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5-①

코르테스와 말린체의 만남 그리고 메스티소의 탄생에 대해 전한다.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는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에스파냐 사람을 말한다. 탐욕으로 가득한 정복자의 공통점은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고, 황금과 보화를 탈취하며, 이교도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사명감을 동시에 지녔다. 코르테스 침략군이 베라크루스지역 타바스코 연안의 한 마을인 포톤찬(Potonchan)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닷가 마을을 차례로 공략할 때 대포와 소총을 본 원주민은 매우 놀랐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말에 더 놀랐다. 반은 사람 같고 반은 괴물 같고, 키는 사람보다 훨씬 크고 빨리 달리는 말 앞에서 원주민 전사들은 놀라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었을 정도다. 부족 추장은 코르테스에게 화친의 표시로 황금 보화와 함께 여자 20명을 선물로 보냈다. 적에게 여자들을 바치는 풍습은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오래된 관습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와 평화의 제스처였다. 여인들은 난생처음 보는 하얀 피부색에 턱수염을 기른 원정 대원의 험상궂은 얼굴에 놀랐다. 하지만 노예 생활로 단련된 말린체는 주변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했으나 코르테스와의 첫 만남은 연인이 아니라 노예와 정복자 관계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⑦

화려했던 아스테카 문명은 에스파냐 침략자에 의해 한순간에 파멸됐다. 코르테스는 황금을 수탈하려고 베라크루스에 상륙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아스텍을 점령했다. 점령 후 기독교도인 에스파냐 침략자 눈에 비친 인신공희는 이해할 수 없는 원시적인 신앙으로 하루빨리 개종시켜야 할 대상이 됐다. 침략자들은 누에바 에스파냐가 추구하는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아스텍의 신전과 부속 건축물을 모두 파괴해야만 했다. 승자가 남긴 당시 자료에서도 원시적인 종교의 야만성을 부각해 자신들의 종교를 정당화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기록은 사라진 아스테카 문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료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 정복자인 에스파냐 문명과 아스테카 문명이 융합해 탄생한 메스티소 문명은 자연스러운 결과가 됐다. 하지만 고고학계는 유적 발굴과 유물 분석을 통해 아스테카 문명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승자에 의해 기록된 사료의 진위를 재해석해 바로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고대 문명을 찾아 떠난 여행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탐구하는 독서일 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서는 우리와 다른 다양한 문화와 삶을 돌아보며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 여행지에서는 현지인들의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삶의 현장을 만날 수 있고, 우리와는 다르지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돌아와 뒤돌아볼 때 아름다웠던 순간의 추억들은 초롱초롱 빛나는 샛별처럼 뇌리에 반짝인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⑥

마요르 신전 발굴 과정에서는 아름답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도자기와 도예품이 출토됐고, 화려했던 아스테카 문명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은 신전에 있는 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태양의 돌은 멕시코국립인류역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아스테카 문명에서 신앙관도 테오티우아칸처럼 그들이 믿는 태양이 생명을 다하면 자신들의 세계도 사라진다고 생각해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 그 흔적은 신전 벽면에 돌로 두개골을 만들어 붙여놓은 솜판틀리(Tzompantli)에서 찾을 수 있다. 신전 주변에는 크고 작은 신전과 부속 건축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정복 후 이곳으로 건너온 가톨릭 성직자가 남긴 사료에 따르면 원래 대성당 자리에 있던 신전을 부수고 그 돌을 사용해 교회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전 밖 시장 자리에는 이곳이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모형도가 화려했던 그 시절을 알리고 있다. 마요르 신전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은 Libreria Porrua 서점 2층 카페다. 이곳은 멕시코시티에서 알려진 장소로 현지인과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식사 때는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식사 시간이 아닐 때는 차를 마시며 신전을 감상할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⑤

소칼로 광장 멕시코시티 대성당 옆에는 그냥 스쳐 갈 수 없는 아스테카 문명의 대표 유적으로 1390년에 세운 마요르 신전이 있다. 유적지는 매우 넓은 자리에 다양한 석조건축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에스파냐 침략자에 의해 파괴되어 사라졌다. 특히 틀랄록(Tlaloc)과 우이칠로포츠틀리(Huichilopochtli)라는 피라미드를 파괴한 자리에는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 가톨릭 신앙의 중심인 멕시코시티 대성당을 지었고, 이때 태양의 돌도 대성당 앞 소칼로 광장에 묻은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멕시코하면 건조한 대지 위에 선인장과 마른풀 사이로 나비와 벌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소칼로 광장 주변에는 아스테카 문명의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에스파냐 점령자는 철저하게 테노치티틀란을 파괴했고 호수를 메울 때 수많은 유적이 사라졌다. 마요르 신전을 발굴할 때 석조 건축물의 윗부분은 이미 사라지고 기단과 계단 일부분만 남아 있었다. 신전은 높이가 60m에 달하는 피라미드 형태로 기단 위에 계단을 쌓고 층을 달리하여 또 하나의 계단을 쌓아 올린 형태로 지금은 기단과 계단 등 석조 구조물 일부분만 남아 있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는 눈언저리가 붉은 신들의 조각상이 여럿 남아있고, 피라미드 바닥과 중간의 평편한 부분은 살짝 기울어져 있으나 제단 주변에는 양각 새김위에 붉고 푸른색으로 칠한 문양이 있다. 이곳도 문명을 달리하고 있으나 테오티우아칸의 신전처럼 인신공희가 치러졌던 곳이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④

아스테카 문명을 대표하는 태양의 돌(Aztec Sun Stone)은 달력과 우주관을 기록한 거대한 원형 석조물이다. 아스텍 달력이라고도 하는 이 돌은 목테수마 2세가 1479년에 만들어 마요르 신전에 바쳤으나 에스파냐 침략자가 이곳을 점령한 후 유적을 파괴할 때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앞 소칼로 광장에 파묻었다. 태양의 돌은 그 후 270년도 넘게 땅속에 있었으나 1790년 12월17일 광장 터 고르기 작업 중에 발견함으로써 당시 세계 이목이 쏠렸고, 이 돌은 지름 3.58m, 두께 0.98m, 무게 25t에 달하는 거대한 석조 유물로 고대 아스텍 사람들의 역법(曆法)과 신앙적 우주관을 담고 있다. 태양의 돌은 원반 형태의 큰 바위를 맷돌처럼 다듬고 질서 정연한 구획 안에 신비로운 상징을 정교하게 조각해 아스텍의 수준 높은 문명을 표현하고 있다. 돌에 조각된 부조의 아름다움과 색채의 조화는 고고학적 가치를 떠나 미학적 예술성도 메소아메리카에서 가장 독특하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평가한다. 태양의 돌에는 다양한 상징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 있다. 석판 한가운데 혀를 내민 인물의 상징은 현세를 창조한 제5의 태양신이고, 두 손을 양쪽으로 내밀어 쥐고 있는 것은 인간 심장으로 인신공희를 상상할 수 있다. 제5의 태양을 둘러싼 네 개의 네모 안에는 제1시대 야수 재규어ㆍ제2시대 바람의 신 케찰코아틀ㆍ제3시대 불의 신 틀랄록ㆍ제4시대 물의 여신 찰치우틀리케 문양이 각각 조각돼 있다. 이 표현은 현세가 오기까지 지난 과거 4개 시대는 야수와 태풍, 화재와 홍수로 멸망하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바깥쪽에 사각형을 둘러싸고 있는 원 안에는 아스텍의 한 달을 상징하는 20개의 칸이 있고, 그 속에는 그날을 상징하는 동물과 식물 등을 그려 놓았다. 이 그림은 그날을 점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가장자리에 있는 원은 시간을 표시한다. 여섯 개의 원 안에 새겨진 기호와 상형문자는 안토니오 레온 이 가마(1792), 알렉산더 폰 훔볼트(1816), 에두아르도 셀레르(1904), 헤르만 바이어(1923), 엔리케 후안 팔라시오스(1943) 등이 연구했다. 그러나 태양의 돌에 남겨진 신들에 대한 기호와 상형 문자 해석은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현세인 제5 태양의 상징은 지진으로 무너진다고 주장하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2012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종말론이 아스텍 역법에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제5 태양이 지배한 세계는 1519년 4월 21일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점령함으로써 이미 무너졌기에 이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③

코르테스 원정대는 아스테카 제국의 막강한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고, 그들 자신도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한 후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원정대에게 콰우테목(Cuauhtemoc) 황제는 전통에 따라 축하연을 베풀어 그들을 환영하고 황금과 보석까지 선물했다. 그러나 배은망덕한 코르테스 일행은 그날 축하연에 참석한 아스텍 지도층을 몰살하고, 황제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신들의 진영에 머물게 했으나 실제로는 볼모로 감금됐다. 그 후 코르테스 일행의 의도를 파악한 아스테카 제국은 군사력으로 테노치티틀란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황제는 목숨을 잃었고, 그의 죽음은 제국이 폐망하는 데 실마리가 됐다. 황제 목테수마 2세의 흉상 사료에 따르면 코르테스 원정대는 테노치티틀란에서 퇴각할 때 절반 이상 목숨을 잃었고, 그들은 싸움보다 많은 황금을 가지고 탈출하다 호수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퇴각 때 목숨을 건진 코르테스와 살아남은 부하들은 쿠바로 돌아가지 않고 아스테카 제국에 반대하는 주변 소국과 연합해 테노치티틀란을 다시 공격했다. 결국 아스테카 제국은 코르테스의 침략과 내부 반란으로 전쟁은 3개월 동안 계속된 전투에 패했고, 설상가상 천연두가 퍼지면서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알라메다 공원 가까이에 있는 국립예술궁전(Palacio de Bellas Artes)에는 멕시코 독립 영웅 디에고 리베라 못지않은 실력과 명성으로 벽화 운동에 동참했던 화가 다비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의 콰우테목의 고통이란 작품이 있다. 멕시코 벽화 미술의 거장 시케이로스는 코르테스 일당에게 고문으로 비참하게 죽임당한 콰우테목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그렸고, 현재 이 작품은 국립예술궁전에 소장돼 있다. 그림에는 황금의 행방을 묻는 코르테스 일당에게 고문당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황제의 의연한 자세와 주변 일당들의 모습을 시케이로스의 화법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투구와 철갑으로 무장한 정복자와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사냥개 앞에서 황제는 장작불 고문을 당한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처참하게 고립됐어도 끝까지 황금이 있는 장소를 말하지 않는 영웅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의 옆에는 눈물을 흘리며 빌고 있는 신하가 대비적으로 배치했고, 무장한 정복자들은 금속 덩어리로 묘사해 비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급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역사관을 담은 시케이로스의 이 작품은 멕시코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②

16세기 초 에스파냐 젊은 남자들은 갓 발견한 신대륙에서 일확천금을 얻으려 너도나도 대서양을 건넜고, 그중에는 메데인 출신 하급 귀족 코르테스도 있었다. 신대륙에 도착한 원정대는 황금 때문에 수많은 피를 흘렸고, 신대륙도 황금에 눈이 먼 그들의 손에 무참하게 파괴됐다. 정복 후에는 식민과 혼성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1511년부터 쿠바에 머물던 젊은 코르테스는 늘 황금에 대한 열망에 빠져 있었다. 그때 서쪽으로 가면 황금으로 뒤덮인 테노치티틀란이 있다는 소문을 듣자 그의 피는 끓어올랐다. 마침내 코르테스는 1519년 수백의 부하와 11척의 선단을 꾸렸고, 그는 황금을 수탈하려 베라크루스 해안에 도착했다. 해안에서 코르테스 원정대의 선단을 처음 본 원주민은 움직이는 산이라고 표현했고, 말 타고 달리는 기병대를 난생처음 보고 괴물이라고 불렀다.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를 악령의 소리라 했고, 거대한 배와 말 그리고 화포와 소총을 처음 본 원주민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케찰코아틀 신이 부활했다고 믿었다. 코르테스 일행은 신화 덕분에 어렵지 않게 아스테카 제국에 첫발을 들일 수 있었다. 원정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도 수천의 원주민 부하를 얻었고, 그들은 황금을 탈취하기 위해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할 때 원주민을 길잡이로 삼았다. 코르테스 일행은 험준한 멕시코시티 중앙 고원에 도착해 산 아래 거대한 텍스코코 호수 안 테노치티틀란을 바라보고 심장이 멎을 만큼 매우 놀랐다. 원정대에 참가한 카스티요(Castillo)의 탐험 기록에 우리는 물 위에 떠 있는 거대한 궁전, 신전, 탑, 그리고 도시를 보면서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아마디스(Amadis)의 전설에 나오는 마법 같았다. 게다가 모든 건물은 석조였다. 병사들은 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이 아니냐고 물었다고 썼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4-①

멕시코는 다양한 고대 문명을 가진 나라로 중남미 국가 중 고대 문명의 보고(寶庫)다. 고대 국가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이 멸망한 후 이 지역은 여러 도시국가가 분할 점령했다. 12세기경에는 멕시코 북부 아스틀란에서 수렵 생활하던 아스텍족이 남하해 그들의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나라를 세운다. 아스텍 사람은 독수리가 뱀을 물고 날아가 선인장 위에 앉으면 그곳에 도시를 세우고 정착하라는 계시에 따라 멕시코 중앙 고원의 텍스코코(Texcoco) 호수(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이르러 여기가 바로 신이 계시한 곳이라고 믿는다. 이 전설은 멕시코의 건국 신화가 됐고, 국기에는 선인장에 얽힌 전설을 담아 그 혼을 이어간다. 오늘은 신이 머무는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 중심으로 제국의 폐망에 얽힌 이야기와 고대 유적 마요르 신전(Templo Mayor)을 찾는다. 아스테카 문명은 후고전기(950~1500년)에 속하고, 제국은 옥수수를 재배하는 농경문화 중심이었으며,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질서가 정연한 계급 사회였다. 신앙은 범신론에 근거해 다양한 종교의식이 널리 행해졌고, 1년 365일 달력을 사용했을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다. 아스테카 제국 초기에는 나우아족의 도시 국가(Altepetle)가 상호 연맹을 맺고 각각 왕이 있었고,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한 나라가 간접 통치하는 형태였다. 조공을 잘 바치면 크게 간섭하지 않는 느슨한 형태였지만, 이들 도시 국가는 경쟁을 통해 힘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됐다. 제국은 목테수마 1세 때 무역을 통해 주변의 여러 도시 국가와 유대를 강화했고, 따르지 않을 때는 군사력으로 정복해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200여년 동안 멕시코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했다. 제국의 전성기는 목테수마 2세 때로, 그는 동맹국의 통치자에서 절대 군주제로 바꾸어 강력한 힘을 가진 황제가 됐다. 그는 1325년경 멕시코시티 계곡에 있는 텍스코코 호수의 섬과 그 주변에 거대 도시 테노치티틀란을 건설했다. 그 후 제국의 수도가 된 테노치티틀란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당시 이곳에는 20만명이 넘는 사람이 살았다.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 가까운 곳에 남아있는 마요르 신전을 비롯한 고대 유적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3-⑦

멕시코에는 사포테카, 미스테카, 테오티우아칸, 톨테카로 이어지는 고대 문명이 있었다. 이 기간에 많은 국가가 흥망을 거듭하며 문명을 이어갔다. 거대한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테오티우아칸 문명은 멕시코 고대사 분류 기준에 따르면 전고전기의 후기(BC100AD700년)에 속한다. 유적은 기원전 2세기경 건설을 시작해 4~7세기 사이(AD350~650년)에 전성기를 맞았다. 테오티우아칸 시대에는 메소아메리카의 광범위한 지역과 교역을 통한 경제력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미 전역에 맹위를 떨쳤지만 7세기 후반 그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테오티우아칸은 후고전기의 전기인 아스텍ㆍ마야ㆍ잉카로 이어지는 후대 문명에 영향을 미쳤고 그 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3세기경 밀림에 버려진 이곳을 처음 발견한 아스텍인들은 눈앞에 펼친 웅장한 피라미드를 보고 놀랐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 신들이 지은 도시로 착각하고 이곳을 신들의 도시란 뜻을 가진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을 붙여 숭배했고 그 명칭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테오티우아칸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전문가의 발굴 조사와 연구가 수없이 진행됐어도 지금껏 피라미드를 비롯한 기타 건축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흔적만 주위에 맴돈다. 유네스코는 남북미 대륙에서 83㎢로 규모가 가장 큰 테오티우아칸을 1987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 멕시코는 30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이 지역은 그들에게 뒤늦게 발견돼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멕시코 문화에서 해와 달은 빛과 어둠, 삶과 죽음, 기쁨과 고독이 공존하는 문화적 특성이 있고 테오티우아칸에도 그 혼이 깃들어 있다. 당시 공희에서 보듯이 죽음은 금기가 아니라 삶과 함께하는 존재의 또 다른 면이고 죽음을 희롱(?弄)하면서 삶과 달관(達觀)하고자 하는 이중적인 면을 시현(示顯)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3-⑥

달의 피라미드는 기단을 4단으로 나눠 층을 달리해 쌓았고 바닥은 130x156m에 높이 46m로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낮고 크기도 작다. 16세기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20일마다 인신공희 제례를 치른 장소였고 당시 믿음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의식은 에스파냐가 멕시코를 지배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달의 피라미드는 2단까지만 오를 수 있고 정상에 오르는 것을 제한한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넓은 평원에는 멕시코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선인장과 어우러진 테오티우아칸이 넘치는 신비함을 자랑한다. 피라미드에 올라 반대편에 있는 태양의 피라미드를 바라보며 유적지 탐방을 마친다. 잠시 쉬면서 그 옛날 애처롭게 희생된 원혼을 달래려 위로의 글 한 수 짓는다. 한 많은 인고의 세월은 통한의 강을 이루고 붉은 태양은 공희가 없어도 이글거리며 잘도 탄다. 어찌하여 희망도 구속도 없는 영혼의 세계를 앞세워 선량한 백성의 피 끓는 심장을 그토록 바쳤는가. 인제 와서 그대들을 원망한들 무엇 하겠소 마는 설원(雪冤)의 한을 풀어줄 이 뉘 있단 말인가. 어이 어이 불러도 대답 없는 샤먼아 천추원혼(千秋怨魂) 달래는 진혼의 춤판이나 펼쳐다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3-⑤

달의 광장 옆에 있는 케찰파팔로틀 궁전(Palacio de Quetzalpapalotl)으로 발길을 옮긴다. 석조건축물은 250300년경 세워진 초기 구조물 위에 450500년 사이에 증축한 궁전으로 지상 석조 건물과 지하 공간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곳도 발굴이 진행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카메라 줌으로 보이는 부분만 찍고 자료를 살펴봤다. 케찰파팔로틀 부조가 새겨진 안뜰 돌기둥은 기하학적 디자인의 상부 장식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고대 건축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벽화와 함께 부조는 테오티우아칸의 중요한 유적 목록에 등재돼 보호받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정교하고 화려한 벽면 부조를 보고 과학이자 예술이라고 극찬했다. 부조에 새겨진 새는 메소아메리카 문화에서 존경받는 신화적인 생물이지만 테오티우아칸의 군사의 신 독수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케찰파팔로틀 신은 대지에 비를 내려 생명과 풍요한 양식을 베푸는 자애로운 신으로 널리 숭배했으나 때로는 우박, 천둥, 번개를 내리는 강력한 정령의 군주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궁전 지하 신전에는 녹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을 칠한 조개와 생명의 상징인 물의 벽화도 있으나 출입제한으로 볼 수 없어 아쉽다. 최근 발굴과정(20092011년)에 궁전 안뜰과 지하 신전의 벽화와 함께 죽은 자의 길 주변 석조건축물에서 약 500점의 부조와 벽화가 발굴됐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3-④

태양의 피라미드에서 내려와 나무 한 그루 없는 죽은 자의 길을 따라 달의 피라미드로 향한다. 죽은 자의 길은 테오티우아칸의 중심이고 케찰파팔로틀 신전에서부터 태양의 피라미드를 거쳐 달의 피라미드까지 이어지며 유적의 전면은 모두 이 길을 향한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는 폭 40100m에 길이가 5.5㎞나 되나 현재 2.5km 정도 개방하고 있다. 이 길은 신에게 바칠 인간 제물을 운반했고 길옆에는 지배자의 분묘가 있었다고 하나 아직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재규어 신전 벽면에는 당시 숭배했던 재규어 벽화도 눈에 띄고 크고 작은 석조건축물을 볼 수 있어 거대한 유적을 걸으며 관람하는 야외박물관이다. 길옆에는 기둥 광장(Plaza de las columnas), 야후알로 궁전(Palace of Yahualo), 자쿠알라 궁전(Palace of Zacuala)의 기단석이 있고 주변에는 상하수도와 목욕탕 같은 유적 잔해도 200여 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지역 특산물인 흑요석과 도자기를 메소아메리카 전역으로 교역하였던 장터 흔적이 있고 유적지 뒤편에는 멕시코의 상징인 키 큰 선인장이 보인다. 이곳 주산물인 흑요석은 철로 된 칼 못지않은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어 전쟁 때는 칼과 화살촉 같은 무기 재료로 사용됐고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길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그뿐만 아니라 인신공희를 위해 심장을 꺼낼 때도 흑요석 칼을 사용했으며 그 흔적은 가까운 곳에 있는 마누엘 가미오 박물관(Manuel Gamio Museum)에서 볼 수 있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3-③

다음으로 죽은 자의 길(La Calle de los Muertos)을 따라 유적지 중심인 태양의 피라미드로 간다. 중남미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이 피라미드는 한 변의 길이가 220x230m나 되고 높이도 66m나 된다. 쌓는 데에는 붉은 화산암을 포함해 76만5천㎥의 건설 재료가 사용됐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중앙에 있는 248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피라미드 꼭대기를 향해 가파른 돌계단을 원숭이처럼 기어오른다. 멀리서 바라볼 땐 쉽게 오를 것 같았으나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들바람도 세차게 불어 숨이 차고 균형을 잡기 쉽지 않다. 오르고 쉬기를 반복하며 20여 분 정도 걸려 꼭대기에 다다른다. 정상에는 제례를 치르는 시설이 있었다고 고고학계는 추정하나 유적은 간데없고 오로지 광야에서 불어오는 세찬 들바람이 시원함을 선물한다. 피라미드 꼭대기는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테오티우아칸의 장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다. 발아래 죽은 자의 길 끝에는 달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Moon)가 보이고 누구나 이곳에 오르면 길 좌우에 펼쳐진 석조 건축물의 규모에 놀라 경탄한다. 이곳에서는 곳곳의 발굴 현장을 볼 수 있고 개방하지 않은 지역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와 석조건축물도 볼 수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5단의 방단형 구조로 작은 돌에 석회 반죽을 쌓아 단별로 좁혀가는 방식이다.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정방형 일체형의 이집트 피라미드와는 차이가 있다. 세운 목적도 이집트는 왕이나 죽은 자의 무덤이었다면 테오티우아칸은 태양신에게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올렸던 제단이었다. 1971년 인류학 및 역사연구소는 테오티우아칸을 유적지 정밀 발굴하는 과정에서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를 찾았다. 지하에는 제물로 희생된 사람의 뼈와 유물이 있었고 유골 형태를 볼 때 산 사람의 허리를 부러뜨려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심장을 꺼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하는 발굴이 진행되고 있어 언제 일반인에게 공개할지 알 수 없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3-②

테오티우아칸 유적지 입구에 서면 태양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Sun)가 어서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드론을 띄우지 않고서는 유적지를 한 번에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정도라 규모에 압도당한다. 하루 일정으로 이곳을 찾았지만 오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4시간 정도 머물 수 있다.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둘러볼 곳이 많고 규모도 커 중요 유적 5곳 정도 탐방하고 시간이 남으면 박물관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먼저 유적지에서 세 번째로 큰 깃털 달린 뱀의 피라미드(Feathered Serpent Pyramid)라는 별칭을 가진 케찰코아틀 신전(Templo de Quetzalcoatl)에 다다른다. 이 신전의 속살은 2003년 폭우 때 한 고고학자가 사방 1m 크기의 싱크 홀이 생긴 것을 찾았다. 그는 지하에서 기원후 50200년 사이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는 다수의 유골을 발굴했고 지하 터널은 200년에 이미 봉인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유적의 가치를 인정한 세계기념물감시위원회는 2004년 감시목록에 올렸고, 지금도 발굴 중이라 입구에는 출입을 제한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아쉽지만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및 역사연구소 자료를 바탕으로 피라미드를 살핀다. 신전은 6단으로 다른 피라미드보다 높이가 낮고 전면 계단을 중심으로 각 층 좌우에 깃털 달린 뱀 머리와 몸통을 형상화한 섬세한 조각이 장식돼 있다. 1천500년 세월이 흘렀어도 그 위용과 정교함을 잃지 않았고 미려한 아름다움은 고대 조각품으로도 가치를 인정받는다. 신전 벽에는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 코치니아를 재료로 만든 천연염료로 정교한 문양에 색을 칠한 아름다운 벽화가 남아 있다. 다신(多神)을 믿었던 고대 신앙에서 케찰코아틀은 비를 내리는 신으로 땅의 풍요를 상징한다. 멕시코 고대 문명을 이해하는 데 태양신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신을 상징하는 문양은 테오티우아칸 시대 전사들이 착용하는 투구나 머리띠 중앙을 장식했던 심볼로 케찰코아틀은 후대 아스텍 시대 틀랄록(Tlaloc)과 같다. 신전은 150200년 사이에 조성된 초기 지하 기단 위에 450500년에 피라미드를 올렸고 종교와 정치 중심지였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3-①

피라미드라면 이집트를 연상하지만 멕시코에도 문명과 축조 시기가 다른 피라미드가 여러 지역에 분포한다. 오늘은 해발 2천300m 고지에 있는 신들의 고향 또는 죽은 자가 신이 되는 도시인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을 찾아간다. 이 유적은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유명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미스터리에 쌓여 있지만 멕시코에서는 가장 오래된 유적지다.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BC 1세기경이지만 밀집해 정착한 시기는 AD 1~7세기다. 이곳에 터를 잡은 고대인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신의 대변자인 제사장이 믿음을 앞세워 통치하는 신정(神政) 형태의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 알 수 없는 재앙(화재와 전염병 추정)으로 폐망했고 그 후 600여 년 동안 밀림에 버려졌다.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와 신전ㆍ궁전과 주택ㆍ대로와 광장ㆍ시장과 부속 건축물은 어울림과 통일성을 가지고 상호 연계해 건설한 계획도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멕시코 고대 유물 중에서 가장 발전한 형태라고 고고학자들은 평가한다. 그러나 신비에 쌓인 이곳은 누가, 언제, 왜, 어떻게 건설했는지 알지 못한다. 숙소를 출발해 지하철로 북부버스터미널까지 이동, 시외버스를 타고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약 50㎞ 떨어진 테오티우아칸으로 향한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길옆 산비탈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 같은 허름한 빈민촌이 산꼭대기까지 자리를 잡았다. 멕시코시티와 상반된 삶의 현장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1시간 남짓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⑥

아스텍 시대에는 태양신의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제물로 공양하던 태양숭배 신앙이었지만 누에바 에스파냐 시대에는 침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일매일 여러분을 위해 피를 대신 흘려주기 때문에 태양은 절대 사그라지지 않는다라는 말로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독려했다. 식민 초기 원주민들은 개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생각만큼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가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한 후 빠른 속도로 개종이 이루어져 태양에 영원한 생명력을 공급하기 위한 명분의 인신 공양은 사라졌다. 그 후 도시에는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지금의 콜로니얼 건축물의 상당 부분이 교회다. 과달루페 성모 발현 이후 가톨릭은 멕시코 전역에 뿌리를 내렸고 원주민 토착 문화와도 자연스럽게 혼합되며 새로운 종교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실례로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 속 마리아도 원주민 인디오 피부색을 가진 모습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친밀감을 높였다. 이 기적은 원주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에스파냐는 종교적 일체감을 바탕으로 중남미 식민지 건설에 발판을 구축했다. 때로는 좋은 꿈을 꾸고 산 복권이 1등으로 당첨되는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난다. 신학적 개념의 기적은 종교적 상황에서 믿는 신이 자신의 기도나 일상에서 초자연적인 상징으로서 발생하는 일이다. 몇 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시골 성당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변한 기적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체의 기적은 깊은 기도 속에서 인식되는 신앙적 기적이다. 과달루페 성모 발현처럼 불가사의한 형상이나 상징도 신앙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고 교회 안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의미가 부여된다. 여행은 이처럼 현지인의 일상을 넘어 종교적 신념과 믿는 신앙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받는 것보다 베풀었을 때 기억이 오래 남듯이 책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보다 현지에서 생생한 현장을 보면 이해도 빠르고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촘촘히 뇌리에 기억되며 느낀 감정을 글로 정리할 때 여행의 추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⑤

옛 성당을 둘러보고 체육관처럼 원형으로 신축한 대성당으로 간다. 성당의 규모는 상상했던 것보다 크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를 고려해 크기가 정해졌다고 한다. 1만명이 동시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규모지만 천장을 바치는 기둥이 없는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성당에는 과달루페 성모 그림과 기적의 망토를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특히 망토가 보관된 곳에서는 한 사람이 오랫동안 그 앞에 서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빙워크를 설치해 놓고 누구나 지나면서 봐야만 한다. 한번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순례자는 돌아가서 다시 무빙워크에 올라야 하지만 차례를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그마저도 쉽지 않다. 과달루페 성지의 중심인 교회 두 곳을 둘러본 후 옛 성당 옆에 있는 수도회수련 학교 성당인 카푸친 교회를 둘러본다. 이 성당을 새로 지을 때 바로 옆에 있는 옛 성당에 심한 지반 침하 피해를 줬다. 작지만 아름다운 카푸친 성당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건축적으로 외적 아름다움 못지않게 내부도 밝고 아늑해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즐겨찾는 성당이다. 언덕을 올라 후안 디에고가 성모 마리아를 만났던 장소에 지은 작은 예배당인 세리토 성당(Capilla del Ceritto)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별 모양의 창틀과 밝은 타일로 꾸민 돔형식의 지붕이 예쁜 원형의 포시토 성당(Templo del Pocito)을 둘러본다. 그리고 언덕에 있는 발현 모습과 개종해 기도하는 원주민의 조형물을 감상하고 순례를 마친다. 멕시코는 고대로부터 태양신을 받드는 아스테카 문명으로 샤머니즘적 신앙을 믿었다. 그러나 1521년 에스파냐가 지배하던 초기에는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 시켜 종교적 일체감을 이루고자 했다. 본국 교구에서 파견한 사제들에 의한 선교 활동이 활발했던 식민과 포교의 시기였으나 쉽지 않았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④

심하게 기울어진 옛 교회는 1974년에 보수 공사를 시작해 1976년에 완공했으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자 잠시 폐쇄됐다. 1979년 멕시코 고고학 및 역사연구소(INAH)에서 기단과 벽체를 강화하는 복구 계획을 세워 복원 기간을 길게 잡고 안전하게 공사를 마친 후 2000년에야 문을 다시 열 수 있었다. 옛 교회는 지난 세월의 무수한 자연 재앙의 고난과 시련을 간직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순례자에게 신앙적으로 여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지의 상징성과 콜로니얼 시대 중세 교회 건축물을 이해하기에는 종교를 떠나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예술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과달루페 성지에는 성모 마리아 발현 당시 후안 디에고가 입었던 망토가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망토의 천은 보통 20~30년 정도 수명이나 50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완전한 상태다. 그뿐만 아니라 1791년 망토에 암모니아가 쏟아졌던 일이 있었으나 저절로 복원됐고 1921년 폭탄 테러 때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자 멕시코 사람들은 과달루페 성지에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는다. 옛 성당에서 신축한 대성당으로 옮겨 보관 중인 성모 그림은 현대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신비를 지닌 그림으로 유명하다. 1979년 미국 과학자가 적외선을 이용해 성화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붓질한 적도 없고 직물에 화학적 처리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는 믿기 어려운 결과가 있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반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섬유조직의 형태와 색감에도 변화가 없다. 이외에도 옛 교회에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과달루페 기적을 본 후안 디에고 성인의 청동 조각상이 있다. 그의 망토에는 성모 마리아가 기도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1921년 테러범이 중앙 제단 옆에 폭탄을 터뜨려 성당 내부가 대부분 파괴됐으나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모습이 그려진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③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에 과달루페 성지를 다섯 번이나 방문했고 2002년에는 후안 디에고를 성인품에 올렸다. 대성당 광장에 도착해 십자가 형상의 조형물을 통해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기적 이야기를 인형극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본다. 성지에는 크고 작은 성당 일곱 곳이 저마다 목적을 가지고 곳곳에 세워졌고 성모 발현 모습을 재현한 성상은 테페익 언덕에 조성돼 있다. 하지만 성지의 중심은 광장 앞 기울어진 그리스도 왕 속죄 교회(Templo Expiatorio a Critro Rey)다. 교회 건축은 누에바 에스파냐 건축가 페드로 데 아리에타(Pedro de Arrieta)가 1695년에 착공, 1709년에 완공했다. 구조는 각 모서리에 4개의 팔각형 탑을 세워 그 중앙에 커다란 돔이 있는 전통적인 스페인 바로크 양식이다. 교회는 완공 후 지반 침하로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고 특히 1887년에는 카푸친(Capuchin) 수녀원 건설 때 심각한 피해를 봤다. 그 후 몇 차례 복구 과정을 거치면서 바로크 양식은 대부분 사라졌고 1895년 완공 때에는 지금 모습인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뀌었다. 성모 발현을 상징하는 신학적 의미를 담은 5개의 성화가 있는 옛 교회는 1921년 폭탄 테러로 대파됐다. 여러 차례 복구했어도 지반 침하로 기울어지자 교회 당국은 현대식으로 새 성전을 지었고 성지의 상징인 과달루페 성모상은 옛 교회에서 신축한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새로운 대성당이 지어지고 옛 교회의 이름은 처음 사용했던 과달루페 옛 대성당(Antigua Basilica de Guadalupe)에서 그리스도 왕 속죄 교회로 바뀌면서 대성당을 상징하는 바실리카(Basilica)라는 명칭도 이름에서 빠졌다. 박태수 수필가

[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2-②

멕시코에는 두 곳의 상징적인 가톨릭교회가 있다. 첫 번째는 멕시코 대성당이고 두 번째는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이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개종한 원주민 후안 디에고(Juan Diego)에게 나타난 기적을 기리고자 1709년에 세웠다. 멕시코 대성당은 아스테카 제국의 왕궁과 신전을 파괴하고 누에바 에스파냐를 건설할 때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테노치티틀란 터전에 세운 상징적인 식민지 교회였다. 그러나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가톨릭이 전파된 지 10년 후 후안 디에고 에게 발현한 성모가 전한 메시지에 따라 세운 교회로 신앙의 중심이자 안식처다. 과달루페 성지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스텍 출신 후안 디에고가 1531년 테페익(Tepeyac) 언덕을 지나가다 우연히 성모를 만났다. 마리아는 디에고에게 주교에게 가서 이곳에 교회를 지으라고 몇 차례 전했으나 스페인 출신 주교는 천한 원주민이 전하는 메시지를 믿지 않았다. 성모는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주교가 믿지 않자 이번에는 디에고에게 바위산 언덕에 올라가 장미꽃을 꺾어오라고 했다. 성모가 말한 곳에 오르자 겨울철임에도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꽃을 꺾어 망토에 싸서 내려온 디에고에게 성모는 주교에게 이 꽃을 전하며 자신의 메시지를 다시 전하라고 했다. 그동안 디에고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주교는 망토에 싸 온 자신의 고향 카스티야 장미꽃과 망토에 새겨진 기도하는 성모의 모습을 보고서야 발현을 믿고 그 장소에 성당을 지었다. 이후 태양신을 믿던 많은 원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디에고도 죽은 후 이곳에 묻혔으며 그는 가톨릭 성인품에 올랐다. 성지는 멕시코시티 북쪽 테페익 언덕에 있다. 프랑스 루르드ㆍ포르투갈 파티마와 함께 세계 3대 성모 발현지다. 과달루페 성지는 멕시코뿐만 아니라 중남미 가톨릭 인에게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처럼 일생에 한 번은 찾아야 하는 순례지로 생각한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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