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녕, 왕자의 길’ 태종과 세 아들이 꿈꾼 무위, 구도, 태평, 평안의 삶 조선의 역사, 한국무용과 현대적 해석에 신선함 덧입다
무엇이든 뜻한 바대로 행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모든 소유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다면 ‘행복’마저도 이룰 수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안녕’과 ‘평안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숱한 삶을 목격해 왔다.
지난달 25~26일 아르코예술 대극장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17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중 하나인 (주)아트로버컴퍼니의 창작무용 공연 ‘녕(寧), 왕자의 길’은 조선의 3대 왕 태종과 그의 세 아들의 운명과 삶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 수단인 ‘몸짓’을 통해 “평안한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지존이면서 동시에 아비로서 고뇌했던 한 남자와 권력이라는 소용돌이 앞에 운명이 뒤바뀐 세 아들의 이야기는 전통의 한국무용과 세련된 음악의 결합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태종 이방원. 형제는 물론 처가에도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왕좌를 지켜낸 인물이자 저물어가는 고려 왕조를 정리하고, 조선이라는 새 시대를 연 개국 공신. ‘피’의 길을 걸어간 태종은 그래서일까 그의 세 아들 양녕, 효령, 충녕에게 ‘평안하다’는 뜻의 녕(寧)을 대군의 이름으로 내렸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총 5장의 옴니버스 형식의 구성돼 인트로 격인 1장 ‘왕좌의 길’에서부터 세 왕자의 인생이 담긴 각 장을 거쳐 욕망과 피로 물든 지난 날을 반추하는 태종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왕좌-무위-구도-태평-평안의 길로 표현된 이들의 춤사위는 네 인물이 다다르고자 했던 ‘평안함’을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에게 욕망 혹은 꿈이란 무엇인지 되묻는다.
‘녕(寧), 왕자의 길’은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다. 장구와 꽹과리를 등 전통악기와 첼로 등 서양악기의 결합, 살풀이와 같은 우리 고유의 ‘한’의 정서에 재즈와 전자음악의 결합으로 세련됨을 더했다.
첫째 양녕이 걸어간 2장 ‘무위의 길’은 리드미컬한 음악, 자아도취의 표정 연기와 자유분방하고 강한 몸짓, 형형색색의 의상들로 표현됐다. 족쇄 같던 세자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풀어헤친 도포 자락과 춤사위에서 그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진 3장 ‘구도의 길’에서 둘째 효령대군은 한스러운 음악과 함께 등장한다. 역동적인 그의 형과는 정반대의 정적인 무대였다. 앞서 파랑, 노랑, 초록 등의 색색의 의상이 시선을 사로잡았던 2장과 상반되는 분위기로 3장에서는 통일된 색상의 바지, 어두운 모자를 쓴 무용수들이 무채색의 단체 군무를 선보인다.
아버지에 의해 운명이 뒤바뀐 형과 자신 대신 왕좌에 오른 아우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놓인 효령. 그의 혼란스러움과 고뇌, 권력에 대한 환멸과 허무는 곡선의 몸짓으로 표현됐다. 승무에서 장삼의 긴 소매를 허공에 흩뿌리고, 무용수들이 펼쳐낸 소맷단의 길을 걸어나가 모자를 벗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세속을 떠나 진리를 탐구하며 불도의 길을 걸어간 그가 추구하는 ‘녕’은 ‘구도’에 있었다.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우는 세종대왕이 된 셋째 충녕의 삶은 4장 ‘태평의 길’에서 표현된다. 그곳은 ‘화합’의 무대라 할 수 있다. 양녕의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춤사위와 효령의 정적이면서도 강직한 몸짓은 충녕에 이르러 직선과 곡선이 모두 어우러진 카리스마와 온화함으로 탄생했다. 일렉트릭과 전통음악의 결합은 분위기를 한층 더하며 백성을 위한 혁파의 길을 걸어간 세종을 나타냈다.
무대의 정수는 태종이 마지막 남겨진 자신의 평안을 찾는 5장 ‘평안의 길’이었다. 무장 가문으로 유명한 이성계 집안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도와 건국을 이뤄내고, 왕좌의 길에 오르기 위해 숱한 피를 뿌려야했던 남자. 마지막 장은 태종이 지난 삶을 반추하고 욕망과 피로 물든 지난 넋을 기리는 일종의 살풀이와 같았다.
핏빛의 붉은 조명과 함께 등장한 태종. 복면으로 얼굴을 감싼 무용수들 사이에서 왕은 고통스럽게 자신의 몸을 긁어내기도 사시나무 떨듯 진동하기도 끝내 쓰러지기도 한다. 피비린내 나는 붉은 빛의 군무는 그를 둘러싼 폭풍 같은 정쟁이며 그 사이로 곤룡포를 입은 태종은 살풀이를 춘다. 이내 살풀이 천을 허공에 뿌리고, 날리는 그의 모습은 혈육과 수많은 목숨에 대한 넋을 풀고, 과거를 회상하며 끝내 자신도 평온함과 평안함에 이르고 싶었음을 느끼게 만든다. 흰색 천으로 쓰러진 넋의 얼굴을 덮어나가고 무언의 울부짓음과 절규하는 ‘용의 눈물’은 한 인간이자 군주, 아비로서의 그의 인생을 떠올리게 했다.
최재헌 연출가는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풀어보고자 했다”며 “가야금, 거문고와 같은 소리를 풍기는 첼로를 사용하는 등 한국적인 것에 서양의 악기를 접목하고 재즈와 전통음악을 결합하는 등 특히 음악에서 여러가지 각도로 시도해봤다”고 밝혔다.
이어 “아들들만큼 평온하길 바랬을 아버지의 마음을 한국무용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며 “자신의 평안함을 위해 욕심도 내고, 후회도 하는 모습은 모두가 공감해봄직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작품은 올해 말 국립정동극장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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