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청춘] 하모니카 전도사 장만수(65)
[언제나 청춘] 하모니카 전도사 장만수(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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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슬픔 모두 잊게 해 준 하모니… 평생 친구로

“어린시절 외삼촌을 그리워하며 불기 시작한 하모니카가 제 인생의 동반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돌며 하모니카를 전파하는 멋진 제2의 인생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7월의 어느날, 평택시 이충동 평택여성회관. 가만히 있을 때조차 콧망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건물 어디선가 땀방울을 식혀주는 청량하고 맑은 하모니카 소리가 바깥으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소리를 따라 507호에 들어가자 평상복 차림의 빨간 뿔테 안경을 낀 60대 남성이 20여명의 어르신 앞에서 멋드러진 자태(?)를 선보이며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있었다. 바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하모니카 전도사’로 활동하는 장만수씨(65)였다. 대충 빗어 넘긴 머리가 마치 베토벤을 연상케 하는 장씨가 가수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 연주를 마치자, 강습생으로 온 20여명의 어르신들은 저마다 우렁찬 박수로 화답하기 시작했다.

‘민중의 지팡이’로 자신의 젊은 날을 모두 보낸 뒤 지금은 하모니카 강사로서 제2의 인생을 보내고 있는 장씨는 “경찰 근무 시절 사고로 장애판정을 받고, 우울증을 얻어 술과 약에 의존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을 하모니카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며 “어린시절 삼촌을 생각하며 시작한 하모니카가 인생의 동반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 여기저기 찌그러진 하모니카, “너는 내 운명”
연주를 마친 장씨가 본격적인 수업을 위해 이어마이크를 끼자 20여명의 어르신들도 악보를 펼치는 한편, 하모니카의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한다. 방금 전까지 진지한 모습으로 하모니카를 연주하던 장씨는 어느새 해학적인 모습으로 돌변해 하모니카 예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씨는 “하모니카는 고령화시대에 가장 적합한 악기로,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치매예방과 천식, 폐기능 강화를 위해 하모니카를 배우고 있다”며 “하모니카를 배우면 저처럼 제2의 인생을 설계함으로써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가 여러분께 애인을 만들어 드리겠다. 성은 ‘하’고 이름은 ‘모니카’”라고 말하자, 어르신들은 환호와 탄성을 보내며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수업을 받는 어르신들은 마치 한편의 마당극을 관람하는 듯 했으며, 장씨는 더욱 열정적으로 수업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장씨가 인생 2막을 열게 해 준 하모니카와 처음 만나게 된 건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1951년 전남 화순에 태어난 장씨는 외삼촌으로부터 하모니카를 선물 받은 뒤 하루도 빠짐없이 하모니카를 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6·25 참전 용사이자 상이군인이던 외삼촌이 미군으로부터 건네 받은 찌그러진 하모니카가 평생의 친구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그때부터 낮이고, 밤이고 하모니카를 불어댄 것이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회상했다.

특히 배고픈 시절이었던 탓에 하모니카 연주에 더욱 매진했다고 털어놨다. 장씨는 “중학교 시절 가수 최희준의 ‘하숙생’을 연주하면 동네 어르신들이 자장면을 사주곤 했다”며 “매번 ‘하숙생’만 연주하면 자장면을 얻어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하려고 다른 노래들도 연습했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러면서 “얼굴도 잘생기고, 하모니카를 기가 막히게 불 줄 아니 순천공고 시절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학생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며 화려한(?) 과거를 뽐내기도 했다.
 

▲ ‘하모니카 전도사’를 자처하는 장만수씨가 수강생들 앞에서 멋진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 경찰 시절 얻은 장애와 우울증, 그리고 하모니카
장씨는 1976년 9월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이후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다 장애를 얻게 됐다.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이마가 찢어졌으며, 버스와 버스 사이에 팔이 끼어 지체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다친 팔을 치료하던 장씨는 2년에 걸친 병원 생활 중 우울증까지 얻게 됐다.

우울증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만신창이가 된 장씨를 오늘로 이르게 한 것 역시 하모니카였다.

그는 “괴롭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하모니카를 불었다”며 “지금은 약을 끊을 정도로 회복됐지만, 세번에 걸쳐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했다”고 털어놨다.

특히 “‘이 작은 하모니카가 내 목숨을 건졌는데, 다른 사람들의 목숨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며 “병원 생활을 계기로 하모니카를 통해 불행한 이들에게 행복을 선물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달동네라고 불리던 서울 성북구 정릉 4동 대일파출소에서 1985년부터 자원 근무를 시작한 장씨는 곧바로 자신의 결심을 현실화 하기 시작했다. 바로 하모니카 교실을 통해 지역주민들과 호흡을 시작했던 것.

장씨는 “처음엔 지역주민들로부터 오해를 많이 받았고, 하모니카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며 “그러나 이후 노인방범대 결성, 학교 예절 수업 등 다양한 활동을 계기로 주민들과 소통이 시작되자 주민들도 진정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장씨의 노력으로 마을은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된다. 알코올 중독과 도박중독이 심했던 주민들은 손에 술 대신 하모니카를 들기 시작했고, 마을 어린이들이 모인 놀이터와 골목 곳곳에서 하모니카 합주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씨는 “당시 마을에서 생활하던 어린이들 가운데 환경이 열악해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는 학생이 많았음에도, 다행히 지금은 다들 성공해서 잘 살고 있다”며 “큰 도움을 준 게 아닌데도 먼저 찾아오고 연락해오는 친구들을 보면 하모니카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 30여년에 걸친 경찰 생활, 그리고 시작된 인생 2막
지난 2007년 용인동부경찰서 교통사고조사계장으로 경찰 생활을 마감하면서 장씨의 제2의 인생도 함께 열렸다. 그의 다음 스텝은 역시 하모니카였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두려움을 겪게 되지만, 나의 경우 그런 점이 전혀 없었다. 평생 하모니카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모니카와 함께 멋진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라며 미소를 보였다.

장씨는 이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설계했다. 평택, 용인, 여주, 이천, 성남, 안성 등 경기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하모니카 강의를 시작한 것이다. 장씨는 “현직에 있을 때는 하모니카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퇴근 이후에 가야 했기 때문에 제한이 많았지만, 퇴직 후에는 온전히 하모니카와 함께 할 수 있어 무척 행복하다”고 밝혔다.

그래서일까 장씨는 지난 2013년 서울국제하모니카 페스티벌 대회 성인독주 3위에 입상한 데 이어 지난해 같은 대회에서 성인독주 1위를 차지하는 등 성과를 거뒀다.

이와 함께 그는 현재 용인 은이성지에서 안성 미리네성지를 잇는 중간에 위치한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에 산장을 건축, ‘하모촌’이라고 명명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하모니카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는 항상 하모니카 연주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 됐다.

특히 장씨는 앞으로 버스를 타고 경기도와 강원도 등을 다니며 하모니카를 전파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그는 “70세가 되면 25인승 버스를 개조해 이동하는 하모니카 교실을 만들고 싶다”며 “경기·강원지역 중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하모니카를 가르쳐줌으로써 꿈과 행복을 전파하는 ‘유쾌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혔다.

송우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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