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고양이와 함께 세미화를 그리다

‘걷는 것이 쉬는 것이다.’ 출간을 앞둔 여행 작가의 책 제목을 고민하다 며칠 궁리 끝에 붙여준 제목이다. 걸음의 동작과 쉼의 상태를 분리하지 않고 활동하는 명상으로서 몸과 마음이 그리고 일과 휴식이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보니 책은 품절된 지 오래다. 작명가로서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생각까지 품절이 된 것 같아 심란하다. 마음의 복잡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잠자코 지켜보다 늪처럼 고이지 않고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읽던 책을 접고 산책을 나서기로 한다. 산책이야말로 문자 너머의 책이다. 내 요즘의 독서는 길에서 만난 고양이의 눈을 빌려 읽은 골목을 다시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고양이가 어디에 주목하고 있나를 살펴보면 틀림없이 명문장을 만날 수 있다. 평소엔 볼 수 없는 풍경이나 그늘 속의 사물들이 그 자체로 경이로운 사건이 돼 드러난다. 최근 내 노트에는 고양이의 두 눈을 호동그래지게 한 숲길의 작은 지진이 추가됐다. 바람도 없는데 바닥의 낙엽이 꿈틀대고 있었다. 누가 굴착공사를 하고 있나. 검불과 땅을 뒤흔들다가 바깥으로 살짝 흙 묻은 코를 내민 뒤 킁킁거리다가 낌새가 수상쩍은 걸 알아차리고 얼른 숨어버린 주인공은 앙증맞은 두더지였다. 나로선 미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장면들과 만날 때 걷기와 읽기와 쉼이 하나의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악기의 공명음을 일으킨다. 일상의 시간과 속도로부터 놓여난 나는 그렇게 나만의 시간과 속도를 창조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늘 오가는 길의 풍경들을 읽던 중 하루는 길고양이를 따라 대로변까지 화분을 늘어놓은 농원 앞에서 멈췄다. 소음과 먼지의 한복판에 수선화 화분들이 나와 있었다. 그 앞에 멈춘 건 고양이와 나만이 아니어서 꽃 앞에서 누군가 한참 구애의 몸짓을 하고 있었다. 정지비행 중인 박각시나방이었다. 도돌이표처럼 돌돌 말려 있는 더듬이가 화촉을 밝힌 노란 꽃잎 속으로 뻗어들어가고 있는데 이 과정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는 듯 박각시나방은 사뭇 골똘하게 겨눈 더듬이가 꽃잎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날갯짓의 속도를 조절하느라 꽤나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지한 자세를 함부로 방해할 수 없다고 느꼈던지 고양이도 침묵을 지켰다.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 수선화 속에 마침내 조바심을 하던 더듬이가 곧게 펴져 안착할 때 꽃잎이 간지럽게 떨리는 듯했다. 그때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신혼의 첫날밤을 훔쳐보듯 내 눈에 장난기 어린 생기가 감돌았을까. 이처럼 현미경을 들고 세미화를 그리듯 주변 세계와 관계할 때 매일같이 마주치는 일상은 신화나 여행이나 꿈이나 사랑이나 축제 같은 비일상의 영토가 된다. 편견과 선입견의 더께를 벗고 생생한 생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대도시의 소음에 시달리며 깊은 몽상의 세계를 탐닉한 이미지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성실하게 살아진 세미화는 나를 주위의 세계로부터 떼어내고 내가 그 주위 세계의 해체작용에 저항하는 것을 돕는다’. 그러고 보니 박각시나방과 수선화의 밀애 장면에 몰입해 있는 동안 질주하는 바퀴들의 소음과 먼지가 한결 견딜 만해진 것 같기도 하다. 기껏 책 제목 하나에 사납게 아우성이던 마음의 불편도 조금은 유순해져 들끓던 마음에 싸리비로 정갈하게 비질을 한 마당 같은 고요한 여백이 머무는 듯도 하다. 이 마당을 콕 찍고 가는 새와 볕과 구름이 그냥 스쳐가길 멈추고 그들만의 문장을 건네온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가며 받아쓰기를 하던 아이로 돌아가 나는 그들의 말을 받아적기에 바쁘다. 경청했으나 개중에는 늘 놓친 말들이 더 많다. 뒤늦은 자각으로부터 주변의 작고 희미한 눈짓들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겸허한 자세가 간신히 가능해진다. ‘마음 밖에 사물이 없다지만, 이 꽃나무는 깊은 산속에 스스로 피었다가 지는데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왕양명은 답했다. ‘당신이 이 꽃을 보지 않을 때 꽃은 당신처럼 외로워지지만 당신이 이 꽃을 바라보는 순간 꽃의 빛깔이 선명해지니 꽃은 당신의 마음 밖에 있지 않다’고. 봄이 오고 또 와도 늘 새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봄은 반복 속에 차이를 만든다. 같지 않으니까 낯설고, 낯선 것은 일상 속에서 눌려 지내던 다른 감각을 깨어나게 한다.

[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DMZ의 봄과 ‘할매’

2018년 일명 ‘도보다리 회담’에서 필자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군사분계선 0101 녹슨 표지판 앞에 선 남북 정상이 아니라 정상 간의 대화가 잠시 음소거된 사이 일산 킨텍스에 모인 외신기자들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된 새소리였다.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비극적 공간이면서 인간의 개입이 정지된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회복한 그 찬란한 생명의 소리는 이념과 갈등을 넘어 눈시울 뜨거워 오는 무정설법의 감동이 아니었나 싶다. 세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107년 전 만세 의거를 맞아 평화를 염원하는 새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일까.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그리고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DMZ 세계문학 페스타 2026’이 이달 말 병사들의 막사였던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릴 예정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포함해 초대된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세계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엿보인다. 가령 ‘분단, 평화, 민주주의, 마이너리티, 기후위기’ 같은 추상적인 의제가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소년병으로 직접 참여한 작가 이스마엘 베아의 “심지어 전쟁에서조차, 혼란과 광기의 그 한가운데에서조차 인간의 또 다른 영혼이 지닌 생동감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러한 인식이, 제아무리 미미할지라도, 평화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한다” 같은 생생한 증언과 만날 때 그 울림은 DMZ를 또 다른 세계문학 담론의 뜨거운 중심으로 바꿔 놓을 것이다. 알렉시예비치와 함께 기조 강연을 맡은 소설가 황석영은 배포된 프로그램 북을 통해 “우리는 평화로 나아가는 몇 개의 계단을 쌓아 올렸고 이제 마지막 계단을 만들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향후 ‘세계작가네트워크’(가칭)의 발족으로 이어질 이 ‘마지막 계단’의 정신을 황석영은 최근작 ‘할매’에서 웅혼한 대가의 필치로 육화한 바 있다. 소설에서 ‘할매’는 개똥지빠귀의 뱃속에서 잉태된 팽나무로서 왕조시대의 봉건적 질서를 통과하면서도 어떻게 공생의 윤리가 가능한지를 묻고 실천하는 상징적 존재인데 왜로 제국주의 시기에는 간척지 공사장으로 바뀐 마을에 가미카제 비행사를 훈련하는 육군비행장이 생기면서 사격 훈련의 목표물로 바뀐다. 생명과 평화의 노래 대신 “어버이 나라를 이제 막 떠나/이기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으리/다짐하는 마음의 용맹함이여” 같은 군가가 강박적으로 울려퍼진다. 소설은 새마을운동을 통과해 개발독재시대를 넘어 신군부의 재집권 프로젝트 중 하나인 새만금방조제 공사장까지 이어진다. 인간 이전의 대자연과 인간의 시간 그리고 인간의 시간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나무의 시간이 선 굵은 서사와 시적 비전 그리고 도래하는 영성의 예감으로 충만한 소설이다. 그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할매’를 찾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미군기지 용지로 결정돼 철거한 삼백 년 된 포구마을 ‘하제’터를 지키는 활동가들이 그들이다. 한 달에 한 번씩 팽나무제를 지낸다. 여기에 작가 황석영도 함께했다. 활동가 오동필을 모델로 한 소설 속의 배동수는 직장까지 바꿔 가며 갯벌과 나무를 지키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답한다. ‘갯벌의 합창을 들은 적이 있다’고. ‘아주 작은 소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들이 생명의 대합창으로 갯벌을 노래밭으로 만들어줬다’고. 생명의 노래를 지키기 위해 배동수는 정적을 유지하는 침묵의 상태에 있기로 한다. 침묵은 사물과 세계의 눈짓을 알아보는 힘을 준다. 그것이 이스마엘 베아의 ‘인간의 또 다른 영혼이 지닌 생동감으로부터 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각성’일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에 대한 보살핌과 공생의 윤리가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DMZ 세계문학 페스타 2026’의 주제가 ‘침묵의 땅에서 생명의 언어로’인 까닭일 것이다. ‘할매’를 내가 처음 만난 건 소설이 아니라 황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를 본 뒤였다. 황 감독은 화성의 군 공항 이전 이야기를 하며 서해안을 따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화성의 서쪽 전곡리에도 ‘할매’를 닮은 천연기념물 물푸레나무가 있다. 미군의 폭격장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던 매향리 농섬의 아픔을 지켜본 나무다. 최대의 접경지역을 품은 경기도에서 이 땅을 지켜온 팽나무와 물푸레나무 ‘할매’들의 서사가 DMZ에 모인 세계 작가들과 함께 전쟁의 한복판을 향해 던지는 생명의 대합창 소리를 들어보자. 107년 전의 만세 소리처럼.

[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입춘첩과 시

뻐꾸기는 어떻게 우나요? 뻐꾹. 파도는 어떻게 치나요? 철썩. 마음을 기울여 들어본 적이 있다면 알리라. 대기와 지형 그리고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뻐꾸기도, 파도도 울림의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을. 약속된 기호의 명명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출렁인다는 것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말들인데 내가 자동판매기 같을 때가 있다. 아메리카노를 누르면 아메리카노가 나오듯이 자동적인 언어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가 기계인간임을 자각하지 못한다. 키오스크로 주문하고 결제하듯이 점점 더 원격화돼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언어가 사유와 상상력 그리고 윤리적 감각을 지배한다. 이런 실험이 있다. 물컵에 ‘사랑’이라고 쓴 뒤 물 분자 이미지를 촬영해봤더니 아름다운 보석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반대로 ‘증오’라고 쓴 뒤 촬영한 결과 보기에도 고통스러운 암세포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긍정적인 말이나 다정한 어휘를 붙여 놓은 물컵의 물 분자 이미지들은 찬란한 생명감으로 빛났다. 인체의 70%가 물이다. 내 안의 세포들을 생명감으로 가득 채울 것인가, 암세포로 만들 것인가. 오래전 베스트셀러 ‘물은 답을 알고 있다’의 질문이다. 말에도 영(靈)이 있다. 시인들은 언령을 모신다. 김승희 시인의 새 시집 ‘빵점 같은 힘찬 자유’ 중 ‘시를 쓰면 그대로 살게 된다’를 보자. “주술 같은 것일까,/지난번 시집에 위궤양에 대한 시를 썼는데/시집이 나온 뒤 위궤양으로 입원까지 하게 됐다/나는 시 쓰기가 두렵다/(중략)/시어는 영매,/그것이 두려울 때 너는 생활에 너무 애착하고 있다/시는 늘 비포장도로로 나아간다.” 시어가 삶으로 그대로 옮겨 오다니. 솔직히 두렵다. 그러나 언령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비포장의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시인에겐 비록 빵점의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힘찬 자유’가 늘 함께한다. 소극적 운명애를 넘어서는 자유 의지의 언령도 있는 것이다. 덕담과 축원을 하는 입춘첩 같은 세시 문서도 ‘언령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옛 선비들은 입춘첩을 시로 썼다. “푸른 산은 약속한 듯이 늘 문에 닿고(靑山有約長當戶)/흐르는 물은 정이 없는데도 절로 못으로 들어가네(流水無情自入池”처럼 목은 이색이 별서에 붙인 시구도 좋고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같은 이성부 시인의 ‘봄’의 한 구절도 춘련(春聯)을 삼기에 제격이다. 여기에 나만의 입춘첩 시를 더해 본다. 지금쯤 남양성모성지의 복수초 군락이 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화신(花信)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줄탁동시는 눈과 꽃 사이에도 있네/눈껍질 깨고 피어난 병아리/샛노란/저 꽃빛을 보면.”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해 미완성인 것이 아쉽긴 하나 이 행성과 나를 연결하는 생명의 감각 자체가 기껍다. 흔적기관으로나 남아 있는 농경문화 시대의 절기로부터 지구 생명체의 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인공지능(AI)으로선 꿈도 못 꿀 이야기가 아닐까. 나만의 입춘첩 시를 궁리하던 중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이야기를 만났다. 브르통이 뉴욕에서 떠돌이 맹인 거지를 만난 모양이다. 거지는 ‘나는 맹인입니다’라고 쓴 팻말을 세워 놓고 구걸 중이었다. 행인들은 무심히 그냥 스쳐갈 뿐이었다. 딱하게 여긴 브르통이 문구를 바꿔 놓고 자리를 떠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맹인 앞에 있던 깡통은 동전과 지폐로 순식간에 가득 차게 됐다. 돈뿐만 아니라 따듯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맹인은 어리둥절해하며 팻말의 문구를 행인에게 읽어 달라고 청했다. 문구는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봄이 머지않았는데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일상어의 표현이 정보만 제공하는 도구 역할에 머물고 있는 데 비해 시인의 새로운 문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서적인 울림의 맥락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시적 언어와 AI의 초지능 언어는 어떻게 다른가. 지구의 생명 시스템을 기억하는 절기를 통해 시의 언령이 입춘을 수행하는 힘이기도 함을 새삼 실감한다. 이상화 시인이 일찍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증명한 바다. 시는 ‘아마도 봄신령이 지폈나 보다.’

[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말 그림을 다시 걸며

집에 몇 점의 그림과 사진 그리고 조각이 있다. 직접 구입한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선물받은 작품들이다. 장욱진의 판화와 김점선의 말 그림은 김수영 시인의 아내 고(故) 김현경의 산문집을 출판한 인연으로 가족이 된 경우다. 김현경의 용인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어지간한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압도적인 수집벽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립이나 도립미술관 수장고에 있어야 할 수준의 진품들로 가득찬 방과 거실에 입이 딱 벌어졌다. 작품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야기들을 들려주거나 그 예술가와 얽힌 추억담을 펼쳐 보일 때 여느 미술관의 기획전이 따라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일상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비일상의 장소로 연출되고 있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지인들을 초대해 가끔 집에 전시된 작품들을 함께 나누기도 해요.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기도 하고 주제별 구성을 취해 보기도 하고 더러는 맥락 없이 그냥 느낌대로 뭐랄까 재즈 선율처럼 즉흥적으로 배치해보기도 하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백 세를 눈앞에 두니 부질없다 싶기도 해요.” 그날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의 기초자료를 모으기 위해 동행한 박준 시인과 함께 들은 이야기다. 구슬을 꿰는 합리적인 개념 틀로부터 이제 자신을 놓아 주고 내려놓는 방하착의 자세가 수집가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말년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성찰로 다가오기도 했다. 베토벤의 말년 또한 전기의 유기적인 구조와는 전혀 다른 음의 불연속성과 휴지(休止)가 특징이 아니던가.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벽에 걸려 있던 김점선의 그림이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베란다 창으로 들어온 자연광의 변화에 따라 갈기의 한 올 한 올이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려 유난히 내 눈길을 유심하게 하던 말 그림이었다. 오랫동안 품고 있었는데 이별 준비를 하느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지냈다며 오늘이 그날이라고 했다. 뜻밖의 선물을 염치없이 받아안은 내게 잘 보살펴 달라며 각별한 눈빛을 보내올 때 나는 그것이 사고팔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그의 혈육과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몇 점의 작품과 더 인연을 맺게 됐다. 그중에도 화가 윤세영의 그림은 수집하다 보니 벌써 다섯 손가락을 넘는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지인들을 부른 뒤 화가를 집으로 초대해 작은 전시 파티를 해보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화가의 반응이 뜨거워 뱉은 말을 어떻게 실천할까를 궁리 중이던 참이었다. 새해 첫날 아침 화가가 ‘카톡’ 사진으로 막 완성한 병오년의 붉은 말 그림을 보내왔다. 행성들 사이로 기립한 말의 도약이 일출의 붉은 햇살처럼 생생했다. 욕심이 났으나 월급쟁이의 경제 규모로는 감히 넘보기 힘든 대작이다. 아쉬움을 달래면서 김점선의 그림을 다시 걸어보기로 한다. 지난해엔 거실 벽에 고정돼 있었는데 새해가 됐으니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해 식탁 벽 쪽으로 옮겨본다. 김현경이 하던 방식이다. 내친김에 장욱진의 판화를 그 곁에 다시 배치하고 아래에 나태주 선생이 편지에 그림까지 그려 동봉한 ‘풀꽃’ 육필로 마무리를 해본다. 이사를 오면서 도배를 하지 않아 심란하던 벽이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내기 시작한다. 전에 살던 아이들의 낙서와 지워지다 만 음식물 얼룩 같은 것이 마치 부러 꾸민 것처럼 절묘한 무늬가 돼 다가온다. 벽의 성격이 바뀌니 식탁의 어지러운 살림도구들까지 영향을 받아 설치미술의 자세를 취하는가 싶다. 빵도마 하나를 놓더라도 벽에 걸린 그림들의 품위에 손상이 되지 않도록 좌정시킨다. 그렇게 해서 신선해지는 것은 내 마음이다. 같은 세계를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벗어날 수 없는 일상과 함께 다른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 예술의 꿈 중 하나일 것이다. 다른 세계가 이 세계의 밖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 이 세계의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세계의 고착과 반복에 저항하는 전략으로서 나는 낡은 세계를 지불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붉은 말’의 꿈을 꾼다. 곁에 두진 못했으나 붉은 말 그림이 그렇게 내게로 왔다.

[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흰여우·흰바람벽·흰별 기다리며

첫눈이 내린 숲으로 들어간다. 인기척이 드문 이른 아침 나무에서 내려온 청설모가 눈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후다닥 가지 위로 달아난다. 장애물 건너뛰기 주자처럼 가지와 가지를 점프할 때마다 눈송이가 쏟아진다. 바람에 날리는 눈들의 오묘한 춤사위에 넋을 놓고 있자니 ‘비디오 아트’로 예술 지형을 바꾼 백남준 선생이 생전에 지인들에게 한 말씀이 떠오른다. ‘예술은 눈 속으로 숨어버린 흰여우의 꼬리’다. 흰 꼬리를 쫓아 평생을 헤맸으나 눈으로 가득 덮인 숲에서 그 꼬리는 흔적조차 없다. 어쩌면 허무하기도 하고 허탈스럽기도 할 이 길의 무엇이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일까. 대가의 겸허한 자기 고백 같기도 하고, 끝없는 길을 향해 나선 자의 샘솟는 창조력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신념이 묻어나는 말 같기도 하다. 쓰고 나면 지워지는 저 백색의 공간을 거울처럼 갈고 닦으며 사는 자에겐 대표작이 늘 미래에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이룬 성과는 모래성과 같아 해변의 파도에게 내줘야 한다. 성을 지키려 하기보다 성을 무너뜨리는 쾌락 속에 있을 때 모든 시간은 모험을 잃지 않는 신생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따듯한 집과 안락한 난롯가를 떠나 흰여우가 사는 겨울 숲의 강풍한설을 일상처럼 겪으며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백석이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고 노래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과 고독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감을 드높은 정신의 영토에 대한 지향 가운데 오롯해지는 순백의 위의로 전환하는 일은 일생을 바칠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연말이라 문학장 내에도 시상식 자리가 잦다. 오랜만에 조우한 출판사 에디터들과 문학담당 기자들 그리고 작가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젊은 여성이 부러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한다. “저 기억하시겠어요. 담양 한빛고등학교에 특강 오셨을 때 뵀어요. 그때 사인해주신 시집을 아직 갖고 있답니다.” 희미하게 지워진 기억 속에서 번개가 쳤다. 작가가 되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히던 문학소녀가 정말 한국 문학의 가장 뜨거운 중심이 돼 나타난 것이다. 2022년 등단 이후 2023년 젊은작가상, 2024년 문지문학상 그리고 올해의 제31회 문학동네 소설상까지 거머쥔 함윤이 작가였다. 문학전문 출판사 ‘무제’의 대표이자 영화배우인 박정민이 특유의 예감으로 주목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동시에 받고 있는 소설가였다. 경이로운 결실도 결실이지만 그 오랜 세월 청소년 시절의 꿈을 놓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걸어왔다는 그 사실이 내겐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등단 과정에 겪었을 참담함과 시련은 말해 무엇하랴. 중학교 3학년 때 첫 신춘문예 응모를 하고 무려 12년 동안 낙방거사로 살다 당선된 나로선 그 고난의 행군이 일종의 전우애처럼 스쳐간다. 위계화된 제도의 질서를 뚫고 첫 책을 내기까지의 역경은 또 얼마나 녹록잖았을 것인가. 그 기나긴 여정 끝에 다시 만난 함윤이 작가의 눈빛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날의 감동을 특강을 간 여러 학교에서 문학을 꿈꾸는 학생들과 함께 나눴다. 11월의 끝에 단재고등학교에서 만난 A군은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자작 단편소설 한 편을 선물로 줬다. 다음에 만날 때는 출간한 창작집을 들고 나타나겠다는 약속을 하며. A군을 만나고 오던 날 청소년 시절의 내가 겹쳐졌다. 소설을 들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가 전상국 선생에게 혹평을 듣고 돌아오던 날이었다. 아찔한 절벽 앞에 선 듯 위태롭던 그 겨울의 별은 왜 그렇게 눈물겨웠을까. 자작나무 수피처럼 갈라 터져 빛나는 별 앞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겨울은 별을 보기 좋은 계절이다. 쌀쌀할수록 잘 씻긴 쌀알처럼 별의 선도가 선명해진다. 여느 계절엔 볼 수 없는 별들이 영하를 고배율 렌즈 삼아 떠오르기도 한다. 눈 내린 숲 너머로 흰여우 같기도 하고 흰 바람벽 같기도 한 별이 반짝이고 있다. 문학의 미래는 저렇게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가을 들판의 연금술

영화 ‘패터슨’(짐 자무시 감독)과 ‘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감독)의 공통점은 일상이다.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어떻게 차이를 살아낼 것인가. ‘패터슨’의 버스 기사는 틈틈이 시를 쓰며 일상의 반복을 견디고 ‘퍼펙트 데이즈’의 화장실 청소부는 일과 후의 독서와 점심때면 만나는 공원의 나무를 필름 카메라에 담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취향의 발현을 통해 하루하루의 작은 차이들을 발견한다. 이들 영화는 내 기억 속에선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까지 이어진다. 폴 오스터의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담배 가게 주인 오기는 14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매일 오전 8시에 사진을 찍는다. 소설가 폴이 동일한 사진을 반복해서 찍는 이유를 묻자 오기는 똑같은 장면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미지들이라며 찬찬히 살펴볼 것을 권한다. 심드렁하게 앨범을 넘기던 폴은 어느 순간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행인들로 가득 찬 거리에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은 바로 얼마 전 사망한 그의 아내였다. 세 편의 독립영화 중 가장 최근에 개봉한 ‘퍼펙트 데이즈’의 엔딩 크레딧은 ‘코모레비(木漏れ日)’의 뜻이 등장한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 그 햇살은 반복되지만 동일한 것이 아닌 저마다의 차이들로 눈부시다. 최근 내가 만난 ‘코모레비’는 ‘벼’다. 양평으로 귀촌한 이산하 시인이 카톡으로 보내 오는 들판 사진. 8월24일부터 보냈으니 받아본 지 달포 가깝다. 역시 언뜻 보면 변화가 없는 같은 풍경인데 조금씩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그 차이는 피사체와의 간격 그리고 찍는 각도, 대기의 흐름뿐만 아니라 대상을 하염없이 골똘하게 바라보는 지극한 마음에서 온다. 마치 모네의 ‘수련’이나 세잔의 ‘성빅트와르산’ 연작처럼 그야말로 월인천강의 경이들이 들판을 생동케 한다. 9월 들면서 초록이 무성하던 논에 물가자미 알 같은 노란빛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사진을 찍는 시인의 그림자가 먹빛을 풀어내며 어른거리기도 하다가 9월18일 자에는 풍우에 무참하게 쓰러져 누운 들판이 나타났다. 저 벼들을 누가 다 일으켜 세우나. 쓰러진 벼는 주인이 일으키면 약값이 더 들고 인부 쓰면 인건비 부담이 더 커 그냥 내버려 둔다니 신자유주의 농사에 착잡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다. 안타까워하던 며칠 사이 시인은 고 김민기 선생과의 일화를 보내왔다. ‘한라산’ 필화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출소한 뒤 10년의 절필은 배신과 환멸과 악몽의 시간 그 자체였다. 그때 포장마차에서 자주 만나 그저 말없이 술만 따라주던 선배가 김민기다. 어느 날 가객은 특유의 그 저음으로 침묵을 깨며 말한다. ‘그 사람들 너무 미워하지 마. 너무 미워하면 그 사람들같이 돼.’ 이산하의 시 ‘김민기’(인문교양 월간지 ‘유레카’ 10월호)처럼 벼들은 짓밟고 지나간 바람과 싸우는 대신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며 쓰러져 누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쓰러진 채 알곡을 채우고 있다. 고통과 눈물을 통과한 생명의 신비는 참으로 장관이다. 9월 말부터는 너그러운 들판의 온기가 여물어가는 알곡들의 풍요와 함께하고 있다. 원경으로 찍은 사진의 색감이 완연하게 노란색의 밀도를 더해 가더니 근접 촬영한 사진 속에선 금싸라기의 광휘를 찬란하게 뿜어낸다. 시월에 접어들자 들판은 시련과 비애마저 승화시킨 생명의 연금술로 가득 찼다. 한때는 백색 테러로 목발을 짚고 다니기도 했던 그였다. 금서라도 전달하듯 막 번역한 프리모 레비의 시를 사주경계를 하며 건네주던 그였다. 그 많은 곡절 끝에 다다른 풍경이 바로 가을 들녘이다. 그 속에 어제와 다른 바람이, 언뜻 보면 평이하고 지루한 풍경을 매일같이 바꾸고 있는 중이다. 거문고를 부숴 버리는 대신 줄을 고쳐 매는 경장(更張)의 참뜻이 이런 것이 아닐까. 문학제며 단풍축제며 방방곡곡 가을은 축제의 계절이다. 반복되지만 차이를 실현하는 축제는 그냥 반복되는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도록 한다. 이 가을을 어떻게 지상에 처음 당도한 계절처럼 살아볼 것인가. 가을장마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금빛으로 출렁이는 들판에 연금술의 꿈이 있다.

[손택수의 문학관 편지] 재를 긁어 모으다

시각디자이너 안상수와 정우영 시인의 시집 북디자인을 위해 시인의 고향인 임실의 산골 생가를 방문한 것이 벌써 열 몇 해 전 일이다. 시인을 길러준 대지와 시어 그리고 시집을 ‘흙’의 이미지로 갈무리하는 느린 디자인이 속도의 시대를 명상하는 디자이너의 철학이었다. 현란한 표지와 띠지를 더해 독자들을 유혹하느라 각축을 벌이고 있는 독서 시장에서 시집만이라도 영혼의 가난을 추구하자는 뜻이었다. 녹록지 않은 과정과 비용이 예상됐지만 습관적인 출판 행위를 성찰해보자는 출판사의 의지도 함께했다. 흙은 획일화된 시선이나 관습에 질문을 던지는 문학의 자질에 참으로 합당한 물질이어서 섬을 만나면 모래가 오고, 산골을 만나면 바위가 오고, 논을 만나면 논흙빛 같은 다채로운 이미지를 선보인다. 탄광을 만난다면 탄광촌의 일상과 만난 예술이 색상도에 없는 오묘한 검정의 뉘앙스를 파문지게 할 것 같았다. 오래전 폐가가 돼버린 정우영 시인의 생가에서는 잿빛이었다. 마을을 산책하던 우리는 시인의 유년시절과 가족사의 내밀한 대목뿐만 아니라 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한 권의 두툼한 소설책처럼 탐독하면서 폐가의 아궁이 벽에 묻어 있는 흙벽의 그을음에 멈췄다. 그 그을음은 가족들을 기다리며 생솔가지 불을 때던 시인의 소년시절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추억과 만난 폐가는 쓸모를 다한 공간이길 멈추고 심해의 폐어처럼 폐호흡을 하며 잃어버린 기억들을 풀어내 줬다. 폐가의 물질성이 영혼의 생가로서 생생히 복원되는 마술 같은 시간이었다. 삶을 무화시키지 않고 회복하게 하는 이 같은 흔적기관들과의 만남은 소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유한성의 세계에 긍지를 주는 힘이 아닌가 싶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주인공 마르코는 세계제국을 건설한 황제에게 이야기한다. “폐하의 손짓 한 번에 따라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도시의 성벽들이 흠 하나 없이 높이 세워지는 동안 저는 그 새 도시에 자리를 넘겨 주기 위해 사라졌을 다른 가능한 도시, 다시 세워지거나 기억될 가망이 없는 그 도시의 재를 긁어 모을 겁니다. 그 어떤 보석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불행의 잔재들을 인식하실 수 있을 때만 폐하께서는 마지막 다이아몬드가 가져야 하는 정확한 캐럿을 계산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이아몬드의 찬란한 광채에 가려진 재의 기억은 권력의지의 실현인 대도시 건설에 의해 추방당한 풍경들을 폐허가 아니라 잠재된 가능성의 세계로 있게 한다. 도시의 충격과 상실의 경험을 통해 새 장소에 자리를 넘겨 주기 위해 사라졌을 다른 가능한 장소, 다시 세워지거나 기억될 가망이 없는 장소와 연대케 한다. 그리하여 오늘, 여기의 풍경은 도래할 또 다른 질서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문화적 퇴적 지층의 심연을 갖게 된다. 심연 속에서 과거와 미래가 만나고 그것은 진정한 현재의 시간이 된다. 인문지리학에선 ‘장소의 획일화’와 ‘상품화된 가짜 장소의 생산’을 무장소성의 두 가지 양상으로 보고 있다. 장소를 기능성, 효율성, 공공성의 입장에서만 바라본다거나 대중 소비사회에 의해 조장된 키치화된 관광지, 박물관, 디즈니화된 명소들이 그 사례라고 하겠다. ‘획일화’와 ‘상품화’ 속에서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 산다는 것이다. 문학관 일을 하면서 한 사업 중 하나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잊힌 지역의 문학을 아카이빙하는 일이었다. 도시 전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삼고 천천히 산책하며 기록하고, 스케치하고 작품화하는 일 또한 병행했다. 요즘은 한참 동탄 신도시의 지명들을 시의 풍경으로 옮겨 오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사라진 옛 지명들과의 만남은 이주민인 나로선 오래된 부식토를 품는 일과도 같아 고고학 발굴이라도 하듯 일상의 고단함을 유장한 호흡 속에 있게 한다. 그리하여 나는 소망한다. 지상의 모든 것이 나를 잊게 될 때 내가 노래한 이 땅의 나무와 강과 산이 내 사랑을 기억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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