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0. 군자금 모금 위한 이수흥의거

■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의거를 결행하다 대일항쟁기 독립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해 자주적이고 독립된 민족국가 건설이었다. 의열투쟁, 외교활동, 실력양성운동, 무장투쟁 중 가장 핵심적인 방략은 무력투쟁에 의한 독립전쟁임이 분명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는 무장투쟁을 목표로 조직됐다. 1920년대 압록강 건너 남만주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한 참의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단체였다.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단체는 경신참변 이후 효과적인 무장투쟁을 수행하고자 통의부를 만들었다. 의도와 달리 이념적인 대립과 인선을 둘러싼 내부적 갈등은 곧바로 나타났다. 이에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참의부를 결성했다. 참의부의 무장투쟁은 사이토 총독 저격과 고마령전투 등이 대표적이나 대부분은 국내진공작전을 통해 수행됐다. 무장대원들은 압록강을 건너 주로 평안도 일대에서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군자금 모금을 위한 대표적인 사건은 황해도·서울·경기도 일대에서 전개된 이수흥의거였다. ■ 일제의 독립전쟁 근거지 말살에 맞서다 이수흥(1905~1929)은 경기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일영으로 본관은 연안이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입학했다가 중도에 자퇴했다. 승려가 돼 속세를 떠났다가 아버지의 설득으로 하산한 후 중국 지린성으로 망명했다. 이때가 1923년 3월 말경이었다. 3·1운동을 전후로 독립에 대한 고조된 분위기와 맞물려 이곳에 많은 무장단체가 조직돼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수많은 애국청년들로 독립군을 편성하는 동시에 군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함으로써 독립전쟁은 가능할 수 있었다.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친일파 처단 등은 항일투쟁 의지를 고취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구 식민지화를 획책하는 일제는 무장단체의 근거지를 묵과할 수 없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홍범도가 이끄는 봉오동전투(1920년 6월)에서의 참패였다. 일제는 독립군을 제거하기 위해 이른바 ‘간도지방불령선인 초토작전’을 수립한 후 훈춘사건을 조작해 침략 구실을 만들었다.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으나 오히려 청산리대첩에서 크게 패배했다. 이에 대한 보복은 너무나 잔인했다. 한인에 대한 대규모 살육·방화는 1921년 5월 말까지 자행됐다. 이른바 경신대참변은 대표적인 경우다. 경신참변 후 일시적으로 타격을 받았던 독립군은 보민회·민회 등 친일단체를 몰아내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통합운동에 나섰다. 마침내 조직된 대한통의부는 무장투쟁을 주도할 군대로 의용군을 결성했다. 이는 가장 폭넓게 통합을 이룩한 독립군단이었다. 참의부는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참의부 독립군의 설립 당시 편제는 통의부 의용군의 편제를 그대로 사용했다. 참의부 독립전쟁은 다른 무장단체처럼 유격전 형식으로 진행됐다. 무적을 자랑하는 일본군과 전면전은 화력이나 전투력 등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한민족 독립전쟁사에서 ‘유격전’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교란하는 가운데 항일정신 고무와 독립의지를 계승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 단독으로 의거를 결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다 참의부의 유격전은 1925년까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됐다. 당시 대일 항쟁은 주로 국내진공작전으로 평안도 지역의 일제 관공서인 경찰서·우체국·영림서 등에 기습전이었다. 국내진공작전 중 국경 방면에서 발생한 무장투쟁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였으나 병력 손실도 적지 않았다. 이수흥의거는 침체된 무장투쟁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의도에서 치밀하고 원대한 계획으로 실행되었다. 1926년 5월26일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이수흥은 펑톈을 출발했다. 그는 모젤 권총 1정과 실탄 147발, 브라우닝 구식 권총 1정과 실탄 29발 등을 휴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했다. 서울에 침투한 그는 일제의 검문을 피하며 7월10일 오후 11시경 동대문경찰서 동소문파출소 앞을 지나게 됐다. 때마침 보초 근무 중이던 토쿠나가 마사루(德永勝)에게 권총을 소지한 것이 발각되자 즉시 모젤 권총으로 중상을 입히고 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일제는 삼엄한 경계를 펼쳤으나 이수흥은 유유히 경계망을 빠져나갔다. 이수흥은 유택수와 함께 안성군 읍내에 거주하는 부호 박승륙에게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신문기자라고 속인 후 마침 집에 있던 아들 박태병에게 군자금 제공을 요구했다. 이어 9월 28일에는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외계리에 사는 부호 이민응을 만났다. 군자금 요구에 이민응은 현금이 없어 당장 응하지 못하나 후일을 약속했다.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고 10월 20일에 이천군 백사면 현방리에 소재한 이민응의 식산회사를 찾아갔다.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근처 현방경찰관주재소를 습격했다. 곧바로 주재소에 들어가 근무 중이던 순사부장 모리마쓰 다게노(森松武之)를 향해 저격하였으나 불발이었다. 이때 함께 있던 고사카 후지타로(小坂富士太郞) 등 2인은 후문으로 도주했다. 이어 백사면사무소에 숙직 중이던 면서기를 저격했다. 한편 이수흥으로부터 브라우닝 권총과 실탄 25발을 넘겨받은 유택수는 10월 25일 오후 9시경 독립자금을 모집할 계획으로 서울 수은동 소재 전익영이 운영하는 전당포에 들어갔다. 그의 형 전기영에게 군자금 5천원을 제공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에 불응하고 밖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저격했다. 이수흥은 7월부터 10월까지 경기 이천군 읍내면 중리 유택수·유남수의 집에 머물면서 군자금 모집과 경찰 등 응징에 힘썼다. ■ 청소년들에게 항일의지를 북돋우다 무장투쟁사 가운데 이수흥의거는 더욱 빛을 발한다. 단독으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은밀히 국내에 침투하여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격살함으로써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의도였다. 고마령참변으로 전사한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도 주요한 배경이었다. 비록 의거는 완전하게 성공하지 않았으나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과감하게 수행된 무장투쟁은 대단한 쾌거였다. 당황한 일제는 이 의거를 ‘제2의 김상옥사건’이라고 자평할 정도였다. 순종 인산일을 전후로 국내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상황에서 전개된 의열투쟁은 청소년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기폭제였다. 공판일에 인산인해를 이룬 방청객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928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이수흥은 상고를 포기했다.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으니 25세의 패기만만한 청춘이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9. 일제의 야만성 폭로된 ‘제암리학살사건’

■ 한국판 제노사이드의 상징이 되다 제노사이드(genocide)는 집단살해나 대량학살을 뜻한다. 원래 ‘인종’, ‘민족’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해’를 뜻하는 라틴어 ‘cide’에서 유래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는 일본군 갑오농민군과 의병운동 대학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승전에 대한 보복인 관동군의 경신대참변, 간토대지진 당시 야만적인 1923년 제노사이드 등이 대표적이다. 3·1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만행이 자행됐다. 제암리학살사건은 1919년 4월15일 화성지역에 일어났다. 3·1운동 당시 일제 군인이나 경찰은 평화적인 시위에 총칼을 앞세워 끔찍하게 탄압했다. 화성시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일대에서 집단학살은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배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세계인들의 공분을 자아낸 충격적인 사건을 일본은 반성하기는커녕 인정조차도 하지 않는다. ■ 생존권 확보 위한 무력항쟁으로 맞서다 화성의 종교계 인사나 유지 등은 서울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후 주민들에게 소식을 널리 알렸다. 마침내 3월21일 오산리 주민들은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을 올렸다.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평화적인 만세운동은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환하는 분위기였다. 거사일은 군중을 자연스럽게 동원하는 장날을 이용했다. 1천여명이나 모인 송산면민들은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종용하던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총을 발포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시위군중은 일본순사를 죽이라고 외쳤다. 기세에 억압당한 노구치는 자건거를 타고 남양만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돌에 맞아 쓰러졌다. 군중들은 몰려가 돌과 곤봉으로 처단했다. 3월31일 정오에 발안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제암리교회 김교철 전도사와 홍원식 교인 등과 공동으로 준비했다. 연대를 통한 시위는 조직적으로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장날을 맞아 이정근은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당황한 일제 경찰의 위협 사격과 시위군중의 투석전으로 이어져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시위대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인근 일본인 가옥과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일본군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만세운동을 이끌던 이정근이 현장에서 칼에 맞아 사망한 가운데 부상자가 속출했다.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흥분한 시위군중은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파괴했다. 정미업자 사사카(佐佐坂) 등을 비롯해 일본인들은 재빨리 피신했다. 4월1일 발안장 주변 산위에 봉화가 올려지는 등 분위기는 더욱 확산돼 나갔다. 4월3일 수촌리 이장 백낙렬, 수촌 제암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이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은 각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단숨에 불태웠다. 저지하던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도 처단하는 등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었다. ■ 학살만행으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다 일제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수원과 안성 지역에 대한 ‘특별검거반’을 편성, 2차에 걸쳐 파견했다. 말이 검거반이지 실상은 악의적인 비방과 악랄한 방화·살육에 있었다. 4월14일까지 64개 마을에 대한 무자비한 검거로 약 800명이나 체포됐다. 검거 과정에서 사상자 19명이 발생하고 17개소에서 278호가 불태워졌다. 발안 장터와 고주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암리 사람들에 대한 진압은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4월13일 79연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와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했다. 외형상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이곳 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한 치안 유지였다. 그때까지 발안 시위를 주도한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고 피신 중이었다. 특히 이곳은 ‘두렁바위’로 순흥 안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천도교와 기독교의 선교활동으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초토화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운명의 그날 4월15일. 아리타는 부하를 인솔하고 우정면 화산리를 향해 떠났다. 이때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과 정미소 주인 사사카의 안내를 받았다. 이들은 김연방과 친척 김태현을 살해한 후 가옥을 불태웠다. 이어 오후 2시에 제암리에 도착했다. 아리타는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와중에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주민들을 속였다. 15세 이상 남자들은 제암리교회 안에 모이게 한 뒤 교회 출입구와 창문을 봉쇄하고 불을 질렀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불에 타서 사망했다. 주변에는 시신이 타는 냄새와 참상으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방화로 30여채 가옥이 불타 마을은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광경이었다. 저들은 곧바로 팔탄면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하고 불태웠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 외국인들이 참상을 만천하에 알리다 현장을 목격한 정한경은 ‘한국의 사정’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은 종이로 된 창문 틈으로 군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포위하고 불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부분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을 때에도 군인들은 계속 불을 붙였다. 탈출을 기도한 사람은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교회 밖에는 처참하게 죽은 시신이 6구나 흩어져 있었다.’ 우정면·장안면의 만세운동으로 인한 수촌리교회와 마을 피해 참상 소식을 듣고 스코필드(석호필)는 4월18일 현장을 찾았다. 제암리 마을의 참상을 보고 국제사회에 알렸다.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은 국제사회에 일제 만행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이후 선교사 노블과 영국 대리영사, 케이블 선교사 등도 이곳을 찾아 학살만행의 실상을 파악하는 동시에 주민들 구호사업에 앞장섰다. 아직도 희생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더욱이 일제는 당시에도 이를 축소하는 등 국제적인 비난을 모면하기에 급급했다. ■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역사현장으로 거듭나기를 정부는 1982년 9월 대대적인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한 뒤 발굴된 유해를 23위의 묘로 안장했다. 이듬해 7월에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기념탑이 건립됐다. 제암리학살사건으로 순국한 분들과 함께 이들 부부에 대한 애틋한 인생항로가 하루빨리 복원되기를 바란다. ‘화성시 만세길’에 얽힌 사연은 역사적인 아픈 기억으로 다가온다. 1982년 8월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은 그날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한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밤하늘을 밝혔으며 곡식 타는 냄새, 시체 타는 냄새가 밤새 바람에 실려 왔고 서까래가 내려앉고 기둥이 쿵쿵 넘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계신 남편과 다시 만날 때까지 몸서리치는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도 채소를 갈기 위해 마당 모퉁이를 뒤엎다 보면 그날 검게 탄 쌀알이 나온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평화와 자유를 위한 전당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8.안성군 원곡·양성면서 연합만세운동

■ 조국광복을 향해 횃불을 들다 문화민족으로서 강한 자긍심을 가진 선조들은 일제 침략에 맞서 다양한 영역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의병운동, 근대교육운동, 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조국광복’을 향한 열기는 전혀 반감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국제정세에 부응한 자유와 평화를 향한 움직임은 마침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동시에 한민족의 강렬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역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찾아진다. ■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첫걸음을 내딛다 서울·평양 등 7곳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곧바로 인근 지역으로 확산됐다. 쓰나미와 같은 질풍노도는 한반도는 물론 국외 한인사회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안성에서는 크게 안성읍내, 죽산지역, 서안성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1914년 4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양성·죽산 3개 군은 안성군으로 통합됐다. 신호탄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일이 지난 3월11일에 양성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일어났다. 50여명의 학생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운동장을 돌았다. 주도한 인물은 보성전문학교 남진우와 선린상업학교 고원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학생들에게 서울의 상황을 알리는 동시에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사들의 설득으로 만세시위는 교내에서 맴도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독립을 향한 열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주민들을 자극했다. ■ 조국광복을 향해 힘찬 진군이 시작되다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는 3월 하순부터 커다란 활화산으로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최은식·이덕순·이근수 등은 고종의 국장에 참례해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했다. 각지에서 전해지는 소식은 이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침묵을 깬 이들은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참여를 독려했다. 이때 천안 출신인 홍찬섭(일명 홍창섭)은 처가집에 왔다가 합류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3월28일부터 4월1일까지 동리 단위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산발적인 만세시위는 4월1일 밤을 계기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약 1천명이나 참여한 원곡만세운동은 서막을 알렸다. 시위 군중은 오후 8시께 등불이나 횃불을 들고 내가천리 면사무소 앞으로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다음 “이제부터 면장을 끌어내어 태극기를 주어 선두에 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경찰주재소로 가자”라고 했다. 시위대는 면장 남길우와 면서기 정종두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으로 향했다. 양성면과 경계인 성은고개(현 만세고개)에 이르러 주동자들은 차례로 등단해 시위군중을 격려하는 연설을 토해냈다. 같은 날 양성면에서도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마을별로 뒷산에서 전개하던 시위군중은 면소재지인 동항리로 집결해 약 1천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면사무소,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렸다. 참가한 마을은 덕봉리를 비롯해 산정리·도곡리·추곡리 등이었다. 질서정연한 만세시위에 경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후 10시께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고 귀가하려는 찰나였다. 이때 원곡면민들 합류로 2천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양성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동시에 돌을 던졌다. 기세에 눌린 경찰들이 도망하자 주재소 사무실, 기숙사, 각종 문서와 기물 등을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이어 양성우편소로 가서 서류와 집기를 불태우고 전화선마저 절단했다. 면사무소의 물품을 파괴하고 서류 등도 불태웠다. 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과 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가옥을 파괴하고 가구류와 기물들을 파괴·소각했다. ■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하다 양성·원곡의 연합만세시위는 일제 당국에게 경악과 곤혹스러움을 안겨 주었다. 무단통치에 순종할 줄 알았던 한민족이 일시에 전면적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4월3일 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79연대 소속 장교 이하 25명은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서안성지역에 투입됐다. 경찰은 원곡면장에게 농사철임을 감안해 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고 나면 사면해 농사를 짓도록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16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성들을 4월19일 현재의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모이도록 가족·친지들을 설득했다. 이 말을 믿었던 시위 참가들 중 상당수는 지정된 장소에 모였지만 상황은 바람과 달리 돌변했다. 일본군은 주위를 포위한 뒤 몽둥이 등으로 일방적인 폭행을 가했다. 저항하거나 도주하려는 사람은 발포로 3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간단한 심문을 마친 후 361명은 상투를 줄줄이 묶어서 안성경찰서까지 약 30리를 동물처럼 학대하면서 끌고 갔다. 6월1일에는 군병력 36명이 파견돼 구속된 시위군중을 갖은 학대와 고문을 가한 후 127명을 기소했다. 뿐만 아니라 파괴·소실된 행정기관 재산과 일본인의 피해까지 부담시켰다. 정신적·육체적·물질적 고통과 공포심을 주민들에게 안겨 주는 야비한 보복으로 일관했다. ■ 역사적인 한 페이지로 기록되다 대중화·일체화·비폭력화는 민족대표가 내건 행동강령이었다. 대중화·전국화는 운동 과정에서 이뤄졌으나 평화적인 만세운동은 진행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일제 군경은 총칼을 휘두르고 발포함에 따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현장에서 격분한 시위군중은 몽둥이, 낫, 괭이 등 농기구와 돌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 조국광복을 위해 안성군 연합만세운동은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과 함께 치열하게 저항했던 3대 실력 항쟁지 중 하나였다. 1천200여호에 불과한 지역에서 2천여명이나 가담한 사실은 주민들의 강고한 결속력과 투철한 항일의식을 유감없이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로 항쟁을 통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1919년 4월1일부터 2일까지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해방구를 쟁취했다. 들불처럼 일어난 만세운동은 식민지배의 모순과 난맥상을 일깨우는 생활현장이자 교육현장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어디까지나 손아귀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반대로 한인들의 일본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굳은 의지도 결단코 일본의 결심만큼 못하지 않으리라”라는 어느 서양인의 기록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일제 군경의 악랄하고 천인공노할 만행에 대한 인간적인 분노는 우리들의 심금을 울린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7.여성들이 개성지역 3·1만세운동 주도하다

■ 지역 독립운동 이끈 ‘여걸 중의 여걸’ 3·1만세운동은 신분과 나이를 초월해 한민족이 혼연일체가 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유사 이래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변화에 부응한 움직임이었다.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타오른 불꽃은 순식간에 국내는 물론 국외 한인사회로 파급됐다. 한국인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한민족의 존재감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서울·평양·원산 등 7곳에서 시작된 도도한 흐름은 너무나 장엄하고 숭고했다. 일체화와 대중화는 소통으로 운명공동체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생활 현장과 접목됐다. 개성에선 이미 독립선언서가 전달됐으나 목사와 전도사 등 남성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여성으로 직접 만세시위를 이끌어낸 주인공은 전도사 어윤희와 교사 권애라 등이었다. 어윤희는 독립운동사에서 개성지역의 자존심을 살린 선각자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여걸 중의 여걸’이었다. ■ 기구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다 어윤희는 1880년 6월20일 충북 충주군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어현중(魚玄仲)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천자문’과 ‘대학’까지 가르칠 정도로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특히 “말은 충성되고 미쁘게,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言忠信 行篤敬)”며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강조했다. 어린 소녀 가슴에 깊은 여운과 아울러 평생의 좌우명이 됐다. 행복한 생활은 소망과 달리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유명을 달리했다. 신혼의 단꿈도 3일 만에 끝났다. 천애 고아이자 청상과부로 ‘버림받은’ 존재였다. 삶에 대한 허무로 정든 고향을 떠나 나이 서른에야 겨우 개성에 정착했다. 남감리회 전도사업의 중요한 근거지이자 중심지는 바로 개성북부교회였다. 어윤희는 세례를 받고 미리흠여학교와 호수돈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았다. 전도부인으로 산간벽지 교회에 복음을 전파하는 동시하는 강고한 인습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 개성 3·1만세운동의 주춧돌을 놓다 3·1만세운동은 역사 무대 뒤편에서 소외된 집단들이 역사적인 전면에 나서는 계기였다. 여성들이 민족운동 주체로서 나선 결정적인 시점은 바로 만세운동 현장이었다. 여성들의 활약상은 여학교 단위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개성지역은 어윤희와 권애라 등 기독교인과 여학생들의 주도에 주민들이 참여하는 양상이었다. 2월28일 독립선언서 100부는 개성에 도착했으나 주민들에게 배포되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사람은 유치원 보모 권애라였다. 그녀는 곧바로 어윤희를 찾아가 배포할 방안을 논의함으로써 예배당 지하실에 숨겨뒀던 독립선언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았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배부한 후 보따리 장사로 가장해 인근 마을에도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이어 여자성경학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인쇄와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 등을 만들었다. 거사일은 3월3일 오후 2시로 정했다. ■ 만세운동으로 여성들의 사회적인 존재감을 알리다 기도회를 마친 일행은 어윤희를 선두로 시위행진에 돌입했다. 이들은 ‘찬미가’와 ‘독립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민들도 가세해 시위군중은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고종 인산일로 서울의 침울하고 조용한 분위기와 달리 개성지역은 만세 함성으로 천지를 뒤흔들었다. 어윤희는 숙소에서 식사를 하던 중 곧바로 일제 경찰에 끌려갔다. 그녀는 형사들에게 “당신들이 내 몸을 묶어 갈 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며 당당한 자세였다. 심영식(세례명 심명철)은 “내 눈이 멀었다고 마음도 먼 줄 아는가.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호소로 만세를 부른 것뿐”이라며 거세게 항의했다. 일제 경찰에게 여성들은 피의자가 아니라 성폭력과 성희롱 대상자일 뿐이었다. 나체로 짐승처럼 기어 다니게 하고 이를 보면서 희롱하며 폭행을 일삼았다. 갖가지 고문으로 정신을 잃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옥중투쟁으로 운명공동체임을 일깨우다 개성 만세운동 주역들은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방에 수감됐다. 3·1만세운동의 ‘아이콘’ 유관순을 비롯해 수원 기생 김향화, 파주의 구세군 부교 임명애 등과 함께 하는 옥중생활이었다. 혹독한 고문과 동시에 성적인 학대, 민족적인 멸시 등은 모멸감을 넘어 정체성마저 뒤흔들었다. 일제의 무도한 탄압과 모진 악형도 독립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2월 말부터 어윤희 등은 ‘통방’이라는 비밀 연락망으로 여옥사 전체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3월1일 오후 2시 8호 감방에서의 신호로 감옥 안은 만세소리가 여기저기에 터져나왔다. 유관순과 신명철은 주모자로 지목돼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유관순은 고문 후유증으로 9월28일 순국했으며 어윤희는 1년 이상 투옥 후 1920년 4월28일 출감했다. 한편 세브란스병원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는 서대문형무소를 자주 찾았다. 수감자들과 면회한 뒤 온갖 고문과 악형 등 처절한 실상을 미국 선교본부로 보냈다. 어윤희와 면담에서 옥중 고난과 저항 소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의남매’라는 인연을 맺는 등 신뢰감을 안겨줬다. 그는 여성 투사들의 옥중 수난과 투쟁활동을 ‘꺼지지 않는 불꽃(The Unquenchable Fire)’으로 기록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 여권 신장과 사회적인 약자를 보살피다 만세운동 이후 ‘여성개조론’에 입각한 여성운동이 본격적인 시발점을 알렸다. 개성의 여성들은 개성여자교육회를 만들었다. 어윤희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등 열성을 다했다. 투철한 항일투쟁의식과 남을 배려한 희생정신은 어윤희를 여성투쟁가로서 존재감을 알리는 계기였다. 어윤희는 전도부인으로서 여성들 민족의식 향상과 여성 교육에 힘썼다. 근우회 개성지회는 1929년 6월15일 만들어졌다. 어윤희는 개성여자교육회를 근간으로 이 단체를 출범시켰다. 목표는 봉건적 굴레와 일제 침략으로부터 진정한 여성해방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따라 호수돈여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한 여학생들은 경찰에 구속됐다. 근우회 해소 이후 어윤희는 민족운동단체에서 물러나 아동복지 활동에 헌신했다. 중일전쟁 발발에 즈음해 개성 유지들의 도움으로 공설운동장 부근에 ‘유린보육원’이란 보육원을 만들었다. 한국전쟁 중 어윤희는 남쪽으로 피란와서 1952년 마포 서강감리교회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하는 등 약자에 대한 보살핌을 이어갔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6.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 자신감 일깨운 ‘여성단체’

■ 나랏빚 청산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김광제·서상돈 등에 의해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순식간에 국내외로 파급됐다. 계몽론자와 전·현직 관료 등은 국민운동으로 승화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국채보상소(회) 조직과 아울러 ‘취지서’ 발표는 주민들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요인이었다. 여성들도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남성 주도의 국채보상운동 전개에 격분한 여성들은 곧바로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군민대회가 열린 직후 대구에서는 정운갑모친 서씨(서채봉), 정운화처 김씨(김달준), 서석균처 최씨(최실경), 서학균처 정씨(정말경), 서덕균처 이씨(이덕수), 김수원처 배씨(미상) 등 7인은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격문을 통해 “경고 아 부인동포라. 우리가 함께 여자의 몸으로 규문(閨門)에 처하여 삼종지도(三從之道) 외에 간섭할 사무가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사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이천만 동포들이 석 달간 담배를 아니 피우고 그 돈을 모은다고 하오니 즉시 사람으로 흥감하게 할지요. 진정에 아름다움이라. 그런데 부인들을 논외로 한다 하니 대저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오”라며 남성 중심에 의한 국채보상운동을 비판하고 나섰다. 논리는 남녀평등론에 의한 사회적인 존재로서 역할 분담과 국민으로서 의무임을 주장했다. 소식을 접한 여성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진주 기생 부용·국향·난초·앵무 등은 진주국채보상부인회 활동을 지원했다. 이들은 취지서를 통해 부인들 참여를 자발적으로 유도하는 등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서울 대안동 국채보상애국부인회를 주도한 신소당은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는 활동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 인천지역 여성들이 국미적성회를 조직하다 인천인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결코 예외적일 수 없었다. 신상회사 임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연동맹회는 정재홍(鄭在洪) 주도로 이뤄졌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널리 확산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외세 침략에 대한 경각심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인천들에게 국채에 대한 심각성을 알리는 교육현장이었다. 사환들에 대한 입회 권유는 노동자 참여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참여를 유도하는 촉진제였다. 이에 권업사·미상회사·신상회사 임직원은 물론 제령학교 생도 90여명도 동참했다. 분위기는 여성들에 의한 조직적인 모금운동으로 이어졌다. 국미적성회(掬米積誠會)는 인천지역 기독교 부인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조직됐다. 1907년 3월29일 주요 발기인은 박우리바·여누이사·정혜스터·장마리아 등이었으며 초기 회원만도 80여명에 달하는 등 부인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진행됐다. 이 중 선발된 권고위원 20명은 2명씩 1개조로 편성했다. 이들은 각각 동리를 맡아 여성들 동참을 권고하는 등 여론 조성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권고위원은 매주 의연한 곡물을 수합했다. 활동 1개월만에 회원은 500여 명으로 급증하는 등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1개월 동안 의연미는 18섬 8되 8홉, 동화는 254원 36전, 1냥중짜리 비녀 2개가 모였다. 국미적성회 활동은 ‘차회(此會)가 승어단연회(勝於斷煙會)’라고 평할 정도로 당대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사회활동을 통한 여성들 스스로에 의한 지위 향상은 물론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인천 일대 의부(義婦)와 열녀가 밥 먹을 때마다 음식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모았다가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또 다시 남의 집을 찾아다니며 권면하고 인도하기를 마치 거지가 구걸하는 듯이 한다. 길에서 서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무어라 말하는데 그 말을 들어보면 모두 국채보상이라 하고 그 안색을 보면 당황하는 모습이 쫓기는 사람과 같다. ■ 경기도 여성들이 호응하다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김포군 검단면 고잔리에 거주하는 한씨·노씨·김씨 등은 국채보상의무소를 조직했다. 이들은 각 동리를 방문해 취지서를 배포하는 동시에 부인들 동참을 권유했다. 취지서 주요 내용은 ‘충효의 윤리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고 국채보상은 국가 흥망과 직결됨’을 강조했다. 나라가 위급한 때에 부인들이라고 편안하게 있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일임을 지적하는 등 애국심을 일깨웠다. 출연 방법은 돈만 의연할 것이 아니라 패물은 물론 곡식까지 출연함을 강조했다. 이는 경제적인 곤궁 속에서 전개되는 국채보상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일환이었다. 여주군 근동면 흔바위 개신교인 여성 단체적인 성격을 띠고 참여하는 등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참여자는 ‘흔바위 예수 믿는 김씨 부인 50전, 고씨 부인 20전, 조씨 부인 40전, 류씨 부인 40전, 권씨 부인 20전, 김씨 부인 10전, 박씨 부인 10전’ 등이었다. 비록 구체적인 단체 명칭은 알 수 없으나 기독교회를 통하여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등 여성의 사회적인 역할에 소홀하지 않았다. 화성군 화척지면 보흥여학교 교사 이리사벳안· 찬성원 신덕김·미시다홍·이뱃가홍과 학부모·학생 등 33명은 9원71전5리를 모았다. 이러한 과정은 학생들이 일제침략 실상을 인식하는 소중한 계기였다. 김희경·김혜경·안마리아 등은 부인의성회를 조직해 모금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 활동은 여성의 사회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 변화를 초래하는 에너지원으로 작용했다. 이는 여성교육회로 전환하는 등 대한제국기 화성지역 여성교육을 확산시켰다. 가정부인 참여는 학생과 유대를 강화하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5. 수원 여성독립운동의 산실 ‘삼일여학교’

■ 근대교육으로 여성들 가치관을 변화시키다 개신교의 선교사업은 교육·의료·복지 사업 등에 치중됐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여성기관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튼(Mary F.B. Scranton, 1832~1909)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인 여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훌륭한 한국이 되도록 함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개화기 지도자나 애국선열의 상당수도 기독교정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남녀불평등과 신분에 의한 차별주의, 오직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던 인습, 무비판적인 권위주의 등은 시대변화와 더불어 크게 흔들리게 됐다. 메리 스크랜튼은 남편과 사별한 후 53세인 1885년 5월에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파송으로 낯선 미지의 조선 땅을 밟았다. 아들로 의사인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1922) 내외와 함께.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 후유증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그녀는 도착하자 여성평등과 여성교육, 아들은 의료사업과 교회 개척에 힘쓰며 선교사업에 헌신적이었다. 1889년에 최초 한국인 여교사로 이경숙을 채용하여 한글교육과 더불어 간단한 한문 등도 가르쳤다. 전도부인이 된 이경숙은 ‘양어머니’를 도와 1902년 6월에 수원에다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와 매향정보여자고등학교 전신)를 설립하여 잠재된 여성의식을 일깨웠다. ■ 대한제국기 대표하는 여성교육기관이 되다 일본인에 의한 ‘일어학교’인 화성학교(華城學院) 운영은 침잠된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종교계학교’는 신도수 증가에 따라 발전을 거듭했다. 이듬해 유지들과 기독교인에 의하여 삼일남학당도 설립되는 등 교육열이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대한제국기 수원지역에는 20여 개교에 달하는 사립학교가 운영될 만큼 변화를 거듭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을 표방한 교훈은 자연법에 기초한 인간평등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주변에서 목격되는 현실은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여교사 김몌례(金袂禮)와 이사라는 여학생들 의식을 일깨우는 선구자였다. 여성에 대한 순종만을 강요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은 이와 맞물려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곧 여성해방은 인간평등을 위한 기본적인 요인으로 여학생들에게 잔잔하게 다가왔다. 특히 역사와 지리 수업은 호기심을 크게 자극시켰다. 이리하여 주변에 산재한 화성행궁·화홍문·팔달문 등이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점차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유적지로 소풍은 이를 확인시키는 교육현장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팔달산도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귀중한 자연유산이라는 사실을 터득했다. 수원지역 여학생을 망라한 연합운동회는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전날은 혹시 비가 오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비가 오면 다음으로 연기되거나 아예 취소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체육시간에 배운 종목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달리기를 비롯한 20여 종목에 걸쳐 정정당당한 경쟁이 펼쳐졌다. 우승자에 대한 시상은 자신감을 배가시켰다. ■ 삼일인들 국내외 민족운동을 주도하다 수원에서 다양한 여성운동 전개는 삼일여학교와 같이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면서 가능할 수 있었다. 졸업생 중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나혜석이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너무나 많다. 최초의 여성서양화, 대중적인 여성작가, 여성해방운동가, 여성독립운동가와 같이 다양하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생활로 근대지식과 문화를 경험하면서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 사회에 비판과 아울러 여권신장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3·1운동 당시에는 학생만세에 깊이 관여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하여 여성평등권을 주창하는 선구자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여러 차례 수상했으며, 최초로 개최한 개인전은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했다. 삼일여학교 출신이자 교사로 근무했던 차인재(차우르다, 임인재)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차인재는 3·1운동 이후 비밀결사체인 구국민단 교제부장을 맡았다. 목적은 첫째로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하에서 이탈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한다. 둘째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있는 사람의 가족을 구조한다는 등이었다. 1920년 8월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화성 영흥도 출신인 임치호와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라 성을 바꿨다. 이는 일찍이 개신교 신자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현실이었다. 이후에도 대한인국민회와 대한여자애국단 등 임원으로 한인들 독립정신 고취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에 앞장섰다. 한글교육을 통한 한인 2세에 대한 민족정체성 일깨우는 활동은 오늘날 한인들의 든든한 정신유산으로 남아있다. 이들 동기생인 박충애는 수원 최초의 전도부인인 할머니 김세라와 삼일여학교 초창기 교사인 어머니 김몌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3·1운동이 전개되는 당시에는 평양에서 조직된 국민회와 평양애국부인회에 참여하며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앞장섰다. 3월 3일 친구인 나혜석은 그녀를 방문하여 평양지역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 요청을 받았다. 이선경 등과 혈복단을 구국민단으로 개칭하고 활동한 임순남과 최문순도 삼일여학교 출신 민족운동가이다. 3·1운동 이후 수원지역 민족운동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신문, 대한민보, 창가집, 경고문 등을 수원지역에 배포하면서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들 대부분은 학교 기숙사나 하숙을 하는 유학생이었다. 주말마다 서울에서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금요일 밤마다 삼일학교에서 모여 장래에 대한 운동방침을 의논했다. 이 단체는 1920년 8월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여성들의 사회적인 존재감을 일깨우다 이들의 독립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과 선구적인 여성으로 성장한 배경은 평등사상과 민족의식을 일깨운 근대교육이 중요한 발판이 됐다. 삼일여학교를 졸업한 이후 이화여고보, 진명여고보, 일본 유학 등은 사회문제와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졌다. 삼일여학교는 선교 목적을 위해 설립한 학교였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이 있었다. 수원 여성들의 사회활동이나 민족운동 참여를 견인하는 통로는 바로 삼일여학교와 종로교회라고 과언이 아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여성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대단했다. 유학이나 이민을 가거나 계몽활동을 적극 펼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외부 세계와 소통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의 제국주의 체제와 여전히 남성 중심의 전근대적 사고가 만연했던 당시에 여성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단체를 결성해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데에는 더 많은 위협과 고통에 맞선 투쟁이었다. 아직도 일반 시민들은 독립운동가들 중 여성에 대한 기억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이들이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우리들과 함께 호흡하고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김형목 (사)선인역사문화연구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4. 강화학무회 의무교육과 민족교육의 산실 ‘보창학교’

■ 신앙공동체가 강화인 의식을 변화시키다 강화도는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 일찍이 군사요충지이자 서해안 해상교통 중심지였다. 선교사들은 일찍부터 인천을 비롯해 이곳 선교사업에 주목했다. 1892년 조원시(George Heber Jones, 趙元時)는 김상림 가족의 열성적인 협력, 교세 확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박능일·김봉일 등의 ‘일자돌림신앙인’은 전도활동에 열정적이었다. 선상 세례와 신앙공동체 탄생은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는 밑거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안방에 갇혀 있던 부녀자를 해방하고 미신을 타파해 문맹한 부녀사회에 교육을 전파하는 등 문화계몽운동은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교회는 기도처로서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이상을 논의하는 생활현장으로 탈바꿈했다. 영국 성공회도 강화도를 중심으로 종교토착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3년 7월 워너(L. O. Warner) 신부는 갑곶진에 거처를 마련하고 선교활동에 나섰다. 그는 고아들을 모아 영국식 기숙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점차 주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전통식 가옥으로 현재 남아 있는 강화읍 성당은 주민들의 성공회에 대한 관심사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 강화도에 근대교육이 시작되다 강화도 최초의 근대적인 사립학교는 목사 조원시와 박능일 등의 협력으로 설립한 잠두의숙(합일학교 전신)이었다. 이들은 잠두교회 내에 학교를 설립한 후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사립 잠두합일학교로 개칭과 더불어 학부로부터 사립학교 설립인가도 받았다. 교장 손승룡 노력으로 재학생은 80여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향중부로들도 적극 호응하는 등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원시·손승룡·최국현 등은 여성교육에 관심을 돌렸다. 위량면 홍천동 제일합일여학교 운영은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됐다. 발전의 기틀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내려온 김영애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1909년 4월 제일합일여학교 개편되는 가운데 교육 내실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육영학원(보창학교 전신)은 1904년 이동휘와 유경근·윤명삼 등에 의해 설립됐다. 설립 목적은 군인 자제와 일반 자제에 대한 근대교육 시행을 통한 구국간성 양성이었다. 초기 모집된 학도는 50여명에 달했다. 교과목은 본국지리·역사, 외국지리·역사, 국문, 산술, 영어, 일어 등이었다. 조희일과 김만식은 일어와 영어 명예교사로서 열성을 다했다.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구국운동은 이를 계기로 발전을 거듭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변화에 부응해 강화학파도 실리 실사(實理 實事)에 입각한 시무책을 강구했다. 시세에 부응하는 논리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로 이어졌다. 곧 양명학 계승·발전은 이들의 윤리규범이자 실천윤리였다. 주요 인물은 이건창·이건승 형제와 이건방·홍승헌·정원하 등이었다. 특히 이건승은 계명의숙 설립을 주도했다. 주체적인 개화·자강에 의한 자주독립은 궁극적인 목적으로 다가왔다. 하도면 여차리와 흥왕동 유지들은 보흥의숙을 설립해 50~60명을 가르쳤다. 숙장과 숙감 등은 열성을 다하는 등 면학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니산의숙은 근로청소년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는 등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100여명을 차지하는 야학생과 학부형회의 지원 등은 당시 분위기를 방증한다. 여성교육은 합일학교와 보창학교에서 시작됐다. 이동휘는 남녀차별을 불식시키는 유효한 수단으로 여성교육에 주목했다. 그는 학부에 여학생을 위한 교사 신설을 요청하는 등 근대여성교육에 앞장섰으며 여성교육 보급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귀결됐다. ■ 강화학무회가 의무교육으로 시세 변화에 부응하다 근대교육 보급이 확산되는 가운데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이동휘는 민족교육에 집중했다. 그는 강대흠·황범주등과 주민 부담에 의한 의무교육 시행에 적극적이었다. 군수는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한 의무교육 시행을 역설하고 나섰다. 이는 강화도 근대교육 도약을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임원진은 회장 강대흠, 부회장 조상석, 총무 황범주 등이었다. 의무교육 시행방안은 생활정도에 따라 주민 부담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의무교육은 민족지도자와 교사 양성 등 긴밀한 계획에 따라 시행됐다. 보창학교 중학과와 중성학교 사범과 설치는 이를 방증한다. 또한 한문 능통자에 대한 우대책과 교사로서 양성은 현지 여건을 고려한 조처였다. 이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실천에 옮겨졌다. 면장·이장 등 교육활동에 적극적인 입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가운데 강화학무회는 ‘의무학교’ 내에 국문야학교를 운영했다. 이는 근로청소년과 문맹한 성인을 위한 의무교육 확대하려는 일환이었다. ■ 보창학교가 민족교육 산실로 자리매김하다 강화도 사립학교설립운동 특징은 첫째, 사립학교 설립은 1905년부터 활성화됐다. 병식체조와 상무정신을 고취시키는 등 국망(國亡)에 대한 위기의식은 교과과정에 그대로 반영됐다.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체육은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 장차 독립군과 민족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교사양성은 사범교육기관을 통해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사립학교설립운동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운영비 확보와 교사 양성 등 중장기적인 계획 부재였다. 사립학교 설립과 달리 근대적인 교수법이나 교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는 의무교육 시행과 더불어 교육 내실화를 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나 마찬가지였다. 의무교육은 자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일제는 ‘시세와 민도’를 핑계로 이를 저지하는 데 안간힘을 기울였다. 당시 제정된 ‘보통학교령’, ‘사립학교령’, ’교과서검정규칙’ 등 각종 교육법령은 대표적인 경우다. 오직 식민정책에 순종·복종하는 ‘식민지형’ 인간을 양성하는 우민화는 저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강화학무회는 학구를 중심으로 보창학교지교에 의한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강화도를 근대교육운동 ‘요람지’로 진전시킨 배경은 여기에서 보인다. 보창학교지교 내 야학과 설립은 청소년들에게 보다 확대된 근대교육 수혜로 이어졌다. 당시 수강자만도 4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야학은 문맹퇴치 차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야학생들도 연합운동회 참가 등을 통해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병식체조를 중심으로 심신을 단련했다. 이동휘의 교육진흥책은 관내 사립학교 운영·유지로 귀결됐다. 그는 육영사업에 몰두하는 한편 의병전쟁을 지원하는 등 문무겸전에 입각한 민족교육을 시행이었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3. 인천지역 민권·계몽운동 주도한 ‘박문협회’

침묵하던 민중… ‘항일 정신’을 깨우다 ■ 조선이 국제무대에 등장하다 강요된 강화도조약이나 조선은 이제 ‘은둔국’에서 벗어나 국제사회 일원이 됐다. 이어 미국·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과 통상은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서울과 개항장에 형성된 조계지는 이들 열강의 침략을 위한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통상거주와 치외법권 등을 인정받은 저들은 자국 이익 추구에 혈안이었다. 선교사들은 절대자 앞의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마치 근대문물의 시혜자처럼 군림했다. 그런 만큼 외래 문물에 대한 불신감이나 의혹은 ‘활화산’처럼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는 개화정책에 소극적인 보수정권 타도에 나섰다. 갑신정변 주역은 메이지유신을 롤모델로 인식할 정도로 국제정세에 둔감했다. 이들은 청나라 속방에서 벗어나고자 일본을 우군으로 내세웠다. 외세에 기대어 또 다른 외세를 몰아내려는 무모한 계획은 허무하게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리하여 국민국가를 수립할 가능성도 치명상을 입었다. 곧 개화정책은 재야 세력과 민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소통과 국론통일이 긴급한 시대과제였으나 이를 추진하기에 너무나 허약한 상황이었다. ■ 독립협회가 국민국가 건설을 모색하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전력을 쏟았다. 민중생존권이 크게 위협을 받는 가운데 지배층에 대한 불신은 폭발 직전의 활화산과 같은 분위기였다. 독립협회는 약육강식의 제국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직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계몽단체였다. 슬로건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하다는 민권사상과 근대적인 법치주의·주권주의 등을 내걸었다.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 건립과 기관지 ‘독립신문’ 발간 등을 통해 자주적인 독립국가로서 면모를 알리는데 노력했다. 이에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고종은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활동 중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백정 박성춘(朴成春)의 만민공동회 연사로서 등장이었다. 강고한 인습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백정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로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박성춘 등장은 민중의 정치참여 의식을 획기적으로 승화시킨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방으로 확산을 거듭하면서 독립협회의 지회이자 자매단체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 변화에 부응한 박문협회가 조직되다 인천 기독교인과 명망가 등은 일찍이 독립협회 활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기독교인 복정채는 독립협회를 후원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세관을 ‘독립신문’에 투고했다. 주요 내용은 부국강병을 위한 충군애국과 자주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담았다. 내리교회 김기범이나 전경택 등도 시국관을 표현한 <경축가>와 <애국가>를 널리 알렸다. 만민공동회로 민권의식이 확산되는 가운데 1898년 6월9일 개항장 인천에 박문협회(博文協會)가 마침내 탄생했다. 이는 경기도에 조직된 최초 계몽단체였다. 명칭은 <논어> ‘안연(〈984F〉淵)’편의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라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궁극적인 목적은 독립협회 자매단체이자 지회로서 역할에 충실함으로 지역사회구심체임을 자임하고 나섰다. ■ 민지 계발과 민권 신장을 내세우다 창립 직후 회원은 130여명에 달할 정도로 대단한 호응을 받는 분위기였다. 임원진은 회장 이학인, 부회장 나동한, 전 임시의장 강준, 회원 유한식, 김기범, 박현보, 이용인, 이동환 등이었다. 우선적인 과제는 회원들의 시세 변화에 부응한 능력 배양과 친목도모였다. 더불어 신교육 보급을 통한 주민들 민지 계발에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은 회관 내에 관보나 신문 열람, 시무에 유익한 서적 구입과 정보 제공 등이었다. 회관은 단순한 집회장소라는 차원을 넘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근대적인 도서관으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민들의 열성적인 지원과 참여는 사회적인 책무를 일깨우는 생활현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연설회장에는 태극기를 앞뒤에 각각 배치하고 국가와 황제에 대한 일련의 의례를 거행했다.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은 이러한 가운데 확산을 거듭하였다. 통상회에 대한 보도 기사는 당시 계몽단체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민의를 수렴하는 여론 공론장의 성격은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회원들은 다양한 활동으로 계몽운동 확산을 전개했다. 인천항경무서 총순 한우근은 민중계몽과 근대교육 보급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연설회에서 ‘회(會)’자의 의미를 설명한 후 단체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위생문제 중 단발은 토론회를 거쳐 실시된 대표적인 결실 중 하나였다. 당시 단발은 단순한 위생적인 차원을 넘어 ‘근대인’을 상징하는 의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의 단발에 대한 보도와 호의적인 보도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회원들은 토론회에서 각자 의견을 스스럼없이 밝힘으로 자신감을 더욱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계몽단체에 의한 토론문화는 학교의 정규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경기지역 계몽·교육활동에 자극제가 되다 박문협회는 인천인들에게 변화를 알리는 ‘상징이자 희망봉’이었다. 회원들의 열성적인 활동과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개항장 인천의 변화를 이끄는 밑거름이었다. 그런데 외세 침략 강화에 따른 정국 불안은 합법적인 계몽활동마저 허용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제정러시아 전제정치를 지향한 대한제국 지배층은 독립협회를 불법적인 단체로 내몰아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박문협회 활동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 외형과 달리 회원들은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에 가담해 계몽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일제의 경제적인 침탈에 맞서 근대적인 상업단체나 회사 운영과 근대교육 보급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사립학교와 야학 설립을 주도하거나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단연동맹회·노인계 등을 결성하여 국채보상운동에도 자발적인 참여에 나섰다. ‘나랏빚 청산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의지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박문협회도 야학인 사립영어학교를 설립·운영했다. 교장은 박문협회장이 겸임한 반면 교사는 인천해관에 근무하는 강준과 이학인 등이 맡았다. 1900년 9월 사립영어학교를 계승한 박문학교는 개교했다. 설립주체는 천주교 제물포본당·샬트르 성바오로 인천분원 수녀들, 박문협회 회원 등이었다. 이 학교는 에우제니오 드뇌(한국명 全學俊) 신부의 활약으로 영화학교와 더불어 민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강제병합 직전까지 인천지역에 설립된 사립학교와 야학 등은 30여 개교 이상에 달했다. 박문협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회원들은 명예교사로 자원하거나 운영비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등 열성을 다했다. 이러한 열정에 의해 영화학교와 박문학교는 대한제국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민족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수원 삼일여학당·삼일남학당, 강화도 합일학교·보창학교·계명의숙, 개성 한영서원·정화여학당 등은 박문협회 활동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외세의 각축장이 된 개항장 인천에서 박문협회의 시작은 역사적인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이러한 흐름은 경기도 각지로 파급돼 교육·계몽운동을 국권회복운동 일환으로 추동시키는 든든한 에너지원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등 지회나 다른 계몽단체는 박문협회의 선구적인 활동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 인천광역시로 우뚝 선 배경은 인천을 사랑하고 주민들을 위해 활동한 계몽론자들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자기희생에서 말미암았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2. 13도 창의대진소와 서울진공작전

각국 영사관에 日 불의 성토… 서울진공작전 펼치다 을사늑약 이후 우리나라는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어느 때보다 팽배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마지막 보류인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수도방위를 책임진 시위대는 이를 거부하고 치열한 ‘서울시가전’을 전개하는 등 ‘구국간성’으로서 임무에 충실했다. 이에 지방의 진위대 병사들도 무기를 탈취한 후 의병진에 합류, 국권 수호에 대한 자신감은 높아지기도 했다. 그런 만큼 투쟁역량 강화와 더불어 고립·분산적인 항일투쟁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였다. 평안도 의병은 황해도 의병장 박기섭, 황해도 의병은 장단 의병장 김수민과 연락하고, 김수민은 철원 의병장 김규식, 김규식은 적성•마전 의병장 허위, 허위는 지평•가평 등지 의병장 이인영, 이인영은 제천 등지 이강년과 원주 등지 민긍호 등과 상통하며 같이 모의하는 상황이었다. 통일적인 체제를 갖춘 의병진인 13도창의대진소(이하 창의대진소) 결성은 곧바로 시대적인 소명임을 의미한다. 물론 과정은 원만하지 않았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엄중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 전국적인 의병부대, 13도 창의대진소의 결성 강원도 원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은찬과 이구채는 이를 추진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경북 문경에 은거 중인 이인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찾아갔다. 부친 간병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던 이인영은 마침내 원주로 이동해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후 의병 모집에 착수했다. 1907년 11월 하순에는 관동창의군으로 조직 확대와 더불어 굳센 항일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했다. 창의대장 이인영은 원주진위대에 경고장을 보내는 한편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통해 의병전쟁의 정당성을 밝혔다. 관동창의군은 연합의진 결성을 위해 근거지를 원주에서 경기도 지평으로 옮겼다.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서울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력 보강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근거지를 서울 근교인 양주로 이동하자 이때 의병장 허위를 비롯해 각지의 의병진이 이곳으로 집결했다. 이듬해 1월에는 지도부를 다음과 같이 재정비했다. 총대장은 이인영, 군사장은 허위이고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 △관서창의대장: 방인관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등이다. 이 같은 창의대진소의 중요 기반은 강원도의 이인영 계열, 경기도와 황해도의 허위 계열, 충청도 이강년 계열 등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의병진 연합부대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주목할 부분은 전국적인 연합의진을 표명한 사실로, 그 의미는 자못 크다. ■ 서울진공작전으로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성을 알리다 창의대진소는 양주를 근거지로 1908년 2월 초순까지 서울 근교를 무대로 두드러진 활약상을 벌였다. 삼산전투와 마전전투는 일본군의 싸운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울 공격을 위해 창의대진소는 군수품과 군자금을 조달하는 가운데 원주와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 공격으로 이틀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서 의병 사상자가 200~300명이나 나올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다만 전투를 통해 전술을 발전시키고 화력을 보완하는 등 의병진 사기가 높아져, 과감하게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의진끼리는 서로 연락하며 성원을 받았다. 각 도에 격문을 전하니 북을 치고 일어나는 원근의 응모자가 주야 끊이지 않고 모여들어 모두 1만여 명이나 됐다. 그리하여 서울로 진군, 통감부를 격파해서 협약(을사늑약과 정미칠조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했다. 이인영은 각 도 의병으로 하여금 일제히 진군하도록 촉구하고 몸소 300명을 이끌어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각 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본군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분전했으나 적과 대적할 수 없어 퇴군하고 말았다. 이는 전국에서 결집한 의병부대로 서로 연락이나 연합작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00여 명은 증원군이 도착하기 이전에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퇴각하고 말았다. 군사장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해 철통같이 준비,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었다. 이에 모든 의진에 전령해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외곽으로 나아가니 대부대는 장사(長蛇)의 기세로 천천히 진격하게 했다. 하지만 전군이 온다는 시기를 어기고 일본군이 졸지에 공격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군이 이르지 않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상을 당함으로 서울진공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았다. 이로 인해 각지에 결집한 의병부대는 원래의 근거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의병부대는 조직을 재정비한 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4월에 허위는 임진강과 강화도 등지 서해안 일대에 활약 중인 의병부대에 항일투쟁 촉구하는 통문을 보냈다. 제2의 진공작전은 증강된 일제의 압도적인 화력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 왜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했나 창의대진소가 서울진공작전에 매진한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서울로 들어가 통감부를 타격하고 성하(城下)의 맹세를 이루며 종래의 이른바 신협약 등을 파기해 대대적 활동을 기도함이라. 우선 신임하는 인물을 서울에 잠입시켜 각국 영사관을 순방하고 통문 한 통씩을 전달하니 그 개략적인 의도는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불행한 상황을 상세히 진술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의병의 순수한 애국적인 혈단(血團)이니 열강도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줄 것과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는 국가의 응원을 호소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해 통감부를 점령한 후 외교적 담판을 벌이되 한국에 주재 중인 구미열강의 외교적 지원을 기대했다. 또 이들은 ‘오적칠간(五賊七奸)을 처단하고 의병 중에서 인물을 골라 정부를 조직할 의도였다. 즉 서울진격작전은 일제 통감부의 타격, 일제와 맺은 조약의 파기, 친일정부의 축출과 의병 주도의 신정부 조직 등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열강의 지원을 받아 국제법상 유리한 입장에서 국권회복 문제를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려는 의도로 나섰던 셈이다. ■ 창의대진소를 통해 본 역사적 의의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으나 의병전쟁사에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크다. 우선 최초로 편성된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시 각지의 의병부대는 독자적인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분산적인 활동은 국권을 수호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연합전선 구축과 연계는 이후 의병전쟁으로 승화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또 통감부와 외교적 담판을 위한 군사활동이라는 점이다. 무력항쟁에 중점을 둔 양반 유생들과 달리 서울진공작전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보내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상을 호소했다. 아울러 자유·정의·평화를 지키기 위한 한국인의 활약상을 세계에 알렸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1. 이천수창소·남한산성 연합의병진

■ 단발령 시행, 불 붙은 의병운동 이른바 전기 의병은 을미사변 이후 시작됐다. 그런데 경기도 최초 의병운동인 이천의병은 단발령 공포한 다음날인 1895년 12월31일(음력 11월16일)에 일어났다. 서울에 거주하던 김하락·구연영·신용희·김태원·조성학 등 젊은 유생들은 이천으로 내려갔다. 일행은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을 영입하고 포군 100여 명을 포섭해 의병진을 조직했다. 방춘식은 초기 경기도 의병운동사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이들은 이천 이현에 진영을 설치하고 의병진을 결성했다. 구연영은 2개대의 포수를 거느리고 양근과 지평 방면, 조성학 역시 2개대를 이끌고 광주 방면으로 떠났다. 김태원과 신용희는 안성과 음죽 방면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노력의 결과로 구연영·조성학·신용희는 각각 300여 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의병진 조직 소식을 접한 용인·안성·수원·안산·시흥 등지에서도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김태원은 이미 조직된 민승천의 안성의병과 연합하기로 약속했다. 이리하여 경기도 연합의병진인 이천수창소가 조직됐다. 조직 편제를 보면 전형적인 전투조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유격장이나 돌격장 등은 다른 의병진에선 보이지 않던 직책이었다. 구체적인 편제 조직도 특징 중 하나로 주목된다. 이천수창소는 고종의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비밀조직이 전달되면서 더욱 확대됐다. 이춘영은 충주와 청주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집했다. 전귀석은 여주의병장 심상희를 만나 장차 연합 활동을 협의하는 등 활동영역을 넓혔다. ■ 백현전투 승리... 의병진 ‘사기 충전’ 이천의병은 이듬해 1월18일 일본군 100여 명과 백현전투에서 첫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의병진은 ‘복병전술’로 맞서 야산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이때 상황을 김하락은 <진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른 아침에 조성학은 적을 맞아 두어 시간 동안 격전을 하다가 갑자기 쇠북을 울리며 퇴군하여 백현으로 달아나니 적병이 고함을 치며 뒤를 추격하여 백현 아래에 당도했다. 그때 갑자기 대포소리가 울리며 구연영은 전면을 가로막고 김귀성·신용희는 산 중턱으로부터 쏜살같이 내려오고 조성학은 적의 돌아갈 길을 차단하여 사방에서 협격하니 적의 포위망에 빠져 진퇴의 길이 없었다. 나는 군사를 지휘하여 급습하여 무찔러 적은 죽은 자가 수십 명에 달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한참 무찌르다 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초생달은 서쪽하늘에 떠 있는데 서릿바람은 뼛속을 뚫는 듯하였다.” 첫 전투 승리로 의병진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였다. 이는 이후 의병운동을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백현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다시 공격해 왔다. 2월12일 새벽에 2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은 총공세에 나섰다. 다음날 새벽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눈보라가 일어 전세는 순식간에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의병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전투를 포기한채 흩어졌다. 결국 일본군에 패배한 의병진은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전투 패배로 인한 손실은 이천수창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의병 토벌을 구실로 이현 마을 전체를 무자비하게 초토화했다. 의병장들에게 시급한 현안은 잔여 의병 수습이었다. 김하락은 여주에 있는 심상희를 찾아가 군사 지원을 요청해 500여 명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뒀다. 구연영·신용희 등도 잔여 의병들을 수습·모집해 2천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박주영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근거지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 남한산성에 연합의병진을 다시 편성하다 남한산성에는 이미 심원진이 이끄는 광주의진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근의병도 여기에 합세하며 연합의병진을 다시 조직했다. 연합의병진 남한산성 점령은 일본군과 개화정권에 당혹감과 더불어 위압감을 줬다. 이곳은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군수물자가 비교적 풍부하게 저장돼 있었다. “사방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고 성첩이 견고하여 참으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1만 병이라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성중을 두루 살펴보니 쌓인 곡식이 산더미 같고 식염이 수백 석에 달하고 무기도 구비되어 여러 장수들은 군용이 유여한데다 진칠 곳마저 견고하여 몹시 기뻐하였다.” 즉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천연의 요새지를 근거지로 삼아 풍부한 군수물자를 갖춘 대단한 무장단체로 거듭났다. 일본 신문도 연하의병진 동향을 연일 보도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정부군은 친위대 1개 중대와 대포를 끌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관군은 3월5일부터 공격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연합의병진은 송파까지 추격해 관군의 대포마저 빼앗았다. 정부는 강화도진위대 병력까지 증파, 항복을 권유했다. 일본군도 증원군을 보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할 뿐이었다. ■ 원대한 서울진공작전, 그리고 실패 이때 의병진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군부대신에게 밀사를 파견해 친러정권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들을 체포하면서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정부는 장기렴에게 1개 혼성대대 병력으로 남한산성 공격을 명령했다. 이른바 장기렴부대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고 말았다. 의병진 확대와 거듭된 승리에 의병진은 서울진공작전을 모색했다. 이는 의병운동사 중 ‘최초’라는 사실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더욱이 경기도 뿐만 아니라 강원도 춘천과 삼남지역 의병진과 연합작전까지 구상한 점에서 주목된다. 나아가 의병운동 일체화와 더불어 국제사회에 일본의 불법성을 모색한 사실이다. 갑작스러운 남한산성 함락으로 중단된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은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 장기간 고립에 의한 군량이나 무기 부족 등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또한 지휘부 내부의 갈등이나 대립도 지적되어야 한다.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은 일부 의병장의 안일한 대응에서 찾아진다. 승리에 도취한 후군장 박준영과 좌군장 김귀성은 관군의 꾀임에 빠져 성문을 열어줬다. 의병진은 전투다운 전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 운동공동체임을 일깨우다 잔여 세력을 수습한 의병진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의병진은 정부군과 일본군의 끝임없는 추격을 받았으나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이동하는 동안 이미 현지에 결성된 의병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함으로 한민족이 ‘공동운명체’임을 일깨우는 밑거름이었다. 전기 의병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경기도 의병운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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