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발과 잣대
[변평섭 칼럼] 발과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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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미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코로나 대처가 잘되고 있다며 자화자찬을 했다. 그때 CBS의 중국계 여기자가 트럼프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발끈한 트럼프는 ‘그런 형편없는 질문은 중국에다 하라’하며 여기자의 질문을 뭉개 버렸다. 자신의 폐쇄적 인식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대구 가톨릭대학 교수로 있는 박병규 신부는 최근 한 가톨릭 간행물에서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편이라는 폐쇄성’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유다인들은 그 누구보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지만, 바빌론 유배를 거치면서 모든 이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유독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포장하는데 열심이었고, 민족주의 폐쇄성이 하느님의 개방성을 가로막아 버렸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반대편이라는 폐쇄성’은 기독교 안에서도 많은 교파로 분열하게 했고, 같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교파가 다르면 이단 취급을 하는 극단주의까지 존재하기도 한다. 이슬람 역시 시아파냐 수니파냐에 따라 전쟁도 서슴지 않는 종파적 폐쇄성이 계속된다. 마음에 안 들고, 미워도 함께 머무르는 사랑과 포용이 아니라 하나의 잣대로 줄세우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 ‘잣대’야 말로 인류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옛날 중국 정나라에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 ‘잣대’를 더 믿는 사람. 하루는 그가 신발을 사러 가면서 자기 발의 크기를 잣대로 재고 본을 떴다. 그런데 막상 시장 신발가게에 도착하여 신발을 사려고 하니까 본을 뜬 것을 집에 놓고 왔음을 발견했다. 차치리는 다시 집으로 가서 그것을 가지고 왔는데 와서 보니 저녁때가 되어 신발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발로 신발을 신어 보면 될 텐데 왜 집에까지 가서 그걸 가져와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차치리는 ‘잣대는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처럼 이념과 사고를 잣대에 맞추면 모든 것은 이분법적으로 나뉘며 그 폐쇄성은 마침내 자신마저 그 잣대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불행한 일이다.

이렇게 오(度)와 족(足)의 신뢰가 뒤바뀌면 검은 고양이를 본 사람에게 ‘너는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흰 고양이를 본 것이다’고 사실을 뒤집어 반복하면 자기도 모르게 검은 고양이가 흰 고양이로 의식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강요된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폐쇄성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치가 조선시대의 사화(士禍)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이분법적 폐쇄성이며 그 잣대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뻔한 사실도 어느 편이냐에 따라 흰 고양이가 검은 고양이가 될 수 있고 검은 고양이가 흰 고양이로 뒤바뀔 수 있다. 트럼프가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것처럼 내 편이 더욱 많아질수록 이와 같은 현상은 더욱 강해지고 ‘이의 있소!’하고 감히 손을 든 사람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지난달 2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 전 정의기억연대 대표를 향해 ‘할머니들을 팔아 먹었다’라며 절규에 가까운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것을 두고도 ‘검은 고양이’니 ‘흰 고양이’니 하는 식으로 편을 가르는 것을 보면 ‘차치리의 잣대’가 실감 난다.

그래서 정치는 무서운 것인가.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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