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터널’ 빠져나오면 저만치 희망이
‘대박’,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본 적 있을 만한 단어.
쳇바퀴 돌듯이 돌아가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밥 먹듯이 이어지는 야근에 지칠 때, ‘대박’이라는 꿈과 상상은 즐거움을 준다.
나 또한 그랬다. 혹시나 모를 대박을 꿈꾸며 로또 복권을 구매하기도 했고, 적은 돈이지만 경륜장에서 게임을 해본 적도 있다.
대박은 전혀 아니지만 투자한 돈보단 조금 더 따보기도 했다. 즐기면서 돈 번다는 느낌? 달콤한 경험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찬바람이 옆구리를 파고들어서인지 공허함과 우울감이 몰려든다. 즐거우면서 신나는 그런 일이 뭐 없을까.
이때 슬며시 떠오르는 ‘대박’의 유혹. 공허함과 우울감은 사라지고, 신나는데 돈까지 벌 수 있는 ’달콤한 유혹’, 도박이 머릿속을 맴돈다.
‘합법적인 도박’이나 해볼까 하고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수원에 ‘경기도박중독예방치유센터’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지인은 나에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문제라며 거기나 한번 가보라고 권했다.
아직 달콤한 유혹에 빠진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도박의 위험성에 대해 알아볼 겸 도박중독예방치유상담사 체험을 하기로 했다.
■ 당신도 지금 대박을 꿈꾸십니까?
미리 연락을 하고 ‘경기도박중독예방치유센터’(이하 센터)를 찾았다. 번듯하게 자리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간판도 없고,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창문에 붙은 스티커만 이곳이 센터라는 사실을 알게 해줬다. 도박 중독자들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 상태였는데 우중충한 센터의 겉모습은 나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이날 하루 내게 도움을 줄 상담 선생님은 교육과 상담 현장에 직접 들어가 보는 걸 추천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욱 효과적일 테니. 내가 투입된 현장은 한 달 간 진행되는 ‘희망 수업’. 도박자들이 처음 이곳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하는 교육이다.
여기에 왜 왔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등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정하는 단계로 총 4번의 수업이 진행된다. 이 단계를 마쳐야 본격 ‘개인 상담’에 들어가게 된다. 이날은 세 명의 도박자가 자리했다. 사실 도박을 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약간 풀린 긴장의 끈이 다시 조여졌다.
이날은 ‘도박 중독’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도박 중독’은 승리단계-손실단계-절망단계로 이어지고, 벗어나고자 노력을 하기 시작하면 결심단계-재건단계-성장 단계로 이어진다는 게 핵심. 그리고 도박을 하게 되는 심리 등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특히 ‘승리 단계’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는 ‘대박’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도박에서의 승리로 얻어지는 짜릿함은 ‘중독’이라는 고통의 늪으로 안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 이날 수업에 참석한 도박자 세 명 모두 ‘대박’ 경험이 있다고 했다. 특히 도박자 한 분은 이틀 만에 5만원으로 7억을 따본 적이 있다고 했다. 물론 그 경험 때문에 지금은 딴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잃었지만. ‘대박’ 경험이 모두 중독으로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도박을 할 때는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된다는 말도 인상 깊게 귓가를 맴돌았다. 도박을 한다는 걸 주변에서 알면 만류할 테니 점점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이 자리에 참석한 도박자들도 이 말에 동의했다.
수업을 듣고 있다 보니, 문득 ‘이런 수업보다는 상담을 통해 빨리 중독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하지 않나? 진짜 중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겁니까?”라고 상담 선생님께 물었다. 이 의문에 대한 상담 선생님의 답은 간결했지만 확실했다.
“도박 중독으로 고생하시다가 치유 과정을 통해 지금은 상담 선생님으로 활동하시는 분이 이곳에 있어요”
확률이나 회복사례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었다. 도박을 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상담 선생님이 됐다. 효과나 방식에 대한 의심은 곧바로 사라졌다. 마침 도박 중독을 경험해본 그 상담 선생님은 다른 교실에서 ‘행복수업’을 진행하려던 참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수업에 따라 들어갔다.
‘행복수업’은 도박자들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과정이다. 도박을 직접 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도박을 했다는 이유로 경제적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을 위한 수업이다.
이곳의 분위기는 도박자들을 위한 교육이었던 ‘희망수업’보다 훨씬 무거웠다.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단도박자(도박을 끊은 사람)의 영상을 볼 때는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벗어나기 힘들 것만 같은 고통의 늪에서 하루빨리 헤어나오길 함께 바라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행인 것은 영상을 본 뒤 소감을 말하는 시간에 이들이 희망을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가족들은 “영상을 보니 힘이 난다”, “빨리 이겨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로 극복을 향한 의지를 다졌다.
■ “도박 유혹 뿌리칠 수 있는 여러겹 장치를”
교육이 끝나고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 상담사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박을 맛본 뒤 15년 간 중독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상담을 받으면서 도박을 끊은 지는 5년여, 2년 전부턴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상담사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말은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는 단도박을 위해선 환경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강한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대박’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믿지 말고 여러 겹의 장치를 두고 도박의 유혹에 빠지는 걸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단도박한 지 5년이 지난 선생님도 환경만큼은 항상 신경 쓴다고 했다. 상담사의 길을 걷는 것도 단도박을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말했다.
또 그는 도박자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가족들이 도와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스스로 고통을 경험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단도박을 향한 의지가 강해질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도박 중독은 단도박 기간이 길다고 하더라도 한순간에 재발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든 경계해야 된다는 그의 말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인상 깊은 말을 쏟아내는 그에게 나는 도박 중독이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상담 센터를 찾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단도박 중인 현재, 자신의 기분을 설명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저는 아직 신용불량자입니다. 하지만 예전에 힘들 때와 비교하면 지금 너무 행복해요. ‘대박’이고 뭐고 도박을 안 하고 있는 지금이 좋습니다.”
상담 일정이 빼곡한 선생님들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어 여기서 상담사 체험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조여져 있던 긴장의 끈이 조금씩 풀렸다. 상담 선생님들 따라다니기 바빠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좀 전과는 달리 센터의 이곳저곳이 눈에 들어왔다. 도박자들의 강한 의지가 나뭇잎처럼 붙어있는 나무 그림부터 좁지만 상담 선생님이 함께 있어 힘을 얻을 수 있는 상담 공간까지.
상담사로서의 하루를 위해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 본 우중충한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많은 도박자들에게 행복한 삶을 안겨주기 위해 쉴 틈 없이 일하는 ‘일당백’ 상담 선생님 10명과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의 나락에 빠진 도박자와 그들의 가족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여러 공간만 보일 뿐이었다.
신지원기자
사진=추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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