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세운 지 무려 217년이나 지났다. 위기가 찾아왔다. 중앙 집권세력과 지방분권이 대립했다. 정치는 불안정했고 권력 다툼도 이어졌다. 문벌귀족 중심의 개경(개성)과 서경(평양) 세력의 갈등이었다. 나라 밖 정세도 만만찮았다. 대륙에선 금나라가 급성장했고 여진족의 침입도 잦았다. 고려 중기의 서사다. 이런 가운데 수도를 개성에서 평양으로 옮기자는 서경천도운동이 시작됐다. 승려이자 문신인 한 인물을 중심으로 개경 중심의 유교적 정치체제에 반발해 깃발을 들었다. 금나라 정벌론과 서경천도론도 내세웠다. 평양성 축성과 성곽 개수도 진행됐다. 그 시작이 1135년 1월19일 아침이었다. 역사는 이 사태를 주도했던 승려의 이름을 따 ‘묘청의 난’으로 정리했다. 1년여간 이어졌지만 실패로 결말이 맺어졌다. 묘청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는 서경파 신하의 추천으로 인종의 왕사로 임명됐다. 관료들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서경천도론을 펼쳤지만 김부식 등 보수세력의 반대로 번번이 좌절됐다. 당시의 정치제체를 오늘날의 버전으로 따지면 개성 세력은 유교를 숭상하는 기득권이었고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는 측은 불교를 신봉하는 개혁세력이었다. 묘청은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고 부르자는 ‘칭제건원’도 주창했다. 연호도 중국의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건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고려 내부의 개혁 요구와 지방 세력의 성장, 그리고 불교적 왕권 강화에 대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천 년 이래 대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었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우리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 등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고 지적했다.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해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었다고 애석해 하기도 했다. 옛날 이야기만 꺼내면 손사래를 치는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대목이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어서다.
갯벌에 나가면 지척에서 채였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팔 할이 그랬다. 붉은발말똥게 이야기다. 등은 개구쟁이 소년의 흙투성이 무릎을 닮았다. 다리에는 갈색 털이 덮였다. 붉은빛을 띠는 갑각 앞부분과 집게다리 등도 특징이다. 집게발 등에 돌기가 나 있고 갑각 옆 가장자리에는 눈뒷니(눈 뒤쪽에 튀어나온 부분) 1개가 뚜렷하다. 눈 사이 이마에 굴곡도 있다. 짙은 회색 갯벌에 숨어 있으면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호미 한 자루 들고 나가 반나절이면 소쿠리가 제법 수북해진다. 그만큼 한반도 바닷가에 널렸었다. 말똥과 비슷한 냄새도 났다. 죽은 물고기, 곤충이나 떨어진 나뭇잎 등 유기물이 섞인 흙을 먹는 습성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녀석들은 갯벌처럼 축축한 습지에선 살지만 아가미로 호흡해 마른 땅에선 살 수 없다. 그래서 이 녀석들의 주 서식지가 바닷가다. 그런데 연안과 갯벌이 개발 및 매립되면서 서식지 급감으로 멸종 위기에 처했다. 그 천덕꾸러기의 머리가 백발이 되는 동안의 세월이었다. 하긴 강산이 다섯 차례나 바뀌었는데 그대로라면 이상할 듯싶다. 그래서 기후에너지환경부가 1월의 멸종위기 야생동물로 선정했다. 이 분류에 들어가면 소멸 위기에 놓였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 아직도 수도권에서 이 녀석들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반갑다. 안산 갈대습지가 그렇다. 안산환경재단과 서울대 연구팀이 600m 구간에서 최대 500여개체 서식(경기일보 2025년 5월23일자 8면)을 확인했다. 안산시는 이곳이 수도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서식지라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시화호 최상류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염분이 적은 진흙 지형과 넓은 갈대 군락이 형성돼 있어 붉은발말똥게 먹이활동과 은신에 적합한 서식 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연은 늘 우리 곁에서 다소곳하게 공존한다는 고정관념은 수정돼야 한다. 붉은발말똥게가 던지는 메시지가 제법 묵직하다.
농협중앙회가 또다시 ‘조직 쇄신’을 내걸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뭇매를 맞은 각종 비위 의혹에 이어 최근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특별감사 중간 결과에서 방만 경영 등 여러 문제가 추가 지적되면서다. 연신 ‘혁신’을 외쳐왔던 농협은 13일 대국민 사과까지 하며 후속 조치 중 하나로 농협개혁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를 통해 그동안 내부적 관행으로 묵인됐던 불합리한 제도 전반을 손볼 계획이다. 많은 구상안이 나온 가운데 특히 농축협 조합장을 비롯한 임원 선거제도에 대한 개선을 약속한 게 눈에 띈다. 내년 3월 제4대 전국동시조합장선거(이하 조합장선거)가 치러지기 때문이다. 조합장선거는 공직선거와 비교하면 인지도가 낮지만 주어지는 힘은 다르지 않다. 선거에서 선출되는 조합장은 조합의 대표권은 물론이고 예금과 대출 등 신용사업, 생산물 판매 등 경제사업을 펼칠 수 있다. 농협중앙회 대의원에 오를 기회도 주어진다. 거대 선거이기에 선거 전후마다 관련 잡음도 피할 수 없었다. 다가오는 조합장선거에서는 그러한 마찰을 막아야 하기에, 진정한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기에 농협개혁위원회의 향배가 주목된다. 현직 조합장의 임기 만료 180일 전인 9월21일부터 조합장선거 사무는 관할 선거관리위원회로 위탁된다. 그전에 개혁위원회의 세부 방향이 정해져 공정 선거를 위한 기틀을 닦아야 한다. 전면적 변화를 꺼내든 지금, 관건은 속도와 실천이다. 조합장선거는 농협 권한 구조의 출발점이자 그동안의 관행과 잡음이 반복돼 온 ‘현장’이었다. 개혁위원회가 출범 자체에 그친다면 이번 쇄신 역시 ‘선언’ 정도에 머물 우려가 있다. 마침 올 초부터 조합장선거를 위한 선거관리사무국도 운영을 시작한 터다. 약속한 대로 금품·향응 제공 행위자에 대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 도입, 부정선거 상담·신고센터 운영, 부정선거 적발 농축협 및 조합원에 대한 무관용 원칙 적용 등이 강화되기 바란다. 전국동시지방선거와 비교하면 남은 시간이 꽤 길다. 농협 혁신의 성적표가 이번 조합장선거로 드러날 수 있기에 돋보이는 ‘개혁’이 요구된다.
1962년 1월1일, 영국 런던의 한 오디션장에 네 명의 청년이 들어섰다. 부푼 꿈을 안고 진행한 오디션이었지만 결과는 참담한 불합격이었다. 심사위원들은 “기타 치는 그룹은 이제 한물갔다”며 그들을 혹평했다. 거절과 실패를 맛본 이들은 얼마 뒤 EMI와 계약을 했고 전설이 됐다. ‘비틀스’의 데뷔 이야기다. 1월 그날의 실패가 없었다면 록의 전설이 있었을까. 실패 하면 떠오르는, 빼놓을 수 있는 인물이 있다. 축음기와 상업용 전구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이다. 그는 전구를 개량하고 시판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셀 수도 없는 실패 끝에 결국 발명에 성공했고 그 결과 현대의 전기 문명이 시작됐다. 우리에게도 1월은 비틀스 및 에디슨과 비슷하다. 결심하고 실패하는 계절이다. 우리는 1월이 오면 과거와 다른 나로 변하겠다고 다짐한다. 헬스장에 등록하고 금연과 금주를 약속하고 어학공부를 시작한다. 지난해 연말에 샀던 2026년판 다이어리에도 그날의 기록을 빠짐없이 쓰기로 한다. 하지만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 했던가. 단단히 먹은 마음은 진정 사흘을 가지 못하는 것인가. 1월 중반이다. 야심 찬 계획은 2주 만에 삐걱거리고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을 수 있다. 오히려 1월에 일찍 넘어진 것이 다행이다. 남은 11개월을 더 단단하게 보낼 수 있는 예방주사를 맞은 셈이니까. 1월에 겪은 시행착오는 남은 1년을 버티게 해줄 훌륭한 오답노트다. 비틀스가 그랬듯 1월의 실패는 ‘끝’이 아니라 방향을 다시 잡으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작심삼일? 결심이 3일도 못갔으면 다시 마음먹고 행동하면 된다. 실패했다면 다시 해보자. 에디슨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작동하지 않는 방법을 1만가지 찾아낸 것이다.” 뭐가 두려운가. 다시 해보자. 용기 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보자.
2020년,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병이 나라를 뒤덮었을 때 기자들에겐 논제 하나가 던져졌다. 시작은 정은경 당시 질병관리청장의 브리핑에서 시작됐다. 어디에서 감염됐는지 모르는 감염을 일컬어 ‘깜깜이 감염’이라 부르던 걸 ‘감염 경로 불명’으로 칭하겠다고 한 뒤부터다. ‘깜깜이’가 장애 차별적 발언이라는 게 이유다. 얼마 전 제목에 그 단어를 썼다. 선거 관련 기사에서다. 다시 돌아온 선거철, 그 단어가 가장 잦게 등장하는 시기를 맞아 한번은 ‘깜깜이’가 정말 차별적 단어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깜깜이는 깜깜하다라는 형용사가 명사화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어원인 깜깜하다의 표준국어대사전상 의미는 ‘아주 까맣게 어둡다’, ‘희망이 없는 상태에 있다’, ‘어떤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잊은 상태’다. 깜깜이는 국어사전에 올라 있진 않지만 국립국어원의 온라인 사전인 우리말샘에 ‘어떤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는 행위, 또는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돼 있다. 정은경 청장이 썼던 ‘불명’을 한글로 푼 것과 뜻이 같다. 아니 불에 밝을 명, 밝지 않다, 즉 어둡다는 뜻이다. 뜻 어디에도 차별적 표현이 보이지 않다. 어둡다는 게 곧 차별을 뜻한다는 게 아니라면 어디에서 차별을 찾아야 할까. 과거 자주 쓰기도 했던 ‘눈 먼 돈’이나 ‘절름발이 행정’, ‘귀머거리 기관’ 같은 표현과는 다르지 않나. 누군가 특정 단어에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면 가끔 그 단어를 사용하는 자체로 인식에 문제가 있는 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자살을 자살로 쓰면 제재를 받고 ‘극단적 선택’으로 써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극단적이라 해도 생명을 선택으로 끝낼 수 있다고 여기게 하는 단어가 더 문제 아닐까란 생각이 들던 날처럼, 생각이 많아졌다.
미국의 주무 장관이 파격적인 정책을 발표했다. 태평양과 극동지역 방어선인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1950년 1월12일 오전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였다. 애치슨 라인은 당시 미 국무장관인 딘 구더햄 애치슨의 성을 따 붙여진 명칭이었다. 물론 애치슨 라인에서 배제되는 국가에는 대만과 인도차이나 등도 포함됐다. 이 정책은 1년 전 하원의 승인을 받았다. 그의 연설 첫 부분을 들어보자. “태평양과 극동 문제를 감안할 때 군사적인 고려에만 집착하는 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문제들은 군사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애치슨 라인의 바깥 국가들이 침략을 당하면 먼저 침공을 당한 국가가 스스로 저항해야 하고 유엔 아래 문명 세계 차원에서 지원해야 하며 군사적 해결책에만 집착하는 건 옳지 않다는 논리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지구촌 질서를 주도했던 강대국 관료 발언의 반향은 컸다. 기자회견장에 참석했던 언론인들도 두 귀를 의심했다. 신생국인 대한민국의 이름도 생소했지만 태평양과 극동지역 방어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내용도 그랬다. 미 국무부는 같은 해 4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애치슨 라인을 공식화했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북한 침입 시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겠다는 의견도 내놨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한반도의 애치슨 라인 포함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미국은 대한민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없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됐거나 대한민국의 방위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며 원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해 6·25전쟁이 발발했다. 역사의 눈길은 이 대목에 집중됐다. 한반도의 애치슨 라인 배제가 당시 소련과 중국 판단에 영향을 끼쳐 북한의 남침을 방조했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려서다. 이 같은 주장은 수십년간 이어진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 전략을 합리화하는 논리에도 유효하게 적용됐다. 반성과 통찰이 없으면 잘못 된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의 패권 경쟁 한복판에 있는 우리로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긴 장대에 매달아 올렸다가 내리기가 반복됐다.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이용해 앞으로도 가고 뒷걸음도 쳤다. 돛 이야기다. 이를 추진 동력으로 삼던 배가 돛배였다. 19세기 초반 증기선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구촌 강은 물론이고 바다를 운항하는 배들을 움직이던 으뜸 동력이었다. 돛은 헝겊으로 짰다. 떡갈나무 껍질에서 얻어낸 검붉은 빛깔의 물감을 들였다. 서양에선 흰색이 주종을 이뤘다. 한국에선 조선시대까지 노란색이 대세였다. 그래서 황포(黃布)라 불렀다. 노란색 돛을 단 배는 한반도 강 및 바다를 누볐다. 황포돛배의 서사다. 그러다 잊혀져 갔다. 한반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2004년 임진강에서였다. 그러다 선착장 부지를 소유한 군부대의 훈련 등으로 2014년 11월 잠시 중단됐다. 이후 파주시는 9억원을 들여 국방부로부터 적성면 두지리 두지나루 부지 6천30㎡를 사들여 주차장 등을 조성한 뒤 2017년 7월1일부터 운항을 재개했다. 코스는 두지리 선착장을 출발해 거북바위~임진강 적벽~원당리 절벽~호로고루성을 거쳐 두지리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6㎞ 구간을 운항한다. 한 척이 하루 8회 운항하며 소요 시간은 40분이다. 강물이 어는 겨울에는 운항하지 않는다. 어떻게 운항했을지 형태가 궁금하다. 파주시에 따르면 6·25전쟁 이전 임진강을 떠다니던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길이 15m에 너비 3m, 돛 길이 12.3m, 무게 6.5t으로 많게는 45명을 태울 수 있다. 운항 재개 첫해인 2017년 2만1천561명이 찾았다. 2018년 2만5천115명, 2019년 2만4천700명이 이용한 것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로 2020년 1만3천247명, 2021년 1만6천906명으로 감소했다. 이후 2022년 2만2천827명, 2023년 2만3천912명, 2024년 2만5천여명으로 다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는 3월부터 10개월간 2만663명이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붉은 말띠해가 밝았다. 올해도 임진강 황포돛배를 타고 뉘엿뉘엿 지는 땅거미를 지켜보자. 두 뺨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겠지만 말이다.
병오년(丙午年)의 희망찬 해가 떠오른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육십간지의 43번째로 붉은색과 불의 기운을 지닌 ‘병(丙)’과 말을 상징하는 ‘오(午)’가 만나 ‘붉은 말의 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붉은 말. 우리는 살면서 ‘삼국지연의(삼국지)’라는 소설을 한 번쯤은 접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소설의 호불호 문제는 여기서 판단할 대상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접한 적토마(赤兎馬)라는 단어는 희대의 명마(名馬)로 모두들 각인돼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붉은빛이 도는 털에 토끼처럼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는 뜻으로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다는 적토마. 원래 삼국지에선 동탁의 애마였지만 여포를 꾀어 오기 위한 이숙의 계책으로 여포에게 주어지고 여포는 양부 정원을 살해하고 동탁의 수하가 된다. 훗날 여포가 조조에게 사로잡히면서 조조의 손에 들어간다. 관우가 하비에서 조조에게 패해 항복했을 때 조조가 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적토마는 관우에게 전해졌다. 그 후 관우를 따라 수많은 전쟁에 참여했다. 관우가 손권에게 처형된 후에는 마충에게 하사됐지만 사료를 일절 먹지 않고 굶어 죽음으로써 주인의 뒤를 따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병오년이 지닌 사전적 의미도 중요한 한 해이겠지만 올해는 군민을, 시민을, 도민을 대표하는 이들을 뽑는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해다. 4년 농사의 성패가 갈리는 만큼 유권자의 선택이 ‘대한민국의 재도약이냐, 거침없는 추락이냐’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유의미한 한 해라 하겠다. 오롯이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겉과 입담은 화려하지만 십 리도 못 달리는 관상용 애마와 같은 사람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야 한다. 목표를 정하면 속도를 붙여 달리는 동물인 말. 여기에 불의 기운이 더해진 ‘2026 병오년’은 실천과 행동이 시작되는 해로 기억되길 기대해본다.
“집과 생활은 단순하고 검소하게.”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거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세상에 밝힌 조언 중 한 구절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1958년 매입한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버핏의 소박한 삶은 그를 더욱 칭송받게 만든다. 2026년 병오년(丙午年). 낮에 천 리(약 400㎞)를 달리고 밤에 팔백 리를 달린다는 전설의 말 적토마의 해를 맞아 ‘뭐라도 시작해 보자’는 차원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유튜브와 커뮤니티를 검색하던 중 ‘가난 챌린지’라는 기이한 유행을 알게 됐다. 가난 챌린지의 핵심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극단적인 불일치에 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라는 자조 섞인 문구. 이와 상반되게 비행기 1등석에서 라면과 후식을 먹고 있는 사진. 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며 올린 식탁 위에 함께 찍힌 수억원대의 외제차 키. 컵라면 뚜껑 덮개로 사용된 수백장에 달하는 5만원권 뭉치 이미지 밑에는 오늘도 겨우 먹는 컵라면 한 끼라는 글. 해당 챌린지를 쭉 살펴보며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대놓고 “나, 부자야”라는 직설 화법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킬까 걱정이 돼 반어적 표현을 통해 웃음도 잡고, 재력도 과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걸까. 가진 게 너무 많아 이젠 가난이라는 예민한 소재마저 끌고 와 과시의 도구로 사용하는 걸까. 그 이면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할 순 없지만 확실한 건 이들은 몇 가지 오판을 저질렀다. 부유층 놀이로 대중적 호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공감 능력의 부재, 범부들의 애환을 담은 특정 단어가 가진 무게에 대한 무지함, 과시를 전제로 한 뒤틀린 인정 욕구. 진짜 무서운 건 경제적 가난이 아니다. 내면적으로 수많은 결핍을 가진 정신적 가난이다.
2025년 을사년이 지나가고 2026년 병오년이 밝았다. 해마다 전국 대학교수들은 그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정하는데 2025년에는 ‘변동불거(變動不居)’를 꼽았다. 세상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한다는 의미의 변동불거. 지난해 봄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 2025년을 잘 나타낸 사자성어다. 교수들이 꼽은 올해의 사자성어 2위는 하늘의 뜻은 일정하지 않다는 뜻의 천명미상(天命靡常)이었다. 민심의 귀함과 무서움을 알고 민심에 따라 행동해야 함을 뜻한다. 이는 올해 치러질 지방선거에 출마할 후보자들이 꼭 명심해야 할 사자성어다. 새해가 되면 각 지자체 및 기관들도 한 해의 방향을 나타내는 사자성어를 발표한다. 2026년 병오년 새해 화성시가 꼽은 사자성어는 ‘정출지일(正出之日)’이다. 솟아오르는 태양의 강성한 기운처럼 106만 시민 모두와 함께 화성시가 힘차게 도약하겠다는 의지다. 안성시가 꼽은 사자성어는 ‘승세도약(乘勢跳躍)’이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경험과 힘을 바탕으로 안성시의 더 큰 도약을 만들어 나가자는 뜻이다. 부천시는 시민과 행정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동심만리(同心萬里)’를, 인천 계양구는 ‘승풍파랑(乘風破浪)’을 선정하며 변화하는 행정 환경 속에서도 기본에 충실한 행정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성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기업들은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선택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 1천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자강불식은 스스로를 강하게 하며 쉬지 않고 노력한다는 의미로 새해를 맞이하는 기업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병오년 새해, 각자의 마음속에 새긴 네 글자 다짐을 꼭 실현하는, 실현되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등 푸른 생선’이라는 표현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푸른 바다 빛으로 보이고 바닷속에서 올려다보면 흰 수면으로 보이는 보호색을 지녀 그렇게 부른다. 고등어 이야기다. 대표적인 국민생선이다. 한국인의 밥상에 조림이나 구이, 찌개 등으로 자주 오른다. 경상도에선 비빔밥이나 된장찌개 정식에도 같이 나온다. 식탁에 오르는 녀석들은 대부분 몸 길이 40㎝가 넘는 중대형이다. 국민생선 고등어는 바로 이 녀석들을 가리킨다. 치어 때는 플랑크톤을 먹고 훌쩍 자라면 멸치 등 작은 물고기가 주요 먹이다. 제주도와 인근 해역에서 가장 많이 잡힌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등어의 이력서다. 그런데 모르는 부분이 있다. 기후변화 속에서 국내산 어획량이 쪼그라들면서 수입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래시장 어물전에서 눈을 씻고 봐도 토종 고등어 찾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요즘 식탁에 오르는 고등어는 대부분 외국산이다. 해양수산부 등에 따르면 녀석의 수입량은 2024년 5만5천t에서 지난해 8만3천t으로 51%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수입산의 80~90%가 노르웨이산이다. 어물전에서 팔리는 중대형 고등어가 사실은 북대서양 바다를 헤엄치던 녀석들이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단골손님인 고등어가 앞으로는 귀한 생선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노르웨이산 고등어마저 공급이 반 토막 날 것으로 보여서다. 해양부에 따르면 노르웨이 정부는 고등어 어획량 쿼터를 지난해 16만5천t에서 올해 7만9천t으로 52% 감축할 계획이다. 2024년(21만5천t)과 비교하면 63% 감소한 수치다. 이 나라는 지난해 말 영국, 페로제도, 아이슬란드 등과 북대서양 고등어 어획량 쿼터를 48% 감축하는 데 합의했고 이 중 26.4%를 배정받기로 했다. 이처럼 고등어 어획량을 급격히 줄인 건 남획 등으로 인한 자원량 감소로 고등어가 더는 ‘지속가능한 생선’이 아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서민의 생선이 귀하게 대접을 받아야 할 정도로 환경 문제가 절실한 현실로 다가왔다.
올해는 아기 울음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국가를 지탱하는 으뜸 프레임이 출산율이라는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쾌했다. 물론 엉거주춤했던 시절도 있었다. 경제가 윤택하지 않아서였다. 생계 문제로 산아가 제한됐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산업화 시대가 딱 그랬다. 가족계획은 6·25전쟁 이후 출생한 세대들이 개구쟁이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던 구호였다. 도시의 초등학교마다 학생이 넘쳐 2부제 수업이 진행됐다. 부모들은 셋방을 얻기 위해 자녀 수를 숨겨야만 했다. 주인집이 아이가 많은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서였다. 2000년대 들어 결혼·출산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육아·교육비용의 영향이었다. 사회로 진출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까닭 모를 죄책감으로 고민해야 했다. 젊은이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당사자라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연간 합계출산율이 0.8명대를 회복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반갑다.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가리킨다.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합계출산율이 0.81명으로 2024년 같은 달에 비해 0.02명 늘었다. 지난해 말까지 안정적인 회복세가 계속된다면 합계출산율은 4년 만에 0.8명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5년 새 합계출산율의 흐름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2021년 0.81명에서 2022년 0.78명, 2023년 0.72명 등으로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2024년 0.75명으로 9년 만에 반등했다. 2024년부터 이어진 혼인 증가, 30대 여성 인구 증가, 출산에 관한 긍정적 인식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합계출산율 1.43명(2023년 기준)과 비교하면 저조해서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붉은 말의 해’를 맞아 드는 반가운 단상이다. 새해부터 느낌이 좋다.
경기도의 내년도 본예산안이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의회에서 통과됐다. 40조원이 넘는 규모다. 도는 이 돈을 경기 회복의 흐름을 뒷받침하고 도민과 지역경제에 변화를 주도록 하는 데 편성했다고 한다. 주요 사업을 보면 올해 진행했던 정책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지역화폐로 결제하면 바로 페이백이 들어오는 ‘경기 살리기 통큰세일’ 사업에 100억원을 편성했다. 올해 해당 행사를 진행했는데 최근 지역화폐 가맹점에서 실제로 결제를 해보니 바로 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잔액을 또 써야 하니 지역화폐를 충전하게 되고 다시 가맹점에서 소비하는 구조다. 이런 식으로 돈을 풀어 지역상권에 돌도록 하는 효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도는 내년 예산에서 ‘생애 맞춤형 전방위 돌봄’이라는 명목으로 9천862억원을 확보했다. 출산, 육아, 돌봄 등에 각각 예산을 투입해 전주기적인 도민 복지를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저출산과 자녀 양육에 대한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동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예를 들어 난임부부 시술비 지원은 가정과 사회 모두에 이익이 되는 정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난임 부부에게 용기를 주면서 저출산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미 여러 지자체가 시행하고 있고 경기도 역시 사업을 확대하면서 이 부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상대적 불편을 감내한 지역에 대한 지원도 담겼다. 특히 예산 심사 과정에서 사라질 우려가 있었던 주한미군 반환공여구역 개발기금 200억원이 다시 살았다. 내년도에는 특별히 경기 북부지역 등에 새로운 경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26일 경기도의회 제387회 정례회 5차 본회의에서 통과된 경기도 2026년도 본예산안은 40조577억원이다. 2025년 본예산 38조7천221억원보다 3.4%인 1조3천356억원이 늘었다. 증가한 예산만큼 복지도 늘어나 혜택받는 도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3.4% 더 행복해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한 해를 정리할 겸 일기장을 뒤적였다. 일기장에 적힌 새해 다짐은 지난해, 또 그 전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올해 이루지 못한 일들을 새해 소망에 또 쓰려니 혼자 있는데도 누가 보는 듯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남은 일이 빼곡하다. 본업에 충실하리라 발버둥을 쳤지만 선언으로만 남아 반성문으로 변한 글도 여럿이다. 많은 이들에게 다사다난한 해였을 것이다. 어수선한 국가의 일들은 개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비상계엄과 탄핵,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의 무거움 속에서 새해는 밝았고 새 정부가 탄생했다. 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매일의 출발선에서 저마다의 짐을 짊어지고 경쟁을 하고, 버티기도 하며 한 해를 보냈다. 종교계가 새해를 앞두고 신년사를 발표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은 29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비난보다 잠시 멈추어 마음을 돌아보는 여유”라고 강조했다. 천태종 총무원장 덕수 스님은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타심”이라고 했으며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사랑과 평화를 실천할 때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의 일상과 세상 안에서 더욱 생생히 증거되고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김정석 대표회장 등의 명의로 낸 신년 메시지에서 “비난보다는 격려를, 정죄보다는 사랑을 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령하 한국민족종교협의회장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가르는 벽이 아니라 함께 걷는 다리”라고 전했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잘 맞이하는 것과 같다. 각자의 한 해가 고단했더라도 찬란한 순간은 분명 존재했고 혐오의 말들이 오간 사회에서도 연민과 연대는 이어졌다. 나무가 잎을 떨구고 겨울눈을 품듯 떨굴 것은 떨구고 새로운 희망을 품는 지혜가 필요한 연말이다. 종교계의 신년사처럼 비난과 분노를 멈추고 서로를 향한 사랑과 격려로 함께 걸어가는 새해를 열어가길 바라본다.
퇴근 후 이웃들과 차를 마신다. 집 주변을 산책한다. 연극도 본다. 주말이면 들녘을 찾는다. 휴가철이면 외국 명승지를 둘러본다. 청년시절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서양인들의 일상이었다. 부러웠다. 우리는 그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으면서 치열하게 살아왔다. 여유가 없었다. 무한경쟁 속에서 한 치의 틈이라도 보이면 진다는 고정관념에 지배당했다. 이런 쫓기는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진 않다. 느긋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 또는 대범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 마음의 상태가 찾아왔다. 이는 곧 여가 생활로 이어졌다. 심리학적 해석으로는 현재의 여가 생활에 대해 ‘매우 만족’ 또는 ‘약간 만족’이라고 응답한 비율을 뜻한다. 여가 만족도 이야기다. 반가운 통계가 발표됐다. 여가 만족도가 2016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고 10명 중 6명 이상이 자신의 여가 생활에 만족했다는 분석이 그렇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여가 만족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참여자의 64.0%가 ‘매우 만족’, ‘만족’, ‘약간 만족’이라고 응답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에 비해 2.4%포인트 상승했으며 2016년 조사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2019년 56.4%였다가 코로나19로 차츰 떨어져 2021년 49.7%를 기록한 뒤 매년 오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좀 더 들어가 보자. 여가 만족도 상승은 여가의 양보다는 질이 높아졌다는 반증이다. 국민 1인당 ‘한 번 이상 참여한 여가 활동’의 평균 개수는 지난해 16.4개에서 15.7개로 줄었지만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여가 활동’ 비율은 38.5%에서 43.2%로 늘었다. 여기에 월평균 여가시간이 3.7시간에서 3.8시간으로 증가하고 스포츠 참여나 문화예술 참여 등 참여형 여가 비율이 높아진 것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여가를 즐기는 장르도 궁금했다. 영화가 50.6%로 가장 많았고 대중음악 및 연예 15.0%, 뮤지컬 5.8% 등의 순이었다. 이 같은 생활이 내년에도 계속 이어지길 소망한다. 그게 바로 잔잔한 평화다.
청년 과학자가 있었다. 조국은 힘 없는 약소국이었다. 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늘 늠름하고 활달했다. 허름한 숙소에서 어렵게 지냈지만 기품은 결코 잃지 않았다. 그날도 어김 없이 오전 일찍 대학 실험실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은 매서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북부 보헤미아에서 산출된 피치블렌드에서 나온 광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은을 음극으로 전기를 분해했다. 그러자 새로운 원소가 마침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듐의 발견이었다. 이 원소는 주기율표 제2족에 알칼리 토금속에 속한다. 같은 질량의 우라늄보다 300만배 많은 방사능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방사능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궁금한 게 있다. 이 원소를 발견한 이는 누구였을까.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마리 퀴리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이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였다. 폴란드에게는 다시 없는 보배였고 자랑이었다. 좀 더 들어가 보자. 그녀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1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폴란드어나 역사를 공부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마리 퀴리는 여학교에서 폴란드어와 역사를 공부하다가 장학사가 오면 실과수업을 받는 것처럼 숨겨야만 했다. 러시아 장학사들은 폴란드 학생들이 러시아어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해 많은 폴란드인들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민족말살에 악용했다. 심지어는 “너희를 다스리는 분은 누구냐”라고 물어 식민지배에 순응하도록 했다. 청소년 시절은 그렇게 우울했다. 우리의 일제강점기가 겹쳐진다. 청소년기를 거쳐 프랑스로 진출해 소르본대학에서 교수로 연구에 매진했다. 그리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과학자 반열에 올랐다. 그녀는 어렵게 발견한 원소에서 발생하는 방사능으로 암에 걸려 결국 이 세상을 떴다. 인생 말년에 찾아온 반전이었다. 동료였던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였다.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한 날은 공교롭게도 성탄절 다음 날이었다. 1898년 오늘의 이야기다.
‘안전수칙은 피로 쓰인다’는 말이 있다. 대규모 인적·물적 피해를 동반한 사고 또는 비극이 발생하고 나서야 원인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미진했던 제도나 규칙이 개선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최근 10년 새 안전수칙을 개선하면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2014년 300여명의 사망자가 나온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는 선박의 화물 과적, 구명 설비 점검 규정이 강화됐고 ‘생존수영’ 과목이 신설됐다. 2017년에는 사상자 118명, 건물 671채 전파 등 피해가 발생한 포항 지진을 계기로 건축물 내진설계 기준이 강화됐으며 2022년 154명이 사망한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인파 관리체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기도내 전통시장에서 발생한 참사로 새 안전수칙이 쓰이고 있다. 경기남부경찰청과 지자체가 부천제일시장을 시작으로 전통시장 내 차량 출입을 전면 통제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달 13일 좁은 시장 골목으로 1t 트럭이 돌진해 4명이 사망하는 등 22명의 사상자가 나온 ‘부천제일시장 차량 돌진 사고’에 따른 후속 조치다. 사고 당시 방문객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인지하고도 비좁은 통행로 탓에 피하지 못하는 폐쇄회로(CC)TV 영상이 공개되면서 차량과 보행자가 겹치는 시장 통행로의 구조적 문제가 인명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현재 부천제일시장에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11시간 동안 차량 출입을 금지하는 이동식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있으며 그간 익숙한 풍경인 ‘시장통을 오가는 차량’은 점차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부는 화재·붕괴·폭발·다중인파 밀집 사고 등 예견 가능한 사회 재난 예방책을 행정안전부가 수립하고 지자체가 실행하는 ‘사회재난대책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2026년은 새 안전수칙이 쓰이지 않는 해가 되길 기대한다.
1914년 12월24일 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유럽의 어느 서부전선. 영하의 참호 속에서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영국군과 독일군의 참호는 고작 9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 독일군 진영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럴이 흘러나왔고 영국군이 이를 따라 부르며 화답했다. 병사들은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고 참호 밖으로 나왔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병사들은 서로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양측은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을 치우고 그 빈자리에서 함께 축구를 즐겼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전날 전쟁터에서 잠시 교전을 멈춘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실화로 이른바 크리스마스 휴전(또는 정전)으로 불린다. 전쟁사에 길이 남을 비현실적이고 놀라운 휴전이다. 111년이 흐른 2025년 12월, 우크라이나 땅은 여전히 붉은 피로 물들어 있다. 4년 가까이 진행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과거 전쟁과는 사뭇 다르다. 과거에는 총을 든 병사가 적에게 직접 총을 쏘았고 상대방의 눈을 보며 방아쇠를 당기기를 주저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수㎞ 떨어진 곳에서 드론을 띄우고 모니터를 보면서 적에서 주저 없어 총을 발사했다. 드론의 표적이 된 병사는 드론을 향해 두 손으로 빌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소용없다. 모든 전쟁은 참혹하다. 우크라이나전쟁에는 1914년 그날과 같은 인류애가 조금이라도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반가운 소식이 미국 플로리다에 나왔다.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대표단이 지난 주말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우크라이나전쟁의 종전을 위한 연쇄 회동을 가졌다. 합의 내용이나 향후 일정에 대한 발표는 없었지만 미 대표단을 이끄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특사 스티브 위코프는 회담을 ‘건설적’이었다고 평가했다. 1914년 전장 속 캐럴이 병사들의 마음을 녹였듯 이번 협상이 얼어붙은 전쟁을 녹이는 2025년 전장 속 캐럴이 되기 바란다. 이번 성탄에는 우크라이나 평원에 윙윙 거리는 드론 소리 대신 평화의 종소리와 캐럴이 울리기를 기원한다.
예년에 비해 부쩍 일찍 찾아왔다. 확산세도 빠르다. 분위기도 심상찮다. 독감 이야기다. 동네 의원들마다 환자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고 있다. 질병당국에 따르면 최근 표본감시 의료기관 300곳을 찾은 외래환자 1천명당 독감 증상을 보인 의심 환자는 50.7명으로 지난달 22.8명에 비해 122.3%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18세 이하 청소년과 어린이 등을 중심으로 유행하면서 7~12세 독감 의심 환자는 외래환자 1천명당 138.1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현실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당국은 현재 일본과 영국 등지에서도 독감 유행이 지난해보다 1~2개월 일찍 시작돼 확산 중인 것으로 분석했다. 현재의 독감 증가 양상과 국외의 발생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올해는 독감 유행 기간이 길고 지난해와 유사한 정도로 크게 유행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망된다. 되돌아보면 이 같은 현상은 진작부터 예고됐다. 예년 같으면 12월 시작됐을 독감 유행이 10월부터 창궐했기 때문이다. 2개월 빨랐다. 북쪽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겨울 초입에 들어서야 비롯됐던 증세가 단풍도 지기 전부터 찾아온 셈이다.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다. 질병당국은 65세 이상 어르신, 임신부, 생후 6개월~13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백신 예방접종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생후 6개월~13세 어린이의 백신 접종률은 57.2%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독감 이외에 코로나19, 호흡기세포 융합바이러스(RSV) 등 호흡기 감염병도 신경이 쓰인다. 코로나19 환자는 지난 여름 늘다 9월 중순부터 감소세로 전환된 후 지금은 매주 200명 이내 수준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SV 감염증 환자도 최근 216명 발생해 지난해 같은 기간 122명보다 다소 늘었다. 최근 4주간 환자 중 0∼6세가 84.1%를 차지하는 등 대부분 영유아인 만큼 산후조리원이나 보육시설 등에서 집단 발생 예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질병의 대처 방안은 철저한 예방뿐이다.
두 세기에 걸쳐 진행된 일대 ‘사건’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체체로 바뀐 홍콩 반환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그렇다. 차근차근 들여다보자. 영국이 청나라와 대륙에서 제1차 아편전쟁을 시작했다. 1842년이었다. 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뒤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의 주권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곳은 당시 중국 광둥성 남녘의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초창기에는 홍콩섬으로만 구성됐다. 하지만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또 무릎을 꿇으면서 주룽(九龍)반도와 스톤커터스섬 등이 추가됐다. 베이징조약의 결과였다. 이후 이 섬은 세계의 주목을 받는 무역항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동양의 진주’라는 애칭도 붙었다. 그러다 1972년 중국과 영국의 국교가 수립되고 1982년부터 반환 협상이 시작됐다. 그때가 1984년 12월19일이었다. 41년 전 이야기다. 15년 후인 1997년 7월1일 0시를 기해 영국의 식민지배를 청산하고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출범했다. 홍콩은 2047년까지 50년간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 정치·경제·사법 등의 분야에서 고도의 독립성을 보장받게 됐다. 155년 만이다. 동서냉전 이후 세계질서 변화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필자는 그곳에서 자본주의 시절 대기업 주재원으로 잠시 근무하다 사회주의로 전환된 뒤 찾았다. 그래서 감회가 새로웠다. 반환에 앞서 7, 8년간 입법평의회 의원 직접선거가 실시됐다. 중국도 예비운영위원회를 꾸렸다. 이후 이 기구를 대신할 홍콩특별행정구 준비위가 발족됐다. 초대 행정장관으로 둥젠화가 선출됐다. 이어 인민해방군 선발대 1진 40명이 도착했다. 홍콩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체제다. 한 나라에 사회주의 체제가 있고 자본주의 체제가 양립한다는 뜻이다.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하다. 법적 지위도 중국와 영국의 공동성명은 국제법상 구속력 있는 조약으로 사회·경제 체제는 2047년까지 유지될 예정이라고 명문화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같은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는지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