. ‘환대’를 소재로 독특한 퍼포먼스와 작품세계를 보여준 송앨리(앨리송) 작가의 부스가 그 중 하나였다. 송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매일 한번씩 특정 시간대마다 케이크와 촛불, 식빵 등을 활용해 ‘환대’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모습을 유쾌하게 표현하며 “현대사회에서 환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작가들이 자신의 부스를 집약하며 각자 만든 일명 ‘모객’ 포스터 역시 눈길을 끌었다. 예술과 음악이 결합한 ‘TRACK DAY’ 프로그램도 돋보였는데 올해 어반브레이크는 자이언티, 기리보이, 원슈타인, 소코도모 등이 소속된 ‘스탠다드 프렌즈’ 레이블과 함께한 콘텐츠를 선보였다. 전시장에선 이들이 주제별 맞춤형 플레스트를 선보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부스 및 직접 참여한 라이브 퍼포먼스와 토크를 체험할 수 있었다. ■ “우린 AI 아티스트”… 케이팝과의 결합을 선보이다 ‘토이콘 서울’과 함께 올해 어반브레이크가 새롭게 선보인 ‘AIAA(AI 아티스트 어워드)’에는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심을 가진 각종 창작자와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는 인공지능을 예술 창작의 도구로 사용하는 창작자를 조명하며 총 상금 2천만원 및 도심 전광판 송출 등 후속 기회를 제공하는 혜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전시장 입구에서는 케이팝 등 한국의 문화적 요소와 음악을 기반으로 제작한 AI 뮤직비디오 수상 후보 9점을 독특한 구조물의 미디어 아치 존에서 상영하는가 하면 9일에는 관람객의 투표를 반영한 시상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어반브레이크 2025’를 총괄한 장원철 ㈜어반컴플렉스 대표는 “자신만의 세계관, 이야기,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AI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창작세계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열띤 관심으로 총 800편의 지원작 가운데 9명의 작품이 선정됐다는데, 앞으로도 AI와 관련한 한국(K) 콘텐츠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보여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차가움과 따뜻함, 붓과 칼의 대비” 해움미술관 2025 첫 기획전 ‘온, 한의 표면- 붓과 칼의 담’ [전시리뷰]

전통의 소재를 현대의 기법으로 표현했을 때 그 오묘함에서 오는 쾌감이 존재한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움은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든다.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교동)의 ‘해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온(溫), 한(寒)의 표면-붓과 칼의 담(談)’ 전시는 오묘한 조합이 자아내는 독창성이 보는 이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해움미술관의 2025 첫 기획전인 이번 전시는 최근 종료한 경기도미술관의 ‘판을 뒤집다’전에서 선보인 손기환, 조진호 두 작가의 작품을 확장했다. 경기도·수원특례시가 후원하는 ‘2025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지역과 연계해 지역민에게 문화예술 향유의 폭을 넓힌다는 의미가 있다. ‘온(溫), 한(寒)의 표면-붓과 칼의 담(談)’이라는 제목처럼 전시는 손기환, 조진호 두 작가의 날카로운 칼로 표현되는 ‘판화’와 부드러운 붓으로 그려지는 ‘회화’의 조형적 예술혼을 담아냈다. 따스함과 차가움, 붓과 칼이라는 극과 극은 이야기를 나눈다. 민속적이고 민중적이며 자연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동시에 가장 현대적이고 추상화된 세련함을 드러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엄청난 길이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조진호 작가의 작품 ‘觀(관)’이다. 마치 칠레의 모아이 석상과도 같은 기하학적이면서도 독특한 분위기의 얼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간중간 물고기, 주전자, 꽃 등이 눈에 들어온다. 민속적인 소재를 주로 활용하는 조 작가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는데, ‘觀(관)’은 전설을 간직한 절, ‘운주사’를 배경으로 한다. 운주사는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불상 1천 좌, 탑 1천 기)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이다. 그곳의 석탑들은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특이하고, 탑의 표면에는 ‘X’, ‘◇’, ‘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 있어 국내 미술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조진호 작가는 수많은 민중의 그 오랜 세월 기도와 바람을 들어왔을 서민들의 이야기는 기하학적이면서 추상적이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표현됐다. 뒤편에 자리한 작품 ‘千年의 傳說(천년의 전설)’ 역시 운주사에 소재한 부부 와불 등을 소재로 했다. 언제 만들어졌을지 모를 미스테리한 수수께끼는 친근하면서도 외계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반면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조진호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은 민중적인 서사와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었다. ‘학살도’와 ‘고목’ 등의 작품은 6.25 당시 희생당한 민중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간결하고 힘찬 선은 예술이 전할 수 있는 시대상을 표현했다. 손기환의 판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의 한 축에 속하는데, 다만 그의 작품 세계는 전위적인 메시지의 전달보단 보편적인 삶을 아우르는데 이번 전시에서 그는 강 건너 고향, 자신의 동네, 인간친화적인 산수 등 자연을 모티브로 담아냈다. 날카로운 칼로 후벼낸 작품이지만 그 안엔 따뜻함이 있다. 그의 작품은 팝아트에 가깝다. 전통의 소재를 담아내지만 흔하지 않은 다색판화의 색감과 구성, 한지를 입체감 있는 질감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을 구현한 그의 작품들 역시 현대의 흐름인 추상성과도 맞닿아 있다. 전시를 기획한 이해균 해움미술관 대표는 결국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따스함과 차가움은 온도의 차이로 공기 중의 입자가 이동하는 듯한 움직임을 내포한다”며 “따뜻함과 차가움은 이질적이면서도 서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작품 하나하나에 깃든 두 작가의 정신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칼로 만든 판화에도 따뜻함이, 가장 부드러운 붓으로 표현된 회화에도 차가움이 있을 수 있듯 동시성을 전달하며 극과 극은 결국 하나로 흐른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해움미술관은 지역사회와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오는 8월에는 손기환, 조진호 두 작가와 시민들이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무료로 판화 제작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예정이다. 전시는 9월26일까지.

“한 때 폐수처리장, ‘우리’ 위한 예술로” … 고색뉴지엄 색깔 담긴 ‘동네야 놀자展’ [전시리뷰]

폐수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거대한 탱크. 화려했던 산업 발전의 한 단면이었을 거대한 공간에는 그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담긴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짚과 풀을 엮어 만든 누에섶, 소 부리망, 똬리, 오리계란 꾸러미와 복조리는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선조들의 지혜와 정서가 느껴졌다. 시간의 축적은 기계와 함께하든, 자연과 함께하든 형태만 다를 뿐 결국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같은 땅을 밟고 서 있는 존재였으리라. 지난 11일 고색뉴지엄의 재개관을 기념하며 개막한 ‘동네야 놀자展’ 현장은 공간 곳곳에 남아있는 폐수종말처리장의 흔적과 회화, 설치, 판화 등 전문 예술 작품부터 도심 속 생태의 시간을 담아낸 시민단체의 설치 작품, 볏짚으로 엮은 짚풀 공예품 등 다양한 생활예술 단체의 작품이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색뉴지엄’은 산업단지가 몰려있는 권선구의 수원델타플렉스 안에 소재한 공간으로 애초 폐수종말처리장으로 지어졌지만 도심 재생사업을 통해 시민 모두를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고색뉴지엄과 고색동이란 동네가 품은 단어는 ‘공존’이란 단어가 어울렸다. 전시장 인근엔 칠보산이, 바로 앞엔 생태하천인 황구지천이 흐르는 생태 동네이며 동시에 산업을 일구는 기업들이 몰려있었다. 공간의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 전시장에는 커다란 약품 탱크, 거친 콘크리트 벽면과 배관, 폐파이프와 전선과 온도계 등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새로 위탁운영을 맡게 된 ㈔수원민예총(수원민족예술인총연합)은 ‘고색뉴지엄’만의 색을 더했다. 이창세 고색뉴지엄 관장(수원민예총 지부장)은 “고색뉴지엄이 추구하는 핵심은 ‘소통’”이라며 “예술가만의 공간이 아닌, 시민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목표는 재개관 기념 전시이자 새출발을 알리는 ‘동네야 놀자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 ‘동네야 놀자展’은 본래 공동체 예술의 살아있는 발자취로 불리며 “동네의 모든 이웃이 함께 어울려 논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번 전시에는 수원민예총 시각예술·문학·사진·영상위원회의 작품뿐만 아니라 서수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채로운 생활예술 단체가 함께했다. 기다란 파이프 관이 늘어선 복도의 양 옆엔 화이트큐브 대신 거친 콘크리트 벽에 ‘새벽빛장애인학교’의 작품이 배치돼 있었고, 고색동에서 30년 넘게 살아오며 지역의 전통인 고색농악보존회를 지켜온 짚풀공예가이자 ‘소리찬아트’ 남옥숙의 작품은 아이러니를 더했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며 나의 존재보다 수없이 이전에 존재했을 나를 이루게 만든 대상들을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생각하고, 인지하지 못하지만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을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서현덕 작가의 설치 작품이었다. 고색동에서 나고 자라 ‘신체성’을 주제로 사운드(음향) 설치 작품을 펼치는 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고색뉴지엄이 주는 공간의 매력을 십분 더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를 현대적인 사운드로 풀어낸 서 작가의 작품은 이질적이면서도 독창적인 분위기로 그곳의 공기와 어우러졌다. 귀로 들을 수 없는 음역에서 다홍빛의 물체가 스피커를 통해 진동하며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모습은 인지하지 못하는 무언의 존재들을 느끼게 했다. 공간의 사람들이 옛(古) 고향을 다시 찾아와(索) 살았다고 하여 ‘고색’이라는 뜻이 담긴 그리움의 동네를 한껏 떠올리게 했다. 고색뉴지엄은 앞으로 산업단지 내 근로자와 청년, 장애인 등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을 위한 연대의 축이 되겠다는 목표다. 이창세 관장은 “앞으로 인근 델타플렉스 단지의 노동자와 연계한 문화예술 사업을 기획하고 있으며 또한 올 7월 말까지는 청년 작가 창작활동을 위한 기획 전시 공모를 진행하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전시는 27일까지다.

‘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 초보자부터 애호가까지…미술을 즐기는 주말 [현장리뷰]

아트페어의 세계에 입문하고 싶으나 괜스레 높은 문턱에 망설였던 이라면 이번 주말 광교에 들려 ‘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화랑미술제 in 수원’이 지난 26일 지난해 이어 두 번째 막을 화려하게 열었다. ‘화랑미술제 in 수원’은 화랑미술제의 오랜 노하우와 광교 호수공원을 배경으로 하는 수원컨벤션센터의 인프라를 접목했다. 경기 남부권을 중심으로 미술시장 불균형을 해소하는 의미를 담은 이번 아트페어엔 국내를 대표하는 우수 회원화랑 104곳과 특별전을 포함해 6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지역과의 상생을 도모하며 수원 지역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선보이는 ‘수문장’과 어린이 프로그램, 도슨트 및 전문가를 동반한 토크 프로그램 및 호수공원을 중심으로 한 야외 공연 ‘레이크 바이크’ 등은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노력으로 가족 단위 관람객은 물론 젊은 커플, 친구들과 추억을 쌓기 좋다. 26일 열린 첫날 프리뷰에만 약 4천700여 명의 관람객이 현장을 찾았으며 축제는 29일까지 계속된다. ■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컨셉 ‘눈길’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기계가 구현할 수 없는 ‘어설픈 미학’을 찾아가는 것이 예술가의 몫 아닐까요.” 오묘한 눈빛에 어딘가 촌스러운 헤어 스타일의 피사체가 새빨간 슈트를 입고, 그 옆엔 로봇의 팔이 겹쳐 있다. ‘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에서는 젊은 감각이 반영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이 대거 출현해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중 특히 젊은 컬렉터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갤러리박영’의 피 킴(P. Kim, 김태기 작가)이었다. 갤러리박영은 출판사 ‘박영사’의 화랑 겸 복합문화공간으로 파주출판단지의 첫 번째 갤러리이며 피 킴은 수원 출신의 작가로 이번 아트페어의 정체성을 더했다. 회화뿐만 아니라 피규어와 영상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하는 그는 지난해 ‘2024 어반브레이크’에서 일본레스링협회에서 직접 협찬받은 레슬링 링으로 전시를 펼쳐 주목받기도 했다. ‘정복자의 유쾌한 골짜기’ 시리즈를 선보이는 작가는 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함이 증가한다는 ‘불쾌한 골짜기’ 개념을 뒤집어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미학의 순간을 포착했다. 1970~80년대 특수촬영물을 소재로 택한 그는 필름 너머의 영웅은 완벽한 초인이 아닌 그저 슈트를 입은 배우이며, 그들과 싸우는 괴수 역시 그 너머엔 인간이란 물리적 존재가 있음을 떠올렸다. 허술하고 미숙한 CG 효과는 현실과 허구 사이 불완전함에서 독특한 미학과 유쾌함, 낭만을 가져다준다고 작가는 말한다. 차량의 도색에 활용되는 페인트는 캔버스와 만나 독특한 질감을 자아냈다. 스포츠카의 상징인 페라리의 빨간색은 강렬하면서도 윤택감 있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마치 AI가 구현한 모델 같기도 하지만, 피사체는 작가가 아날로그로 창조한 얼굴이다. ■ 회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설치·조각 작품까지 각 부스마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아트페어의 묘미 가운데 하나이다. ‘토포하우스’ 갤러리는 회화에 어울리는 설치미술 작품을 곳곳에 배치하며 마치 누군가의 집에 방문한 듯 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테마별로 배치했다. 동물을 소재로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김재규 작가의 작품은 이번 현장에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은은함을 선사했다. 김 작가는 지난 4월 코엑스에서 열렸던 ‘2025 화랑미술제’에서도 독특한 색감으로 아기자기한 동물 작품을 선보이며 관람객의 애정을 받았다. 그는 중국, 터키 등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 작가다. “자연에서 온 진흙에 시간이 더해지며 우연함을 포착하려 했습니다.” 김 작가의 작품이 주는 부드러움의 힘은 독특한 색감에서 형성된다. 말랑말랑한 진흙 상태의 천연 세라믹에 우리나라 전통 유약의 기법을 차용한 작업 방식에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동반자이자 벗으로 묵묵히 곁을 지켜온 동물은 무대의 중앙으로 올라왔다. 김 작가의 작품과 나란히 자리한 허준 작가의 작품도 지나칠 수 없다. 소치 허련의 5대손인 작가는 한국화 창시 집안의 품격이 드러나는 현대적 산수화를 그린다. 수석 모으기가 취미였던 할아버지 남농 허건 선생과의 추억과 푸근한 놀이터가 되어줬던 그에 대한 애정을 커다란 나무 속 새 두 마리로 표현한 작품 등을 만날 수 있다. ■ 블루칩이 주는 안정감… ‘미래의 블루칩’은 누구? ‘021갤러리’의 류재하는 블루칩의 명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비주얼 아트를 전공하고 미디어와 물리적 오브제의 결합으로 다양한 키네틱, 미디어 설치, 미디어 파사드, 영상 작업을 해오는 그는 최초란 수식어가 많다. 2010년 ‘G20 정상회담-미디어 첨성대’, ‘덕수궁-중화전 매핑’, ‘광화문-빛 너울’, ‘2018년 평창 올림픽’ 등 다양한 문화유산 미디어 파사드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현장에선 그의 신작 등을 만날 수 있다. ‘끝과 끝은 통한다’. 작가는 솥뚜껑, 화투 등 향토적인 소재를 첨단의 기술로 제단한다. 작품 ‘우아한 눈치’(2025)는 마치 인간의 눈꺼풀처럼 눈을 오므려 궁금증을 자아냈다가 깜빡이며 입을 벌린다. 작가는 타인의 심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대인의 삶을 화투 놀이에서 눈치로 비유한다. 삼등분한 솥뚜껑에서 나타나는 화투, 깜빡이는 눈의 작품들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써포먼트 갤러리’의 권혜조가 그린 도시와 자연의 풍경과 독특한 질감, 파스텔톤의 색감 역시 관람객에게 큰 인기였다. 권 작가는 일상 속 평범한 풍경과 순간을 감각적으로 풀어내는데 특히 그가 구현하는 트렌디한 색감과 특유의 컬러 팔레트는 상징처럼 자리하며 외국에서 특히 인기이다. 반복적인 붓질과 두꺼운 오일페인팅은 울퉁불퉁한 입체감으로 생동감을 더했다. 그의 작품엔 샴페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항상 축하하고 기념할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이번 미술제는 아트페어의 문턱을 낮추고 ‘아트페어 입문자’를 초대하는 의미가 있다. 미래의 블루칩을 찾는 재미가 쏠쏠한데, ‘노화랑’ 갤러리의 정하진 작품이 그러하다. 1999년생 신진작가인 정하진은 노화랑이 강력하게 주목할 만한 신진 작가로 자신 있게 내보인 인물이다. 꽃이 져야 열매가 나오는 상반된 계절감을 갖는 집 마당에 자리한 모과나무는 그의 작품 소재가 됐다. 차가운 도자기에 특유의 방식으로 따뜻한 색감을 담아낸 그의 설치 작품은 둘러봄 직하다. ■ 문화도시 수원 특별전 ‘수문장:당신의 풍경, 당신의 취향’ 3층의 전시는 1층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형성한다. 마치 살롱에 들어가듯 카페트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조명과 분위기는 이번엔 아늑함을 자아낸다. 3층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가람화랑’의 구상희 작가의 작품이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피사체는 화면을 뚫고 바닥에 정착했다. 구상희 작가는 중앙보다는 프레임 옆을, 가운데보다는 구석이나 모서리에 천착한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는 세상에서 어쩌면 주변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폭포가 흘러내리는 순간의 영원함을 포착한 작가는 화면 밖에 영원한 정지 상태로 머무르게 만들며 시선을 잡아끈다. 이외 자개장의 신비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갤러리 아트숲’의 서은경, 모녀 작가의 동화 속 세계를 그린 팀 비비 등이 주목할 만하다. 3층에 자리한 문화도시 수원 특별전 ‘수문장:당신의 풍경, 당신의 취향’은 심사를 통해 선정된 수원의 청년예술가 20인 외에, 수원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예술단체 소속 예술가 21인의 작품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이는 지난해보다 두 배 늘어난 규모로 작품의 수준 또한 손색 없다. 마은영 작가의 ‘캉가의 화려한 외출’은 독특한 세계관과 아기자기한 작품 구성은 관람객에게 열띤 애정을 받았다. “어느 날 야생 닭이 밖으로 나가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들을 다 같이 한 차에 태워 행복을 찾아 떠나자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10년간 가족과 아프리카 케냐에서 생활하며 곳곳을 여행 다닌 마 작가는 알록달록한 닭에 현지인과 자기 자신, 가족의 모습을 투영했다. 천으로 재봉한 작품은 얼룩말 등 현지의 동물을 담아냈고, 그가 타고 다녔을 모형의 오토바이는 화면 안에 와이드한 그림으로 확대됐다. 노랑, 분홍, 파랑의 물결은 현지의 바람이 전해지는 듯하다. 현장에 자리한 이성훈 화랑협회장은 “서울이 아닌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공간이 수원이라고 생각한다”며 “이곳은 수원화성 등 고유의 문화유산과 수도권을 아우르는 강력한 인프라로 문화예술이 꽃피울 수 있는 강력한 위치”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회장은 “올해 특히 수준 높은 작품들로 중무장했으며 이와 각 갤러리에서 미래를 이끌어갈 신진 작가들을 엄선했으니 이러한 점을 즐겨보시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 관련기사 : “아트페어 입문자, 대환영”…더 크고 화려해진 ‘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 미리보기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617580276

“폭넓은 레퍼토리, 교수들의 팀 플레이가 보여준 환상의 4일”…‘2025 평택 실내악 축제’ [공연리뷰]

우리는 대개 현대 예술에 관해 난해하고 심오하다는 편견을 갖는다. 미술관에 방문해 ‘점’ 하나 찍어 놓은 듯한 작품을 바라보며 “역시 현대미술은 난해해”하고 뒷걸음을 하기도 하고, 처음 들어보는 낯선 현대음악엔 오묘하고 기괴하다는 느낌까지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낯섦’이란 무조건 부정적이기만 감정은 아닐 테다. 예측할 수 없는 혹은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겠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예술은 일상에 신선한 긴장감을 주고 시야를 한 단계 넓게 만든다. 4일간 평택 남부문화예술회관에서 펼쳐진 ‘2025 평택 실내악 축제(PCMF)’는 클래식계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어쩌면 가장 고전적인 음악 장르로 꼽히는 클래식 악기가 트렌디한 현대의 작곡가들과 만나고, 18세기 베토벤부터 우리와 동시대 살아 숨 쉬는 21세기 작곡가들까지 다채롭게 아울렀다. 이를 내로라하는 정상급 연주자 4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지휘자 없이 음악의 대화로만 이뤄지는 실내악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 이번 연주회는 한 마디로 ‘축제’였다. 공연은 지난 13~14일, 20~21일 총 4일간 펼쳐졌다. ‘열정의 서곡’이란 주제로 막을 올린 첫째 날은 ‘열정’이란 단어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 우리에겐 피아노 견습생의 교과서로 유명한 체르니(1791-1857)의 ‘협주곡 론도, 작품 149번’은 고전이 왜 고전인지를 알려줬다. 체르니는 피아노 연습곡 작곡가로 익숙하지만, 사실 그는 베토벤의 제자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1천 곡에 육박하는 작품을 남긴 다작의 작곡가다. 오윤주(성신여대 음악대학 학장·코리아나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 단원)가 펼치는 피아노 연주는 건반의 연주가 시작되자 무대에서 한시도 눈을 못 떼게 했다. 마치 시냇물이 흘러가듯, 옥구슬이 쏟아지듯 유영하는 연주는 객석을 빠져들게 했다. 고전의 매력이, 클래식의 진가가 빛을 발하는 무대였다. 채재일(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이 선보인 클라리넷 연주는 ‘충격’이란 단어가 어울렸다. 이날 그는 피아노의 오윤주와 함께 바씨(1833-1871)의 ‘베르디 리골레토 주제에 의한 협주 환상곡’을 연주했는데 화려한 클라리넷 기술을 뽐낸 그의 애티튜드는 ‘피리 부는 사나이’와 같았다. 무대에 완전히 몰두하며 악기와 한 몸이 된 듯 온 열정을 다해 연주하는 채재일의 퍼포먼스는 과연 연주가가 지녀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그의 열정은 객석에 전해지며 관객은 한동안 브라보를 외쳤다. ‘풍요의 여정’이란 주제로 관객을 사로잡은 둘째 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국내 초연의 머스토넨의 곡이었다. ‘2025 평택 실내악 축제(PCMF)’ 예술감독을 맡은 김현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공연에 앞서 경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클래식 레퍼토리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축제에서 매력적인 인물들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번 4일간의 공연에선 로시니, 베토벤, 모차르트 등 고전 작곡가뿐만 아니라 머스토넨(1967~), 페르트(1935~), 셰드린(1932~) 등 현시대의 작곡가와 피아졸라 등 현대의 작곡가들까지 아울렀다. 이 가운데 핀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머스토넨은 김현미 교수가 국내 관객에게 소개하고 싶은 의지가 드러난 인물이다. 이날 국내 초연된 머스토넨의 ‘9중주 제2번’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로 구성된 작품으로 18세기 대위법과 현대의 리듬이 어우러지며 치밀한 구조에서 각 악기가 에너지를 발산하는 곡이다. 특히 머스토넨이 이날 객석을 찾은 관객에게 영상을 통해 전한 인사는 깜짝선물과 같은 즐거움을 전했다. 머스토넨은 영상에서 “베토벤의 현악 4중주는 거대한 숲속을 산책하는 것처럼 들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했다”며 자신의 작품에선 “더블 베이스가 ‘한 끗’의 묘미를 더해 매혹적인 앙상블의 오케스트라를 완성해 줬다”고 설명했다. 4일간의 대축제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피날레 무대 구성 역시 유머가 묻어났다. 멘델스존의 현악 8중주는 무수한 클래식 공연에서 마지막 무대의 레퍼토리로 자리할 정도로 음악사에서 제일 유명한 8중주 작품이다. 김 교수는 마지막 작품으로 스벤센(1840-1911)의 ‘현악 8중주 가장조 작품 3’을 선보였다. 1840년생 노르웨이 오슬로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스벤센은 멘델스존이 설립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그의 절친인 페르디난드 다비드에게 바이올린을, 라이네케에게 작곡을 배웠다. 해당 곡은 멘델스존의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연주 직후 학생으로는 유례없이 유럽 최고의 출판사에서 계약을 제안받기도 했다. 바이올린의 김현미 교수를 필두로 김덕우(중앙대 예술대학 교수) 등과 김상진(연세대 음대 교수) 등의 비올라, 첼로 등은 북유럽 최고 지휘자로 활약하기 전 ‘떡잎부터 남달랐던’ 스벤센의 밝고 생동감 넘치는 감성을 뿜어냈다. 이어진 앙코르 무대에선 멘델스존의 작품이 연주돼 축제의 기승전결을 장식하며 객석의 환호와 함께 의미 있던 장정을 마무리했다. ● 관련기사 : 최정상 음대교수들 모여 ‘틀’을 깨다… 김현미 ‘2025 평택 실내악 축제’ 예술감독 [문화인]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608580188

“프로와 아마추어, 함께 지역 미술 기록”…수원미술협회 ‘2025 수원시 미술단체 아카이브展’ [전시리뷰]

프로와 아마추어가 한데 모여 지역 예술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현직에서 활동하는 프로 미술작가부터, 각자의 영역에서 분주히 생활하면서도 일상에서 창작 활동을 놓지 않는 아마추어까지. 나이도, 성별도, 사연도 각양각색이지만 미술을 사랑하는 만큼은 하나인 이들이 모여 지역 문화예술의 정체성을 더했다. 지난 15일 성황리에 막을 내린 수원미술협회 주관의 ‘2025 수원시 미술 단체 아카이브 展’은 수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전문 미술 단체와 아마추어가 함께 어우러지는 교류전이었다. 수원미술협회는 지난 20여 년간 ‘수원시 미술 단체 연합전-따뜻한 동행 展’이란 이름으로 교류전을 이어왔는데, 올해 21회를 맞이한 전시는 ‘2025 수원시 미술 단체 아카이브 展’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지역 미술의 흐름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공공의 의미로 확대 발전했다. 전시에는 총 24개 단체, 3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관(官)의 주도가 아닌 예술인 스스로가 기획하고 실행한 자발적인 성과다. 현장에는 목공예부터 수채화, 서예, 민화, 서양화 등 다양한 장르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아리 회원들의 작품을 통한 교류가 이뤄졌다. “‘따뜻한 동행’이란 이름의 연합전으로 오랜 세월 이어진 이번 아카이브 전시는 수많은 수원의 미술 단체들에 꿈과 희망의 존재였습니다.” 권청자 화백의 지도를 받는 ‘소망가득’(혜정전통민화작가회) 회원들은 전시의 참여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2006년 결성된 이들은 민화를 통해 서민의 삶과 정서와 소망을 되새기고, 전통문화를 이어가고자 노력하는 데 이번 전시를 통해 공동체 정신과 소박한 철학을 선보였다. 2021년에 결성된 ‘모닝어스’는 14명의 회원이 매주 목요일 모여 일상과 예술을 나누는 공동체다. 주로 직장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코로나 시기에도 새벽 6시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출근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애정을 뿜어냈다. 그런가 하면 천원기 작가를 지도 강사로 하는 ‘광교2동 수채화클래스’ 회원들은 수채화를 통해 일상에서 예술의 감수성을 기르고 창작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1990년부터 활동을 이어온 단체 역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원문화원의 서양화 실기 강좌에 참여한 생활 미술인들로 구성된 ‘문미회’는 전문 작가를 배출하는 등 성과를 이루며 현재는 매주 목요일마다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순수미술 동아리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대준 수원미술협회장은 “미술인과 미술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이 협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며 “공식으로 집계된 적 없는 지역의 미술 단체를 톺아보고, 그림을 전시하고, 도록으로 남기는 의미뿐만 아니라 수원에 어떤 장르의 단체와 생활예술인들이 분포돼 있는지를 파악해 다양한 정책 마련 등에도 활용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고 밝혔다.

수원시립미술관 ‘수마 웰니스’… 단순 관람 넘어 ‘치유 공간’ [현장리뷰]

“캔버스를 흰색 물감으로 전부 덮겠습니다. 이번에는 나를 감싸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낸다고 생각하고 손톱과 스크래퍼를 이용해 캔버스를 덮은 흰색 화면을 긁어내 봅시다.” 마치 흙 속에 감춰진 진주를 찾듯이 11명의 참가자들이 각자의 앞에 놓인 조그마한 캔버스 위를 열심히 긁어냈다. 감정을 억눌렀던 규범에서 벗어나 흰 화면에 감춰졌던, 각자의 소중한 감정의 색채가 하나둘 드러날수록 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지난 30일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마인딩: 마주하기’ 프로그램의 ‘손끝의 위로와 마주하기’ 회차는 한 마디로 ‘비워내고, 다시 채워내는’ 시간이었다. 시민 참가자들은 이날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감정적 규칙과 규범에서 벗어나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마인딩: 마주하기’는 수원시립미술관이 고령화, 우울, 단절 등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예술로 치유하는 사회적 처방 프로그램 ‘SUMA Wellness(웰니스)’ 가운데 일부이다. 수원시립미술관은 지난해 시민의 심리 정서적 돌봄을 위한 ‘SUMA 웰니스’를 시범 운영을 했는데, 올해엔 전문성 강화를 위해 홍익대 교육대학원(미술치료 전공)과 업무협약을 맺고, ‘마인딩: 마주하기’ 프로그램을 공동 기획했다. 미술관이 단순한 관람의 공간이 아닌 치유적 공간으로, 시민들의 삶에 예술이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값비싼 미술 치료프로그램은 미술관이란 특별한 공간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된다. 지난달 9일부터 본격 시작된 ‘마인딩’ 프로그램의 5회차에 접어든 이날은 박다은 홍익대 교육대학원 미술치료 강사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박 강사는 “현대인은 자기 감정을 마주하는 시간이 부족한데, 진정한 마음 챙김의 시작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분은 승차권을 내고 개찰구를 들어갈 수도, 개찰구를 뛰어넘어 무임승차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제일 먼저 수원역 지하철을 모방한 전시장 입구 앞에서 사회적 규칙을 벗어나는 과정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손에 든 표와 옆에 자리한 다른 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당황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미술작품 감상 규칙 깨기의 시간이었다. 고개를 거꾸로 돌려보기도, 앉아서 쳐다보기도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즐겨본 이들은 2층에서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나에게 중요한 감정, 소중한 것, 물질적 가치가 아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떠올려보고 엽서에 적어보겠습니다.” 가족, 건강, 사랑, 행복, 안정, 평온함 등 참가자들은 연필을 쥐어 들고 엽서에 단어들을 적어 내려갔다. 이번엔 소중한 감정에 어울리는 색의 물감을 하나씩 꺼내 들고, ‘붓’이 아닌 손가락을 이용해 캔버스를 채워갔다. 미끄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물감을 손끝의 감각을 이용해 거칠 화면에 그려나가는 체험은 일탈이었다. 이날 현장엔 20대 취업 준비생부터 간호사 직장인 친구, 10년 차 부부, 아픈 어머니를 위한 시간을 마련한 모녀 등 다양한 시민들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각자의 걱정과 불안 등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간호대학 동기와 함께 자리한 김연주씨(가명·20대)는 “직장에서 일하며 ‘감정’은 불필요한 ‘소비’라 느껴져 일부러 꾹꾹 닫아뒀는데, 오늘 억눌린 감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장전문의 간호사인 김씨는 이날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커다란 심장을 그렸다. 아내와 함께 현장에 자리한 이기엽씨(38)는 “평소 미술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는데, 프로그램을 따라가다 보니 예술이 가깝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아내 강초롱씨(35)는 “처음 그림을 그릴 때는 ‘잘못 그렸나’라고 생각했는데 완성된 그림을 보니 너무 만족스럽다”며 “후회하는 습관 대신 나 자신에게 만족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련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남기민 수원시립미술관 관장은 “앞으로도 ‘예술을 통한 돌봄’이라는 주제로 미술관의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을 담은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색채의 향연, ‘세헤라자데’로 춤추다...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공연리뷰]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 개관 1주년을 기념해 1989년 첫선을 보인 ‘교향악축제’가 올해로 37회를 맞았다. 지난달 1일부터 20일까지 전국 18개 교향악단이 참가한 이번 축제의 10번째 무대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11일 장식했다. 이 밖에도 2일 인천시향, 4일 수원시향, 20일 경기필 등 경기·인천 교향악단이 무대에 섰다. 전국 교향악단의 18개 음색이 한 무대에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는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를 목표로 전국의 교향악단이 한 무대에 오르는 유일무이한 축제로 자리매김해 왔다. 올해 교향악축제엔 특히 젊은 지휘자들과 역대 최다 해외 협연자가 출연해 클래식 팬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4월 11일 금요일 무대에 오른 부천필은 앞서 1일 제4대 상임지휘자 프랑스 출신의 아드리앙 페뤼숑을 위촉했다. 2014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로 정식 데뷔한 페뤼숑은 2021년 라무뢰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약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까지 서울시향의 수석 팀파니스트로 클래식 팬들에게 각인된 음악가다. 페뤼숑은 10일 부천아트센터에서 같은 레퍼토리를 미리 선보였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여자 주인공 ‘세헤라자데’를 주제로 한 두 작품 라벨의 ‘세헤라자데: 요정 서곡 M.17’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Op.35’를 처음과 끝에 연주하고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26’을 박지윤의 협연으로 올렸다. 색채의 향연, ‘세헤라자데’로 춤추다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세헤라자데: 요정 서곡’은 1898년 초연 당시 “러시아 악파를 서투르게 흉내 낸 거친 데뷔작”이라는 비평을 들었다. 여기서 비교된 ‘러시아 악파’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1888년)로 부천필은 두 작곡가가 다른 색채로 풀어낸 ‘세헤라자데’를 한 무대에서 연주했다. 1988년 창단한 부천필의 연주력은 그간 소화해 온 레퍼토리만으로도 증명이 된다. 쇤베르크, 바르토크 등 20세기 작품을 국내 초연했으며 브람스,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가졌다. 무엇보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말러 시리즈는 우리나라에 말러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국내 클래식계의 한 획을 그었고 국내 최정상 오케스트라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날 교향악축제에서 페뤼숑이 이끄는 부천필은 앞으로 보여줄 시너지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페뤼숑이 이끄는 부천필의 음색은 ‘파도’ 그 자체였다. 오보에로 시작된 선율의 흐름을 현악기가 받고 화려한 금관이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현악기의 음색은 때로는 소극적으로, 때로는 큰 무리를 지어 요동쳤다. 페뤼숑의 손짓에 따라 음색이 출렁였고 ‘공기 반 소리 반’의 미덕이 오케스트라에서도 구현될 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모티브를 둔 ‘세헤라자데’가 ‘바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모르더라도 부천필의 입체감 있는 연주가 망망대해의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에서는 높고 거친 파도의 움직임이 더욱 극적으로 다가왔다. ‘바다와 신밧드의 배’, ‘칼린더 왕자의 이야기’, ‘젊은 왕자와 젊은 공주’, ‘바그다드의 축제-바다-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배’ 등 악장마다 붙은 표제가 상상의 틀을 잡아줬다면 부천필의 연주는 관객을 바다에 떠 있는 배 위로 이끌었다. 특히 전곡에 걸쳐 등장하는 세헤라자데 모티브와 바이올린 솔로는 때마다 다른 호흡과 감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했다. 한편 협연자로 나선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으로 활동하며 실내악 연주에도 조예가 깊은 연주자다. 연주 전부터 브루흐 협주곡 중 ‘가장 풍부하고 유혹적’이라는 평을 듣는 작품 1번을 섬세하고 부드러운 박지윤의 바이올린이 어떻게 발현해낼지 귀추가 주목됐다. 박지윤의 바이올린은 브루흐 협주곡이 요구하는 물리적인 ‘세게’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의 부드럽고 풍성한 음색을 무기로 우아함의 절정을 보였다. 앙코르로 연주한 라벨의 ‘하바네라 풍의 소품’도 신비로운 하프 반주와 어우러져 박지윤의 바이올린을 더욱 매혹적으로 느끼게 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노부스콰르텟이 완성하는 현악사중주 [공연리뷰]

2007년 결성해 어느덧 19년 차를 맞은 노부스콰르텟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대표 현악사중주 팀이다. 멘델스존, 베토벤, 쇼스타코비치 등 전곡 완주에 능한 이 팀은 3월 1일 부천아트센터 외 세 곳에서 두 번째 브람스 전곡을 완주했다. 지성인의 대화, 우아한 토론 괴테는 현악사중주에 대해 “4명의 지성인이 나누는 대화”라고 표현했다. 반원 형태로 무대에 앉아 각자의 프레이즈를 연주하고, 서로의 소리를 듣고, 동시에 소리 높이는 모습을 떠올려 보니 꽤나 우아한 토론의 모습 같기도 하다. 독주나 피아노와의 듀오에 익숙한 현악 연주자들도 실내악, 그중 현악사중주는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연주 영역이자 잘하고 싶은 편성으로 꼽을 정도로 현악사중주 활동에 적극적인 편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현악사중주단은 긴 시간 팀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고 있으며 현악사중주를 위한 레퍼토리도 고전부터 현대까지 풍부하다. 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는 모두 바이올린족에 속하는 현악기로 어찌 보면 음역 외엔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간혹 일반 청중은 현악사중주를 다소 진입장벽이 높은 편성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현악사중주 연주자들은 비슷한 음색의 악기 4대가 서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할 때보다 일치를 이루는 것이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비로소 네 대의 악기가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냈을 때 ‘완벽한 앙상블’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07년 결성해 올해로 19년 차를 맞은 노부스콰르텟의 등장은 ‘실내악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그야말로 반갑고 귀한 소식이었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으로 뭉친 이들은 결성 원년 멤버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40)과 김영욱(36), 2018년 합류한 비올리스트 김규현(36), 2020년 합류한 첼리스트 이원해(34)로 구성돼 있다. 2008년 오사카 콩쿠르 3위를 시작으로 2012년 뮌헨 ARD 콩쿠르에서 2위 수상, 2014년 제11회 모차르트 국제 콩쿠르 우승을 통해 실내악을 향한 본인들의 ‘진심’을 검증받았다. 연주자·관객 얼마나 빨리 몰입하느냐가 관건 국내외 실내악 팬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각인한 이후 노부스콰르텟은 2020년 멘델스존 현악사중주 전곡(6곡) 연주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현악사중주 전곡 연주에 돌입한다. 2021년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전곡(15곡)을 나흘에 걸쳐 완성했으며 그해 8월 브람스 현악사중주 전곡(3곡)을 연주했다. 런던 위그모어홀 상주음악가로 선정된 2022~2023 시즌엔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16곡)에 도전했고 올해 프랑스 클래식 레이블 아파르테를 통해 여섯 번째 음반 ‘브람스’를 발매하며 다시 한번 브람스 전곡 연주에 나섰다. 브람스의 현악사중주 작품은 세 곡뿐이지만 이 곡들을 완성하기 전 스무 곡에 달하는 현악사중주 곡을 폐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브람스 스스로 현악사중주 작품에 대한 기준이 높았고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완성된 1번의 1악장은 시작부터 많은 음과 세밀한 멜로디를 뿜어냈다. 평소 음향 좋기로 손꼽히는 부천아트센터이지만 브람스 현악사중주 1번의 쏟아지는 멜로디를 소화하기에 다소 과한 울림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어떤 무대건 첫 곡, 첫 악장에서는 연주자들도 몰입이 덜 된 상태이기 마련인데 그렇게 영점이 잡히지 않은 연주에는 아무리 좋은 공명이라도 약간의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또 한번 깨달았다. 노부스콰르텟은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고정하지 않고 작품에 따라 변화를 주고 있다. 이날 브람스 전곡 연주에서도 첫 곡 ‘1번, Op.51-1’은 김영욱이 제1바이올린으로, 김재영이 제2바이올린으로 나섰고 ‘2번, Op.51-2’와 ‘3번, Op 67’은 바꿔 연주했다. 앙상블이 연주에 몰입하고, 청중이 작품에 빠져드는 데 제1바이올린의 역할은 크다. 김영욱의 제1바이올린은 스스로 조금 두드러지더라도 확실하고 빠른 방법으로 팀을 깨워 앞장서 끌고 나가는 모양새였다면 김재영은 맨 뒤에 서서 상황을 살피면서 나머지 세 악기의 틈을 메우고 아우르며 지지하는 방식이었다. 완전히 다른 두 스타일의 제1바이올린이어서 이것 또한 노부스콰르텟 연주의 장점이자 특징이었다. 2027년은 베토벤 서거 200주기이자 노부스콰르텟 창단 20주년이 되는 해로 노부스콰르텟은 베토벤 전곡을 다시 연주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20대부터 시작된 이들의 대화가 세월의 변화에 따라 어떤 깊이와 이야기를 더할지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오케스트라와 지역 예술인들의 하모니…2025 수원 음악인의 밤 [공연리뷰]

관객은 지역의 수준 높은 음악가를 알게 되고, 교향악단은 평소와는 색다른 구성의 작품을 연주해 보며, 음악인들은 지역의 전문 교향악단과 합을 맞추며 큰 무대에 서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뜻깊은 밤이었다. 지난 13일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서 열린 수원시립교향악단 기획연주회 ‘수원 음악인의 밤’은 축제의 장이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수원 음악인의 밤’은 (사)수원시음악협회의 추천을 받아 선정된 지역 음악인들이 매년 수원시향의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선보이는 지역 문화예술 교류의 장이다. 이날 축제의 시작을 알린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에서는 호스트 격인 수원시향 오케스트라의 매력이 한껏 드러났다. 이 곡은 스코틀랜드 핑갈 동굴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 커다란 암굴 부근의 경치 등 자연이 지닌 분위기와 전설적인 사건이 소재가 돼 장엄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특징이다. 지휘를 맡은 신은혜 수원시향 부지휘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현악기의 한가운데로 흐르는 오보에의 선율은 동굴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떠올리게 했다. 이어진 모차르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마주 본 두 대의 피아노 사이로 각각 붉은 색과 검정 드레스로 상반된 아우라를 풍기는 수원음협의 두 피아니스트 황수연, 김은아가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마치 핑퐁처럼 음을 주고받으며 한 대가 경쾌한 마디로 문을 두드리면, 다시 상대가 묵직한 음으로 대답했고 여기에 오케스트라가 풍미를 더했다. 모차르트가 그의 누이 ‘난네르’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 작품은 특히 제3악장 ‘론도’에서 가장 다채로운 구성을 보여줬다. 수원시향의 현악기가 론도 주제를 시작하고, 이어 피아노가 빠르게 악상을 이끌어 가며 흥겨움을 더했다. 이날의 묘미는 색소포니스트 임승훈이 함께한 이베르의 ‘색소폰을 위한 작은 협주곡’이다. 색소폰은 풀 사운드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며 곡 자체도 흔치 않기에 이날 연주는 관객으로선 자주 접하기 어려운 무대였다. 해당 곡은 1900년대 초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고 자리매김한 이베르가 알토 색소폰과 플루트, 바순, 오보에, 호른 등 현악기를 위해 만든 협주곡으로 색소폰 연주자 지그문트 라셔에게 헌정된 곡이기도 하다. 서정적인 곡의 분위기를 뚫고 나오는 색소폰의 중후하면서도 세련된 음색은 객석으로 피어올랐고, 그의 솔로 연주에 화답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풍성함을 더했다. 흔치 않은 조합에서 매력적인 무대로 마무리된 연주에 객석에서는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이날 객석에서 가장 큰 기대와 관심을 받은 건 첼리스트 권새롬과의 협연 무대였다. 대미를 장식한 곡은 첼로의 모든 음역을 사용하며 연주자에게 숙달된 테크닉을 요구하는 고난도 작품으로 유명한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 1번’이었다. 세 개의 악장이 중단되지 않고 연주되는 기법은 생상스 특유의 창의성을 엿보게 한다. 이날 객석에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과연 이 고난도의 작품을 권새롬과 수원시향이 어떻게 선보일지 기대감이 한껏 더해졌다. 이날 권새롬은 숨 쉴 틈 없는 연주를 마치 첼로와 한 몸이 돼 선보이며 객석을 감탄의 시선으로 숨죽이게 했다. 그는 첼로 위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화려한 기교를 소화해 냈다. 권새롬의 솔로에 이어서 특히 그를 둘러싼 바이올린의 향연은 압권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의 주제가 다시 나타나고, 화려한 주제들이 첼로와 오케스트라로 번갈아 주고받는 마무리는 피날레다웠다. 수준급 연주를 펼친 지역 음악인과 시립교향악단의 어우러짐에 관객들의 박수갈채는 오랫동안 공연장을 메웠다. ● 관련기사 : “지역 음악인과 함께”… 수원시향, 13일 ‘수원 음악인의 밤’ 개최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303580147

“고통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노래 [공연리뷰]

성남시립합창단의 정기연주회가 2월 7일 금요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김성진의 지휘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Op.45’를 연주했으며 소프라노 홍주영, 바리톤 양준모, 성남시립교향악단, 수원시립합창단이 함께했다. ‘고통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령미사곡’으로 해석되는 레퀴엠(Requiem)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에 따라 라틴어 가사가 붙고 입당송(Introitus), 자비송(Kyrie), 거룩하시도다(Santus), 부속가(Sequentia),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 등의 순으로 악장이 나뉘어 연주된다. 2월 7일 성남시립합창단이 노래한 브람스의 ‘Ein Deutsches Requiem(독일 레퀴엠)’은 자신의 평생 스승인 슈만과 어머니를 비슷한 시기에 잃고 슬픔에 잠겨 쓴 작품으로 1859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완성한 역작이다. 미사 전례에 따른 레퀴엠이 아닌 브람스 자신이 발췌한 성경 구절을 조합했으며 종교는 없었지만 신교에 영향을 받은 브람스였기에 라틴어가 아닌 자신의 모국어 독일어 가사를 붙였다. 보통의 레퀴엠이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donna eis, Domie)’, 즉 세상을 떠난 이의 넋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는 반면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로 시작해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기도 한다. 총 7장으로 구성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중 ‘제1곡: 합창’은 ‘찬가(Hymn)’ 그 자체였다. 가사 내용을 모르는 사람도 ‘다 괜찮다, 지나간다’는 위로를 느낄 만한 정제된 합창의 진수였다. 오케스트라의 낮은 음역을 담당하는 현악 파트의 더블베이스, 첼로, 비올라와 금관악기의 튜바 및 트롬본, 목관악기의 바순 등이 최소한의 선율을 연주했고 인간의 목소리로 ‘고통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Selig sind, die da Leid tragen)의 메시지를 전했다. 영혼을 위로하는 목소리 이날 솔리스트로 무대에 선 소프라노 홍주영과 바리톤 양준모는 각각 제5곡과 3, 6곡을 노래했다. 바리톤 양준모는 독일 레퀴엠 무대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협연자 중 한 명으로 제3장 “주님, 제 끝을 알려 주소서. 제가 살 날이 얼마인지 알려 주소서”의 절절함을 영락없이 소화해냈다. 단, 독일 레퀴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3장에서 솔리스트와 합창이 만나 시너지가 폭발할 것을 예상했으나 서로 주춤거리는 인상이 아쉬웠다. 반면 6곡에서 등장한 바리톤 솔로와 합창은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음’을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음’을 교대로 주고받으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위로받고 싶은 마음 뒤에 우리 모두에게 올 죽음에 대한 의연함을 균형감 있게 노래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화려한 솔리스트가 무대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날 84명의 합창단이 뿜어내는 음색의 일체감과 화려함, 섬세함과 웅장함은 그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아름다웠다. 브람스가 직접 편곡한 ‘피아노 듀엣과 합창을 위한’ 독일 레퀴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덮고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리고 있을 영혼을 위로하는 것은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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