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하우스 후끈한 열기에 숨이 헉…건강한 먹거리 고집에 감사
그런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점점 젓가락이 채소를 향하게 됐다. 삼겹살을 상추에 싸먹으니 고기의 느끼함도 덜하고 상추의 달곰함도 느낄 수 있어 더욱 맛이 풍부해졌다. 맵기만 했던 풋고추의 알싸한 맛, 쓰다고 손을 내저었던 치커리나 적겨자 같은 채소의 개운한 맛까지 알게 됐다. 일부러 쌈밥 집을 찾아가 푸짐한 쌈 채소에 밥을 얹고 우적우적 씹는 재미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왜 어렸을 때는 이 맛을 몰랐을까?’ 스스로 의아하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채소를 많이 먹었다면 더 건강체질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도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일일체험을 하게 됐을 때 망설임 없이 채소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유기농 쌈채소 농장 ‘맑은 샘 유기농 작목반(남동구 남촌동)’의 문을 씩씩하게 두드렸다. 지금이라도 채소를 가까이한다면 ‘건강미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심이 듬뿍 담긴 선택이었다.
농장일을 해본 적이 없던 기자는 지난 15일 청바지에 치렁치렁 늘어진 니트 티셔츠를 입은 채로 복장부터 불량하게 농장에 들어섰다. 운동화를 챙겨 신은 게 다행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농장에서 일 바지를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베테랑 선배일꾼들은 이미 복장을 완벽히 갖추고 일터에 나선 터라 초보일꾼은 간신히 모자와 장갑만 빌린 채 바로 농장으로 투입됐다.
‘맑은 샘 유기농 작목반’의 백학현 작목반장은 “생각보다 일이 녹록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선배일꾼들에게 제대로 된 소개도 없이, 채소를 따는 방법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기자를 비닐하우스로 밀어 넣었다.
비닐하우스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에 숨이 막여왔다. 495㎡나 되는 하우스 안에는 적겨자들이 서로 손을 잡아달라 아우성이라도 치듯 풍성하게 잎을 벌리고 있었다.
선배일꾼들은 벌써 비닐하우스 끝에서부터 내다 팔 수 있을 만큼 자라난 적겨자를 따느라 분주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신세를 지게 된 김미경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복장도 불량하고 본의 아니게 지각까지 한 기자는 송구스런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혹시라도 선배들 일하는 데 방해만 되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은 탓이다.
그러나 선배들은 “아이고, 젊은 처자가 고생스러울 텐데…”라며 오히려 기자를 걱정해줬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적겨자 잎 따는 법 좀 가르쳐주세요”라며 애교를 섞자 “이파리가 손바닥만큼 자라난 것으로 골라 밑동이랑 작은 잎은 남겨두고 뜯어내면 된다”고 친절한 설명이 뒤따라왔다.
하우스에는 남촌댁(75)과 김일라(70), 강화댁(77), 베트남에서 온 하이(33), 흥선(42) 등 선배들이 손발을 맞춰가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서로 이름이 아니라 별명으로 부른다는 선배들에게서는 정겨움이 한껏 묻어났다.
선배들이 적겨자 잎을 따내 한 손에 차곡차곡 쌓았다가 하이에게 넘겨주면, 하이가 이파리 끝을 가위로 잘라내고 상자에 정돈해 4㎏씩 포장을 했다.
하이는 연방 선배들에게 “할머니 주세요. 할머니 주세요”를 외치며 일하는 속도를 조절해갔다. 손이 가장 느린 기자에게도 “아가씨 주세요. 아가씨 주세요”라며 재촉하기도 했다. 남촌댁 할머니는 “언니라고 부르라고 시켜도 죽어도 할머니라고 부른다니깐”이라며 살짝 투정을 내비치기도 해 하우스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쭈그리고 앉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이내 얼굴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허리는 뻐근해지고 다리도 저릿저릿해지기 시작했다.
힘든 기색도 없이 옆에서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남촌댁 할머니께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어리석은 물음(愚問)을 하니 “당연히 힘들지”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래도 벌써 6~7년 이 일을 하다 보니 힘든 것도 모르고 일을 할 만큼 이력이 생겼단다. 강화댁 할머니는 온종일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도 저녁때면 따로 텃밭을 일구러 갈 정도로 일벌레란다. 가장 힘들 때가 언젠지 물었더니 “벌레가 많이 파먹어서 못쓰게 된 이파리를 따내 버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적겨자 이파리마다 조그맣게 ‘송송’ 구멍이 뚫려 있다. 본적도 없는 자그마한 벌레들이 적겨자 위를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유기농 쌈채이기 때문에 농약을 치지 않아 벌레들이 마음 놓고 포식을 하고 있었던 거다. 작은 구멍은 괜찮지만 커다랗게 ‘숭숭’ 구멍이 뚫리거나 잎을 파먹은 것들은 상품가치가 없어서 가차없이 잎을 뜯어내 버려야 한다. 적겨자 잎 예닐곱 개를 뜯어내면 한두 개는 버려야 한다. 초보일꾼에게도 마음이 아프고 아까웠다. 그래도 친환경 웰빙푸드답게 유기농 쌈채소에는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기 때문에 작은 구멍은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신뢰의 표시라고 생각하자 이내 마음이 놓였다.
‘맑은 샘 유기농 작목반’은 올해로 4년차에 접어든 인천 도심농가의 대표주자이지만, 쌈채소를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백학현 작목반장은 농사를 잘 짓는다고 소문난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 노하우를 배워오고 직접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름의 방법을 터득했다. 백 반장은 “처음에는 농약을 쓰지 않으니까 채소가 병드는 걸 막는 게 가장 어려웠다”며 “벌레는 천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데 농약으로도 잡기 어려운 균을 유기농법으로 잡아야 하니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백 반장이 찾은 해결법은 이엠(EM)농법이다. 유용미생물을 이용한 이엠농법은 효모와 유산균 등 자연계에 존재하는 유익한 미생물을 수십 가지 섞은 원액에 쌀겨, 키토산 등을 배합해 만든 발효퇴비를 사용하는 것이다. 백 반장은 “이엠퇴비는 토양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자연농법이라 토양을 튼튼하게 하고 채소가 병에 걸리지 않게 해준다”며 “3년 동안 땅 만드는 일을 했더니 1년 내내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건강한 땅이 됐다”고 설명했다.
오후 5시께 끝이 없어 보이던 적겨자 이파리 따는 일을 대략 마무리하고 쌈채소를 포장하는 작업장으로 이동했다. 별로 도움도 안 된 것 같은데 선배들이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려주니 매우 쑥스러웠다.
작업장에서 포장을 기다리는 품목은 깐 마늘과 상추. 마늘은 급하게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초보일꾼의 느긋한 손놀림을 봐줄 여유가 없다며 상추포장대로 보내졌다. 저울에 상추를 150g씩 정확하게 무게를 달아 상품포장을 하는 일이다. 몇 시간 동안 허리 아프게 적겨자 이파리를 땄던 생각을 하자 상추 잎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게 생각됐다. 행여 잎이 다치거나 찢어지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저울에 올려놓고 살살 봉투에 넣으니 속도가 날 리 없었다. 옆 자리 선배일꾼을 보니, 두어 번 손놀림에 상추 150g이 저울 위로 올라가고 3초 만에 포장이 뚝딱 완성됐다. 초보일꾼에게는 신의 손으로 보일 정도였다. 생활의 달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자에 가지런히 담긴 상추는 농협 하나로 마트와 생협을 비롯해 GS마트 SM 마트, 롯데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로 팔려나간다고 했다. 유기농 식품은 극심한 불황 속에서도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손꼽히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소득 수준도 올라가면서 ‘좋은 먹을거리’에 과감히 투자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농산물 시장규모는 올해 3조 9천845억 원으로 전망되고 있다. 유기농 쌈채도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비료 등을 쓰기 때문에 생산비용이 많이 들어 가격이 조금 높은 편이다. 유기농의 장점을 잘 아는 소비자들은 가격장벽을 뛰어넘어 고정고객이 된다고 한다.
‘맑은 샘 유기농 작목반’은 9명 농가가 모여 비닐하우스 28개 동을 운영하고 있다. 생산하는 채소만 30여 가지가 넘는다. 일반재배보다 채소가 1주일 이상 오래가는 것이 장점이다. 판매할 때는 개별 작물에 각각 생산자의 이름을 표기하는 ‘생산실명제’를 쓰고 있다. 쌈을 섞어서 포장할 때만 작목반 이름으로 출하한다. 평소에 시장이나 마트에서 채소를 살 때는 유기농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했는데 고작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을 농장에서 보내고 나니 유기농 쌈채소 가격이 결코 비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소비자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유기농을 고집하고 있는 농심(農心). 채소를 먹을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파리 하나라도 소중하게 먹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김미경기자 kmk@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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