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딸랑’ 종소리… 빨간 냄비에 사연도 쌓이고 온정도 쌓이네
어린 시절에는 길을 걷다가 ‘어려운 이웃을 도웁시다’라는 말이 들려오면 주머니를 뒤적거려 동전 몇 개라도, 1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빨간 냄비에 넣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선냄비를 보더라도 왠지 모르겠는 쑥스러움에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하고 슥 지나쳐 가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차를 운전하며 다닌 뒤로는 자선냄비를 만나는 일도 부쩍 줄었다.
이 겨울이 더 지나기 전,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도 갖고 항상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셨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축하할 겸 구세군의 문을 두드렸다.
구세군은 다양한 방법으로 연중 모금 활동을 하고 있지만 11~12월은 집중 모금기간이라 매우 바쁜 시기다. 자선냄비가 거리로 나오는 것도 이 즈음이다. 기자가 구세군 인천영문을 찾은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자선냄비 거리모금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구세군은 성탄을 축하하고 기부 열기를 끝까지 이어갈 수 있도록 마지막 날인 24일은 자정까지 모금한다. 악대도 등장해 기부 열기를 한껏 끌어올리기도 한다. 하필이면 기자가 방문한 날이 구세군으로서는 가장 바쁜(?) 날이었다.
하지만, 구세군 인천영문의 담임 사관인 박준하 사관(56)과 차은옥 부담임 사관(34·여)은 환한 미소로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늦은) 기자를 반겨줬다. 박 사관은 구세군이 아직은 낯선 기자에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구세군 자선냄비가 처음 시작된 것은 12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였다. 구세군 조셉 맥피 사관이 도시 빈민을 위해 오클랜드 부두에서 큰 쇠 솥을 내걸고 ‘이 국솥을 끓게 하자’며 모금한 뒤 성탄절에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한 게 시초가 됐다.
한국 구세군의 역사도 100년을 넘어섰다. 1909년 처음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해 1918년에는 한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를 위한 사회복지시설 ‘혜천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사회구호활동에 나섰다. 사회가 점점 각박해진다고 하지만 자선냄비 모금액은 나날이 늘어갔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 13억 4천300만 원이었던 기부금은 지난 2011년 48억 8천700만 원으로 늘었다. 올해는 55억 원이 목표다.
이렇게 모인 기금은 아동·청소년, 노인·장애인, 여성·다문화, 위기가정, 사회 소수자 및 북한·해외지역 구호 대상자의 기초생계 지원, 건강지원 서비스, 환경개선 서비스 등에 쓰인다. 특히 구세군은 전국 160여 사회복지기관과 연계돼 있어 체계적으로 기금을 사용하고 있다.
박 사관은 “얼굴도 본 적 없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위해 선뜻 돈을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며 “자선냄비에는 기부금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국민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서민의 정성으로 가득 찬 빨간 냄비
구세군 인천영문이 자선냄비를 내건 곳은 동인천역 지하상가 중심 통로였다. 찬바람이 부는 길 한복판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기자와 함께 모금활동에 나서준 차은옥 부사관에게 너스레를 떨어봤더니 한 마디로 ‘축복’이란다. 찬바람을 맞으면서 모금활동을 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묵묵하게 모금활동을 이어온 전국의 수많은 구세군과 자원봉사자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구세군 모금활동은 사관과 자원봉사자들이 교대로 한다. 인천영문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는 대략 50~60명. 순번을 정해 대략 2시~3시간가량 번갈아가면서 모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체험을 하면 멋진 구세군 사관 정복과 모자를 착용할 수 있을까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정복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사관학교 교육을 마치고 자격을 얻어야만 입을 수 있는 옷이기 때문이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욕심을 버리고 현장으로 나섰다. 때마침 모금활동을 하고 있던 자원봉사자는 35년째 봉사활동을 하는 박종심씨(64·여)와 10년 차 베테랑 서광호씨(66)였다. 자선냄비 옆에는 황금색 돼지 저금통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들어보니 무게가 상당했다. 동전과 지폐로 저금통이 가득 차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좋은 곳에 써달라고 놓고 가셨단다. 하루 이틀 모은 돈이 아닐 텐데 무거운 저금통을 이곳까지 가지고 와서 기부한 그 마음이 정말 고맙고 감사했다. 냄비 안에는 두툼한 봉투도 보였다. 아저씨 한 분이 오셔서 냄비 앞에 무릎을 꿇고 돈을 넣으셨다는 설명을 들었다. 괜스레 눈가가 뜨거워졌다.
박 사관은 “4년 전 인천으로 발령을 받은 첫해에 냄비에서 100만 원이 든 봉투와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며 “편지에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고 전했다.
사연들을 듣고보니 빨간 냄비 안에 들어 있는 동전 한 개, 지폐 한 장이 모두 소중하게 느껴졌다. 구세군 냄비에 기부하는 사람은 모두 익명의 기부자다. 그리고 대부분 서민이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오가는 사람, 찬바람을 맞으면서 걸어다니는 사람이다. 지갑은 비록 가볍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운 사람들이다.
빨간 냄비와 ‘깔 맞춤’으로 빨간 색 자원봉사 점퍼를 입고 본격적으로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내 모금활동의 첫 기부자는 나 자신이 되기로 하고 1만 원을 냄비에 넣었다. 마음이 뿌듯했다.
그런데 시작과 함께 난관에 부딪혔다. ‘딸랑딸랑’ 종을 치는 일이었다. 차 부사관이 시범으로 은은하게 ‘딸랑딸랑’ 소리를 내면서 종을 치는 방법을 가르쳐줬지만, 아무리 종을 흔들어도 ‘땡 땡’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종소리는 자선냄비의 존재를 멀리까지 알리고 행인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행인들이 행여 시끄러운 ‘땡 땡’ 소리를 피해 가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차 부사관에게 다시 종을 넘기려는데 더 해보면 괜찮아질 거라면서 손을 내둘렀다.
어설픈 종소리가 울리는데도 마음씨 좋은 기부자의 발걸음은 이어졌다. 7~8살로 보이는 꼬마 아가씨는 두어 살 터울의 언니에게 1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 냄비에 쏙 집어넣었다. 한 남학생은 냄비를 보더니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동전을 잔뜩 꺼내 기부했다. 친구들이 동전뿐이냐고 핀잔을 주자 그 남학생은 ‘동전이 뭐 어때서? 너희보다는 낫거든!’이라며 당당히 어깨를 편다. 동인천역에서 지내는 노숙자로 보이는 허름한 차림의 한 아저씨도 1만 원짜리 한 장을 넣더니 쑥스러운 미소를 짓고 돌아섰다. 기부가 이어질 때마다 저절로 허리 굽혀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게 됐다.
한참 모금을 하고 있는데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할아버지 한 분이 조심스레 다가와 외투 안 주머니에서 두툼한 흰 봉투를 꺼내 냄비에 넣고는 사라졌다.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자의 직감(?)에 황급히 따라나서 인터뷰를 시도했는데 할아버지는 “연말이잖아”하면서 유유히 떠나셨다.
기부를 하는 것은 꼭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순히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과 마음이 만나 빨간 냄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깨달았다.
김미경기자 kmk@kyeonggi.com
사진= 장용준기자 jyju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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