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 만들고 배달 척척 봉사원들 내공 느껴져… “봉사는 미쳐야 하는 일” 실감
독서와 영화감상이 취미인 엄마는 최근 연필 스케치 공부를 시작했다.
점잖고 고상한 엄마가 “너 나가 살아”라며 소리를 빽 지를 때가 있다.
십중팔구 빨래통 앞에서다.
하루 두 장씩 내놓는 축축한 수건과 김칫국물이 묻은 흰 셔츠, 구깃한 바지를 세탁기 속에 하나씩 집어넣을 때마다 엄마의 화도 차곡차곡 쌓이다가 결국엔 폭발하나 보다.
“너 나이가 몇인데, 엄마가 네 종이니? 시집가서는 어떡할래?”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가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고 뒤따른다.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수모치고는 다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럴 때는 잠자코 있는 게 상책이다.
마땅히 나가 살 데도 없는데다 그렇다고 부지런히 가사에 동참할 자신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네가 언제까지 아기 인 줄 아니?”, 이어지는 타박에 “저렇게 늙은 아기도 있나?”라고 키득대는 동생의 비웃음을 견뎌야 함은 물론이다.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않는 내게 지친 엄마가 나의 오늘 하루를 봤다면 뭐라고 할까.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린 8월 넷째 주, 일일 적십자 봉사원으로 이불빨래와 반찬배달에 나섰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구리 토평동에 있는 구리시종합사회복지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복지관 정문 앞 주차장에서 봉사원 아주머니 열댓 명이 저마다 웃음을 쏟아내며 이불 빨래에 한창이었다.
쨍쨍한 햇볕 아래 빨간 플라스틱 대야와 큰지막한 소쿠리, 파란 고무장화, 적십자 봉사원 특유의 노란 조끼가 ‘깔 맞춤’이라도 한 듯 선명한 조화를 이뤘다.
“기자 아가씨가 지각했네, 얼른 와요”
대야 안에 들어가 빨래 밟기에 열중하던 봉사원 한 분이 손을 내밀며 맞이했다.
이날은 복지관 앞에서 매달 한 차례씩 하는 적십자 빨래 봉사 날이다.
이른바 ‘사랑의 이동세탁사업’으로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에서 이동빨래방차량을 제공하고 적십자 구리시 지구협의회 회원들이 봉사에 참여, 1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구리시 9개 동마다 있는 적십자 봉사회에서 한 곳씩 돌아가며 빨래봉사를 실시, 이날은 인창동 봉사회원 15명이 나왔다.
이들은 전날 미리 걷어온 독거노인 18가구의 빨래를 모아서 오전 9시부터 빨래를 시작했다.
세탁물은 어르신 스스로 빨기 어려운 이불, 담요 등의 침구류로, 봉사원들은 이불을 발로 밟고 헹궈 빨래방차량 안에 있는 탈수기에 넣고 돌린 뒤 빨랫줄에 널고 있었다.
이미 한 시간여 동안 빨래를 한 터라 주차장 위로 쳐둔 빨랫줄엔 알록달록한 이불이 가득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빨래하기는 더없이 좋은 땡볕이었다.
줄지어 늘어선 7개 대야 속에서 노란 조끼가 둘씩 들어가 빨래를 밟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적십자 봉사원 조끼와 빨간 고무장갑을 건네받고 운동화와 양말까지 벗은 뒤 빨래를 시작했다.
이불이 든 대야 속에 맨발을 담그자 “앗, 차가워” 소리가 절로 나왔다.
비누기가 가시지 않은 이불이 미끄러워 휘청대자 대야 속에서 맨발로 마주한 봉사원이 “두 손을 꼭 맞잡고 해야 한다”며 팔을 붙들었다.
빨래는 비눗물 세탁과 헹굼 세 차례로 나눠 이뤄졌다.
나는 장홧발로 초벌세탁을 끝낸 빨래를 담당했다.
지근지근 빨래를 밟자 말갛던 물이 금세 뿌예졌다.
물을 비우고 찬물을 다시 받아 또 밟았다.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 위로 햇볕이 반짝 튀어 올랐다.
쉴새 없이 빨래를 밟는 동안 엉뚱한 곳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이 헹군 이불빨래를 손으로 지그시 눌러 물기를 빼내고서 소쿠리에 옮겨 담았다.
세탁차량까지는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았지만 물을 잔뜩 먹은 이불이 무거워 낑낑댔다.
세탁차 안에서는 백상순 적십자 구리시 지구협의회장이 탈수기에 빨래를 넣고 다시 꺼내느라 분주했다.
백 회장과 함께 탈수기에서 빨래를 꺼내 들고 빨랫줄에 널었다.
뽀송뽀송한 새 이불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백 회장은 “십 년 전에는 빨랫감을 서로 헷갈리지 않으려고 색색 실로 표시해 뒀는데 이제 각자 스마트폰으로 찍어둔다”며 “헌 이불 들고 와 새 이불 돌려주니 받으시는 어르신도, 우리도 기분이 좋다”고 미소 지었다.
11시 반이 조금 넘어 빨래봉사를 끝낸 후 복지관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남양주로 향했다.
오후에 진행될 반찬배달 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차로 20분여를 달려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동북희망나눔봉사센터에 도착했다.
맛있는 반찬 냄새가 풀풀 풍겼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만들어 배달하는 날, 이날은 고등어조림과 무장아찌, 어묵볶음과 김 400인분을 준비했다.
12년간 센터에서 반찬배달봉사 지속해온 동안 대상자는 100여 가구에서 382가구로 늘었다.
반찬배달에 참여하는 봉사원만도 50명이다.
센터 내 조리실은 반찬 마무리작업이 한창이었고 옆에 자리한 강당에서 봉사원들이 모여 분주했다.
저마다 자리를 잡고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담은 반찬을 노란 비닐봉지에 넣어 묶고서 장바구니와 종이상자에 나눠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에서 12년 봉사의 ‘내공’이 느껴졌다.
봉사원들은 운전봉사원 한 명과 배달 봉사원 두 명씩 3인 1조로 조를 짜 한 조당 20여 가구에 개인차량으로 배달한다.
해당자는 독거노인과 조손가정, 장애인가구 등이다.
샴푸, 치약 등을 담아둔 생필품 선물세트도 챙겼다.
운전은 박종선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간사가 맡았다.
오전 내내 반찬을 만들었다는 장 회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리시니 어서 가자”고 서둘렀다.
트렁크는 물론 뒷좌석까지 반찬과 생활용품을 가득 싣고 배달에 나섰다.
장 회장이 구불구불한 뒷골목과 좁다란 길을 요리조리 가리키며 설명하는 동안 맹 봉사원은 휴대전화 수첩에 이를 받아적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직접 운전 봉사를 해야 하는 탓에 길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배달길은 돌고 돌았다.
지원가정 대부분이 오래된 다세대주택이나 빌라에 살면서 길이 제대로 닦여 있지 않거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장 회장은 “여름엔 낫지, 겨울에는 온통 빙판길이라 배달 중 접촉사고가 부지기수”라며 “지난겨울 배달하다 차가 미끄러져 사고가 나 결국 차를 바꿨다”고 말했다.
지원가정의 집안 환경은 하나같이 열악했다.
혼자 사는 김이순 할머니(82)네 반지하 방에 들어서자 곰팡이와 반찬냄새 등이 뒤섞인 눅눅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환기가 잘되지 않는 탓인지 두 벽면에는 회색 곰팡이가 잔뜩 펴있었다.
“너무 고맙다”고 반복해 말하는 김 할머니에게 장 회장은 곰팡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핀 거냐, 집주인이 도배 안 해주느냐 등을 질문을 이어갔다.
집을 나선 장 회장은 “적십자 사업으로 도울 수 있을지 몰라 꼼꼼히 알아본 것”이라며 “반찬을 배달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건강상태도 보고 집안 환경도 살펴본다.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드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빛이 안 드는 원룸, 스러져가는 판잣집, 눅눅한 지하방을 누비며 배달을 이어갔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아버지가 손뼉을 치며 “고맙습니다”를 연발했고 고개를 허리까지 숙여야 할 정도로 등이 굽은 할아버지는 검은 봉투에 음료수 네 병을 넣어 손에 쥐여줬다.
다리를 쓰지 못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할머니가 어두운 방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반찬을 건네주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일을 나가 집을 비운 곳에는 문고리에 반찬을 걸어두거나 창문 속으로 넣어두기도 했다.
점점 느려지는 걸음이 땡볕 속 배달에 지친 탓인지, 무거워진 마음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 하나를 낳고 하나를 벤 20대 초반, 장 회장은 남편의 장사가 완전히 망해 거리에 나앉을 처지로 내몰렸다.
가까스로 월세 방을 얻었지만 가재도구 조차 없어 밥을 해먹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매일같이 인스턴트 음식을 사먹는 장 회장에게 이웃 아주머니가 연유를 물은 뒤 “새댁이 밥을 해먹어야지”라며 냄비와 그릇 등 살림살이를 내어줬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어요. 그때 나도 나중에 꼭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지 결심했지요. 이젠 봉사가 일상이 됐고 평생을 이렇게 살 거에요”
오후 3시, 반 녹초가 돼 센터로 돌아왔다.
오전 중 음식조리를 마친 봉사원들이 모여 다음 달 반찬배달 스케줄을 짜고 있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30년간 봉사를 해온 이들이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봉사원들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화기애애했다.
‘봉사를 오래하면 체력도 강해지나? 역시, 아줌마들이라 다른가….’
지친 탓인지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기울었다.
‘그럼 그렇지’하는 엄마의 타박 섞인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김영란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동부희망나눔봉사센터장은 “점조직화된 봉사원이 없으면 반찬배달을 비롯해 다방면에서 이뤄지는 봉사활동을 실시할 수가 없다”며 “돈을 받기는커녕 들여가며 봉사하는데, 봉사 중 발생한 사고 처리비용 등 최소한의 지원도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기지역 내 적십자 봉사원 2만여명. “좋은 일 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는 말에 김 센터장의 대답이 명쾌하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아직 세상이 살 만한 거겠죠”
성보경기자 boccu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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