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 탄생 주춧돌
1919년 삼일 만세운동을 돌아보면, 다소 의아한 점이 있다. 이 운동을 통해서 되찾으려는 나라가 왕국이나 제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조선이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가 망하게 된 때가 1910년 8월 29일이었으니, 3ㆍ1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10년 전에는 왕국 내지 제국의 신민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왕국을 말하지 않고 ‘민국’을 말하게 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최근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재조명되고 있다. 임시정부를 몇몇 망명자 집단으로 폄하하는 견해가 일부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추동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낡은 시대를 흘려보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기원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중대한 의미를 띤다. 그 선각자들 가운데 주요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이었다.
조소앙의 출생지는 교하군(현 파주시 월농면)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본가와 그를 기리는 기념관은 양주시 남면 양연로(황방리)에 있다. 두 지역은 30km 정도 떨어져 있다. 행정구획의 변동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출생지와 성장지가 약간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조소앙은 조정규(趙禎奎)와 박필양(朴必陽)의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용은(鏞殷)이고, 자는 경중(敬仲)이다. 소앙(素昻)은 그의 호이다. 어려서 통정대부인 할아버지 조성룡(趙成龍)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1902년에 성균관에 입학했으니, 전통적인 한학을 학문적 배경으로 성장한 셈이다. 그의 문장엔 동양 고전에 대한 지식이 배어 있다.
그러나 조소앙은 맏형 조용하(趙鏞夏)의 영향으로 서양의 최신 지식을 접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1904년에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세이소쿠영어학교,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 등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일본 유학생활 8년은 그의 일기 <동유약초(東遊略抄)>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성균관 시절부터 일본의 침탈 행위를 규탄했다. 일본 유학시절에도 유학생들의 조직 활동에 적극 가담하여 일본의 잘못을 성토하는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일본 당국에 의해 요시찰인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1912년 3월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일시 교편을 잡았으나, 이미 마음먹었던 중국 망명을 결행했다.
그의 사상적 지평은 넓었다. 전통 유학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 1915년에 발표한 ‘육성교(六聖敎)’는 단군,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마호메트 등 여섯 성현의 가르침을 일체화한 것이다. 이는 종교의 통합을 통해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기하고 민족간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 취지였다.
1917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 14명의 명의로 ‘대동단결의 선언’을 발표했다.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최고기관과 헌법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경술국치일이 황제권의 소멸일이며, 민권의 발생일이라는 주장이다. 즉 한인의 주권이란 한인 아닌 자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이며,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로 오히려 주권이 한국 인민 전체에 귀속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건설할 국가의 정체와 독립운동을 주도할 임시정부의 법적·논리적 근거를 세운 셈이 됐다.
1919년 2월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국제정세의 변동을 포착하여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민족독립운동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했는데 그 기초 책임을 조소앙이 맡았다. 이 선언은 일본 유학생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와 국내의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서보다 시기적으로 선구를 이루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혈전이라는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한 것이다. 이는 ‘대동단결의 선언’의 독립운동론을 이은 것이었다.
3·1운동을 전후로 한 독립운동의 흐름은 4월 상해에서의 임시정부 수립으로 귀결됐다. 10일 늦게 모여 밤샘 토론 끝에 11일에 ‘대한민국’ 국호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결정됐는데, 여기에는 조소앙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이후 독립운동과 헌법정신의 근간이 됐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은 지금의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규정으로 이어져 왔다.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이를 통치함”이고, 제10조는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다. 권력분립과 의회주의를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제3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이라고 하여 신분제적 질서를 부정하고 평등의 원칙을 선언한 것이다. 제4조에서 기본권 내지 자유권, 제5조에서 참정권, 제6조에서 국민의 교육·납세·병역 의무, 그리고 제7조에서 국제평화주의 원칙을 정하고 있다. 제9조의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는 조항도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처럼 역사적 의미가 큰 활동에 조소앙이 법학 전공자로서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조소앙은 외교활동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유럽을 순방하면서 한국 독립의 지지를 호소했는데, 특히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서 지지를 얻었다. 즉 만국사회당대회에서 한국독립을 승인하는 외교적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유럽 순방을 통해 조소앙은 소련 공산당을 비롯한 유럽의 다양한 정치 이론과 현실을 견문할 수 있었다.
1920년대 후반에 노력을 기울인 민족유일당운동이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1930년 1월 조소앙은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이때 당의 이론화 작업을 조소앙이 맡아 바로 ‘삼균주의’를 선보였다. 1931년 1월에 쓴 ‘한국독립당의 근황[近像]’이란 글을 통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조소앙은 한국독립당은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균등한 생활을 주의로 삼는다”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의 균등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치 균등화 방안으로는 보통 선거제를, 경제 균등화 방안으로 국유제를, 교육 균등화 방안으로 국비 의무 학제를 방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민족과 민족의 균등을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국가와 국가의 균등을 위해 식민주의의 배격과 침략 전쟁 금지를 주장했다.
조소앙은 또한 건립할 국가의 형태와 정치 체제로 바로 ‘민주 입헌공화국’을 제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독립당과 공산당의 차이점을 제시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파괴하는 시기에는 독립당은 민족투쟁을 도구로 삼고,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도구로 삼는다. 그리하여 전자는 국내의 모든 반일 민중과 국외의 피압박 민족과 연합하여 일본을 타도하는 것을 도모하고, 후자는 국내의 무산계급과 세계의 무산계급이 모든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할 것을 도모한다. 건국하는 시기에는 독립당은 자체 주권을 옹호하여 어떠한 외세의 간섭과 대행 통치도 승인하지 않고, 공산당은 동일한 주의를 가진 대국에 자국을 편입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아 더 이상 자국의 주권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 계급을 간판으로 내걸고 독단으로 정치를 행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1939년 ‘독립운동방략’을 발표했는데, 한국독립당, 임시정부, 광복군이 삼위일체가 되어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했는데, 삼균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대일선전성명서(對日宣戰聲明畵)’가 주석 김구와 나란히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발표됐다.
조소앙은 1945년 일본이 패퇴하여 귀국했는데, 임시정부는 미군정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총선거에도 불참하고 남북 협상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태도를 바꿔 참여했는데,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로 당선됐다. 그러나 곧 6·25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고 말았다. 그는 북한에서 1958년 9월 세상을 떴다.
전통은 힘을 잃고 새것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는 그러한 전환기에 새로운 나라를 이끌 생각들을 정리하여 제시했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활동 등 실효성 있는 방안을 찾아 끝까지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2·8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이광수, 3·1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최남선이 훗날 변절한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삶의 무게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조소앙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하고 대한민국 탄생을 기초한 사상가였으며, 불굴의 독립운동가였다.
김태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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