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지혜 깃든 장맛의 발견
이제 남자도 요리를 해야 하는 시대. 부끄러운 얘기지만, 기자가 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끓는 물에 면과 수프를 넣고 3분 동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라면이 전부다.
그야말로 요리 불능이다. 같이 살아주는 아내에게 그저 고마워해야 할 따름이기만 하다.
이번 체험에서 멋지게 파스타 같은 외국 요리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전국이 시끌벅적한 김장철이기도 한 만큼, 초보 전통장 명인(?)으로 하루를 살아봤다.
■ 앞치마·고무장갑 완전 무장… ‘된장남’ 변신
시냇물이 흐르는 조용한 시골 마을 길을 따라 최근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에 위치한 국가지정 전통식품업체인 (주)상촌식품을 찾았다.
업체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지는 수백 개의 장독에 입이 딱 벌어졌다. 상촌식품 대표이사이자 지난 2010년 대한민국 식품명인(어육장 제조부문)제 37호로 선정된 권기옥 명인(83)이 반갑게 맞았다.
상촌식품은 신선한 국산 원재료에 전통방식 그대로 어육장을 비롯해 각종 장류와 장아찌류를 생산하는 업체. 오늘의 임무는 된장 담그기와 수백 개의 장독 관리 등이다. 거울 앞에 서서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서 고무장갑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난 뒤에야 명인을 따라 가공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쉬지 않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시원하게 쏟아내는 명인.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메주와 소금, 물의 양의 조절이란다. 재료는 메주 1말(6장)과 천일염 5㎏, 숯, 대추, 마른 홍고추, 그리고 항아리.
명인을 따라 항아리 안에 3분의 2가량 메주를 여러 개 넣은 뒤 물과 소금을 4대1로 맞춘 소금물을 부었다. 남은 소금물은 햇볕에 장물이 줄면 수시로 보충해주어 항상 항아리에 소금물이 가득해야 한단다. 이렇게 해야 곰팡이가 끼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 정성·기다림의 결정체… 명인 20년 노하우 섭렵
이어 항아리 주둥이를 무명 헝겊으로 덮고서 야물게 동여놓았다. 익는 과정에서 파리 등 벌레의 접근을 원천 방지하기 위해서다.
“밤에는 항아리 뚜껑을 덮어놓고, 햇볕이 있는 낮에는 뚜껑을 열어 약 두 달간 익혀야 해요. 아파트에서도 햇볕만 잘 드는 곳이라면 장을 담글 수 있다”라고 설명하는 권 명인. 메주에 소금과 물을 부어 발효시킨 뒤 국물을 떠내면 간장이, 남은 메주는 된장이 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익는 과정에서 파리가 접근하면 벌레가 생길 수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해서 매일 매일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든다’라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옛 선조의 부지런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 밖에 있는 온실하우스로 나가 볼까요?”
명인을 따라 밖에 있는 온실하우스에 따라나섰다. 장을 담근 항아리 수백 개가 하우스마다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온실하우스는 마치 농사를 짓는 비닐하우스와 흡사한 모습으로 유리로 둘러싸인 높다란 천장과 옆으로는 통풍할 수 있도록 방충망이 설치돼 있었다.
이는 항아리를 바깥에 놔두면 파리가 꼬이기 때문이란다. 항아리마다 ‘어육장’ ‘된장’ ‘간장’ ‘고추장’을 나타내는 품목과 언제 담갔는지 날짜 등 자신마다 정보를 기록한 표가 달렸었다. 20년이 다된 오래된 장들도 눈에 띄었다. 보통 항아리에 들어간 이후 고추장은 1년, 된장과 간장은 2년 후에 맛을 볼 수 있단다.
어육장은 조선시대부터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즐겨 먹던 최고급 장으로 말 그대로 고기와 생선을 메주와 함께 담가 장이 될 때까지 묵혔다 꺼내 먹는 일반인은 다소 생소한 귀한 장이다. 그야말로 육해공의 재료가 다 들어가 있다. 이번에는 간장 독을 열어 보았다. 그것도 20년이 다된 독이었다.
검고 윤기가 좔좔 흘렀고, 풍겨오는 향은 푸근했다. 맛을 봐도 좋다는 명인의 말에 손가락으로 콕 찍어 혀에 대보았다. 시중에서 파는 간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했다. 과연 일반 간장보다 풍미가 진중한 이유가 있었다. 귀한 재료들의 맛과 영양이 듬뿍 배었기 때문일 것이다.
■ 잊혀져가는 전통장… 다시금 소중함 깨달아
다음 임무는 항아리 관리. 기자는 직원들과 함께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햇빛과 바람을 쐬어주기 위해서다. 수백 개의 항아리 관리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오늘 장 담그기 체험을 해봐서 알겠지만, 우리의 전통 장은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귀한 것이랍니다. 외국 셰프들은 우리의 간장과 된장을 맛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죠. 그런데 정작 이 귀한 것을 우리 한국인들은 잘 모른 채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일반 장맛에 길들어 있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며 언젠가는 우리의 전통 장이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명인.
이날 하루 소중한 체험을 마치고 상촌식품 정문 밖을 빠져나오면서 투박한 항아리 안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디어 탄생한 전통 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전통 장은 그야말로 정성과 기다림의 결정체였다. 바로 우리 조상의 지혜와 슬기의 산물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용인=권혁준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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