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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체험리포트]안양교도소 '교도관 24시'

함께 기도하고, 이야기 나누니…어느새 '담장 안 사람들' 편견 달아나

“당신이 작은 약속 하나만 지켜준다면 8년이 아니라 80년이라도 기다릴께요.”

살인죄로 8년형을 선고받았던 장해진씨(55)에게 그의 아내가 건넨 말이다.

그 작은 약속은 바로 장씨가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장씨의 노력은 힘든 수형생활을 이겨내는 지름길이 됐다.

어느덧 안양교도소에서 생활을 한 지 5년째에 접어드는 그는 현재 수용자들 사이에서도, 교도관과의 관계에서도 가장 신뢰받는 수형자가 됐다.

그는 천주교 거실에서 생활하며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 밤 9시 기도로 하루를 마감한다.

사회에서 기타를 치며 무명가수로 전전하다가 라이브카페를 운영한 것도 교도소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천주교 성가대장으로 지휘를 맡고 있으며, 매주 자살위험자 등의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노래교실에서 반주 등을 하며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작업반장’은 교도관은 물론 동료 수형자로부터 신뢰로 얻은 또 하나의 훈장이다.

점심식사 후 오후 1시20분부터 시작된 고충처리반의 업무를 맡으면서 시작된 면담은 어느덧 30분이 훌쩍 넘었다.

그는 “매순간이 소중하다는 것과 사람과 사람간에 믿음과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이 곳에 와서 깨달았다”며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아내가 있기에 더 열심히 생활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교도소에 있는 가족 만남의 집에서 1박2일로 아내를 보고 싶은 소원이 있다고 얘기했고, 본 기자는 즉시 이같은 면담 내용을 정리해 그의 고충을 상급자에게 보고했다.

그의 바람이 이뤄진다면, 교도관으로서의 일일 체험에서 결과물을 내는 것이기에 더욱 간절히 기원해본다.

장씨의 얘기를 듣는 동안 오전내내 정신없이 역할을 부여받으며 몸으로 체험한 안양교도소 교도관으로서의 시간이 함께 겹치며, 불현듯 최근에 본 영화 ‘7번방의 선물’이 떠올랐다.

영화이기에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허구가 가미됐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것은 바로 휴머니즘이었다.

교도관과 수형자간의 끈끈한 교감, 수형자들간의 믿음, 수형자와 가족간의 사랑, 교도관들간의 신뢰와 배려 등 영화에서 감동을 준 휴머니즘은 안양교도소라는 현실에서도 보일듯 보이지 않게 체감됐다.

지난 13일 오전 9시 신입 교도관으로의 역할을 위해 안양교도소를 찾았다.

곧바로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교도관 모자와 ‘교정’이란 글자가 새겨진 점퍼을 입은 모습은 조금은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마음은 경건해지면서 발걸음도 달라졌다. 제복의 힘이다.

그렇게 향한 첫번째 행선지는 안양교도소장실.

유승만 안양교도소장에게 “2013년 2월13일부로 경기일보 이명관 기자는 안양교도소 일일체험을 명받았습니다”라는 신고를 시작으로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시작됐다.

첫 임무는 교도소 담장 밖에 있는 중간처우 시설인 소망의 집에서 생활하며 세차장 업무를 맡고 있는 중간처우 수형자들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5명이 한 조로 역할 분담을 통해 자동차 스팀세차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본 기자도 걸레를 들고 세차업무에 동참했다.

이 곳에서 만난 임영달씨(57)는 휴게소 운영과 관련해 사기죄로 입소한 경위와 수용생활 초기의 어려웠던 점, 오는 7월 출소를 앞두고 중간처우 대상자로 선정된 점 등의 이야기를 쉴새없이 풀어갔다.

교도소의 배려인 듯 싶다.

일을 마치고 난 뒤 본격적인 업무를 위해 교도소 담장 안으로 들어갈 차례가 됐다.

교도소 내 정문에서 신분증을 제출하고 휴대전화와 담배를 맡기고 전산시스템에 등록했다.

교도소 내로 들어서자 건물을 잇는 복도 사이사이에는 철문이 이어졌고 그 곳을 지날때마다 ‘끼익, 철커덩’소리가 반복됐다.

교도소 내에서 맡은 업무는 종교 행사를 위해 이에 참가하는 수용자들을 계호하는 일이었다.

수용자들을 교회당 건물까지 이동하게 하고 불교 행사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했으며, 30여분간 진행된 행사가 끝난 뒤 일인당 두덩이의 떡을 나눠주기까지가 업무의 끝이었다.

이어 3명의 미결 소년수가 한자 인성교육을 받도록 인도한 뒤, 옆에서 수업에 참관했다.

경험이 많아보이는 한우동 강사는 아이들이 조금 지루해하자, 수업 중간에 하모니카를 꺼내 조용필의 ‘친구여’를 불었다.

너무나 구슬픈 가락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짖?은 표정으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던 한 소년수의 눈빛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연주가 끝날 무렵에는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소년수는 “밖에 있는 친구들이 생각나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며 연신 큰 박수를 쳤다.

긴장을 해서인지 배가 고프던 순간 점심시간이 왔다.

그러나 식사시간은 30분에 불과했다.

4명이 교대로 식사를 해야하기 때문으로, 점심시간은 30분씩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까지였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교대를 위해 정신없이 간 곳은 수용동.

건강이 안 좋은 수용자들이 있는 2동 수용동에서는 식사를 마친 수용자들이 방 안에서 신문과 TV를 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방 안 한켠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모습도 보였다.

20개 가량의 방이 이어진 치료거실의 방을 한 차례 둘러보고 인원체크 등 점검을 마쳤다.

이어 조사ㆍ징벌ㆍ독거거실을 근무를 명받고 갔지만, 1963년에 준공된 안양교도소의 노후된 시설이 여실히 드러났다.

독방의 길이는 175㎝에 불과했다.

빈 방을 찾아가 누워봤지만 똑바로 누울 수 조차 없어 쪼그려 옆으로 누울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옆 방에 있던 한 수용자가 “안양시랑 무슨 소송을 한다나, 교도소에서 증개축을 하려고 하는데 시가 허가를 안내준대”라며 “그래도 우리도 인권이 있는데…”라고 안타까워했다.

이후 도자기 직업훈련장과 원예작업장, 자동차부품 생산작업장 등에서 업무를 맡아 일하다보니 어느새 작업 마감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수용자들의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가슴 한켠에서는 웬지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까지도 세인들이 거부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교도소에서의 정신없는 하루는, 본 기자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줬다.

이 곳이야말로 가장 끈끈한 휴머니즘이 살아있는 곳이라는…

이명관기자 mk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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