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공동체와 개인 오가는 선택… 오산시립미술관 ‘일인가구’ 展

오늘날 꾸준히 늘어가는 1인 가구는 더이상 특별한 사회집단이 아니다.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지난 영향 때문인지 관계 속의 고립, 공존 속의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젠 누구에게나 그런 형태의 삶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 지난 17일부터 시작된 오산시립미술관 특별기획전 ‘일인가구’ 전은 집단 속에 머물렀던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을 찾아가는 길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방문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13인(팀)의 작가들이 모여 풀어낸 ‘자발적 고립’, ‘발화’, ‘공감’ 세 개의 주제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집단과 개인을 오가는 선택에 직면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발견한다. 먼저 2층의 첫 섹션인 ‘자발적 고립’이다. 누구나 공동체를 벗어나 홀로 살아갈 때는 자신의 일상을 다시 살펴볼 기회를 얻게 된다. 전윤정, 염지희, 윤민섭, 안경수 작가는 이런 점에 착안해 작품을 구성했다. 특히 전윤정 작가의 ‘Black hair Rapunzel’은 캔버스 위에 표현된 검은 선의 집합으로 홀로 갇힌 긴 머리의 라푼젤을 형상화했다. 선은 하나이지만 여러 선들이 뭉치면 집단처럼 보이기에, 홀로 있는 존재를 구성하는 세계의 구성 요소 면면에 대해서 쉽게 정의 내릴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엿보인다. 두 번째 섹션 ‘발화’에선 표영실, 이지영, 지희킴, STUDIO 1750의 작품들을 통해 개인을 둘러싼 세계의 변화를 느낀다. 1부의 작품들이 자신과 그 주변에 초점을 맞춰 응시하는 방법을 공유했다면, 2부의 작품들은 각자가 타인과 맺는 관계에 무게를 두면서 방향성이 확장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지영 작가의 ‘네면의 집’에선 내부를 의도적으로 비워놓고 누군가가 들어갈 법한 문을 열어놓은 채로 기다리는 기묘한 집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집에 있어야 하며, 그 사람이 집의 어떤 공간에서 누구와 만나게 될지는 그림을 보는 이들 각자가 떠올려야 할 몫이다.  STUDIO 1750(손진희·김영현) 팀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의자와 침대 등의 생활 가구를 조명한 ‘XX씨의 방’ 시리즈에선 매트리스가 침대 프레임을 벗어나 크게 부풀려져 있거나 의자의 쿠션보다 한참 커져버린 나무 프레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상 속 사물이 왜곡된 모습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세상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감’을 키워드로 체험의 공간을 만난다. 1부와 2부에서 관람객들은 개인이 집단과 어울릴 때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에 빠졌던 작가들의 사유를 경험했다. 이번 섹션에 마련된 설치 작품과 애니메이션 및 단편 영화들은 앞서 봤던 작품들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1부에서 물리적인 확장을 담아냈던 윤민섭의 ‘Room series’가 방의 공간 속성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다룬 정다희의 단편 애니메이션 ‘빈 방’과 소통할 수 있다. 특히 최수환 작가의 ‘함께, 혼자’는 철골 사각 구조물에 두 개의 문이 달려 있는데, 사람이 문을 열고 드나들 때 안팎의 경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상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오산시립미술관 관계자는 “자신과 주변의 사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메시지를 주는 전시”라며 “홀로 또 같이 살아가는 사회를 살면서 느껴봐야 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4월9일까지.

[전시리뷰] 첨단 기술로 담아낸 예술의 빛… 미구엘 슈발리에 '디지털 뷰티'

기술과 예술, 이질적인 두 세계가 만나 매일 새롭게 쓰는 디지털 아트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미구엘 슈발리에가 선보이는 ‘디지털 뷰티’가 서울시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지난 18일 개막했다. 아라아트센터 5개 층을 활용해 열리는 이번 전시는 14개의 설치 작품 외 드로잉, 다큐멘터리 등 총 70여점으로 구성돼 작품 미구엘 슈발리에의 갤러리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다. 미구엘 슈발리에는 1980년대 이후부터 예술적 표현 수단을 오직 컴퓨터에만 집중한 작품들을 공개해 왔다. 홀로그램, LCD·LED 화면, 3D 프린팅 조형물 등 발달된 현재의 기술로 작품을 만든다.  전시의 묘미는 관람객이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체험형 전시라는 점이다. 전시를 찾은 방문객들은 작품을 단순히 눈으로 관람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작품 속에 녹아들고 직접 이를 만드는 등 작품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작품은 이를 이용하는 관람객의 고유한 몸짓에 따라 형태가 변해 매분 매초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지하 1층에 마련된 전시장에 들어서면 3면을 가득 채운 ‘그물망 복합체’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오늘날 우리가 맺고 있는 온‧오프라인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수많은 선이 얽히고 설켜 있다. 작품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선은 깨져 나가기도 다른 모양과 다른 색의 선으로 변하기도 한다. 지하 1층부터 지하 4층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작품을 관람하게 돼 있는데 계단 바로 위 천장에 설치된 ‘라이좀’은 어느 층에서도 바라볼 수 있다. 1천500개의 강철 막대와 UV 라이트로 구성돼 있어 라이좀이 생성하는 빛이 전시장 전체를 아우른다. 불규칙하게 연결된 막대들은 ‘디지털 뷰티’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지하 3층에선 미구엘 슈발리에와 패트릭 트레셋의 협업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디지털 예술과 로봇 예술이 결합한 ‘어트랙터 댄스’는 5개의 관절형 로봇팔이 쉴 새 없이 드로잉을 한다. 로봇은 동일한 간격으로 동그랗게 설치된 채 깃털을 달고 움직여 마치 무대 위에서 군무를 펼치는 예술가를 연상시킨다. 1년여 이어지는 전시 동안 로봇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그려낼 예정이다. 어트랙터 댄스를 지나 옆에 위치한 룸으로 들어서면 로봇이 만들어낸 선들이 작품이 돼 방을 아우른다. 대형 스크린 양옆으로 설치된 통거울은 공간을 무한정 연장해 작품을 끝없이 이어지게 한다. 관람객은 마치 또 다른 세계에 놓인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전시장 말미에 설치된 ‘디지털 무아레’와 ‘매직 카페트’ 역시 눈길을 끈다. 1950~60년대 옵아트를 재현한 14m 높이의 디지털 무아레는 기하학무늬의 그래픽으로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그 아래 놓인 매직 카페트는 눈밭에 발자국을 새기듯 발걸음의 흔적을 남길 수 있어 재미를 더한다. 지상 5층에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는 꽃이 피어나고 자라는 순서를 대형 화면에 담아낸다. 여덟 개의 꽃이 피고 지는 사이클을 통해 사람의 탄생과 삶,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 최첨단 기술을 통해 담아낸 작가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기술도 단순한 화려함도 아닌 삶과 자연, 사람이다.  전시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미구엘 슈발리에는 “오늘날 우리가 쉽게 접하거나 볼 수 있는 기술을 이용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담아내고 싶었다”며 “작품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 관람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2024년 2월11일까지. 

[전시리뷰] 보편성에서 찾아낸 새로운 이미지…‘틈의 풍경 between, behind, beyond’

자신만의 세계 구축과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30대 작가들인 김세은, 라선영, 송수민, 황원해 등 4인을 주목하는 자리가 파주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 마련됐다. 젊은 작가들을 조명하는 ‘미메시스 아티스트 프로젝트’의 다섯 번째 기획전인 ‘틈의 풍경 between, behind, beyond’다. 이들의 작품에는 보편적인 도시와 공간, 사람과 자연의 이미지를 다루는 시선이 녹아 있다. 작가들은 표면과 이면, 그 사이 생겨나는 틈을 각자의 방식대로 응시한다. 저마다 결이 다른 네 명의 작가들이 세상을 독해하는 관점을 어떤 측면에서 공유하는지 곱씹어보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전시의 매력을 발견한다. 자연광이 때때로 스며드는 1층에선 라선영 작가의 작품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얼굴 없는 사람 조각들이 교복, 작업복, 운동복을 입고 있다. 각자의 직업과 생활 영역 특성으로 세분화된 다양한 인간 군상은 삶의 풍경을 반영하는 하나의 소통 창구다. 이때 조각들은 눈높이보다 낮은 곳 혹은 바닥에 놓여 있어 관람객들이 조각을 조망하듯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객관화된 시선은 곧 개체와 개체 사이의 틈을 눈여겨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2층에선 작가들의 지난 전시 활동, 작업 동향 등의 궤적이 담긴 글과 영상 자료를 만날 수 있는 아카이브룸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눈을 돌리면 회화 작가 세 명의 시선이 공존하는 장이 펼쳐진다. 송수민 작가의 작품에선 회화와 공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는 전체를 먼저 구성하는 대신, 부분에서 출발해 하나씩 연상하며 확장한다. 캔버스의 형태와 갯수를 조정하는 것 역시 그런 관점의 연장선이다. 작가는 여러 개의 캔버스가 연결된 거대한 작업인 ‘고요한 소란 1+2’에서 화산폭발과 들꽃의 이미지를 다양한 시점으로 조합했는데, 이를 통해 재현된 풍경보다는 풍경과 풍경 사이의 상상지대이자 모호한 틈새의 풍경이 생겨난다. 송 작가의 작품 곁에 김세은 작가의 작품도 보인다. 도시와 자연을 본 뒤 느낀 감정을 형상화한 것인지, 눈에 비친 모습 자체를 뒤틀리게 그려낸 것인지 모호하게 보인다. 어쩌면 김 작가의 작품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경험을 넘어서는 도시 곳곳의 이미지를 감각으로 드러내려면 추상의 형태에 가까워져야 하는 건 아닐까. 같은 층에선 황원해 작가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황 작가는 도시 건축물의 부분에 내재한 물성, 도시의 평면성, 입체와 평면 사이를 오가는 이미지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그는 ‘Facade in facade’, ‘Moire’ 등에서 그림 속 요소들의 결합과 와해를 통해 화면 영역에 표현되는 조형성이나 움직임을 잡아내는 과정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이 송수민, 김세은, 황원해 작가의 작품들이 일정 구간마다 느슨하게 교차되는 광경을 2층에 이어 3층에서도 지속해서 만난다. 이에 따라 관람객들은 세 작가가 각자의 대상에서 찾아낸 균열을 통해 이들의 작품 세계가 어떤 공통분모로 연결되는지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전시를 기획한 김미금 큐레이터는 “인간과 공간 등의 테마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가는 동시대 작가들의 한 경향에 주목하고자 했다”라며 “재구성된 풍경이 만들어내는 탐색지대를 살펴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24일까지.

[전시 리뷰] “형태가 변하는 모든 것이 조각”…수원시립미술관 ‘에르빈 부름: 나만 없어 조각’

조각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지난 7일부터 열린 ‘에르빈 부름: 나만 없어 조각’ 전시는 우리나라와 오스트리아의 수교 130주년을 맞아 오스트리아 대표 현대미술작가 에르빈 부름의 작품 세계를 담아냈다. 타이틀 ‘나만 없어 조각’은 ‘조각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갖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에르빈 부름은 1980년대부터 조각의 본질과 형식을 탐구해 형태 변화, 부피 증감 등 모든 현상 자체를 조각으로 정의한 작가다. 비만·행위·시간 등 형태가 변하는 모든 것들을 조각으로 재정의 한 그의 시선이 61점의 조각, 사진·영상, 퍼포먼스 작품에 담겨 예술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이번 전시는 연도 순이 아닌, 작가가 조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됐다. 1부 ‘사회에 대한 고찰’에서는 부피를 변형시킨 작품들이 등장한다. 먼저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차량의 부피가 풍선처럼 늘어난 ‘팻 컨버터블(팻 카, Fat Car)’이다. 소비에 대한 욕구가 부풀려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표현한 조각 뒤에 놓인 모니터에선 팻 카가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굵은 목소리로 무기·마약 등 무거운 주제를 언급해 사회문제를 환기한다. 2부 ‘참여에 대한 고찰’에서는 ‘만지지 마세요’가 아닌 ‘참여하세요’라고 말한다. 특히 에르빈 부름을 다시 작가로 도약하게 한 ‘1분 조각’은 물성뿐만 아니라 시간성도 조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분 조각’은 ‘동작의 속도를 늦춘다면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아이디어에서 조각의 개념을 확장한 작품이다. 예로 작품 중 하나인 ‘에피쿠로스 태양 아래 빛을 쬐시오’는 천장에 걸린 램프와 받침대, 벽면의 지시 드로잉과 작품 사이에 신체부위를 두고 조각이 돼 보는 관객으로 이뤄진다. 관객이 직접 작품에 손을 대거나 밟아 보는 등 참여자가 조각 자체가 되는 형태를 볼 수 있다. 3부 ‘상식에 대한 고찰’에선 조각에 대한 상식을 깨는 작품을 마주한다. 일반적으로 사진과 평면을 조각이라고 보지 않지만, 납작한 것들도 조각의 양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관점이 드러난다. 작가가 스스로를 모델로 찍은 ‘사진 조각’에선 예술가가 항상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통념과 정반대인 ‘게으름, 잠, 멍때리기’ 등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 관습처럼 이어오는 생각에 대한 의문이 묻어난다. 이어 실제 모델의 옷과 팔·다리 등 표면 일부를 캐스팅한 ‘스킨조각’과 그림을 걸어 둔 ‘평면 조각’은 덩어리가 아닌 껍데기를 조각으로 남겨두며 ‘조각’에 대한 상식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조각은 모든 현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이자 사회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구다. 현실적이어야 사람들이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은 정치로 모두 해결할 수 없으며 예술을 통해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라고 말한 에르빈 부름의 통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전시는 내년 3월19일까지 열린다.

[전시리뷰] 국내 도자사 새롭게 조명…경기도자박물관 ‘흑자 : 익숙하고도 낯선, 오烏’

도자기를 떠올릴 때 오묘한 검은 빛을 띠는 ‘흑자’를 단번에 생각해내는 이는 드물 테다. 청자와 백자로 수놓인 한반도의 도자기 역사를 짚어본다면 흑자는 제법 낯선 존재다. 하지만 흑자엔 긴 시간 동안 누적된 우리 민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흑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을 맴돌았고,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삶과 관계를 맺었을까. 경기도자박물관에선 지난달 29일부터 ‘흑자: 익숙하고도 낯선, 오烏’ 기획전을 열어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전시는 흑자의 뿌리에서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우리 도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흑자에서 풍기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매력과 고유한 가치를 알린다. 칠흑같이 어둡게 주변에 스며들다가도 때때로 오색으로 반짝이는 흑자의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경기도자박물관 측은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박물관 등 국내 주요 박물관 및 개인 소장가와 협력해 고려시대 이전부터 근대까지의 ‘흑자’ 및 관련 자료 70점을 전시장에 가득 채웠다. 1부 ‘검은 빛으로부터’, 2부 ‘까마귀를 걸친 은둔瓷(자)’, 3부 ‘빛, 변용과 계승’ 등 총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 고려와 조선, 일제강점기 시기를 수놓았던 흑자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흑자가 국내로 유입된 시기는 삼국시대 전후로 추정된다. 이후 중국에서 꾸준히 수입되던 흑자는 자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자리 잡힌 고려시대가 돼서야 비로소 생산되기 시작했다. 고려가 해상무역이 발달한 데다 송나라의 차(茶)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흑자 문화와 연결된다. 그에 따라 이 시기의 흑자는 그릇이나 다완(찻잔) 등 실생활의 영역에서 많이 보였다. 당시 흑자는 청자를 생산하던 가마에서 함께 구워졌기 때문에 동일한 기형을 가진 청자와 흑자가 함께 발견되기도 했다. 이처럼 1부 전시공간에선 ‘흑유 탁잔’, ‘흑유 주자’ 등의 흑자를 통해 송나라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고려 시기의 흑자 문화가 어떻게 형성, 발전됐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2부에선 조선 시대로 들어서면서 변화하는 흑자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사실 흑자는 당시 조선 백자나 고려 청자 만큼 영향력을 끼치는 도자기가 아니어서 생활 영역에서 골고루 쓰이지는 않았지만 음식을 담는 그릇뿐 아니라 장이나 육류를 저장하거나 운반하는 용기로 쓰임새가 확대되기도 했다. 전시장을 거닐다 보면 흑자가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서 보듯 주병으로도 많이 쓰였다는 점도 확인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파주, 포천, 가평 등지에 전용가마가 생겨나면서 수요와 생산량이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는 등 흑자를 둘러싼 문화 전반의 변화 양상을 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생산되던 흑자는 수요와 용도가 다양해진다. 조선 때처럼 도자 본연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기념품으로도 많이 생산됐다는 데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흑자 문화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며 과도기를 겪는다. 당대 생산됐던 도자엔 외세에 의한 산업화와 전통 계승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흔적처럼 배어 있기 때문이다. 강명호 경기도자박물관장은 “우리의 도자문화를 풀어낼 때 백자나 청자 위주로 인식하던 기존의 틀을 바꾸는 시도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며 “이번 전시가 국내 도자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이자 마중물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내년 3월26일까지.

[전시리뷰] ‘죽음을 대하는 선조들의 마음’…경기도박물관 특별전 ‘경기 사대부의 삶과 격, 지석’

조선 시대 장례 문화를 수놓은 ‘지석’에 적힌 글귀를 음미하다 보면, 당대 사대부들의 살아 생전 모습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글씨를 써서 남긴 이들이 죽은 이의 삶을 정확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올곧은 정신, 삶을 대하는 태도를 정성껏 추모하는 글자 속에서 발견한다. 경기도박물관의 특별전 ‘경기 사대부의 삶과 격, 지석’이 지난 7일부터 개막해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국내의 공립박물관 가운데 지석을 최다 소장한 도박물관이 조선시대의 지석들을 한데 모아 선보이는 자리라는 점에서 뜻깊다. 1부 ‘예禮를 다하다’, 2부 ‘삶을 기록하다’, 3부 ‘경기사대부의 정신을 잇다’의 구성을 통해 관람객들은 지석의 의미와 유래, 시대별 지석 생산 문화의 변천, 그리고 그에 담긴 사대부들의 삶과 후손 이야기 등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지석은 죽은 이의 인적 사항과 무덤의 위치 정보 등을 적어 넣어 시신과 함께 매장하는 도자기판 내지는 판판한 돌이다. 기원전 3세기께 중국 진나라 때 등장한 지석 문화는 국내에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널리 유행했다. 고려 때의 지석은 돌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고 불교식 화장 문화와 혼합되기도 했다. 조선 때에 이르면 유교 문화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는데, 계층에 따라 재질이 다르게 생산됐다. 유교를 통치 이념 삼았던 조선 시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에는 ‘주자가례’(사람이 일생 동안 거치는 관혼상제 예절을 다룬 책)에 따른 장례 절차와 기준 등이 수록됐고, 그 속에 지석 제작과 매납 방식에 대한 내용이 발견된다. 경기도에서 출토된 지석에서는 조선시대 국가 운영의 핵심이었던 사대부들의 삶과 가치관,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태도 등을 접할 수 있다. 2부 전시장에선 소재와 제작 방식 등에 따라 다양한 모습의 지석을 만난다. 음각, 상감, 청화, 철화 등 글씨를 새겨넣는 방식이 다채롭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의 선조들이 시기와 상황에 맞춰 효와 예의 도리를 다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특히 ‘주자가례’의 원칙을 계승한 조선후기의 지석에는 정갈하고 단정한 멋이 깃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지석을 통해선 사대부의 생전 행적뿐 아니라, 사대부들을 떠나보내는 남은 이들의 비애와 태도를 함께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지석의 제작 시기를 파악하는 작업은 그 집안 가세의 영향력과 수준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3부를 수놓는 5개 가문의 지석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관람객들은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에 자취를 남겼던 사대부들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청송심씨 인수부윤공파, 청송심씨 사평공파, 풍양조씨 화양공파, 기계유씨, 남양홍씨 등이 그들이다. 조선의 지석 문화가 이들 같은 사대부들이 공유하는 특징을 살피는 데 있어 공통 분모가 된다는 데서 전시의 의의가 엿보인다. 김기섭 경기도박물관장은 “지석에 새겨진 사대부의 생전 모습들, 먼저 떠나간 사람를 향한 남은 이들의 마음을 살펴볼수록 나 자신을 돌아 보게 된다”며 “지석을 매개로 경기 사대부의 내면과 생각을 조명하는 이번 특별전이 우리가 그들에게서 어떤 정신을 이어 받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통로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3월26일까지 열린다. 송상호기자

[영화리뷰] 넓어진 무대에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아바타: 물의 길’

2009년 개봉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아바타’의 후속작 ‘아바타: 물의 길’이 13년 만에 극장가를 찾아 화제다. ‘아바타: 물의 길’은 개봉 첫날인 14일에 3시간12분이라는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35만9천288명을 극장으로 불러 모아 흥행 몰이를 예고했다. 이번 영화는 기술력과 비주얼으로 충격을 선사했던 전작과 비교해 어떤 점에서 진보했고, 어떻게 다른 세계관을 묘사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어 더욱 관심을 모은다. 특히 이번 후속작은 3D 안경을 착용한 뒤 산등성이와 열대우림 그리고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OTT 이용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문화에 균열을 낼 수 있기도 하다. 과연 이번 개봉을 계기로 영화적 체험이 가능한 극장의 존재 의의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 ‘에이리언 2’,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통해 ‘속편의 제왕’으로 이름을 날린 제임스 카메론은 사실 ‘어비스’, ‘타이타닉’ 등의 장편과 심해·해양 탐사 등을 다룬 바다 관련 다큐멘터리 여러 편을 통해 바다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꾸준히 반영해 왔다. 이처럼 ‘바다’는 그의 영화를 대변하는 정체성과도 같은 요소라고 볼 수 있기에, 이번 작품은 1980년대부터 이어 온 그의 여정을 집대성한 무대로 볼 수도 있다. 관람 내내 화면을 들여다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영화에 구현된 해양 생물들의 세밀한 움직임이나 수심에 따라 달라지는 바닷속의 풍광을 3D 안경을 낀 채 보고 있으면, 마치 물 속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도 든다. 그만큼 감독이 만든 판도라 행성을 뒤덮는 바다는 오로지 스크린만을 통해서도 오감을 자극하기 때문에 매력이 흘러넘친다. 하지만 판도라 행성의 무대가 한껏 넓어지고 선명해진 대신, 서사의 무게는 줄었고 그 농도 역시 옅어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1편에 이어지는 2편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객들은 식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원주민(나비족)의 갈등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는 전개를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번 영화는 그와 같은 반복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성장’이라는 화두를 내세워 1편의 주요 등장인물로 대변되는 부모들과 자라나는 세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조명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관계들은 거대한 해양 생물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 그 자체에 희석된다. 1편을 통해 판도라 행성이라는 낯선 세계를 창조해낸 제임스 카메론은 13년 만에 찾아온 속편을 통해 오히려 낯선 세계는 없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낸다. 어쩌면 낯선 세계 대신 매혹적인 세계는 있다.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기 위해, 막대한 제작비와 최상의 기술력으로 구현해낸 판도라의 바다는 그 목적을 분명 달성할 것이다. 다만 판도라의 확장은 더 완벽한 세계관을 향한 구축으로 이어질 뿐, 새롭고 참신한 자극과 서사를 접할 기회는 오히려 사라질지도 모른다. 13년 만에 돌아온 ‘아바타: 물의 길’에서 느낄 수 있는 건 그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감독의 야망이 아닐까. 이 야심이 2년 뒤 찾아올 또 다른 아바타의 후속편에서 어떤 모습으로 관객들과 만나게 될지 궁금하다.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움직임'으로 비춰본 새로운 일상…111CM 전시 ‘어제 본 하루 중에서’

‘깨달음’은 특별한 여행이나 큰 프로젝트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일상을 돌아보면서도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 보는 사람의 높이, 그때의 상황, 시간, 위치, 배경 등에 따라 대상에서 느껴지는 것은 달라진다. 수원시 복합문화공간 111CM에서는 대상을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반복적인 움직임을 조각에 담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개관 1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1일부터 일상의 순간들을 이야기와 함께 조형적으로 풀어가는 양정욱 작가의 ‘어제 본 하루 중에서’다. 연초제조창을 리모델링해 문화공간으로 재창조한 111CM의 장소적 특성과 평범한 일상을 돌아보는 작가의 작품은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지나간 것들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번 전시에선 총 9개 작품이 관람객과 만난다. 조각 ‘균형에 대하여’는 집안일, 친구 만나기, 아이 돌보기, 일, 독서 등에 쏟는 시간을 일정하게 보내던 화자가 어느 날 하루를 통째로 한 곳에만 모든 시간을 쏟고,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 매번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양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를 일으키며 균형을 맞추는 일상의 모습을 조각에 투영했다. 반복적인 움직임을 조각에 담아 시간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단지 한순간만을 담지 않는다. 사진 한 장으로는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주변의 모습, 사람들의 사연 등을 멈춰진 형태가 아닌 어떤 순간을 반복시켜서 관객에게 설명한다. 공중에 걸린 조형물을 중심으로 양쪽 구조물이 마주보고 도는 작품 ‘그는 옆이라 말했고, 나는 왼쪽이라고 말했다’는 ‘균형’에 대한 작가의 철학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부부가 그림을 벽에 걸기 위해 못 박을 위치와 그림 액자를 이리저리 옮겨보고 오랫동안 맞춰가는 과정을 나타낸 이번 작품은 서로 간의 설득이 오가는 순간에 맞춰지는 균형이 생동감 있게 드러난다. 반복하는 그의 작품 속 우리가 얻는 것은 위로다. 작가가 표현하는 누군가의 일상은, 또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나무로 만든 낱개의 작은 날개들이 하나의 쌍을 이뤄 날갯짓을 반복하는 모양의 ‘같은 마음으로’는 한쪽 날개만 남은 사람들이 작고 좁은 곳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날개를 젓는 순간을 담아 보는 사람을 달래 준다. 작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누군가의 일하는 모습, 액자 거는 부부 이야기 등 일·관계로 만들어진 균형·습관은 움직이는 조각에 녹아들어 삶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사유할 수 있다. 작품을 만들기 전 작가가 느꼈던 특정한 인상을 글로 세상에 꺼낸 뒤 그 이야기를 조각으로 만들어 간 점도 예술로 포용된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에 어울리는 안경의 크기, 바지의 색, 걸음의 속도, 들썩이는 어깨, 재채기 소리까지 모두 모양으로 재정립했다. 작가가 직접 쓴 소설, 시, 수필 등은 이렇게 벽에 메모지와 테이프로 붙여져 작품을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양 작가는 “작품들을 만들 때 한 가지 상태가 아니라, 계속 맞추고 변화하려고 움직이며 노력하는 ‘균형’을 나타내기 위해 반복적인 순간을 표현했다”며 “111CM에 부분적으로 남은 연초제조창의 골조나 일하던 사람들의 동선 등 은유적 사건을 떠올리며 전시를 구성했다”고 말했다. 평범한 일상을 독특한 그 무엇으로 골똘히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이번 전시는 내년 2월19일까지 열린다. 김건주수습기자

[전시리뷰] ‘색채로 재탄생한 일상의 풍경’…프랑코 폰타나 : 컬러 인 라이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사진작가 프랑코 폰타나의 단독 회고전 ‘프랑코 폰타나 : 컬러 인 라이프’가 국내 최초로 서울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지난 9월30일부터 열리고 있다. 1933년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서 태어난 폰타나는 28세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는 전세계 유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400여회의 개인·그룹전에 출품했고 캐논, 돌체앤가바나 등의 브랜드와도 협업을 이어 온 작가다. 이번 회고전을 수놓은 122점의 사진을 통해 자연, 도시, 사람을 바라보는 폰타나만의 독특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섹션인 ‘랜드스케이프’는 세계 각지를 돌며 풍경에 스며든 폰타나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황금빛, 초록빛의 들판이 프레임 내부를 채운다. 마치 추상 회화를 보는 듯한 색채 대비를 보여주는 ‘바실리카타’, ‘풀리아’ 등의 작품은 그저 눈으로만 인식되는 자연 풍광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작가 스스로가 선택하고 관찰해 만들어낸 또 다른 현실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두 번째로는 ‘어반스케이프’ 섹션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현대인이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상 영역에 있어 폰타나는 친숙한 요소를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의 사진은 일상의 재해석과 재구성에 대한 욕구를 불러 온다. 그가 담아낸 휴스턴, 로스앤젤레스 등의 대도시 건물들과 구조물 등이 뒤섞인 길거리를 통해선 그 도시만이 갖는 특성을 느낄 수 없다. 강조되는 건 색채의 대비와 실험적인 구도, 피사체의 배치를 토대로 만들어낸 매혹적인 형태일 뿐이다. 세 번째 섹션 ‘휴먼스케이프’에선 사람에게도 관심이 많았던 폰타나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든, 그의 인물 사진 역시 다채로운 색의 관계, 통념을 비튼 관점이 녹아든 산물이다. 특히 그가 사람을 찍을 때는 공간과 자연 요소가 함께 섞여 있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인물상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포인트다. 그가 찍은 ‘루체 아메리카나’ 시리즈에선 미국의 인간 군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빛의 특성, 선의 기하학 요소들이 물씬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폰타나는 근대화의 상징인 고속도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피사체를 찍기도 했다. 아스팔트 위 칠해진 페인트 도료, 깨진 도로의 일부 등에선 그가 생각해온 일상의 모습이 다시 한번 재구성된다. 그의 사진은 단순한 재현 혹은 반영이 아니다. 보이지 않던 걸 보이게 하는 그의 작업물은 관람객들이 평소 접하던 일상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셈이다. 전시 해설을 맡은 심성아 도슨트는 “폰타나 작가는 남들이 무심코 놓친 틈새에서 삶의 파편들을 발견해왔다”며 “이번 회고전에선 있는 그대로의 재현보다는 찰나에서 포착되는 컬러를 곧 일상과 풍경으로 연결하는 그의 독창적인 시선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3월1일까지.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경기도미술관 2022 경기작가집중조명 ‘달 없는 밤’

지난 24일부터 ‘2022 경기 시각예술 집중조명 프로젝트’에 선정된 기슬기, 천대광, 김시하 작가의 신작 발표전 ‘달 없는 밤’이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은 경기문화재단과 경기도미술관의 경기작가집중조명전은 사진,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다뤄온 10년 이상 경력의 중진 작가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별빛이 지금 우리에게 와 닿는 것처럼 각기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해 경기도미술관으로 모여든 세 작가들이 관람객들과 만난다. 하늘을 수놓는 별이 또렷하게 눈에 담기는 ‘달 없는 밤’, 세 명의 작품 세계를 지금 여기서 살펴본다. 기슬기 작가는 카메라의 뷰파인더 안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작업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사진을 찍은 이후의 과정에도 줄곧 매달린다. 인화된 사진을 재촬영하거나 원본 이미지에 조작을 가한 뒤 다시 사진으로 출력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이미지에 녹아든 시공간의 궤적을 조명한다. 기 작가는 전시장에 설치와 조명 작업을 마친 뒤 액자 속에 걸린 9점의 사진을 다시 찍었다. 작가는 이렇게 액자 속 원본과 유리에 비친 모습이 겹쳐 있는 작품을 빚어냈다. 한 장의 사진에 전시공간과 작업을 이어온 시간의 흔적이 뒤섞인 채로 겹겹이 쌓여 있다. 관람객들은 유리를 통해 비치는 자신과 나를 둘러싼 전시장의 모습도 발견한다. 무엇이 프레이밍됐을 때 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과연 어디까지가 재현이고 어디까지 복제인가. 기 작가의 사진은 이처럼 사진 매체의 근간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천대광 작가는 개인의 내면이 묻어나는 요소들이 바깥 세상과 호응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려고 한다. 그가 전시장에 마련한 ‘사람의 집’엔 작가 본인의 유년 시절 기억이 투영돼 있다.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 시기, 곳곳에서 건물이 지어지는 광경을 보며 자란 기억을 더듬으며 작업에 임한 천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당대 양옥에서 주로 보였던 슬래브 건축 양식을 녹여냈다. 형형색색의 유리와 통일되지 않은 인테리어가 정제되지 않은 천 작가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 천 작가가 만들어낸 구조물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관람객들은 그가 빚어낸 공간에 스며들 기회를 얻는다. 방을 드나들고, 계단을 올라가면서 빈 곳을 채우는 관람객들로 인해 작가의 개인적인 표현 양식들이 재구성되거나 다시 의미를 획득하기도 한다. 개인이 펼쳐놓은 시공간에 관람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이 작품의 매력이다. 김시하 작가는 대형 설치 작업을 이어오다가 최근 들어 물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조각 작업을 무대로 올려 작품의 존재성을 가늠해보는 자리를 마련하는 데 관심을 보인다. 존재의 본질은 곧 경계와 이어진다. 그는 자연과 인공, 중심과 주변 등 이분화된 개념이 무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을 알아본다. 김 작가는 이번 작품 ‘조각의 조각’을 만드는 데 있어 지금껏 제작해 온 작품들의 파편을 재활용해 무대를 꾸몄다. 무엇이 쓸모있고 무엇이 쓸모없음을 말하고 있는가. 조명과 조각들로 채워진 무대 공간에서 관람객들은 작품의 일부이자 작품 바깥의 관찰자를 오가는 존재가 된다. 전시 공간과 작품 그리고 관람객의 속성을 구분 짓지 않으려는 김 작가의 고민이 묻어난다. 김선영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세 명의 중진 작가들이 구축해 온 작품 세계를 조망하면서도 현 시점에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풀어내는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2월12일까지. 송상호기자

[공연리뷰] 인간의 욕망과 파멸 동시대성 살려 재해석…경기도 극단 연극 ‘맥베스’

‘맥베스’는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충동과 야망에 사로잡혀 눈이 먼 인간이 내면의 갈등에 휩싸인 채 파멸에 이르는 모습을 담아냈다. 경기도극단의 한태숙 감독은 맥베스의 부인을 중심으로 재해석한 ‘레이디 맥베스’를 선보인 바 있는데, 지난 3일부터 고전 ‘맥베스’를 다시 무대 위로 올렸다.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 여러 차례 조명 받아 온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과연 이번에 어떤 모습으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을까. 전박찬 배우가 연기한 맥베스는 위태롭게 흔들리다가도 광기와 충동에 사로잡혀 확신의 발걸음을 내디딘다. 극 중 맥베스의 대사처럼, 선택은 어렵지만 결단은 쉬운 법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노예가 된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맥베스’가 남긴 묵직한 질문들을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오는 13일까지 만날 수 있다. 한 감독과 김민정 작가(각색)의 손을 거친 ‘맥베스’에선 동시대성이 두드러진다. 이곳은 중세 배경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처럼 보인다. 현대식 군복과 총기, 귀를 울리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녹아든 불안정한 음향들 속에서 맥베스는 광기 어린 눈빛을 번뜩인 채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저울질하고 있다. 연극을 통해선 왕권 탈환에 눈이 멀어 버린 맥베스가 어째서 타락과 파멸로 향해가는지 명확히 알기 힘들다. 오히려 연극은 인물들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맥베스가 사람을 죽이거나 심리적인 변화를 겪을 때마다 그의 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또 다른 내면이 눈에 띈다. 죄의식과 욕망,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맥베스의 내면이 인간과 비슷한 생명체로 형상화된 존재다. 이 존재는 관객들이 맥베스의 심리 상태에 더욱 깊게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이처럼 경기도극단의 ‘맥베스’는 무대 위 다양한 표현들을 통해 여러 방식으로 관객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이번 공연은 원작의 무대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총탄이 울려 퍼지고 군인들이 죽어나가는 전장의 한복판, 피비린내와 희뿌연 연기가 뒤엉키는 죽음의 공간을 내세워 관객에게 손짓한다. 그래서 무대 위 인물들의 곁에 놓인 죽음의 기운이 눌러 붙은 관들이 중요한 소재가 된다. 극이 진행될수록 배우들이 관을 들고 움직이거나 관이 구조물이나 장소처럼 변하면서 관에 다양한 의미가 덧입혀지기도 한다. 끝내 관들이 모여 운명과 예언이 실행되는 던시내어의 숲으로 변하는 시점이 되면, 관객들은 말라붙은 나무처럼 빽빽하게 서 있는 관들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인물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만날 수 있다. 마침내 읊조리는 맥베스의 마지막 독백은 욕망 앞에 스러진 인간의 덧없음을 드러낸다. 살아가면서 충동에 못 이겨 광대처럼 소란을 피우고 무대 위 배우처럼 떠들어 대더라도 끝나고 나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한낱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한태숙 예술감독은 “유혹에 사로잡혀 고뇌에 빠진 맥베스의 딜레마가 현대인들이 겪는 내면의 갈등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다”면서 “총질이 난무하는 살육의 무대가 배경이지만 현장의 인상보다는 정신의 세계가 극을 지배하는 작품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 감독은 “사람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통제불능이 될 때 어떤 불행이 찾아오는지 이번 공연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실학박물관 특별전 ‘연경燕京의 우정’

18~19세기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국경을 뛰어넘어 교류하며 우정을 쌓아갔다. 말도 문화도 통하지 않는 그들은 어떻게 인연을 이어갔을까.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은 18일 개막한 특별전 ‘연경의 우정’을 통해 이러한 인연의 끈을 보여준다. 이번 특별전은 18~19세기에 걸쳐 한국과 중국의 문인들의 교류가 동아시아사와 실학사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돌아보며, 30주년을 맞는 한·중수교의 의미를 되새기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연경 유리창에서 만난 한·중 지식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한자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필담 등으로 연결됐다. 그들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편지를 보내 그리움을 달랬고 서로의 글과 그림을 감상하며 필요한 책을 주고 받으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전시는 과천시 추사박물관, 석주선기념박물관 등 기관 및 개인 소장품들로 구성돼 있다. 1부 ‘만남의 공간, 연경 유리창’, 2부 ‘홍대용과 엄성의 천애지기’, 3부 ‘북학파의 시, 중국에 알려지다’, 4부 ‘한류의 선봉, 초정 박제가’, 5부 ‘추사 김정희, 60일의 여정과 교유’, 6부 ‘19세기 청조 문인과 조선’ 등으로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홍대용과 엄성, 박제가와 중국 문인들, 박정희와 완원·옹방강의 인연에 주목했다. ■ 홍대용과 엄성,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알아주는 각별한 벗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담헌 홍대용은 1766년에 엄성과 반정균, 육비 세 사람을 연경(지금의 북경) 유리창에서 처음 만났다. 그 중 엄성과 홍대용은 서로 통하는 지점이 많아 가깝게 지냈다. 홍대용은 평소 몸가짐과 자세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엄성 역시도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지점들이 있어 각별한 사이를 이어갔다.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홍대용의 모습이 세심하게 담겨 있고, 엄성을 비롯한 이들이 홍대용에게 쓴 편지 ‘고항적독’에선 연경에서 막 헤어진 문인들의 진솔한 그리움이 잘 표현돼 있다. 엄성이 홍대용이 선물한 묵향을 맡으며 숨을 거뒀다는 일화 역시 그들의 깊은 우정을 잘 드러낸다. ■ 박제가와 중국 문인들, 활발했던 한·중 지식인 네트워크 초정 박제가는 10년 간 중국을 네 번이나 방문하는 등 한·중 지식인 네트워크의 정점에 있었다. 그는 기윤, 옹방강, 완원과 같은 청나라 학계의 지식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과 소통하며 지적 네트워크를 다졌다. 이 가운데서도 박제가는 화가 나빙과 관음각에서 주로 만났다. 나빙은 그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 하면서 초상화과 함께 ‘월매도’를 그려 박제가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이 같은 일화는 박제가의 시문집들이나 ‘호저집’에 수록돼 있으며, 특히 박제가가 중국 문인들과 교유했던 시와 편지 등이 엮여 있는 ‘호저집’에 등장하는 중국 인사들이 180명이 넘는다는 사실로 미뤄 보면 박제가의 인적 네트워크가 얼마나 탄탄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 김정희와 완원·옹방강, 우정을 넘어 학술 교류의 장으로 박제가가 구축했던 네트워크는 추사 김정희의 무대로 확장됐다. 우정에서 시작된 만남이 금석학 등의 학술 교류의 장이 됐다. 김정희는 당대 최고의 학자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게 되면서 삶과 학문, 예술 활동에 있어 분수령을 맞이했다. 그들은 고증학, 금석학 등의 이론에 관한 필담을 나누며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교환했다. 옹방강이 정리한 귀중한 금석 연구 자료 ‘해동금석영기’, 완원이 간행한 ‘황청경해’ 등에선 당시 김정희가 이들과 학술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세기까지는 지식인들이 우정을 나누는 네트워크가 형성됐다면, 김정희 이후로는 학문적인 영역으로도 한·중 연결망이 한층 넓게 확장된 셈이다. 정성희 실학박물관장은 “이번 전시에선 한중 지식인 간의 우정에서 시작한 인연이 문화예술을 아우르는 교류의 무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주목했다”며 “이 자리가 밀접하게 얽혀 있던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다시 조명하는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8일까지.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일상에서 발견하는 예술성…이해균, '균열의 패러독스'展

무엇을, 어디까지 예술로 볼 것인가? 모호한 예술의 경계는 오랜 기간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해균 작가는 아무 생각 없이 대하는 일상의 오브제에서 틈을 찾아낸다. 그 틈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에 거대한 균열을 낸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포착되는 포장지, 나무껍질, 폐비닐 등이 전시장으로 들어와 새로운 관찰의 무대를 만들어 낸다. 용인 안젤리미술관에서 지난 8일 개막한 이해균 작가의 개인전 ‘균열의 패러독스’에서는 관객이 그 무대로 자연스럽게 흡입된다. 이 작가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자재와 소품들을 전시장에 옮겨 놓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보는 게 흥미롭다고 말한다. 자연에 내재된 속성을 머금은 소재들은 작가에 의해서 다중적인 의미를 획득하는데, 이러한 작업에 있어 인과의 사슬과 예측 불가능한 무작위의 산물이 언제나 혼재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가운데서 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마구 구겨져 평면성을 잃어버린 종이에 물감이나 커피를 쏟는 작업에서, 작가는 액체가 뭉쳐서 맴돌고 있는 지점에 굳이 손이나 도구를 대지 않는다. 퍼뜨리는 대신 그대로 굳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위적인 재현을 포기한 무작위성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무작위가 있다면, 한편으로는 종이 위 다른 영역에선 고르게 퍼져 나가 패턴을 만들어내거나 균등하게 스며든 질감을 형성하는 구간들도 생겨난다. 한 곳에서 뭉쳤다면 한 곳에선 퍼져나가고 이 같은 과정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가운데 관객은 일상의 오브제를 대하는 방식을 곱씹어볼 기회를 얻는다. 이 작가는 포장지를 마구 이어붙이거나 물감을 덧칠하다가도 그것들을 다시금 지워내는 작업도 반복해 왔다. 그는 “활자를 비우든 이미지를 비우든 흔적을 지워내는 과정은 곧 ‘무’를 생성하는 것으로 치환될 수 있다”면서 “있고 없음은 언제나 상대적인 개념이기에, 일상에서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는 주의 깊은 관찰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덧붙였다. 그의 손길을 거친 작품들이 끝내 전시장으로 들어왔지만, 이 작가의 전시에선 작품이 전시 공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작품이 생성되는 과정도 작품 그 자체다. 성인 남성의 팔이 닿을 정도의 크기인 합판에 제멋대로 꽂혀 있는 다트들. 그는 이조차도 작업의 일부이며 과정으로 표현했다. “원래 다트가 판에 박혀 있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떨어졌다. 이후 작업하면서 심심할 때마다 던져 판에 박히는 대로 내버려 뒀다”는 것.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며 다트의 꼬리 장식이 떨어져 나가고, 합판에 박힌 못 주위는 녹슬어 간다. 작품이 작품으로서 규정되는 순간은 과연 언제일까. 이처럼 이 작가의 작품은 크고 작은 모든 요소들을 품은 채 일상과 예술을 정의할 때 시공간적 의미를 재단하는 방식에 관한 사유를 끌어내고 있다. 이 작가는 “작위 속에 무작위가 있다. 그것이 예술의 역설이자 이번 주제에서 집중했던 부분”이라며 “내 작업은 무용한 것이 무용하지 않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관람객 각자의 해석과 관점에 자유롭게 맡기는 게 좋지 않겠나”라며 웃어 보였다. 전시는 26일까지.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현대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2022 수원국제예술프로젝트 ‘온새미로’

'온새미로’. 깨지거나 갈라지지 않은 그대로의 상태를 나타내는 순우리말이다. 코로나19 등 전염병의 상흔에 혐오와 차별로 얼룩진 갈등이 전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는 요즘, ‘온새미로’를 모토 삼아 뒤틀린 삶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크고 작은 균열들을 메우기 위해, 국적과 인종이 다른 지구촌 예술인들이 설치·퍼포먼스·회화·조각·사진·영상 등 다채로운 고유의 언어로 ‘온새미로’를 외치고 있다. 이 같은 표현은 분단에 처한 한국에만 머무르는 개념이 아니며 각기 다른 나라의 다른 배경, 문화권과 공명할 수 있기에, 대립에 신음하는 오늘날의 인간 사회에 예술이 제안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지난달 28일 개막해 9일까지 수원특례시 장안구의 복합문화공간 111CM과 수원시립만석전시관, 팔달구의 예술공간 아름, 실험공간 UZ 에서 펼쳐지는 2022 수원국제예술프로젝트 ‘온새미로’ 전시의 이야기다. 이번 대규모 협업 프로젝트는 ‘온새미로’를 기치로 내걸고 국외 30여명(20개국)의 작가와 국내 33명의 작가들이 뜻을 모은 자리다. 각기 다른 개성으로 무장한 작품들이 각 전시 공간 특성에 알맞게 스며들어 관람객들과 만나고 있다. 먼저 111CM에서 이윤숙 작가는 ‘온새미로 2022-코로나 랩소디’로 파괴된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체험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추상미술의 대가 이건용 작가도 붓에 묻어있는 물감을 씻어 버리지 않고 버려진 골판지에 칠해, 환경 파괴에 대한 문제 의식을 불러오는 작품인 ‘쓰다 남은 색_Leftover Used Color’를 펼쳐 놨다. 또 자연과 나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관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지나 손 작가의 ‘중첩된 시간’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다. 만석전시관에선 치유와 해소를 위해 인간의 내면과 자아를 비롯해 나를 둘러싼 바깥의 현상을 저울질하며 고민을 이어 온 최세경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며, 실험공간 UZ에선 현시대의 국제적인 이슈들을 도덕성과 연결해 비주얼 작업을 선보이는 잉그리드 롤레마의 시선이 느껴지고, 예술공간 아름에서 볼 수 있는 홍채원 작가의 ‘풍경의 이면’은 사람이 떠난 자리에 머무는 곰팡이를 응시하는 작업에서 공존·공생 의식을 환기시키고 있다. ‘온새미로’의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는 장도 전시 기간 마련됐다. 지난 1일에는 김종길 미술평론가, 펑 차이쉰 디렉터 등이 참석한 컨퍼런스가 열렸고, 2일과 4일엔 111CM에서 국내외 작가들이 협업 퍼포먼스로 방문객들과 소통했다. 6일에는 최세경, 김정대, 오점균, 잉그리드 롤레마, 톰 빙크, 피오나 챙 등 작가들이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자리가 수원문화재단에 마련된 데 이어 네덜란드 민속 문화를 테마로 하는 야외 퍼포먼스도 화성 행궁 광장에서 열렸다.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한 김성배 총감독은 “온새미로 프로젝트의 시작은 2018년부터다. 나 자신과 우리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되찾고 연대와 회복을 도모하는 취지인 만큼 단발성·일회성에 그치지 않는 장기 기획이 될 것”이라며 “해외 작가들 역시 프로젝트의 취지와 명분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향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나 ‘카셀 도큐멘타’에 버금가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상징적인 화두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송상호기자

[공연리뷰] 빛과 몸의 언어로 말하는 감정들…무용극 '사랑에 미치다'

때로는 집어삼킬 듯 강렬한 몸부림으로, 때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몸짓으로 감정을 형상화한다. 음악과 어우러지는 빛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감정의 진폭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이처럼 사랑을 두고 벌어지는 남녀 간의 다채로운 감정을 담아낸 무용극 ‘사랑에 빠지다’가 지난 17일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수원문화재단의 ‘2022년 방방곡곡 문화공감 민간예술단체 우수공연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번 공연에선 안무가이자 발레무용수인 윤전일의 공연 단체 ‘윤전일 Dance Emotion’을 중심으로 현대무용수, 발레무용수와 한국무용수들이 출연해 무대를 빛냈다. 서로 사랑하지만, 가까워 지는 여자의 죽음 앞에 멀어질 수밖에 없는 연인의 이야기를 다양한 장르의 무용과 심리 상태에 따른 조명과 음악의 변화를 잘 배합해 관객에게 전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공연은 한 남자의 격렬한 몸짓이 무대 전체를 물들이는 현대무용 파트로 시작한다. 표현의 폭이 크고 풍성한 몸짓부터 손가락 만을 이용하는 작고 세밀한 움직임까지, 무용수가 전하는 몸의 언어를 통해서 혼자 있는 남자의 복잡한 내면이 드러나는 구간이다. 이어지는 남녀의 이야기는 낭만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가도 순식간에 좌절과 절망으로 둘러싸이는데, 이 과정에서 빛의 색감이 달라지면서 무대를 물들이는 방식과 그에 따라 맞춰 전개되는 다양한 음악이 말 없이 진행되는 무용극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게 돕고 있다. 독특하게 소리를 전혀 쓰지 않는 구간도 있다. 이 시점에 이르면, 연인의 숨소리와 옷깃 소리, 몸을 맞댈 때 나는 미세한 소리만이 존재하고 관객들은 숨죽여 남녀의 사연에 몰입하게 된다. 극의 절정에 다다르면, 얼굴과 손을 맞대며 마음을 나누던 여자가 결국 쓰러지고 남자는 심란한 마음을 드러낸다. 여자가 점점 멀어져 가다가 길게 늘어뜨린 하얀 천 속으로 사라진 뒤, 천에 비친 여자의 실루엣은 주황빛으로 물들고, 공허한 심정을 느끼는 남자의 공간이 초록빛으로 변한다. 여자가 천 속으로 사라진 뒤 보이는 남자의 반응을 보고 있으면, 천이 놓여 있는 곳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느껴진다. ‘사랑에 미치다’는 연인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나 동기, 명분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거나 신음하고, 어떻게 고통 받거나 낭만에 빠지는지 다채로운 표현법을 곁들여 조명할 뿐이다.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작품으로 재탄생된 폐플라스틱’…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無用之用>전

인간은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물건들은 쓰임을 다하면 버려지게 되고 쓸모없는 것들은 어딘가에 남아 쌓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쓸모없다고 버리는 것들에 주목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이정걸, 정찬부 작가는 무심코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에 주목했다. 계속해서 언급되는 환경문제에 이끌려 유행처럼 버려진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작가는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게 바꿔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메시지를 전한다. 오는 10월23일까지 시흥 소전미술관에서 열리는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無用之用> 전시에서 플라스틱으로 세상을 바라본 예술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정걸, 정찬부 두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선 평면이지만 입체적인 플라스틱 작품을 볼 수 있다. 크지 않은 소전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면 다른 세상에 온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가 자주 쓰고 접하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낸 것들이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정걸 작가는 우리가 쓰다 버린 물건을 박제하듯 작품으로 만들었다. 물병, 샴푸통, 헤드셋, 아이스크림 뚜껑, 칫솔 등 우리 일상에서 버려지기 전 유용하게 쓰였던 물건들이다. 이 작가는 버려진 것들을 한데 모아 캔버스 위에 석고로 찍어내 우리가 어떤 것을 사용했는지, 우리가 어떤 물건들을 버렸는지 등을 알게 한다. 이 작가는 작품을 통해 버려진 후 사라져가는 흔적에 생명의 불씨를 불어넣어 소멸의 흔적에서 새로운 존재감을 발견해낸다. 정찬부 작가는 빨대를 이용해 자연을 재해석했다.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흰색, 검은색, 빨간색 등 형형색색의 빨대는 작은 조각으로 나눠져 다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음료를 한 번 마실 때 이외엔 쓸모없는 빨대가 화분, 연잎, 물방울, 도마뱀 등 자연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최준석 학예사는 “지금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비닐이나 플라스틱 등 새롭게 가공된 물질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게 되면서 한 번 사용하고 버려지는 것 또한 많아졌다. 하지만 우리는 쓸모없는 것들을 외면하고 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가가 재해석한 쓸모없는 것들의 쓰임을 살펴보고 쓸모없음을 다시 쓸모 있게 바꾸는 지혜를 찾아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은진기자

[전시리뷰] 경기도박물관, 실감 영상 ‘경기사대부 잔치로의 초대’ 등 선봬

4차 산업시대에 발맞춰 경기도박물관이 ‘디지털 놀이터’로 전환하고 있다. 도박물관은 스마트 애플리케이션(앱) 등을 개발해 실감 영상실인 ‘경기사대부 잔치로의 초대’와 전시 안내 앱인 ‘경기 천년 시간 수호대’를 공개했다. 사업비 12억원을 들여 1년여간 연구한 결과다. 도박물관은 지난 9일부터 실감 영상실을 개방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도박물관이 보유한 대표 유물, 보물 제930호 ‘이경석(李景奭)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에 담긴 내용을 재해석한 영상이 나온다. ‘백헌(白軒) 이경석’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현종으로부터 나이가 많은 공신 등에게 내리는 하사품인 궤장(의자와 지팡이)과 이를 기록한 ‘연회 도첩’을 받았다. 영상실의 벽처럼 보이던 몰입형 화면에서는 이경석에게 궤장을 하사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들어서는 궁중의 악사와 승정원 관리들, 가마꾼들의 모습이 흘러나온다. 화려한 색감의 영상이 정면과 양측의 커다란 화면에 투사돼 입체감을 느끼게끔 하면서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물든 북악산, 잔치를 하는 이경석의 집에 함께 있는 듯한 감동이 느껴진다. 도박물관은 3개의 독립된 카메라를 통해 상영관의 벽면을 에워싸듯 영상을 투사해 중앙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나타냈다. 특히 도박물관은 벽면과 어우러지는 바닥 면에 동작을 감지하는 인터렉션 장치를 설치했다. 바닥에 투사된 모란꽃 모양은 발걸음에 따라 피거나 지고, 별빛 등이 움직이면서 흥미로움을 더했다. 이와 함께 도박물관은 전시 안내 앱인 ‘경기 천년 시간 수호대’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의 전시 관람을 돕는 디지털 콘텐츠다.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태블릿으로 이 앱을 실행하면 박물관의 캐릭터 ‘뮤호’가 나오면서 증강현실(AR)의 세계로 들어간다. 태블릿으로 주먹도끼, 초조대장경 등 도박물관이 시대별로 선정한 10개의 유물을 찾는 것이 미션이다. 미션을 성공하면 유물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퀴즈와 게임 등을 즐길 수 있다. ‘지루한 박물관’의 인식을 깨고, 어린이 관람객 등이 자연스럽게 역사와 유물에 흥미를 높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김기섭 경기도박물관장은 “이번에 공개한 영상과 앱은 ‘디지털 놀이터 박물관’으로 변화하는 첫 걸음”이라며 “경기도의 문화·역사를 누구나 알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해 젊은 박물관으로 변화하겠다”고 했다. 김보람기자

[영화리뷰] '아슬아슬' 부여잡는 일상…워킹맘의 고군분투, 영화 ‘풀타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됐고,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최우수 감독상·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석권한 영화 ‘풀타임’(감독 에리크 그라벨)이 18일 개봉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풀타임’은 파리 교외에서 홀로 두 아이를 기르는 워킹맘 쥘리(로르 칼라미)가 위태롭게 마주하는 일상을 꿋꿋하게 부여잡으려는 모습을 담아낸 영화다. 쥘리는 파리 시내의 호텔 룸메이드로 일하며 장거리 출퇴근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규모 교통 파업이 발생하고, 생활비는 바닥을 보이고, 아이들을 맡길 곳을 새로 찾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다.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일상이 한순간에 난장판이 될 위기다. ‘풀타임’은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한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제시되는 건 일어나자마자 두 아이를 깨우고 정신없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분주한 움직임,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파리 시내의 파업 속보, 놀이 공원은 언제 가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질문들이 뒤섞이는 새벽 풍경이다. 쥘리에겐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것조차도 어쩌면 사치다. 대체 인력을 구하지 못한 채 몰래 이직 면접을 보거나, 카풀이나 히치하이킹에 실패해 지각하는 등의 변수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의지와 상관없이 출근 인파 속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어느새 하루 일과가 시작되고, 내일이 찾아오고, 모레도 변함없이 쳇바퀴처럼 지속될 것이다. ‘풀타임’은 잘 짜인 각본이나 기승전결의 흐름이 담긴 탄탄한 서사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는 그저 쥘리가 위태롭게 떠도는 모습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포착한다. 때로는 바짝 붙어서, 때로는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면서 숨죽여 따라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안하게 반복되는 전자 음악 비트는 시시각각 압박 받고 있는 쥘리의 심리 상태에 관객들이 더욱 생생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쥘리에겐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돌발 상황이 쉴 새 없이 생겨난다. 과연 엔딩 장면에서 관객들은 쥘리가 보여주는 표정과 몸짓을 보고, 쥘리에게 드디어 평안이 찾아오겠다고 쉽사리 예상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쥘리는 그저 일상을 버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송상호기자

[전시리뷰] 일상을 예술로 승화…수원시립미술관 기획전시 '우리가 마주한 찰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거나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몇몇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런 의미 없는 그런 일상을 붙잡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이들이 있다. 지난 9일부터 오는 11월6일까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소장품 교류 기획전 ‘우리가 마주한 찰나’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수원시립미술관을 비롯한 경기도미술관, 오산시립미술관 등 국공립미술관 열 곳의 소장품을 한 데 모았고, 24명(팀)의 작가들을 대표하는 회화·영상·설치·조각 등 79점의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이는 기획 전시다. ‘자연’·‘인간’·‘그 너머’의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먼저 1부 전시장에 들어서면 주변 풍경에 녹아든 자연 요소를 탐구하는 작가들이 기다린다. 이들의 작품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제공해주고 있다. 임선이 작가의 사진 연작 ‘극점 2-1, 2-2, 2-3, 2-4' 시리즈는 자연에 축적된 시간과 인위적으로 변화된 문명의 시간의 간극을 비교한다. 전현선 작가의 ‘나란히 걷는 낮과 밤’은 수채화이면서도 15점의 캔버스를 겹쳐 놓았으므로 디자인 툴로 그린 듯한 컴퓨터 이미지들을 연상시킨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회화로 재조합된 초록빛 숲 속에서 대상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음미할 수 있게 된다. 1부가 일상에 스며든 주변부를 바라보는 방식을 다뤘다면, 2부는 살면서 마주하는 사건과 현상들을 어떻게 대할지 탐색하는 구간이다. 정정엽 작가는 일상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스쳐 갔을 법한 거울들에 의미를 잡아낼 수 없는 단어들인 ‘져’, ‘꾸’, ‘옵’, ‘핍' 등으로 제목을 붙여 완벽히 이해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표현했다. 거울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탈핵-몸’, ‘네 방에 댄스홀을 허하라’ 등에서 사회문화적 맥락을 통해 의미가 확장된다. 이어 듀오 아티스트 ‘뮌(김민선·최문선)’은 잡동사니가 진열된 캐비닛에 조명을 비추는 구조물인 ‘오디토리움 (템플릿 A-Z)’을 선보인다. 벽에 비친 구조물의 그림자가 수시로 바뀌면 관람객들은 자신이 마주해온 일상에 의미 부여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돌아볼 수 있다. 3부 전시장에는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을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돌아오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윤향로 작가의 ‘Drive to the moon and galaxy'와 ‘스크린샷 5.41. 16-001’, ‘스크린샷 5.41. 16-003’이 연달아 나오는 통로를 지나게 되면 삶의 단면과 미술과 매체 등 문화가 어우러진 작가의 소우주를 통과해 본격적인 심연으로 진입한다. 이어지는 김아타 작가의 ‘온 에어 프로젝트 160-13, 인디아 시리즈’는 2002년부터 시작된 ‘온 에어 프로젝트’ 사진 연작 중 하나로, 장시간 노출 후 중첩시킨 인도의 한 도시 전경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뿌연 먼지로 지워내는 듯한 시간의 흔적을 드러낸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의식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 기획을 담당한 조은 큐레이터는 “관람객들이 작품 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공간 설계와 작품 배치 등에 특히 주안점을 뒀다”면서 “다양한 연령대의 중진 및 신진 작가들의 인지도 높은 작품을 총망라하는 전시로, 미술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송상호기자

[영화리뷰] 액션으로 채운 역사의 여백…이정재의 '헌트'

영화 ‘헌트’(감독 이정재)가 지난 10일 개봉했다. 5월 ‘범죄도시2’를 시작으로 예열을 마친 한국 상업 영화계가 7월 말부터 잇따라 출격한 ‘외계+인 1부’, ‘한산:용의 출현’, ‘비상선언’ 등으로 여름을 장악하는가 싶었지만, ‘탑건: 매버릭’의 장기흥행과 최근 불거진 바이럴·역바이럴 등 여러 논란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형국이다. 이에 ‘헌트’가 극장가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가 된다. 영화는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한다. 1980년대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정권의 공고한 권력 유지를 위해 온갖 더러운 범법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핵심 권력자에 대한 암살 시도나 테러의 가능성이 언제든 유효했다. 이런 불안정한 정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안기부의 국내 팀 차장 김정도(정우성)와 해외 팀 차장 박평호(이정재)는 상부의 지시로 조직에 숨어든 스파이(동림)를 찾아내기 위해 각자의 부서를 압박하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수사하고 파헤친다. 아웅산 묘소 테러가 일어났던 1983년이 영화의 주 무대다. 그런데 영화는 그날의 진실 추적이나 현실의 재현 등에 힘을 쏟지 않는다. 1980년 광주를 극으로 불러들이는 모습이나 인물의 몇몇 대사, 독재자 대통령 등이 묘사되는 순간들만 보더라도 분명 현실 요소를 극에 녹여내고 있지만,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적절한 각색과 비워두는 전략을 통해 실존 인물들의 흔적이 아닌 극 중 인물들의 상황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역사에 녹아든 격동의 시대상을 알면 분명 도움이 되지만, 굳이 알고 가지 않아도 감상하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헌트’는 이렇게 느껴지는 이야기의 여백을 다양한 액션으로 채워 넣는다. 극 전개의 리듬이 몇몇 결정적인 장면에서 선보이는 액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이때 ‘헌트’가 주요한 액션 신들을 인물들의 처지를 강조하는 데에도 활용하고, 그 자체로 전개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로 녹여내기도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거리를 두면서 서로를 견제하던 박평호와 김정도가 계단을 굴러 내려오며 뒤엉켜 맨몸 액션을 벌이는 장면에 이르면, 서로의 육체가 충돌하는 그 시점부터 두 사람을 둘러싼 갈등 양상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후반부의 결정적인 건물 폭발 신에서 두 사람은 각종 파편과 회색빛 먼지와 재에 뒤덮여 서로 분간이 안 가는 형상이 된 채 만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관객은 사냥꾼이기도 했다가 사냥감이기도 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 변해 왔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어쩌면 ‘헌트’는 움직임으로 인물들을 표현하고, 몸짓으로 시대의 여백을 채운 ‘행위’의 영화가 아닐까. 그래서 ‘헌트’의 무대는 밀도 넘치는 심리 묘사를 진득하게 몰아붙일 수 없는 곳이다. 막다른 길에 내몰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뿐이다. 송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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