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디세이] 지구의 방생

불교에 ‘방생(放生)’이라는 의식이 있다. 인간에 의해 잡힌 동물을 다시 그들이 살던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것으로 생명 존중과 공생이라는 불교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의식이다. 사찰에서는 봄, 가을이나 물고기의 산란기에 맞춰 방생의 법회를 열어 많은 불교인들과 함께 인간만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공존하고 함께하는 지구라는 가르침을 일깨워 준다. 과거에는 방생에서 물고기나 새 등을 풀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것이 자칫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방생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다. 최근에는 방생의 의미를 보다 넓게 해석해 생명이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활동으로 변해 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강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정화작용을 돕거나 겨울철 먹이가 부족한 산짐승이나 철새에게 사료를 제공하는 방생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방생문화는 생명 존중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보다 지금의 현실에 맞게 실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 방생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바로 지구를 위한 방생이다. 당장 11월 말의 폭설을 떠올려 보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예측조차 못할 정도의 기록적인 눈이 내려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에 대란을 일으켰다. 더불어 장마와 태풍은 매년 그 피해와 규모의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우리의 지구가 이제는 우리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던 곳에서 두려움과 걱정의 대상이 돼 가고 있다. 모든 인류는 지금까지 지구에서 태어났고, 지구에서 살다가 다시 지구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 지구는 단지 우리의 터전을 넘어 모든 생명의 토대이고 그 생명들의 세상이다. 그러나 그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오직 자신만을 위해 마구잡이로 생산하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일회용품을 사용하며, 흥청망청 자원을 소비한다면 지구가 제공하던 터전은 그리고 세상은 어쩌면 이제 우리를 품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생명을 지키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이제 지구를 위한 방생을 해야 한다. 지구를 위한 우리의 방생이 어쩌면 다소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탓을 할 때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실천해야 한다. 그 방법도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으나 오히려 실천하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용하는 자원을 조금만 아끼고, 사용한 것은 잘 분리해 버리며,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꼭 다시 쓰면 된다. 그리고 주변에 타인에 의해 버려지거나 훼손된 것을 내가 먼저 줍고 정리한다면 그 작은 실천이 하나둘 모여 거대한 힘이 돼 지구를 살리는 방생이 된다. 누구나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한다. 이 ‘행복하고 잘 사는 것’은 우리의 자리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다. 오늘 무엇 하나를 줍거나 아낀 그 행동이 훗날 더 아름답고 안락한 지구가 돼 우리에게 행복의 터전을 제공해 줄 것이다.

[삶, 오디세이] ‘꼬리표’ 농담처럼 사소화되는 편견과 차별

꼬리표란 단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늘 따라다니는 떳떳하지 않은 평판이나 좋지 않은 평가’를 뜻한다. 그런데 누구나 이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음을 잘 알고는 있어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지는 말로 그 꼬리표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일례로 ‘동남아’와 ‘다문화’라는 단어를 한번 돌아보자.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각각 ‘동남아시아의 음역어’와 ‘한 사회 안에 여러 민족이나 여러 국가의 문화가 혼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즉, ‘동남아’는 ‘아시아의 동남부’ 지역인 ‘동남아시아’를 한자로 간단히 나타낸 지리학 관련 용어이고 ‘다문화’란 한 사회의 문화적 변화 양상을 의미하는 사회문화학 관련 용어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의 학계가 아닌 일반 언중은 이 ‘동남아’와 ‘다문화’라는 용어를 그 본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특정 언어·문화권의 사람들을 ‘동남아’나 ‘다문화’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현재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이민자들의 출신 국가 중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가 동남아시아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한민족 순수 혈통’이라 자부하는 일부 한국인은 그 지역에서 온 이주민을 통틀어 ‘동남아’ 내지는 ‘다문화’라고 부르곤 한다. 이때의 ‘동남아’는 더 이상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동남부를 뜻하는 지리학 용어가 아니다. 그보다는 동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민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안에는 이들을 향한 편견이 내재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동남아’는 편견으로 점철된 꼬리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문화’라는 용어는 또 어떠한가. 한국의 언중 사이에서 주고받는 ‘다문화’는 더 이상 학계에서 공유되는 사회문화학 용어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언중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한민족 순수 혈통’이라 할 수 없는 이주민을 구분하고자 하는 꼬리표로서의 기능만 할 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평범한 말로 누군가에게 꼬리표를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꼬리표가 붙은 대상자는 본인도 의도하지 않은 편견 속에 숨죽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꼬리표에 짓밟히고 있는 셈인데, 평범한 말로 꼬리표를 붙인 당사자들에게 이러한 지적을 하면 그들은 대부분 무심코 그랬다거나 농담으로 한 소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생각 없는 말이나 농담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는 동시에 언어에 사고가 반영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말들 속에 편견이 내재해 있거나 그 속에서 잠재적인 편견이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배우가 한 시상식에서 “편견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한 적 있다. 무심코 던진 말에는 모종의 편견이 내재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농담이라 항변하는 말들도 누군가에게는 꼬리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한번 붙은 꼬리표는 쉽게 떼기 어려우며 그 꼬리표로 차별받는 일상은 당사자에게 벗어날 수 없는 폭력 그 자체로 작용한다. 이렇게 농담처럼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사실은 편견 어린 차별이자 잠재적인 폭력임을 기억해야 한다.

[삶, 오디세이] 문예지 발간의 어려움

문예지는 발간하기도 어렵고 발간 이후 지속하기도 어렵다. 그 이유는 기획 능력과 특별한 사명감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이 중에서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클 것이다. 문예지를 발간하는 데는 청탁한 원고에 대한 고료가 가장 많이 들어간다. 고료가 없으면 좋은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하지 못한다. 최근 폐간 또는 휴간에 들어간 문학사상과 시인수첩 같은 수준 높은 문예지도 여럿 있다. 과거에는 우리 문단을 대표하는 10대 문예지가 있었다. 10대 문예지들은 어느 곳이든 각자 개성 있는 문학적 담론을 생산해 냈다. 순수 문예지가 폐간 또는 휴간하는 것은 한국 문학 발전에 장애로 작용한다. 필자가 작가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포엠피플 발간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것이다. 발간 비용은 우선 인천시인협회 회원들의 연회비에서 나온다. 인천시인협회는 가입할 때 심의위원회에서 작품 심의를 한다. 심의에 탈락하는 분이 많다. 그 대신 가입하면 시인으로 성장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 포엠피플은 시와 비평 전문지이므로 시 발표뿐만 아니라 평론가로부터 평가받을 기회를 수시로 준다. 회원 수가 많지 않고 연회비가 다른 단체보다는 조금 더 많다. 연회비로 한 호 발간이 가능하다. 포엠피플은 과거의 문학과 대화하고 현재의 문학을 성찰한다. 그리고 한국 문학의 미래를 짚어보는 담론을 다양한 특집을 통해 생산한다. 인천시인협회 회원들은 포엠피플과 동반 성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문화재단의 기금을 지원받는다. 포엠피플은 인천에서 발행하는 문예지이기 때문에 인천문화재단에 기금을 신청한다. 올해는 문화재단으로부터 동인지와 동일한 금액을 지원받았다. 문예지와 동인지는 분명 차이가 있다. 문예지는 수많은 외부 필자가 참여하고 동인지는 동인들만 참여한다. 따라서 발간 비용만 호당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동인지는 1년에 한 번 펴내는 연간지이고 포엠피플은 반년간지에서 계간지를 목표로 하는 전문 문예지다. 이에 부당함을 느낀 필자는 인천문화재단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처럼 호당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호당 지원이 어려우면 동인지와 차등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학판이 변하는데 문화재단이 변하지 않으면 문학 발전은 어렵게 된다. 포엠피플을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는 것은 선경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기 때문이다. 선경산업은 호마다 포엠피플 표4에 광고를 싣는다. 문예지는 광고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광고로 후원해 주는 것이다. 이 기업은 우리뿐만 아니라 문학상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선경산업은 문학에 대한 후원이 선구적이고 적극적이다. 글로벌 시대 문학의 발전은 제조업 분야의 상품 판매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과 문학의 부가가치가 상품에 얹히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포엠피플은 10대 문예지를 목표로 한다. 인천시인협회가 시와 비평 전문지 포엠피플을 발간할 수 있는 것은 회원과 문화재단 기금 그리고 선경산업의 후원 때문이다. 순수 문예지인 포엠피플을 지속적으로 발간하려면 문화재단의 현실성 있는 기금 지원이 절실하다. 작가들은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성장한다.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해 K-문학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제2의 한강을 찾기 위해 포엠피플은 매년 신인을 탄생시키며 문학의 저변을 확장하고 있다. 한 권의 좋은 문예지가 작가들에게 주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이것이 어려움을 딛고 포엠피플을 발간하는 이유다.

[삶, 오디세이] 노년의 아름다움

지금 대한민국은 노인 천만의 시대, 초고령사회를 맞이하고 있다. 노인을 책임지고 부양해야 하는 젊은 세대의 짐도 점점 더 커지지만 사실 노인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어른들의 삶의 자세는 더 중요하게 됐다. 어떻게 하면 노년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을까. ‘겪어보면 안다’는 김홍신 작가의 글이다.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걸/목마름에 지쳐보면 안다. 물이 생명인걸/일이 없어 놀아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걸/아파보면 안다. 건강이 엄청 큰 재산인걸/잃은 뒤에 안다. 그것이 참 소중한걸/이별하면 안다. 그이가 천사인걸/지나보면 안다. 고통이 추억인걸/불행해지면 안다. 아주 적은 게 행복인걸/죽음이 닥치면 안다. 내가 세상의 주인인걸.’ 젊을 땐 몰랐는데 나이 들어 노년이 돼 보면 인생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아름다운 것처럼 인생도 어린아이의 시절도, 푸른 청년의 시절도, 빛나는 중년의 시절도, 황금빛 노년의 시간은 모두 다 아름답고 풍요롭다. 생각해 보면 봄만 좋고 여름은 나쁜 것이 아니다. 여름만 좋고 가을은 나쁜 것이 아니다. 가을만 좋고 겨울은 나쁜 것이 아니다. 봄은 봄이라서 좋고, 여름은 여름이라서 좋고, 가을은 가을이라서 좋고, 겨울은 겨울이라서 좋다. 물론 봄에는 봄의 어려움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와 코감기와 꽃샘추위를 극복해야 봄의 따뜻한 바람과 예쁜 꽃을 맞이할 수 있다. 여름에는 여름에 극복해야 할 열대야 무더위와 장마와 홍수와 태풍이 있다. 가을에는 가을에 극복해야 할 가을걷이의 분주함과 겨울을 준비하는 수고가 있다. 겨울에는 겨울에 극복해야 할 추위, 눈길의 미끄러움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문제와 환경을 주셨다. 그리고 그 너머에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주신다. 구약성경의 시편 71편 9절에는 이런 기도가 있다.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인생은 누구에게나 늙고 약해질 때가 있다. 그때 늙고 약한 나를 붙잡아 줄 손길이 필요하다. 노년이 되면 자신을 지탱하고 방어할 힘이 약해진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이 아프다. 그때 노인을 도울 분이 있어야 한다. 나이보다 젊게 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과신하며 내뱉는 말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인데 92세 어르신 목사님께서 농담 삼아 말씀하시기를 ‘그 말은 거짓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하셔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하고 힘이 생기는 것도 젊었을 때인가 보다. 그래서 기도하는 노년이 돼야 한다. 시편의 기도가 ‘늙은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한 번도 버리지 않으셨고, 떠나지 않으셨다. 다만 젊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세상에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멀리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래서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는 기도는 자기 고백과 결심이다. 세상의 일들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노년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세상을 향한 문을 조금씩 닫고 하나님께로 문을 활짝 열어 가시길 바란다.

[삶, 오디세이] 그 자리의 자신

어느새 올해도 11월에 접어들며 연말에 다가서고 있다. 올해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 여러 일이 벌어졌고 현재진행형인 경우도 상당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해마다 듣는 뉴스이지만 경제와 물가, 취업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무엇보다 염려되는 것은 사람들이 점차 현실을 떠난 곳에서 일상을 찾고 경제활동을 하려는 모습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요새는 정말 누구나 주식과 코인 등의 투자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상당수가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좋은 투자처라며 흥분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쪽에서는 떨어졌네, 잃었네 하며 속상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밝은 투자는 거의 없는 듯하다. 이러한 모습이 일반화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현실에서의 모습과 전망에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 의해서다. 매일같이 어두운 소식의 뉴스가 나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는 자신을 뺀 모든 사람이 부유하게 사는 듯한 괴리감을 준다.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삶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잔혹한 게임을 하며 일확천금해 다시 살아가려는 희망을 갖는 내용의 드라마다. 주인공 기훈(이정재)이 그 게임장에서 쌍문동에서 가장 똑똑한 상우(박해수)를 만나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라며 놀라는 장면이 있다. 이때 상우는 ‘선물’에 투자했다가 부도가 났다고 하지만 기훈은 선물이 진짜 ‘선물’인 줄 아는 웃기며 슬픈 내용이 있다. 어느덧 오징어게임이 나온 지 3년이나 지났으나 상우를 통해 전하고자 한 모습은 어느새 잊혀지고 오히려 더 많은 ‘상우’가 생겨 나고 있는 듯한 지금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지금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하루 동안 그곳에서 많은 사람과 여러 인연을 쌓고, 그 인연 속에서 다시금 내일을 준비하며 하루를 마친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곳’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설령 현실이 힘들고 많은 것에 의해 어려움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그 자리의 자신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상우도 현실을 떠난 큰 꿈을 꿨으나 돌아온 곳은 지독하게 현실을 직시한 그 자리였다.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가르침이 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땅에 서서 살아간다. 그 땅은 자신의 지금이고 나아갈 토대다. 누구라도 지금보다 나은 자신을 바란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금 그 자리의 자신을 명확하게 바라보고, 그 자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움츠러드는 추운 계절이지만 웅크린 가슴을 펴고 문 밖의 공기를 한 아름 마시며 오늘 그 자리의 자신으로 이 하루의 한 걸음을 내딛자.

[삶, 오디세이] 프로답게 산다는 것은

필자는 개인적으로 미국에 대해 별다른 적대심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선호하는 마음도 없지만 미국의 대선 때만 되면 한 번쯤 미국에서 살 때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곤 한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원 펠로십이라는 이름으로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사립대학을 다닐 때의 이야기다. 평소 전공 분야뿐만 아니라 영화평론에도 관여하고 있던 터라 그날도 영화 리뷰 하나를 쓰기 위해 도서관 인문학 열람실을 찾았다. 참고로 그 대학 도서관의 경우 주중에는 24시간 개방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도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 대학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주중 24시간 개방이라는 학교 도서관 정책에 한번 놀라고, 그 늦은 시각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책에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또 한번 놀랐던 순간이다. 그렇게 인문학 서적이 진열된 장서실 여기저기를 대중없이 훑어보다가 우연히 정치학 코너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놈 촘스키. 촘스키는 필자가 속한 언어학 분야에서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창시해 미국이 좁다 하고 전 세계 언어학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세계적인 언어학자다. 그런 언어학자의 이름을 대학 도서관의 정치학 코너에서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개인적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 순간에는 잠시 동명이인일 것이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책의 저자 소개란에는 언어학자 촘스키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느껴졌던 한 인간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촘스키와 관련해 놀랐던 적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교수로 소속된 학교가 흔히 MIT로 불리는 매사추세츠공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 중심의 대학들은 언어학과 같은 순수 인문학을 대학 글쓰기나 외국인 유학생 대상의 한국어 등의 교양 과목 운영을 위한 조건 정도로만 여길 뿐 그것을 핵심 연구 분야로 두고 명성을 떨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MIT가 테크닉 중심의 기술인 양산이 아닌 인간을 생각하는 철학적 공학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는 것은 익히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학이라는 순수 인문학이 공대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필자로서는 감히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만큼 놀라움이 컸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는 ‘문송하다’는 자조 섞인 신조어가 대학생들과 채용가를 중심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정도로 인문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학문의 경계를 넘어 학제적 연구가 자유롭게 이뤄지는 미국 대학의 개방성에 눈길이 간다. 이뿐만 아니라 연구자든 누구든 스스로를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정의할 필요가 없는 미국식 인재상 또한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국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이 여러 전문 분야에 걸쳐 이른바 멀티태스킹을 할 경우 어느 영역에서도 전문성을 갖지 못하는 한량처럼 정의하려 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국의 지배적 정서상 MIT나 촘스키 같은 멀티플레이란 한국에서 태생적으로 기대하기 힘든 구조인 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반가운 것은 그러한 한국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가 지금의 MZ세대를 중심으로 크게 변하고 있는 점이다. 비록 구직 후 잦은 이직이 문제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 개인이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리라. 지금 여기에서 프로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반드시 프로여야만 하는가.

[삶, 오디세이] 우리가 원하던 문화 강국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문화 강국을 꿈꿨다. 이제 김구의 꿈이 이뤄졌다. 한국의 문화는 케이팝, K-드라마, K-뷰티, K-푸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K-문학이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이 됐다.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동안 국제 사회에 부정적으로 비쳤던 한국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뛰어난 문학작품이 돼 빛을 발한 것이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이 갖는 의미는 한국의 문화가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순수문화인 문학에서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쾌거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분단 시대를 맞이했고 6·25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군사독재를 유지하다가 민주화를 이뤄냈다. 따라서 외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은 부정적인 면이 많은 나라다. 권위주의 시대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가수가 음반을 낼 때 건전가요를 넣어야 했다. 작가들도 글을 쓸 때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과 문학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발전하기 어렵다. 한국은 경제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다. 민주화가 되자 예술인과 작가들은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했다. 이 때문에 국제적인 가수가 탄생했고 한류를 주도할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드디어 한국의 문화는 글로벌 시대 세계인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게 됐다. 문화의 힘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을 준다. 선진국들은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우리를 대표하는 작가가 그동안은 없었다. 이제 한강이 그 길을 열었으니 우리의 K-문학도 세계 중심이 됐다. 문학의 본질을 놓고 보면 노벨 문학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벨 문학상이 갖는 의미는 아주 크다. 세계화 시대 국제 시장에서 한국의 제조업 상품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예술과 문화라는 부가가치가 제조업 상품에 얹어져야 한다. 수준 높은 예술과 문화가 없으면 싼 가격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제조업을 하는 분들은 예술과 문학에 종사하는 문화인들로부터 사실 큰 도움을 받고 있다. 국제 시장에서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할 때 그 나라의 문화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예술과 문화는 제조업 상품을 판매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실질적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에서 예술과 문학을 한다는 것은 늘 고통을 동반한다. 국가의 지원은 약하고 기업의 후원은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되려면 정치인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거나 지원금을 삭감하는 일이 더는 반복되면 안 된다. 필자가 발행인으로 있는 ‘포엠피플’도 재정난이 심각하다. 매번 발간 위기에 놓여 전전긍긍한다. 우리나라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은 소수를 빼고는 작품 활동으로 수익을 내지 못한다. 제2, 제3의 한강이 나오기 위해 문학에 대한 지원 대책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 국가 예산이 700조원 가까이 되는 나라에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의 경우 2024년 총예산 지원이 발간지원 6억원, 발표지원 6억원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상황이 이런데도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한강의 기적’이다.

[삶, 오디세이] 커피 한잔에 담긴 ‘행복’

외국인들이 한국에 여행을 오면 두 번 놀라는 일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수많은 커피숍이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커피숍들이 한결같이 예쁘기 때문이란다. 맞는 말이다. 어느덧 대한민국은 미국, 독일, 브라질…. 세계 15위 커피 소비국이 됐다. 현대인들의 삶 깊은 곳에는 커피의 향이 스며 있다. 아침이면 잘 내린 커피 한잔, 점심이면 식후 커피 한잔, 친구를 만나도 커피 한잔을 빼놓을 수 없다. 점심시간에 길거리에 나가 보면 젊은이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손에 커피 하나를 손에 들고 길을 걷는 것을 볼 수 있다. 직장 생활의 피곤과 힘든 것을 커피를 마시면서 힘을 얻어 오후 업무를 준비하는 것이다. 올여름에 필자도 작정하고 거금을 들여 커피 공부를 했다. 수원에서 세종을 열한 번 오가며 커피의 대가를 찾아가 커피의 생성 및 맛과 향을 감별하는 것에서부터 커피를 추출하는 것까지의 과정을 열심히 공부했다. 필자가 커피를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맛있는 커피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어떤 커피는 맛있는 커피라고 말하고 어떤 커피는 맛없는 커피라고 말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기준을 만드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컸다. 필자에게 커피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은 첫 번째 시간에 “커피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했다. 필자는 “커피는 행복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아주 훌륭한 대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맛에는 사회성이 있다’라는 말로 많은 궁금증에 답을 주셨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가 세계 최고는 아니지만 어머니가 끓여 주는 된장국을 그리워하고 그 어머니의 된장국을 맛있게 먹는 것은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맛의 사회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멋진 커피숍의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잔보다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담아 타 마시는 맥심 커피가 더 맛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커피는 개인 취향이 강한 기호식품이란다. 커피를 배우고 난 다음 교인 13명에게 커피를 가르쳐드리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갖게 해 드렸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오전에 만나 커피 공부를 계속하던 중 가을에 교회 앞마당에 거리 카페를 열고 지나가는 분들에게 맛있는 커피를 나누고 있다. 커피 한잔을 놓고 마주 앉아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자식 이야기, 동네 이야기, 나라와 정치 이야기, 북한의 오물풍선 성토와 노후의 삶 이야기….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대화는 누구 하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거스르지 않아 좋다. 커피가 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아무도 없다. 목사인 필자에게 뭔가를 듣고 싶은 기대가 있지만 필자는 열심히 듣다가 필요하면 또 커피를 준비해 지나가는 한 분에게 맛있는 커피 드시고 가라고 권할 뿐 말을 줄인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커피를 대하는 자세는 첫째는 행복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커피를 준비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먹고살 수 있는 양식뿐 아니라 과일을 주신 것은 더 행복하라고 하시는 뜻이라고 믿는다. 밥만 먹으면 살 수 있고 일할 수 있는데 식후에 후식으로 과일을 먹는 것은 배고파 먹는 것이 아니다. 배부르기 위해 먹는 것은 양식이지만 행복하기 위해 먹는 것이 과일이다. 필자는 유난히 과일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은 너무 시다며 못 먹겠다는 자두도 사과도 필자는 참 맛있게 먹는다. 그래서 아내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맛없는 과일이 어딨어.’ 커피는 과일 열매다. 그 과일의 씨앗을 농사해서 잘 볶아 정성스럽게 준비해 행복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커피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청결’이다. 깨끗하게 위생적으로 관리하고 만들어야 한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커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커피 기계를 다루는 과정에서 맡은 사람들이 청결에 집중하지 않으면 사람을 속이는 일이 된다. 커피 한잔 때문에 몸이 상하거나 병이 생기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겉으로는 실컷 웃으면서 행복하게 커피를 마시는데 그 커피를 담은 손이 깨끗하지 않다면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와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이웃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한 사람의 언어라는 세계

리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말과 순간순간 드는 일련의 생각들은 마치 하나의 신경처럼 연결돼 있다. 듣거나 읽은 것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도 하고, 스스로 떠올린 단편적인 생각의 조각들을 나름대로의 체계로 엮어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의 언어와 사고야말로 일심동체인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고가 언어를 통제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한 학술적 논의 중 하나가 바로 사피어-워프 가설이다. 이는 언어적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그것을 지지하는 관점에는 인간의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강성론적 입장과 언어가 사고에 크든 작든 영향을 준다는 중도적 입장이 공존한다. 언어와 사고에 관한 이러한 학술적 논의는 사실 정교하게 검증하기 쉽지 않아 여전히 언어학적, 심리학적 난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언어와 사고는 명백히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캐나다의 드니 빌뇌브 감독은 ‘컨택트’(원제 ‘Arrival’·2017년)라는 작품에서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이 영화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비행물체 안의 외계 생명체와 인간이 소통하는 과정을 핵심 서사로 삼는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저명한 언어학자와 과학자를 섭외해 외계 생명체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외계의 도형 문자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독하며 서로 소통한다. 그러던 중 지구에 온 목적을 묻는 질문에 외계 생명체가 ‘무기를 주다’로 답하자 각국 정상은 일대 혼란에 빠진 채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다행스럽게도 돌이킬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을 때 한 언어학자에 의해 외계 생명체가 표현한 ‘무기’란 ‘선물’을 의미한 것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가상의 스토리로 엮어낸 영화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갈등은 사람들이 인간의 언어 사용 방식대로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이해하려 들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과연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의 방증처럼 보이기도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 사용으로 발생하는 오해와 불통의 문제는 일상생활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가 제습기가 필요하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습기를 제거해 주는 기계를 떠올리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습기를 흡수해주는 제습제를 떠올리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방향을 가르쳐줄 때 어떤 사람들은 먼 곳을 가리키면서 ‘저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안내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다르다는 말을 틀리다로 인식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것은 대부분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때로는 극단적인 갈등과 그로 인한 관계의 단절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같은 언어권이라도 각자 생활하는 상황과 맥락은 다르며, 그에 따라 자기만의 사고 체계 안에서 구축된 자신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외계 생명체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누군가의 말처럼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세계를 만나는 것과 다름없다. 그 세계를 만날 때, 그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의 언어 체계와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지금 내 주변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일까.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어떤 세계의 사람일까.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 안으로 기꺼이 뛰어들어야 한다.

[삶, 오디세이] 오늘은 내일의 선물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해인사 법보전의 주련에 쓰여 있는 가르침으로 ‘깨달음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삶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의미다. 불교를 수행하며 추구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떤 형상이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 자신으로서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을 원하고, 어떠한 존재가 되고 싶거나 무언가를 갖고자 한다. 이는 어쩌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중요한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처럼 원하고 지니며 살아가지만 삶은 언제나 갈증을 느끼고 지금도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끊임없이 이렇게 살아가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그것을 뒤로하고 또 다른 것에 갈증을 느끼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법보전의 주련은 이러한 인간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다.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깨달음일지언정 그것을 갖거나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순간의 마음이 그것을 원하는 것뿐이고, 그것을 얻게 됐더라도 다른 순간이 되면 다른 것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일지라도 만약 갖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에게 사라질 수도 있고 뺏길 수도 있는 것이 돼 버린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을 우리가 이처럼 살아 있고 살아 간다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고 기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나로서 무언가를 해 나갈 수 있고 다시금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오늘 또다시 기회를 맞이하고 있지만 그 기회가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당연히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으면서 무엇도 하지 않는다면 그 살아 있다(生)는 생생(生生)함을 상실하게 된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업(業)의 힘에 의해 끌려 산다고 한다. 그러나 인과(因果)를 통찰해 자신의 주변에 인연이 일어나는 것을 깨달은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삶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한다. 즉, 우리의 오늘을 당연한 하루로 여기고 그저 그렇게 업과 시간의 힘에 끌려 보내게 된다면 지나간 어제와 같이 귀중한 이 순간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하루다. 이 하루의 시간에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일을 해보고, 사랑하는 인연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면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우리는 분명 오늘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행복은 어느 날 문득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만든 삶이라는 상자에 행복을 담아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자신에게 보내는 것이다. 우리의 오늘은 내일의 선물이다. 그 선물상자에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담아 로켓 배송을 보내주자.

[삶, 오디세이] 인공지능 시대의 창작

챗GPT는 오픈AI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이다. 챗GPT는 발전을 거듭해 2023년에는 챗GPT-4 터보가 발표됐고 2024년 5월에는 인간처럼 대화가 가능한 챗GPT-4o가 공개됐다. 인공지능은 교육, 산업, 군사, 사법, 예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 곳이 없다. 문단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챗GPT가 시를 쓴다. 챗GPT가 요구하는 입력값대로 시를 쓰게 되자 문단에 비상이 걸렸다. 작년에는 다수의 문예지가 챗GPT 특집을 다뤘고 올해는 급기야 문학상 공모에 ‘GPT를 활용한 작품이라고 판단될 경우 수상을 취소한다’는 유의 사항이 붙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챗GPT를 활용했다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런 유의 사항은 챗GPT는 동일한 입력값에도 모두 다른 시를 생산해 내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 문단에 챗GPT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됐던 2023년 ‘포엠피플’ 여름호 특집으로 필자는 ‘챗GPT, 시인으로서의 (불)가능성―한국의 명시 7선과 챗GPT의 명시 7선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챗GPT에 동일한 한국 명시 제목과 주제를 입력값으로 시를 쓰게 했다. 그중 챗GPT가 쓴 명시 1편을 소개한다. “이별의 정한에 서로를 바라보며/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말없이 손을 흔들며/길을 나선 그대와 나/희미해진 뒷모습을 바라보며 떨리는 가슴을 감추지 못하고//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서로를 지키며 함께한 추억이 번져/그리움과 아픔이 한껏 더해져/이젠 서로의 곁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진달래꽃이 지는 그날까지/이별의 정한을 깨지 않으려 애쓰는 그대와 나/서로의 마음속에 간직한 추억으로/진달래꽃처럼 아름답게 떠나기를 바라며//진달래꽃이 지는 그날까지/서로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챗GPT∙‘진달래꽃’ 전문) 이 시는 챗GPT에 “진달래꽃이라는 제목으로 4연 12행의 시를 쓰시오. 주제는 이별의 정한입니다”를 입력값으로 줘 생산해냈다. 챗GPT는 필자가 요구한 4연은 지켰으나 12행은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한 시를 주제에 맞게 써냈다. 아직 챗GPT는 시적 착상과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미숙하다. 사유의 구체성과 시적 화자가 어떤 상태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챗GPT가 쓴 시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주제에 충실했다. 문예 창작을 전공하는 학생이 필자에게 “교수님, 챗GPT가 저보다 시를 잘 쓰는 거 같아요”라고 강의 중에 말했다. 학생의 말은 인공지능 시대 창작자의 위기감을 압축한다고 본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챗GPT를 활용해 업무의 효율을 높이듯이 작가들도 챗GPT를 활용할지 모른다. 챗GPT에 입력값을 주고 초고를 쓴 다음 끊임없이 퇴고한다면 초고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전자계산기를 도구화하듯이, 그리고 19세기 사진기의 등장으로 인상파가 출현했듯이 이제 인공지능 시대의 창작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삶, 오디세이] 허풍 심한 사람은 약점이 많다

2주 전에 강원도 정선의 한 컨벤션센터에서 전국적인 회의가 있어 다녀왔다. 2박3일간의 회의를 마치고 수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반도지형’을 처음으로 여행하게 됐다. 주차요금이 포함된 입장료를 내고 각자 칡주스를 하나씩 손에 들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소나무 산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니 생각보다 먼 곳에 다다랐을 때 그 유명한 한반도지형이 신비롭게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먼저 도착해 사진을 찍으면서 서로 작은 소리로 ‘와우~ 대박^^’ 감탄으로 더운 땀을 식히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장난기 가득하게 두 손을 높이 들고 ‘대한민국~ 짜 자짝 짝짝’을 손벽치며 2002년 월드컵 구호를 외쳤더니 분위기가 썰렁하지 않게 먼저 온 몇 사람도 같이 호응해 대한민국을 외쳤다. 어디서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천안에서 여행을 왔다고 한다. 나는 수원에서 왔다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우리 둘을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하며 핸드폰을 내밀었더니 흔쾌히 사진을 찍어줬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누고 그분들은 먼저 온 길로 되돌아가고 남아 사진 몇 장 더 찍고 동행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런 말을 해 깜짝 놀랐다. “형님, 제가 형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까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자신감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에게서 표현되는 모습인데 저도 그런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인데 나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됐다. 과장이나 허풍은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때가 더 많다. 모든 상황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은 ‘자신감이 부족할 때 허풍을 떤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과도하게 허풍을 떨 때 그에게 뭔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은 단지 모르는 척 할 뿐이다. 내가 과장하고 허풍을 떨 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거나 눈살을 찌푸리며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매스컴의 정치 뉴스를 보면 과장과 허풍이 하늘을 찌를듯한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논리에도 맞지 않고 예의에도 어긋나며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목적도 불분명하다. 단지 진영논리에 갇혀 소리를 치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과장과 허풍에 국민들은 이미 고개를 돌리고 실망하고 말았다. 추석 때 문경의 한 리조트에서 가족들이 모여 명절을 보냈다. 대구와 대전에 있는 자녀들이 같이 모일 수 있는 중간 지점이고 아버지께서 10년 동안 광부로 사셨던 문경에서 모이면 좋겠다고 해서 문경에 살고 있는 동생의 도움으로 좋은 장소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문경에는 문경새재, 문경오미자, 문경약돌고기, 문경사과로 지역 먹거리와 관광상품이 특화돼 있었다. 문경새재는 전국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라고 하고 문경약돌 삼겹살 식당도 여러 곳 있었다. 높은 가을 하늘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레일바이크를 타며 허풍스럽지 않은 작은 도시의 최적화한 지역 상품화와 개발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수원에도 10월에 화성문화제와 수원성을 중심으로 많은 축제가 열린다. 과장과 허풍의 거품을 제거하고 내실 있고 수원스러운 행사로 시민들과 수원을 찾는 분들이 고개를 끄떡이며 만족했으면 좋겠다. 수원특례시는 정조대왕의 효와 수원갈비뿐 아니라 깨끗한 화장실문화로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의 도시가 돼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가꾸고 다듬으면 될 일이지 타 도시를 흉내 낼 필요는 전혀 없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에 자신감을 조금 더하고 겸손을 겸비하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내가 될 수 있다.

[삶, 오디세이] 불교적 하루, 연기적 삶

‘중도, 깨달음’ 등 불교를 대표하는 많은 표현이 있지만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의 불교는 수행과 더불어 다양한 사상과 기복적 요소까지 더해지며 더욱 복잡해졌다. 그렇기에 이러한 불교에 대한 물음에 가장 적절한 답은 아마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法)’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법이란 무엇인가. 바로 ‘연기(緣起)’다. 연기법이라고도 하는데 ‘인과(因果)’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생긴다’는 아주 간단한 법칙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고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이 인과적 연기법에 대해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연기에는 ‘자업자득, 인과응보’라는 특별한 법칙이 있다. 자신이 지은 어떠한 원인은 업(業)이라는 결과가 돼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이 두 표현과 업은 우리나라에서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불교를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로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법칙을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원인이 돼 다음의 결과가 되는 것이기에 지금 좋은 일을 하면 그것이 원인이 돼 좋은 결과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선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업이 나쁜 것만이 아니라 선업과 악업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하여 선업을 지으면 삼선도라는 좋은 곳에, 악업을 지으면 지옥을 포함한 삼악도에 태어난다고 한다. 즉, 선하고 올바른 삶을 산다면 그로 인해 좋은 결과가 생겨나 그 자신을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불교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을 ‘연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제를 비롯한 지난날의 내가 보내온 원인의 과정이다. 만약 지금이 행복하고 좋다면 지난날의 자신에게 감사해야 하고 만약 피로하고 힘들다면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고 그것을 수정하도록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와 꿈이 있다면 오늘의 이 하루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에 가깝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이 하루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나에게 선업이라는 법의 힘을 만들어 뜯어보지 않은 선물을 전해줄 것이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볼 것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볼 것이다’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 잘 사는 법, 행복해지는 법의 첫 번째는 연기적 삶을 사는 것이다. 내 곁의 인연들과 화합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 그 모든 것들과 행복해지기 위한 오늘을 산다면 내일은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적 삶의 실천이며 마음의 주인이 돼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다. 오늘은 어제의 이어짐이며 내일은 오늘의 이어짐이다. 이 시간 속에서 마음의 주인이 돼 자신의 하루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의 삶을 살자.

[삶, 오디세이] 우리 시대의 언어 풍경

‘노 잉글리시, 노 햄버거’. 영어를 하지 않으면 햄버거를 팔지 않겠다는 뜻으로 영어권 국가의 이민자와 방문객들에 대한 대표적인 차별 사례로 지속적으로 인용되는 문구다. 이렇게 언어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과 맞물려 있다. 그만큼 ‘언어’라는 단어를 접할 때 연상되는 것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당장에는 말, 소리, 문자 같은 것들이 있을 테고 누군가는 현재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모어나 학습하기 어려워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외국어 등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언어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 이러한 특정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대중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중, 즉 한국의 언중에게 언어란 뜻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관습적 체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언어 활동으로 표현된 여러 결과물을 통해 언중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밝혀낼 수도 있을까. 사회언어학에서는 언어가 사회적 요인에 따라 변모하는 양상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방문객이나 이주민이 급증해 다중 언어·문화(multi-language & culture) 사회로 진입 중이거나 이미 진입한 국가를 중심으로 사회언어학 연구의 한 방법인 ‘언어 경관(linguistic landscape)’ 분석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여기서 언어 경관이란 언어의 풍경으로 자연 경관이 식물과 동물 및 각종 구조물 등으로 구성된다면 언어 경관은 문자, 그림 등 시각적으로 읽혀지는 모든 기호로 구성된다. 거기에는 공원, 지하철, 극장 등에 게시되는 각종 안내문, 특정 장소의 기능(화장실, 기도실 등)이나 금지 사항(금연, 정숙 등)을 표시하는 픽토그램, 도로에 세워지는 교통신호나 표지판, 상업적 기능을 하는 광고판 및 간판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멀티미디어 또한 언어 경관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 경관을 분석해 보면 어떤 지역이나 특정 영역에서의 시간 흐름에 따른 언어 사용 양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그것이 모어 중심의 극단적인 단일 언어 사용 양상을 보인다면 그 사회나 공동체에는 아직 다문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거나 외국인 방문객과 이주민에 대한 인식이 공론화되지 않은 곳으로 볼 수 있다. 그 반대로 모어나 영어 외에 특정 언어 사용이 도드라진다면 그 지역은 해당 언어권의 이주민들이 사회문화적 연대를 이루고 거주하는 타운(town)으로 이미 자리 잡았거나 그렇게 변모 중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 한국이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다문화사회로 변모 중이란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 앞서 비슷한 길을 걸었던 여러 국가의 사례를 기억할 때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있기도 하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다문화 및 국제화 시대에 과연 우리 주변의 언어 경관은 어떠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이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몰고 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주민 그리고 좋은 마음으로 입국하는 세계 각국의 방문객들에 대한 바른 인식과 배려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디 한국에서만큼은 ‘노 코리안, 노 김밥’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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