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진 ‘희망의 사다리’… 하루하루 ‘맨땅에 헤딩’
대한민국서 안정적 정착위해 자영업·학업 희망, 대부분 난민 신청자 신분 ‘기회의 불평등’ 좌절
원하는 직업을 얻으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 대한민국에선 상식이다. 대부분의 취업 준비생들이 대학을 나왔고,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서고자 스펙을 쌓는다. 남들 다 하는 그저 그런 일자리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면 공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본국에서의 박해를 이유로 쫓겨나거나 도망친 난민들도 분명 여기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다. 본국에서의 학력이나 경력을 인정받기가 어렵고, 체류 신분도 발목을 잡는다. 무엇보다 이곳에서의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교육을 위한 경제적 여유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취업을 원하는 난민들의 꿈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길 바라는 것이 첫 번째이고, 자신들을 받아준 나라에 은혜를 갚는 것이 두 번째다. 그리고 출신 본국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 간호사, 통역사, 자영업을 원하는 비율이 높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높은 벽은 이런 작은 소망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난민들에게 취업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이 아닌,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점차 안정을 찾아갈수록 꿈은 멀어진다. 과연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고 목표를 이뤘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 11년 전 자영업·학업 꿈꿨지만, 지금은…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지난 2010년 발간한 ‘한국 체류 난민 등의 실태조사 및 사회적 처우 개선을 위한 정책 방안’에 따르면 앞으로 종사하고 싶은 업종으로 ‘취업’이 응답자 총 383명 중 151명인 39.4%로 가장 많았다. 이어 ‘자영업’(24.8%), ‘학업’(23.2%)의 비율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특히 자영업을 희망하는 비율은 난민인정자의 경우 40%, 인도적체류허가자의 경우 42%에 달해 매우 높게 나타났다. 학업도 난민인정자는 18.8%, 인도적체류허가자는 26.9%로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다. 이는 난민들이 국내에서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은 뒤 자영업이나 학업을 통해 자립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보고서는 “자영업이나 학업의 비율이 높은 건 경제적 목적 외에도 도전적이고 자아실현을 추구하고자 하는 성향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를 가진 비율이 절반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며 “한국 사회에서 난민들이 원하는 건 안정된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아를 실현하거나 자립을 이룰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자영업을 하고 싶어도 창업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채널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또 창업을 시도할 때 체류자격이 없어 곤란을 겪은 경우도 29.3%에 이르렀다. 자영업을 하기 위해선 사업자등록이 필요한데 이때 F-2(거주), 재외동포(F-4), 영주(F-5), 결혼이민(F-6) 등의 소지자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제도적 정비가 필요한 실정이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난민들은 과연 꿈을 이뤘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여전히 꿈으로만 머물러 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는 임금체불이나 폭언 등 부당한 일들을 겪으며 악착같이 살다 보니 어느새 꿈은 잊혀졌다. 본국에서의 공부를 이어가겠다는 결심도 흐려졌다. 새로운 기술을 익혀 나만의 가게를 열고 싶다는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
인천에서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출신 난민은 “원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한국에서 같은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공부를 계속해서 학위를 받아 본국에도 도움이 되고자 했지만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며 “지금은 그냥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사는 게 행복하다. 다른 꿈은 없다. 이제는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미얀마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난민은 “한국에서 목공소 일을 하거나 금속을 가공하는 일 등을 했는데 대부분 처음 해보는 일들이었다”며 “이제는 일이 손에 익어 벌이도 적당하고 안정적이지만, 언젠간 꼭 공부를 해서 미얀마 국민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 불안한 신분에 막힌 ‘희망’
난민들이 자영업이나 학업을 이어가려면 안정적인 신분이 우선돼야 한다. 가장 불안한 ‘난민 신청자’ 신분으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난민 인정자’ 또는 ‘인도적 체류 허가자’가 돼야 원하는 직업을 얻을 기회가 생기지만 합법적인 체류 지위를 얻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현재 많은 난민이 살고 있는 부천이나 부평에는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 식료품점, 휴대폰 가게 등 다양한 종류의 상점들이 있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모두 난민들이 자신의 힘으로 일군 가게들이다. 이들 대다수는 ‘재정착 난민’으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지녔다.
외국인 지원단체 관계자는 “난민들이 가게를 차리고 자영업을 하는 데 있어서 정부가 지원해준 것은 없다고 보면 된다. 취업도 힘든데 창업까지 지원하는 제도는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며 “스스로 한국 땅에 자리를 잡아 가게를 차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9년에는 한 파키스탄 소수민족 출신 20대 여성이 난민신청자라는 이유로 대학 입학의 꿈이 좌절될 뻔한 일도 있었다. 이 일은 당시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주목받았다. 이 여성은 통역사의 꿈을 키우며 부산의 한 국립대 영어영문학부에 입학했지만 체류자격이 발목을 잡았다. 학교 측은 이 여성에게 유학생 비자가 필요하다고 했고, 여성은 지역 출입국·외국인청을 찾아가 난민신청자 자격(G-1-5)을 유학생 비자로 변경할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다행히 학교 측의 배려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이후 법무부도 “외국인 대학 입학 시 반드시 유학생 비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라는 긍정적인 입장 변화를 보였다.
결국 한국에서 난민들이 창업을 하거나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얻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난민 인정률과 인도적체류 결정률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난민 인정률은 0.3%(3,879건 중 10건), 인도적 체류 결정률은 21건으로 0.8%에 그쳤다.
■ 자립의 길 열어줘야 진정한 도움
난민의 자립을 돕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 길에는 취업이 있을 수 있고, ‘창업’이나 ‘교육’도 있을 수 있다. 난민 스스로가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정착해 다시금 안녕과 평화를 되찾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려면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국도 난민들이 빠른 시간 안에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다고 보고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중에서도 난민들의 사업을 다방면으로 지원해 주기 위한 소액창업개발프로그램(the Microenterprise Development Program)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 프로그램은 난민들이 자신들의 사업을 개발, 확장, 유지할 수 있도록 사업계획 개발, 경영, 회계, 마케팅 분야 등에 관한 교육 및 기술 지원 등에 관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공공보조 및 보조금을 받는 난민, 금융기관, 신용기록 또는 개인 자산이 부족해 대출이나 관련 기관을 통한 재정 지원을 받기 어려운 사람, 혹은 시민권을 받지 못한 난민의 경우에도 미국에 도착한 날짜와 상관없이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실제 미국 사회에서 이주민은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하지만 창업 기업가 집단 가운데 25%는 이주민이 차지한다는 분석이 있다. 재밌는 점은 우리에게 ‘아이폰’으로 익숙한 애플의 창업자이자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의 아버지도 시리아의 폭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에서는 사회통합을 전제로 난민 신청자가 시설에 입소해 직업훈련을 개시하는데, 만약 외부의 직업훈련학교를 다닐 경우 수업료 보조는 물론, 퇴소 후 사업을 시작한다면 창업자금으로 1만5천유로(한화 약 2천만원)가 지급된다.
난민지원단체 관계자는 “국내에 거주 중인 난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이 난민 인정을 쉽게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자리를 얻기 어렵고 취업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하물며 난민에 대한 창업지원을 바란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하지만 해외 사례처럼 사회·경제적 효율성을 고려해 이제라도 전향적인 난민정책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전했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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