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선 여유롭게 연애도 하던데, 숨가쁜 현실에선…
지난 2001년 배용준, 송윤아 주연의 ‘호텔리어’라는 드라마에서 집중 조명되면서 관심을 얻기 시작한 호텔리어는 최근에도 ‘적도의 남자’, ‘울랄라부부’, ‘해운대의 연인들’, ‘미스 리플리’ 등 다양한 드라마에서 세련되고 매력적인 직업으로 그려지고 있다.
드라마 속뿐만 아니라 현실사회에서도 호텔리어의 비중은 점차 커지고 있다.
관광산업을 육성하고 국제적인 비즈니스와 글로벌 기업 유치가 늘어나면서 호텔 수요도 덩달아 늘고 있고 전문적이고 능력 있는 호텔리어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커지고 있다.
인천에서도 최근 3~4년 사이에 특급호텔만 4~5곳이 생겼고 송도, 영종 등 경제자유구역을 중심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호텔리어는 청소년들의 ‘꿈의 직업’ 순위에서도 당당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세련되고 멋진 호텔리어로 하루를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인천의 대표적인 특급호텔인 ‘하버파크 호텔’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관광객과 외국인이 오가는 호텔 특성상 쉽지 않은 부탁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흔쾌히 기자의 방문을 환영해줬다.
21일 오전 9시, 인천항을 마주 보고 있는 하버파크 호텔의 문을 두드렸다.
호텔리어로서의 하루가 시작됐다는 기분에 들떠 상큼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기자를 반겨준 것은 하버파크 호텔의 최병구 총지배인(57)과 박지수 마케팅 매니저(27), 호텔을 소유하고 있는 인천도시공사의 오수진 관광사업팀 차장. 특히 최 총지배인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도 마지막 탑승객까지 알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줘 몸에 배어 있는 서비스정신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최 총지배인은 신참 내기 호텔리어가 넓고 넓은 호텔에서 헤매지 않도록 호텔리어의 직무와 하는 일, 하루 동안 체험할 동선 등을 세밀하게 준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비록 하루짜리 호텔리어지만 특급호텔에 누가 되는 일은 없어야겠기에 호텔의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교육을 받으며 머릿속에 담아뒀다.
사실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는 동안 호텔에서 묵은 경험이 수차례 있지만, 정확히 호텔리어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화려한 겉모습에만 관심을 뒀지 정확히 호텔리어가 어떤 역할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던 것이다.
호텔은 모든 영업과 조직을 총괄하는 최고 경영자 중 한 사람인 총지배인의 지휘를 받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객실은 컨시어지(Concierge)와 당직지배인(Duty manager), 안내(Front Dest), 도어맨(Door man), 벨맨(Bell man) 등으로 구성돼 있다. 컨시어지는 중세 프랑스에서 귀족들을 보좌하며 뭐든 다 해주는 집사를 뜻하는 말인데 고급호텔에서는 정보와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관광객들에게 자동차 대여부터 유명 식당 및 공연 소개, 항공권 예약, 관광지 안내, 우편물 발송 등의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VIP 고객을 전담해 관리하는 GRO(Guest Relation Officer)와 ‘컨시어지의 꽃’으로 불리는 ‘레클레도르(프랑스 어로 황금열쇠)’ 등으로 세분화된다고 한다.
이 밖에도 호텔리어는 마케팅(판촉, 홍보) 부서와 비즈니스 미팅, 웨딩 등 연회 부서와 식음·조리부서, 객실청소와 세탁 등을 담당하는 부서, 빌딩관리 부서 등으로 구분된다.
호텔의 각 조직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이어져 숨 가쁘게 돌아가는지 단지 귀도 설명만 듣는 것인데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드라마 속 호텔리어들은 호텔에서 연애도 하면서 여유 있는 모습이었는데 현실은 역시 드라마와는 달랐다.
신참 내기 호텔리어에게 처음 맡긴 임무는 객실 내부를 청소하고 침대 시트와 베개 커버 등을 깨끗이 세탁한 새것으로 바꾸는 메이드 역할이었다.
메이드 경력 3년차인 김선분 여사(60)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시트 가는 법을 배웠다. 기자와 동행해줬던 오수진 차장도 기꺼이 메이드 일을 도와줘서 든든했다.
침대 모서리까지 깔끔하게 선을 맞춰 하얀 시트를 깔고 난 뒤 베개 커버 4장을 갈아 침대 위에 가지런히 얹어놓으면 침대정리는 끝. 군대경험은 없지만, 꼭 군인이 돼서 각을 잡고 모포를 개는 기분이었다.
수월하게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혹여 깨끗하게 갈아놓은 침대 시트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힘이 드는 작업이었다.
김 여사님(호텔에서는 호칭을 ‘여사님’으로 통일하고 있었다)은 “힘으로 하려고 들면 못해. 요령이야 요령”이라고 설명해줬지만 신참 내기에게 요령을 기대하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김 여사님은 “손님이 묵는 방을 치울 때는 될 수 있으면 손님의 물건은 휴지 하나, 종잇조각이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줬다.
김 여사님이 하루에 치우는 방은 무려 17~18개. 달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여사님 손길이 닿은 침대나 베개는 순식간에 새 것처럼 변신했다. 하버파크호텔을 찾는 투숙객은 항상 객실의 청결함을 칭찬한다고 한다.
객실청소가 끝난 뒤 정장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프런트 데스크(Front Dest)로 자리를 옮겼다.
호텔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프런트에 서니 괜스레 실수할까 걱정이 앞섰다. 하루 동안 프런트를 거치는 투숙객이나 방문객이 무려 300~500명에 이른다고 한다.
프런트의 선임인 백승훈 지배인(35)은 “객실예약부터 투숙객 민원, 문의사항, 불만사항 등이 모두 집결되는 곳이 프런트”라면서 “빠르고 정확하게 고객의 요구를 이해하고 가장 최고의 방법을 찾는 게 주임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한 외국인 투숙객이 호텔에서 지병으로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급하게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호텔 측이 발 빠르게 움직인 덕에 수술은 성공했고 외국인 손님은 감사인사를 남기고 무사히 돌아갔다.
점심때가 되자 15층 뷔페로 이동했다. 인천항과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100여 가지가 넘는 최고급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호텔 투숙객뿐만 아니라 뷔페 점심을 이용하려는 손님들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식사 중인 손님들 테이블을 오가면서 물을 채워주고 빈 접시를 내어가는 일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타이밍’의 문제일까? 치우는 게 너무 늦으면 손님들의 불만이 쌓이고 너무 일찍 치워도 안된다.
초보 호텔리어가 식당 가운데서 주춤주춤 하는 사이 선배들이 발 빠르게 테이블을 정리해갔다. 민망해진 손을 부여잡고 선배들을 유심히 보니 비결은 손님들을 찬찬히 그리고 꼼꼼히 살피는 것이었다.
선배들에게 민폐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식당 대신 연회 준비를 돕기로 했다.
저녁 만찬이 예정된 홀에서 냅킨, 포크와 나이프, 포도주잔과 물잔 등을 정해진 위치에 놓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테이블을 보니 괜히 뿌듯함이 밀려왔다.
단계별로 호텔 구석구석을 다니며 호텔리어 체험을 하다 보니 세밀한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예약손님을 공항에서부터 모셔와 깨끗한 객실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고 체크아웃하는 순간까지 불편함 없이 지내도록 서비스하는 것, 호텔은 이용객이 관광이든 비즈니스든 원하는 바를 충실히 이루고 만족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공간이었다.
얼마 전 태국 여행 때 사흘 동안 묵었던 모 호텔에서는 일행이 수건에 염색 물이 들었다는 이유로 60달러를 배상한 일이 있었다. 세탁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도 호텔 측이 막무가내로 배상하라고 다그치는 하는 통에 매우 기분 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즐거웠던 여행까지 망치는 느낌이었다.
호텔은 단순히 잠을 자고 음식을 먹는 곳이 아니다. 여행이나 출장길에서 휴식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고 결혼과 같은 특별한 순간의 무대이자 배경이 되는 공간이다.
호텔리어는 그 공간을 준비하고 꾸미고 완성하는 사람이다.
최 총지배인은 “호텔리어는 긍정의 에너지와 인내의 힘을 두루 요구하는 직업”이라며 “호텔리어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호텔은 달라진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kmk@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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