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 초보자부터 애호가까지…미술을 즐기는 주말 [현장리뷰]

아트페어의 세계에 입문하고 싶으나 괜스레 높은 문턱에 망설였던 이라면 이번 주말 광교에 들려 ‘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화랑미술제 in 수원’이 지난 26일 지난해 이어 두 번째 막을 화려하게 열었다. ‘화랑미술제 in 수원’은 화랑미술제의 오랜 노하우와 광교 호수공원을 배경으로 하는 수원컨벤션센터의 인프라를 접목했다. 경기 남부권을 중심으로 미술시장 불균형을 해소하는 의미를 담은 이번 아트페어엔 국내를 대표하는 우수 회원화랑 104곳과 특별전을 포함해 6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지역과의 상생을 도모하며 수원 지역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선보이는 ‘수문장’과 어린이 프로그램, 도슨트 및 전문가를 동반한 토크 프로그램 및 호수공원을 중심으로 한 야외 공연 ‘레이크 바이크’ 등은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노력으로 가족 단위 관람객은 물론 젊은 커플, 친구들과 추억을 쌓기 좋다. 26일 열린 첫날 프리뷰에만 약 4천700여 명의 관람객이 현장을 찾았으며 축제는 29일까지 계속된다. ■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컨셉 ‘눈길’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기계가 구현할 수 없는 ‘어설픈 미학’을 찾아가는 것이 예술가의 몫 아닐까요.” 오묘한 눈빛에 어딘가 촌스러운 헤어 스타일의 피사체가 새빨간 슈트를 입고, 그 옆엔 로봇의 팔이 겹쳐 있다. ‘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에서는 젊은 감각이 반영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이 대거 출현해 관람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중 특히 젊은 컬렉터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갤러리박영’의 피 킴(P. Kim, 김태기 작가)이었다. 갤러리박영은 출판사 ‘박영사’의 화랑 겸 복합문화공간으로 파주출판단지의 첫 번째 갤러리이며 피 킴은 수원 출신의 작가로 이번 아트페어의 정체성을 더했다. 회화뿐만 아니라 피규어와 영상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하는 그는 지난해 ‘2024 어반브레이크’에서 일본레스링협회에서 직접 협찬받은 레슬링 링으로 전시를 펼쳐 주목받기도 했다. ‘정복자의 유쾌한 골짜기’ 시리즈를 선보이는 작가는 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함이 증가한다는 ‘불쾌한 골짜기’ 개념을 뒤집어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함이 만들어내는 유쾌한 미학의 순간을 포착했다. 1970~80년대 특수촬영물을 소재로 택한 그는 필름 너머의 영웅은 완벽한 초인이 아닌 그저 슈트를 입은 배우이며, 그들과 싸우는 괴수 역시 그 너머엔 인간이란 물리적 존재가 있음을 떠올렸다. 허술하고 미숙한 CG 효과는 현실과 허구 사이 불완전함에서 독특한 미학과 유쾌함, 낭만을 가져다준다고 작가는 말한다. 차량의 도색에 활용되는 페인트는 캔버스와 만나 독특한 질감을 자아냈다. 스포츠카의 상징인 페라리의 빨간색은 강렬하면서도 윤택감 있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마치 AI가 구현한 모델 같기도 하지만, 피사체는 작가가 아날로그로 창조한 얼굴이다. ■ 회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설치·조각 작품까지 각 부스마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아트페어의 묘미 가운데 하나이다. ‘토포하우스’ 갤러리는 회화에 어울리는 설치미술 작품을 곳곳에 배치하며 마치 누군가의 집에 방문한 듯 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테마별로 배치했다. 동물을 소재로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김재규 작가의 작품은 이번 현장에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은은함을 선사했다. 김 작가는 지난 4월 코엑스에서 열렸던 ‘2025 화랑미술제’에서도 독특한 색감으로 아기자기한 동물 작품을 선보이며 관람객의 애정을 받았다. 그는 중국, 터키 등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는 작가다. “자연에서 온 진흙에 시간이 더해지며 우연함을 포착하려 했습니다.” 김 작가의 작품이 주는 부드러움의 힘은 독특한 색감에서 형성된다. 말랑말랑한 진흙 상태의 천연 세라믹에 우리나라 전통 유약의 기법을 차용한 작업 방식에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동반자이자 벗으로 묵묵히 곁을 지켜온 동물은 무대의 중앙으로 올라왔다. 김 작가의 작품과 나란히 자리한 허준 작가의 작품도 지나칠 수 없다. 소치 허련의 5대손인 작가는 한국화 창시 집안의 품격이 드러나는 현대적 산수화를 그린다. 수석 모으기가 취미였던 할아버지 남농 허건 선생과의 추억과 푸근한 놀이터가 되어줬던 그에 대한 애정을 커다란 나무 속 새 두 마리로 표현한 작품 등을 만날 수 있다. ■ 블루칩이 주는 안정감… ‘미래의 블루칩’은 누구? ‘021갤러리’의 류재하는 블루칩의 명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비주얼 아트를 전공하고 미디어와 물리적 오브제의 결합으로 다양한 키네틱, 미디어 설치, 미디어 파사드, 영상 작업을 해오는 그는 최초란 수식어가 많다. 2010년 ‘G20 정상회담-미디어 첨성대’, ‘덕수궁-중화전 매핑’, ‘광화문-빛 너울’, ‘2018년 평창 올림픽’ 등 다양한 문화유산 미디어 파사드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현장에선 그의 신작 등을 만날 수 있다. ‘끝과 끝은 통한다’. 작가는 솥뚜껑, 화투 등 향토적인 소재를 첨단의 기술로 제단한다. 작품 ‘우아한 눈치’(2025)는 마치 인간의 눈꺼풀처럼 눈을 오므려 궁금증을 자아냈다가 깜빡이며 입을 벌린다. 작가는 타인의 심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대인의 삶을 화투 놀이에서 눈치로 비유한다. 삼등분한 솥뚜껑에서 나타나는 화투, 깜빡이는 눈의 작품들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써포먼트 갤러리’의 권혜조가 그린 도시와 자연의 풍경과 독특한 질감, 파스텔톤의 색감 역시 관람객에게 큰 인기였다. 권 작가는 일상 속 평범한 풍경과 순간을 감각적으로 풀어내는데 특히 그가 구현하는 트렌디한 색감과 특유의 컬러 팔레트는 상징처럼 자리하며 외국에서 특히 인기이다. 반복적인 붓질과 두꺼운 오일페인팅은 울퉁불퉁한 입체감으로 생동감을 더했다. 그의 작품엔 샴페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항상 축하하고 기념할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이번 미술제는 아트페어의 문턱을 낮추고 ‘아트페어 입문자’를 초대하는 의미가 있다. 미래의 블루칩을 찾는 재미가 쏠쏠한데, ‘노화랑’ 갤러리의 정하진 작품이 그러하다. 1999년생 신진작가인 정하진은 노화랑이 강력하게 주목할 만한 신진 작가로 자신 있게 내보인 인물이다. 꽃이 져야 열매가 나오는 상반된 계절감을 갖는 집 마당에 자리한 모과나무는 그의 작품 소재가 됐다. 차가운 도자기에 특유의 방식으로 따뜻한 색감을 담아낸 그의 설치 작품은 둘러봄 직하다. ■ 문화도시 수원 특별전 ‘수문장:당신의 풍경, 당신의 취향’ 3층의 전시는 1층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형성한다. 마치 살롱에 들어가듯 카페트 위로 떨어지는 따뜻한 조명과 분위기는 이번엔 아늑함을 자아낸다. 3층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가람화랑’의 구상희 작가의 작품이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피사체는 화면을 뚫고 바닥에 정착했다. 구상희 작가는 중앙보다는 프레임 옆을, 가운데보다는 구석이나 모서리에 천착한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는 세상에서 어쩌면 주변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폭포가 흘러내리는 순간의 영원함을 포착한 작가는 화면 밖에 영원한 정지 상태로 머무르게 만들며 시선을 잡아끈다. 이외 자개장의 신비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갤러리 아트숲’의 서은경, 모녀 작가의 동화 속 세계를 그린 팀 비비 등이 주목할 만하다. 3층에 자리한 문화도시 수원 특별전 ‘수문장:당신의 풍경, 당신의 취향’은 심사를 통해 선정된 수원의 청년예술가 20인 외에, 수원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해 온 예술단체 소속 예술가 21인의 작품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이는 지난해보다 두 배 늘어난 규모로 작품의 수준 또한 손색 없다. 마은영 작가의 ‘캉가의 화려한 외출’은 독특한 세계관과 아기자기한 작품 구성은 관람객에게 열띤 애정을 받았다. “어느 날 야생 닭이 밖으로 나가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들을 다 같이 한 차에 태워 행복을 찾아 떠나자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10년간 가족과 아프리카 케냐에서 생활하며 곳곳을 여행 다닌 마 작가는 알록달록한 닭에 현지인과 자기 자신, 가족의 모습을 투영했다. 천으로 재봉한 작품은 얼룩말 등 현지의 동물을 담아냈고, 그가 타고 다녔을 모형의 오토바이는 화면 안에 와이드한 그림으로 확대됐다. 노랑, 분홍, 파랑의 물결은 현지의 바람이 전해지는 듯하다. 현장에 자리한 이성훈 화랑협회장은 “서울이 아닌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공간이 수원이라고 생각한다”며 “이곳은 수원화성 등 고유의 문화유산과 수도권을 아우르는 강력한 인프라로 문화예술이 꽃피울 수 있는 강력한 위치”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회장은 “올해 특히 수준 높은 작품들로 중무장했으며 이와 각 갤러리에서 미래를 이끌어갈 신진 작가들을 엄선했으니 이러한 점을 즐겨보시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 관련기사 : “아트페어 입문자, 대환영”…더 크고 화려해진 ‘2025 화랑미술제 in 수원’ 미리보기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617580276

“폭넓은 레퍼토리, 교수들의 팀 플레이가 보여준 환상의 4일”…‘2025 평택 실내악 축제’ [공연리뷰]

우리는 대개 현대 예술에 관해 난해하고 심오하다는 편견을 갖는다. 미술관에 방문해 ‘점’ 하나 찍어 놓은 듯한 작품을 바라보며 “역시 현대미술은 난해해”하고 뒷걸음을 하기도 하고, 처음 들어보는 낯선 현대음악엔 오묘하고 기괴하다는 느낌까지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낯섦’이란 무조건 부정적이기만 감정은 아닐 테다. 예측할 수 없는 혹은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겠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예술은 일상에 신선한 긴장감을 주고 시야를 한 단계 넓게 만든다. 4일간 평택 남부문화예술회관에서 펼쳐진 ‘2025 평택 실내악 축제(PCMF)’는 클래식계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어쩌면 가장 고전적인 음악 장르로 꼽히는 클래식 악기가 트렌디한 현대의 작곡가들과 만나고, 18세기 베토벤부터 우리와 동시대 살아 숨 쉬는 21세기 작곡가들까지 다채롭게 아울렀다. 이를 내로라하는 정상급 연주자 4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지휘자 없이 음악의 대화로만 이뤄지는 실내악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 이번 연주회는 한 마디로 ‘축제’였다. 공연은 지난 13~14일, 20~21일 총 4일간 펼쳐졌다. ‘열정의 서곡’이란 주제로 막을 올린 첫째 날은 ‘열정’이란 단어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 우리에겐 피아노 견습생의 교과서로 유명한 체르니(1791-1857)의 ‘협주곡 론도, 작품 149번’은 고전이 왜 고전인지를 알려줬다. 체르니는 피아노 연습곡 작곡가로 익숙하지만, 사실 그는 베토벤의 제자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1천 곡에 육박하는 작품을 남긴 다작의 작곡가다. 오윤주(성신여대 음악대학 학장·코리아나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 단원)가 펼치는 피아노 연주는 건반의 연주가 시작되자 무대에서 한시도 눈을 못 떼게 했다. 마치 시냇물이 흘러가듯, 옥구슬이 쏟아지듯 유영하는 연주는 객석을 빠져들게 했다. 고전의 매력이, 클래식의 진가가 빛을 발하는 무대였다. 채재일(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이 선보인 클라리넷 연주는 ‘충격’이란 단어가 어울렸다. 이날 그는 피아노의 오윤주와 함께 바씨(1833-1871)의 ‘베르디 리골레토 주제에 의한 협주 환상곡’을 연주했는데 화려한 클라리넷 기술을 뽐낸 그의 애티튜드는 ‘피리 부는 사나이’와 같았다. 무대에 완전히 몰두하며 악기와 한 몸이 된 듯 온 열정을 다해 연주하는 채재일의 퍼포먼스는 과연 연주가가 지녀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그의 열정은 객석에 전해지며 관객은 한동안 브라보를 외쳤다. ‘풍요의 여정’이란 주제로 관객을 사로잡은 둘째 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국내 초연의 머스토넨의 곡이었다. ‘2025 평택 실내악 축제(PCMF)’ 예술감독을 맡은 김현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공연에 앞서 경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클래식 레퍼토리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축제에서 매력적인 인물들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번 4일간의 공연에선 로시니, 베토벤, 모차르트 등 고전 작곡가뿐만 아니라 머스토넨(1967~), 페르트(1935~), 셰드린(1932~) 등 현시대의 작곡가와 피아졸라 등 현대의 작곡가들까지 아울렀다. 이 가운데 핀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머스토넨은 김현미 교수가 국내 관객에게 소개하고 싶은 의지가 드러난 인물이다. 이날 국내 초연된 머스토넨의 ‘9중주 제2번’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로 구성된 작품으로 18세기 대위법과 현대의 리듬이 어우러지며 치밀한 구조에서 각 악기가 에너지를 발산하는 곡이다. 특히 머스토넨이 이날 객석을 찾은 관객에게 영상을 통해 전한 인사는 깜짝선물과 같은 즐거움을 전했다. 머스토넨은 영상에서 “베토벤의 현악 4중주는 거대한 숲속을 산책하는 것처럼 들을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했다”며 자신의 작품에선 “더블 베이스가 ‘한 끗’의 묘미를 더해 매혹적인 앙상블의 오케스트라를 완성해 줬다”고 설명했다. 4일간의 대축제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피날레 무대 구성 역시 유머가 묻어났다. 멘델스존의 현악 8중주는 무수한 클래식 공연에서 마지막 무대의 레퍼토리로 자리할 정도로 음악사에서 제일 유명한 8중주 작품이다. 김 교수는 마지막 작품으로 스벤센(1840-1911)의 ‘현악 8중주 가장조 작품 3’을 선보였다. 1840년생 노르웨이 오슬로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스벤센은 멘델스존이 설립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그의 절친인 페르디난드 다비드에게 바이올린을, 라이네케에게 작곡을 배웠다. 해당 곡은 멘델스존의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연주 직후 학생으로는 유례없이 유럽 최고의 출판사에서 계약을 제안받기도 했다. 바이올린의 김현미 교수를 필두로 김덕우(중앙대 예술대학 교수) 등과 김상진(연세대 음대 교수) 등의 비올라, 첼로 등은 북유럽 최고 지휘자로 활약하기 전 ‘떡잎부터 남달랐던’ 스벤센의 밝고 생동감 넘치는 감성을 뿜어냈다. 이어진 앙코르 무대에선 멘델스존의 작품이 연주돼 축제의 기승전결을 장식하며 객석의 환호와 함께 의미 있던 장정을 마무리했다. ● 관련기사 : 최정상 음대교수들 모여 ‘틀’을 깨다… 김현미 ‘2025 평택 실내악 축제’ 예술감독 [문화인]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608580188

“프로와 아마추어, 함께 지역 미술 기록”…수원미술협회 ‘2025 수원시 미술단체 아카이브展’ [전시리뷰]

프로와 아마추어가 한데 모여 지역 예술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현직에서 활동하는 프로 미술작가부터, 각자의 영역에서 분주히 생활하면서도 일상에서 창작 활동을 놓지 않는 아마추어까지. 나이도, 성별도, 사연도 각양각색이지만 미술을 사랑하는 만큼은 하나인 이들이 모여 지역 문화예술의 정체성을 더했다. 지난 15일 성황리에 막을 내린 수원미술협회 주관의 ‘2025 수원시 미술 단체 아카이브 展’은 수원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전문 미술 단체와 아마추어가 함께 어우러지는 교류전이었다. 수원미술협회는 지난 20여 년간 ‘수원시 미술 단체 연합전-따뜻한 동행 展’이란 이름으로 교류전을 이어왔는데, 올해 21회를 맞이한 전시는 ‘2025 수원시 미술 단체 아카이브 展’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지역 미술의 흐름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공공의 의미로 확대 발전했다. 전시에는 총 24개 단체, 3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관(官)의 주도가 아닌 예술인 스스로가 기획하고 실행한 자발적인 성과다. 현장에는 목공예부터 수채화, 서예, 민화, 서양화 등 다양한 장르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아리 회원들의 작품을 통한 교류가 이뤄졌다. “‘따뜻한 동행’이란 이름의 연합전으로 오랜 세월 이어진 이번 아카이브 전시는 수많은 수원의 미술 단체들에 꿈과 희망의 존재였습니다.” 권청자 화백의 지도를 받는 ‘소망가득’(혜정전통민화작가회) 회원들은 전시의 참여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2006년 결성된 이들은 민화를 통해 서민의 삶과 정서와 소망을 되새기고, 전통문화를 이어가고자 노력하는 데 이번 전시를 통해 공동체 정신과 소박한 철학을 선보였다. 2021년에 결성된 ‘모닝어스’는 14명의 회원이 매주 목요일 모여 일상과 예술을 나누는 공동체다. 주로 직장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코로나 시기에도 새벽 6시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출근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애정을 뿜어냈다. 그런가 하면 천원기 작가를 지도 강사로 하는 ‘광교2동 수채화클래스’ 회원들은 수채화를 통해 일상에서 예술의 감수성을 기르고 창작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1990년부터 활동을 이어온 단체 역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원문화원의 서양화 실기 강좌에 참여한 생활 미술인들로 구성된 ‘문미회’는 전문 작가를 배출하는 등 성과를 이루며 현재는 매주 목요일마다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순수미술 동아리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대준 수원미술협회장은 “미술인과 미술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이 협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며 “공식으로 집계된 적 없는 지역의 미술 단체를 톺아보고, 그림을 전시하고, 도록으로 남기는 의미뿐만 아니라 수원에 어떤 장르의 단체와 생활예술인들이 분포돼 있는지를 파악해 다양한 정책 마련 등에도 활용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고 밝혔다.

수원시립미술관 ‘수마 웰니스’… 단순 관람 넘어 ‘치유 공간’ [현장리뷰]

“캔버스를 흰색 물감으로 전부 덮겠습니다. 이번에는 나를 감싸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걷어낸다고 생각하고 손톱과 스크래퍼를 이용해 캔버스를 덮은 흰색 화면을 긁어내 봅시다.” 마치 흙 속에 감춰진 진주를 찾듯이 11명의 참가자들이 각자의 앞에 놓인 조그마한 캔버스 위를 열심히 긁어냈다. 감정을 억눌렀던 규범에서 벗어나 흰 화면에 감춰졌던, 각자의 소중한 감정의 색채가 하나둘 드러날수록 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지난 30일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마인딩: 마주하기’ 프로그램의 ‘손끝의 위로와 마주하기’ 회차는 한 마디로 ‘비워내고, 다시 채워내는’ 시간이었다. 시민 참가자들은 이날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감정적 규칙과 규범에서 벗어나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마인딩: 마주하기’는 수원시립미술관이 고령화, 우울, 단절 등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예술로 치유하는 사회적 처방 프로그램 ‘SUMA Wellness(웰니스)’ 가운데 일부이다. 수원시립미술관은 지난해 시민의 심리 정서적 돌봄을 위한 ‘SUMA 웰니스’를 시범 운영을 했는데, 올해엔 전문성 강화를 위해 홍익대 교육대학원(미술치료 전공)과 업무협약을 맺고, ‘마인딩: 마주하기’ 프로그램을 공동 기획했다. 미술관이 단순한 관람의 공간이 아닌 치유적 공간으로, 시민들의 삶에 예술이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값비싼 미술 치료프로그램은 미술관이란 특별한 공간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된다. 지난달 9일부터 본격 시작된 ‘마인딩’ 프로그램의 5회차에 접어든 이날은 박다은 홍익대 교육대학원 미술치료 강사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박 강사는 “현대인은 자기 감정을 마주하는 시간이 부족한데, 진정한 마음 챙김의 시작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분은 승차권을 내고 개찰구를 들어갈 수도, 개찰구를 뛰어넘어 무임승차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제일 먼저 수원역 지하철을 모방한 전시장 입구 앞에서 사회적 규칙을 벗어나는 과정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손에 든 표와 옆에 자리한 다른 이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당황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미술작품 감상 규칙 깨기의 시간이었다. 고개를 거꾸로 돌려보기도, 앉아서 쳐다보기도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즐겨본 이들은 2층에서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나에게 중요한 감정, 소중한 것, 물질적 가치가 아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떠올려보고 엽서에 적어보겠습니다.” 가족, 건강, 사랑, 행복, 안정, 평온함 등 참가자들은 연필을 쥐어 들고 엽서에 단어들을 적어 내려갔다. 이번엔 소중한 감정에 어울리는 색의 물감을 하나씩 꺼내 들고, ‘붓’이 아닌 손가락을 이용해 캔버스를 채워갔다. 미끄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물감을 손끝의 감각을 이용해 거칠 화면에 그려나가는 체험은 일탈이었다. 이날 현장엔 20대 취업 준비생부터 간호사 직장인 친구, 10년 차 부부, 아픈 어머니를 위한 시간을 마련한 모녀 등 다양한 시민들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각자의 걱정과 불안 등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간호대학 동기와 함께 자리한 김연주씨(가명·20대)는 “직장에서 일하며 ‘감정’은 불필요한 ‘소비’라 느껴져 일부러 꾹꾹 닫아뒀는데, 오늘 억눌린 감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장전문의 간호사인 김씨는 이날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커다란 심장을 그렸다. 아내와 함께 현장에 자리한 이기엽씨(38)는 “평소 미술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는데, 프로그램을 따라가다 보니 예술이 가깝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아내 강초롱씨(35)는 “처음 그림을 그릴 때는 ‘잘못 그렸나’라고 생각했는데 완성된 그림을 보니 너무 만족스럽다”며 “후회하는 습관 대신 나 자신에게 만족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련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남기민 수원시립미술관 관장은 “앞으로도 ‘예술을 통한 돌봄’이라는 주제로 미술관의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을 담은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색채의 향연, ‘세헤라자데’로 춤추다...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공연리뷰]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 개관 1주년을 기념해 1989년 첫선을 보인 ‘교향악축제’가 올해로 37회를 맞았다. 지난달 1일부터 20일까지 전국 18개 교향악단이 참가한 이번 축제의 10번째 무대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11일 장식했다. 이 밖에도 2일 인천시향, 4일 수원시향, 20일 경기필 등 경기·인천 교향악단이 무대에 섰다. 전국 교향악단의 18개 음색이 한 무대에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는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를 목표로 전국의 교향악단이 한 무대에 오르는 유일무이한 축제로 자리매김해 왔다. 올해 교향악축제엔 특히 젊은 지휘자들과 역대 최다 해외 협연자가 출연해 클래식 팬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4월 11일 금요일 무대에 오른 부천필은 앞서 1일 제4대 상임지휘자 프랑스 출신의 아드리앙 페뤼숑을 위촉했다. 2014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로 정식 데뷔한 페뤼숑은 2021년 라무뢰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약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까지 서울시향의 수석 팀파니스트로 클래식 팬들에게 각인된 음악가다. 페뤼숑은 10일 부천아트센터에서 같은 레퍼토리를 미리 선보였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여자 주인공 ‘세헤라자데’를 주제로 한 두 작품 라벨의 ‘세헤라자데: 요정 서곡 M.17’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Op.35’를 처음과 끝에 연주하고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g단조, Op.26’을 박지윤의 협연으로 올렸다. 색채의 향연, ‘세헤라자데’로 춤추다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세헤라자데: 요정 서곡’은 1898년 초연 당시 “러시아 악파를 서투르게 흉내 낸 거친 데뷔작”이라는 비평을 들었다. 여기서 비교된 ‘러시아 악파’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1888년)로 부천필은 두 작곡가가 다른 색채로 풀어낸 ‘세헤라자데’를 한 무대에서 연주했다. 1988년 창단한 부천필의 연주력은 그간 소화해 온 레퍼토리만으로도 증명이 된다. 쇤베르크, 바르토크 등 20세기 작품을 국내 초연했으며 브람스,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가졌다. 무엇보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말러 시리즈는 우리나라에 말러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국내 클래식계의 한 획을 그었고 국내 최정상 오케스트라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날 교향악축제에서 페뤼숑이 이끄는 부천필은 앞으로 보여줄 시너지의 기대감을 갖게 했다. 페뤼숑이 이끄는 부천필의 음색은 ‘파도’ 그 자체였다. 오보에로 시작된 선율의 흐름을 현악기가 받고 화려한 금관이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현악기의 음색은 때로는 소극적으로, 때로는 큰 무리를 지어 요동쳤다. 페뤼숑의 손짓에 따라 음색이 출렁였고 ‘공기 반 소리 반’의 미덕이 오케스트라에서도 구현될 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모티브를 둔 ‘세헤라자데’가 ‘바다’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모르더라도 부천필의 입체감 있는 연주가 망망대해의 바다를 떠올리게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에서는 높고 거친 파도의 움직임이 더욱 극적으로 다가왔다. ‘바다와 신밧드의 배’, ‘칼린더 왕자의 이야기’, ‘젊은 왕자와 젊은 공주’, ‘바그다드의 축제-바다-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배’ 등 악장마다 붙은 표제가 상상의 틀을 잡아줬다면 부천필의 연주는 관객을 바다에 떠 있는 배 위로 이끌었다. 특히 전곡에 걸쳐 등장하는 세헤라자데 모티브와 바이올린 솔로는 때마다 다른 호흡과 감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했다. 한편 협연자로 나선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은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악장으로 활동하며 실내악 연주에도 조예가 깊은 연주자다. 연주 전부터 브루흐 협주곡 중 ‘가장 풍부하고 유혹적’이라는 평을 듣는 작품 1번을 섬세하고 부드러운 박지윤의 바이올린이 어떻게 발현해낼지 귀추가 주목됐다. 박지윤의 바이올린은 브루흐 협주곡이 요구하는 물리적인 ‘세게’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의 부드럽고 풍성한 음색을 무기로 우아함의 절정을 보였다. 앙코르로 연주한 라벨의 ‘하바네라 풍의 소품’도 신비로운 하프 반주와 어우러져 박지윤의 바이올린을 더욱 매혹적으로 느끼게 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노부스콰르텟이 완성하는 현악사중주 [공연리뷰]

2007년 결성해 어느덧 19년 차를 맞은 노부스콰르텟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대표 현악사중주 팀이다. 멘델스존, 베토벤, 쇼스타코비치 등 전곡 완주에 능한 이 팀은 3월 1일 부천아트센터 외 세 곳에서 두 번째 브람스 전곡을 완주했다. 지성인의 대화, 우아한 토론 괴테는 현악사중주에 대해 “4명의 지성인이 나누는 대화”라고 표현했다. 반원 형태로 무대에 앉아 각자의 프레이즈를 연주하고, 서로의 소리를 듣고, 동시에 소리 높이는 모습을 떠올려 보니 꽤나 우아한 토론의 모습 같기도 하다. 독주나 피아노와의 듀오에 익숙한 현악 연주자들도 실내악, 그중 현악사중주는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연주 영역이자 잘하고 싶은 편성으로 꼽을 정도로 현악사중주 활동에 적극적인 편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현악사중주단은 긴 시간 팀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고 있으며 현악사중주를 위한 레퍼토리도 고전부터 현대까지 풍부하다. 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는 모두 바이올린족에 속하는 현악기로 어찌 보면 음역 외엔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간혹 일반 청중은 현악사중주를 다소 진입장벽이 높은 편성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현악사중주 연주자들은 비슷한 음색의 악기 4대가 서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할 때보다 일치를 이루는 것이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비로소 네 대의 악기가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냈을 때 ‘완벽한 앙상블’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07년 결성해 올해로 19년 차를 맞은 노부스콰르텟의 등장은 ‘실내악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그야말로 반갑고 귀한 소식이었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으로 뭉친 이들은 결성 원년 멤버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40)과 김영욱(36), 2018년 합류한 비올리스트 김규현(36), 2020년 합류한 첼리스트 이원해(34)로 구성돼 있다. 2008년 오사카 콩쿠르 3위를 시작으로 2012년 뮌헨 ARD 콩쿠르에서 2위 수상, 2014년 제11회 모차르트 국제 콩쿠르 우승을 통해 실내악을 향한 본인들의 ‘진심’을 검증받았다. 연주자·관객 얼마나 빨리 몰입하느냐가 관건 국내외 실내악 팬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각인한 이후 노부스콰르텟은 2020년 멘델스존 현악사중주 전곡(6곡) 연주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현악사중주 전곡 연주에 돌입한다. 2021년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전곡(15곡)을 나흘에 걸쳐 완성했으며 그해 8월 브람스 현악사중주 전곡(3곡)을 연주했다. 런던 위그모어홀 상주음악가로 선정된 2022~2023 시즌엔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16곡)에 도전했고 올해 프랑스 클래식 레이블 아파르테를 통해 여섯 번째 음반 ‘브람스’를 발매하며 다시 한번 브람스 전곡 연주에 나섰다. 브람스의 현악사중주 작품은 세 곡뿐이지만 이 곡들을 완성하기 전 스무 곡에 달하는 현악사중주 곡을 폐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브람스 스스로 현악사중주 작품에 대한 기준이 높았고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완성된 1번의 1악장은 시작부터 많은 음과 세밀한 멜로디를 뿜어냈다. 평소 음향 좋기로 손꼽히는 부천아트센터이지만 브람스 현악사중주 1번의 쏟아지는 멜로디를 소화하기에 다소 과한 울림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어떤 무대건 첫 곡, 첫 악장에서는 연주자들도 몰입이 덜 된 상태이기 마련인데 그렇게 영점이 잡히지 않은 연주에는 아무리 좋은 공명이라도 약간의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또 한번 깨달았다. 노부스콰르텟은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고정하지 않고 작품에 따라 변화를 주고 있다. 이날 브람스 전곡 연주에서도 첫 곡 ‘1번, Op.51-1’은 김영욱이 제1바이올린으로, 김재영이 제2바이올린으로 나섰고 ‘2번, Op.51-2’와 ‘3번, Op 67’은 바꿔 연주했다. 앙상블이 연주에 몰입하고, 청중이 작품에 빠져드는 데 제1바이올린의 역할은 크다. 김영욱의 제1바이올린은 스스로 조금 두드러지더라도 확실하고 빠른 방법으로 팀을 깨워 앞장서 끌고 나가는 모양새였다면 김재영은 맨 뒤에 서서 상황을 살피면서 나머지 세 악기의 틈을 메우고 아우르며 지지하는 방식이었다. 완전히 다른 두 스타일의 제1바이올린이어서 이것 또한 노부스콰르텟 연주의 장점이자 특징이었다. 2027년은 베토벤 서거 200주기이자 노부스콰르텟 창단 20주년이 되는 해로 노부스콰르텟은 베토벤 전곡을 다시 연주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20대부터 시작된 이들의 대화가 세월의 변화에 따라 어떤 깊이와 이야기를 더할지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오케스트라와 지역 예술인들의 하모니…2025 수원 음악인의 밤 [공연리뷰]

관객은 지역의 수준 높은 음악가를 알게 되고, 교향악단은 평소와는 색다른 구성의 작품을 연주해 보며, 음악인들은 지역의 전문 교향악단과 합을 맞추며 큰 무대에 서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뜻깊은 밤이었다. 지난 13일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서 열린 수원시립교향악단 기획연주회 ‘수원 음악인의 밤’은 축제의 장이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수원 음악인의 밤’은 (사)수원시음악협회의 추천을 받아 선정된 지역 음악인들이 매년 수원시향의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선보이는 지역 문화예술 교류의 장이다. 이날 축제의 시작을 알린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서곡’에서는 호스트 격인 수원시향 오케스트라의 매력이 한껏 드러났다. 이 곡은 스코틀랜드 핑갈 동굴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 커다란 암굴 부근의 경치 등 자연이 지닌 분위기와 전설적인 사건이 소재가 돼 장엄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특징이다. 지휘를 맡은 신은혜 수원시향 부지휘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현악기의 한가운데로 흐르는 오보에의 선율은 동굴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떠올리게 했다. 이어진 모차르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마주 본 두 대의 피아노 사이로 각각 붉은 색과 검정 드레스로 상반된 아우라를 풍기는 수원음협의 두 피아니스트 황수연, 김은아가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마치 핑퐁처럼 음을 주고받으며 한 대가 경쾌한 마디로 문을 두드리면, 다시 상대가 묵직한 음으로 대답했고 여기에 오케스트라가 풍미를 더했다. 모차르트가 그의 누이 ‘난네르’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작곡된 작품은 특히 제3악장 ‘론도’에서 가장 다채로운 구성을 보여줬다. 수원시향의 현악기가 론도 주제를 시작하고, 이어 피아노가 빠르게 악상을 이끌어 가며 흥겨움을 더했다. 이날의 묘미는 색소포니스트 임승훈이 함께한 이베르의 ‘색소폰을 위한 작은 협주곡’이다. 색소폰은 풀 사운드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며 곡 자체도 흔치 않기에 이날 연주는 관객으로선 자주 접하기 어려운 무대였다. 해당 곡은 1900년대 초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고 자리매김한 이베르가 알토 색소폰과 플루트, 바순, 오보에, 호른 등 현악기를 위해 만든 협주곡으로 색소폰 연주자 지그문트 라셔에게 헌정된 곡이기도 하다. 서정적인 곡의 분위기를 뚫고 나오는 색소폰의 중후하면서도 세련된 음색은 객석으로 피어올랐고, 그의 솔로 연주에 화답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풍성함을 더했다. 흔치 않은 조합에서 매력적인 무대로 마무리된 연주에 객석에서는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이날 객석에서 가장 큰 기대와 관심을 받은 건 첼리스트 권새롬과의 협연 무대였다. 대미를 장식한 곡은 첼로의 모든 음역을 사용하며 연주자에게 숙달된 테크닉을 요구하는 고난도 작품으로 유명한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 1번’이었다. 세 개의 악장이 중단되지 않고 연주되는 기법은 생상스 특유의 창의성을 엿보게 한다. 이날 객석에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과연 이 고난도의 작품을 권새롬과 수원시향이 어떻게 선보일지 기대감이 한껏 더해졌다. 이날 권새롬은 숨 쉴 틈 없는 연주를 마치 첼로와 한 몸이 돼 선보이며 객석을 감탄의 시선으로 숨죽이게 했다. 그는 첼로 위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화려한 기교를 소화해 냈다. 권새롬의 솔로에 이어서 특히 그를 둘러싼 바이올린의 향연은 압권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의 주제가 다시 나타나고, 화려한 주제들이 첼로와 오케스트라로 번갈아 주고받는 마무리는 피날레다웠다. 수준급 연주를 펼친 지역 음악인과 시립교향악단의 어우러짐에 관객들의 박수갈채는 오랫동안 공연장을 메웠다. ● 관련기사 : “지역 음악인과 함께”… 수원시향, 13일 ‘수원 음악인의 밤’ 개최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303580147

“고통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노래 [공연리뷰]

성남시립합창단의 정기연주회가 2월 7일 금요일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김성진의 지휘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Op.45’를 연주했으며 소프라노 홍주영, 바리톤 양준모, 성남시립교향악단, 수원시립합창단이 함께했다. ‘고통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령미사곡’으로 해석되는 레퀴엠(Requiem)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에 따라 라틴어 가사가 붙고 입당송(Introitus), 자비송(Kyrie), 거룩하시도다(Santus), 부속가(Sequentia),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 등의 순으로 악장이 나뉘어 연주된다. 2월 7일 성남시립합창단이 노래한 브람스의 ‘Ein Deutsches Requiem(독일 레퀴엠)’은 자신의 평생 스승인 슈만과 어머니를 비슷한 시기에 잃고 슬픔에 잠겨 쓴 작품으로 1859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완성한 역작이다. 미사 전례에 따른 레퀴엠이 아닌 브람스 자신이 발췌한 성경 구절을 조합했으며 종교는 없었지만 신교에 영향을 받은 브람스였기에 라틴어가 아닌 자신의 모국어 독일어 가사를 붙였다. 보통의 레퀴엠이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donna eis, Domie)’, 즉 세상을 떠난 이의 넋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는 반면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로 시작해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기도 한다. 총 7장으로 구성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중 ‘제1곡: 합창’은 ‘찬가(Hymn)’ 그 자체였다. 가사 내용을 모르는 사람도 ‘다 괜찮다, 지나간다’는 위로를 느낄 만한 정제된 합창의 진수였다. 오케스트라의 낮은 음역을 담당하는 현악 파트의 더블베이스, 첼로, 비올라와 금관악기의 튜바 및 트롬본, 목관악기의 바순 등이 최소한의 선율을 연주했고 인간의 목소리로 ‘고통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Selig sind, die da Leid tragen)의 메시지를 전했다. 영혼을 위로하는 목소리 이날 솔리스트로 무대에 선 소프라노 홍주영과 바리톤 양준모는 각각 제5곡과 3, 6곡을 노래했다. 바리톤 양준모는 독일 레퀴엠 무대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협연자 중 한 명으로 제3장 “주님, 제 끝을 알려 주소서. 제가 살 날이 얼마인지 알려 주소서”의 절절함을 영락없이 소화해냈다. 단, 독일 레퀴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3장에서 솔리스트와 합창이 만나 시너지가 폭발할 것을 예상했으나 서로 주춤거리는 인상이 아쉬웠다. 반면 6곡에서 등장한 바리톤 솔로와 합창은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음’을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음’을 교대로 주고받으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위로받고 싶은 마음 뒤에 우리 모두에게 올 죽음에 대한 의연함을 균형감 있게 노래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화려한 솔리스트가 무대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날 84명의 합창단이 뿜어내는 음색의 일체감과 화려함, 섬세함과 웅장함은 그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아름다웠다. 브람스가 직접 편곡한 ‘피아노 듀엣과 합창을 위한’ 독일 레퀴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덮고 고생 끝에 안식을 누리고 있을 영혼을 위로하는 것은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객석 울린 앙코르 ‘엄마야 누나야’까지…오페라 황금기 재현한 ‘이 무지치 베네치아니’ [공연리뷰]

18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음악가들이 선보인 무대는 21세기 한국의 관객들에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깊은 울림과 따뜻한 감동을 전했다. 지난 18일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서 수원문화재단의 2025 신년 음악회 ‘이 무지치 베네치아니’ 내한 공연은 90분 동안 로시니,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 거장의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된 18세기 오페라의 황금기를 재현하는 갈라 콘서트를 펼쳤다. 화려한 궁정 의상과 원숙한 앙상블, 재치 있는 표정 연기는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앙코르 무대에서 보여준 진심 어린 무대 매너는 관객에게 전달되며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했다. 300년 전 베네치아의 화려한 연회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감동으로 변했고, 이들이 선보인 연주는 바로크 음악을 보다 친숙하고 가깝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막이 오르기 직전, 관객들의 얼굴은 호기심의 들뜬 표정으로 한껏 상기돼 있었다. 평일 저녁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900석가량 꽉 찬 객석에는 베네치아 귀족 연회장을 어떻게 재현했을지에 대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이윽고 등장한 오케스트라의 눈을 사로잡는 복장에 객석은 등장만으로도 즐거움에 박수를 보냈다. 이날 관객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이는 뛰어난 표정 연기와 능숙한 무대 매너를 보여준 소프라노 산드라 포스키아토였다. 특히 로시니의 희극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 제1막에서 여주인공 로지나가 알마비바 백작이자 가난한 청년 린도로가 보낸 편지를 읽고, 그에 대한 사랑의 의지를 드러내며 부르는 아리아 ‘방금 들린 그대 음성’(Una voce poco fa)은 천장을 찌를 듯한 화려한 성악 기교가 돋보였다. “시간 좀 내주오~ 갈 데가 있소!” 바로 이어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 제3막에서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이 부르는 곡 ‘여자의 마음’(La donna è mobile)은 소프라노와 테너 두 남녀가 보여준 코믹한 연기가 객석을 웃음 짓게 했다. 경쾌한 왈츠풍의 리듬과 우리에겐 ‘갈대’라는 단어를 재치 있게 활용한 광고 음악으로 친숙한 작품은 현장에 밝은 분위기를 더했다. 본 공연에서 가장 열띤 호응을 이끌었던 넘버 중 하나는 오페라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 푸치니의 ‘투란도트’(Turandot) 가운데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였다. “사라져라, 밤이여. 지거라, 별들이여. 해가 뜨면 승리하리라!”를 외치는 곡은 제3막에서 칼라프 왕자가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모두 맞히고 승리에 대한 확신과 사랑의 결연함이 담긴 아리아로 ‘승리하리라’를 외치는 테너의 깊은 울림과 묵직한 감동이 매력이다. 절정으로 향하는 테너의 독창은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고, 끝내 외치는 승리는 객석에서 ‘브라보’를 외치게 했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19곡의 알찬 무대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4곡의 앙코르 무대였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멀리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18세기 화려한 궁정 의상과 가발을 착용한 베네치아의 음악가가 뱉은 첫 마디에 객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한국어가 들려오자 깜짝 놀랐던 얼굴들은 이내 감동의 표정으로 변했다. ‘엄마야 누나야’에 이어 ‘그리운 금강산’이 시작되자 머리가 희끗한 한 중장년의 관객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2018년 이후 7년 만에 한국을 찾은 ‘이 무지치 베네치아니’는 이달 충남, 부산, 경남 등 국내 4개 도시에서 내한 공연을 펼치며 한국 관객을 위해 가곡의 무대를 선보였다. 특히 4개 도시의 투어 일정의 마무리가 된 수원에서 이들은 ‘그리운 금강산’을 앙코르 무대에 추가로 선보이며 이곳의 관객에게 특별한 선물을 전했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한국 관객들을 위해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가슴에 손을 하나 얹은 채 부르는 소프라노의 모습은 특별한 말 없이도 관객에게 전달돼 깊은 여운을 남겼다. 객석은 두 팔 벌려 환호와 오랫동안 박수갈채를 보내며 화답했고 이 무지치 베네치아니의 마무리 인사는 한동안 계속됐다. ● 관련기사 : “세계적인 바로크 앙상블... ‘이 무지치 베네치아니’ 아니?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50120580136

거품에서 피어난 초월과 꿈의 해방…김기태 초대전 ‘그늘의 춤-유영의 시간’ [전시리뷰]

밤의 세계와 낮의 시간은 매 하루 똑같이 양분돼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무의식이 지배하는 밤의 세계, 그 속에서 펼쳐지는 꿈속 세상은 무한정으로 펼쳐나간다. 지난달 13일부터 팔달문화센터 지하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사)수원예총 팔달문화센터의 김기태 초대전 ‘그늘의 춤-유영의 시간’은 디지털 페인팅, 회화, 설치, 시 등 여러 형태의 작품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시도를 선보인다. 어딘가 정착하지 못한 ‘불안’은 창작의 밑거름이 됐다. 작가는 ‘과거의 시간’, ‘꿈의 기억’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때로 나쁜 기억에 매몰되기도 했던 그는 놓쳐버린 기억을 포섭하려 했다. 악몽을 기록하는 과정은 현실을 살며 얽힌 불안의 실을 풀어나갔고,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직조하는 과정이 됐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유영’, ‘앙금’, ‘꿈’ 등의 단어들로 인지한 기억에 ‘해파리’, ‘거품’, ‘연꽃’ 등 구체적인 형상을 결합했다. 벨벳이라는 소재는 원경과 근경의 양위성을 제공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천장까지 닿은 거대한 벨벳 소재의 ‘유영 은하수 3’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붙잡는다. 어두운 밤하늘 같은 벨벳 천에 강한 힘을 내뿜는 그림은 어린 시절 접했던 동화 속 도깨비 혹은 꿈에서 봤을 귀신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신비하면서도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은 물속에 비친 자신에게 홀려 빠지고만 나르키소스의 수선화와 같이 보는 이를 빨려들게 만든다. 밤의 시간에 주목했다는 작가는 꿈을 기억할 때 시간이 선형이 아닌 형태로 기묘하게 섞이는 방식을 활용했다고 말한다. 어둠은 모든 걸 흡수하는 색이지만 벨벳은 빛은 반사하는 소재다. 작가는 “그림자 사이에도 차이가 존재하듯, 기묘한 초현실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줄기를 타고 올라간다/ 한 때는 업혀 있었던 푸른 등을 동경했다/ 이제는 굽은 너의 등을 품는다” (김기태作 ‘유영 7’ 작업노트 중) 전시장에서는 그가 창작 과정에서 함께 구상한 시와 디지털, 회화 매체 작품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시와 디지털 페인팅으로 표현된 ‘유영 7’은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인어공주와 같기도 파도 속에 생명력을 내뿜는 동물 같기도, 거대한 식물이 내뿜는 포효 같기도 하다. 작가는 ‘유영’의 이야기를 해파리와 거품 등으로 표현했다. 최소한의 본능만을 품은 채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해파리의 유연함은 누군가를 위해 비워줄 수 있는 공간이자, 함께 효과를 낼 수 있는 공간이자, 여러 삶의 형태를 품을 수 있는 ‘하나의 우주’라고 말한다. 또한 생명력이 넘치는 불순물에서 만들어내는 빈 공간인 거품과 방울은 포화한 상태에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담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틔운다. 불안과 상처, 기억의 파편에 주목했지만, 작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화합을 발견했다. 끝없이 순환하는 원을 떠올리게 하는 ‘유영 4’가 그러하다. 한 번에 활짝 피고 다시 꽃잎이 지는 꽃봉오리의 모습은 생명력을 내뿜는다. 작가는 “과거를 ‘두렵고 새로운 무엇’으로 비유하는 우리의 마음을 비유했다”며 “쉽게 결딴날 수 없는 영역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전시를 통해 각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달 3일까지.

민낯 같은 무대의 빛나는 감동…'더하우스콘서트' [공연리뷰]

더하우스콘서트는 매주 월요일 오후 8시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진행되고 있다. 2002년 박창수 예술감독의 연희동 자택에서 시작된 이 공연이 시작될 무렵 ‘하우스콘서트’는 붐을 일으키며 관객을 매료하기도 했지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는 공연은 더하우스콘서트뿐이다. 손 뻗으면 닿을 무대, 몸으로 느끼는 진동 더하우스콘서트는 2002년 7월 12일 연희동의 가정집에서 시작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박창수 예술감독은 “음악회를 만드는 일은 곡을 쓰는 것과 같다”는 생각으로 자택에서 첫 하우스콘서트를 올렸다. 각각의 공연에서, 그리고 그 공연들이 모여 전체의 구조를 이뤄 가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여겼다. 박 감독은 하우스콘서트에 대한 첫 영감을 “서울예고 재학 시절 친구들과 서로의 집을 오가며 연습하던 기억”이라고 말한다. 음향 시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집이지만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몸으로 진동을 느끼며 직접 듣는 음악의 감동은 그 어떤 연주회장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작품을 만드는 심정으로, 감동을 나누겠다는 의지로 시작한 더하우스콘서트의 가장 큰 특징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강당 같은 공간에 피아노 혹은 보면대가 놓여 있으면 그곳이 무대인 것이고 관객은 마룻바닥 위 드문드문 놓여 있는 방석에 앉으면 된다. 관객은 편의에 따라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다리를 폈다 굽혔다 하며 ‘방구석 음악회’를 감상하고 연주자들은 관객의 숨소리와 눈빛을 동력 삼아 민낯 같은 무대를 헤쳐 나간다. 대가와 신인, 관객 모두에게 공평한 이곳 1천78회, 20여년의 시간 동안 거의 매주 쉬지 않고 열리고 있는 하우스콘서트의 2025년은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과 피아니스트 박영성의 듀오 연주로 시작했다. 연희동 자택을 시작으로 광장동, 역삼동, 도곡동 등 녹음실과 스튜디오를 거쳐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 정착한 지 10년째인 더하우스콘서트는 매회 50~100명의 관객이 찾는다. 이날은 새해 첫 하우스콘서트라는 기대감과 설렘 때문인지 예술가의집 마루가 꽉 찼다. 공연이 끝난 후 진행된 미니 토크에서 더하우스콘서트 강선애 대표는 유튜브를 통한 생중계 동시 접속자 수도 100명을 훌쩍 넘었다며 고무적인 새해 출발을 알렸다.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은 2015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20세의 나이로 한국인 최초 심사위원 만장일치 우승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현재 연세대 음대 관현악과 조교수로 재직 중인 임지영은 최근 올바른 세대교체의 정석과도 같은 국내 바이올린계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행보와 연주력을 갖추고 있는 연주자다. 임지영은 아주 정성껏 연주하되 지루하지 않았고 정석적이면서도 대중이 좋아할 요소를 갖춘 소리와 매력을 갖춘 연주자였다. 특히 그녀의 연주 중 발동작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개 서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다리를 고정한 채 상체의 움직임만으로 음악을 따라가기 마련인데 음악에 따라 춤을 추듯 따라가는 스탭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연주나 감상을 전혀 해치지 않으면서도 연주자가 온전히 음악에 몰두했다는 느낌을 줬고 저음에서 고음, 지판에서 손가락이 움직이는 만큼 보폭도 너무 정확히 맞아떨어져 감상에 오히려 도움을 준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이날 함께한 피아니스트 박영성은 “함께 연주하지 않은 곡을 찾는 것이 빠르다”고 말할 정도로 자주 호흡을 맞추는 파트너로 연주 초반부 두 연주자 모두 ‘영점’을 맞추는 시간이 조금 필요해 보였지만 곧바로 완전한 앙상블을 보였다. 임지영은 연주 후 토크 시간에 “관객으로서 하우스콘서트를 즐기러 올 때마다 분위기가 매우 좋았는데 실내악이 아닌 듀오로 오게 돼 설레었다”며 “(하우스콘서트가) 최근 연주 중 가장 기대되는 무대여서 심혈을 기울였는데 쉬는 시간 없이 세 곡을 연달아 하려니 너무 힘들었다”며 웃었다. 그 말처럼 슈베르트 ‘론도 D.895, Op.70’, 그리그 ‘소나타 2번, Op.1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소나타 Op.18’까지 한 곡 한 곡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레퍼토리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소리꾼 장사익이 마다하지 않는 무대,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이 각각 15세, 17세일 때 그들을 먼저 알아보고 연주의 기회를 준 곳이 바로 더하우스콘서트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더 많이 주목받고 있는 최근이지만 하우스콘서트는 그저 언제나 이 무대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더하우스콘서트는 2월에도 매주 월요일 오후 8시 예술가의집을 지킨다.

태종과 세 아들은 어떻게 ‘안녕’을 빌었나…한국 창작무용 ‘녕, 왕자의 길’ [공연리뷰]

무엇이든 뜻한 바대로 행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모든 소유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다면 ‘행복’마저도 이룰 수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지존(至尊)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안녕’과 ‘평안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숱한 삶을 목격해 왔다. 지난달 25~26일 아르코예술 대극장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17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중 하나인 (주)아트로버컴퍼니의 창작무용 공연 ‘녕(寧), 왕자의 길’은 조선의 3대 왕 태종과 그의 세 아들의 운명과 삶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 수단인 ‘몸짓’을 통해 “평안한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지존이면서 동시에 아비로서 고뇌했던 한 남자와 권력이라는 소용돌이 앞에 운명이 뒤바뀐 세 아들의 이야기는 전통의 한국무용과 세련된 음악의 결합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태종 이방원. 형제는 물론 처가에도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왕좌를 지켜낸 인물이자 저물어가는 고려 왕조를 정리하고, 조선이라는 새 시대를 연 개국 공신. ‘피’의 길을 걸어간 태종은 그래서일까 그의 세 아들 양녕, 효령, 충녕에게 ‘평안하다’는 뜻의 녕(寧)을 대군의 이름으로 내렸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총 5장의 옴니버스 형식의 구성돼 인트로 격인 1장 ‘왕좌의 길’에서부터 세 왕자의 인생이 담긴 각 장을 거쳐 욕망과 피로 물든 지난 날을 반추하는 태종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왕좌-무위-구도-태평-평안의 길로 표현된 이들의 춤사위는 네 인물이 다다르고자 했던 ‘평안함’을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에게 욕망 혹은 꿈이란 무엇인지 되묻는다. ‘녕(寧), 왕자의 길’은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의 결합이다. 장구와 꽹과리를 등 전통악기와 첼로 등 서양악기의 결합, 살풀이와 같은 우리 고유의 ‘한’의 정서에 재즈와 전자음악의 결합으로 세련됨을 더했다. 첫째 양녕이 걸어간 2장 ‘무위의 길’은 리드미컬한 음악, 자아도취의 표정 연기와 자유분방하고 강한 몸짓, 형형색색의 의상들로 표현됐다. 족쇄 같던 세자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풀어헤친 도포 자락과 춤사위에서 그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진 3장 ‘구도의 길’에서 둘째 효령대군은 한스러운 음악과 함께 등장한다. 역동적인 그의 형과는 정반대의 정적인 무대였다. 앞서 파랑, 노랑, 초록 등의 색색의 의상이 시선을 사로잡았던 2장과 상반되는 분위기로 3장에서는 통일된 색상의 바지, 어두운 모자를 쓴 무용수들이 무채색의 단체 군무를 선보인다. 아버지에 의해 운명이 뒤바뀐 형과 자신 대신 왕좌에 오른 아우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놓인 효령. 그의 혼란스러움과 고뇌, 권력에 대한 환멸과 허무는 곡선의 몸짓으로 표현됐다. 승무에서 장삼의 긴 소매를 허공에 흩뿌리고, 무용수들이 펼쳐낸 소맷단의 길을 걸어나가 모자를 벗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세속을 떠나 진리를 탐구하며 불도의 길을 걸어간 그가 추구하는 ‘녕’은 ‘구도’에 있었다.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우는 세종대왕이 된 셋째 충녕의 삶은 4장 ‘태평의 길’에서 표현된다. 그곳은 ‘화합’의 무대라 할 수 있다. 양녕의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춤사위와 효령의 정적이면서도 강직한 몸짓은 충녕에 이르러 직선과 곡선이 모두 어우러진 카리스마와 온화함으로 탄생했다. 일렉트릭과 전통음악의 결합은 분위기를 한층 더하며 백성을 위한 혁파의 길을 걸어간 세종을 나타냈다. 무대의 정수는 태종이 마지막 남겨진 자신의 평안을 찾는 5장 ‘평안의 길’이었다. 무장 가문으로 유명한 이성계 집안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도와 건국을 이뤄내고, 왕좌의 길에 오르기 위해 숱한 피를 뿌려야했던 남자. 마지막 장은 태종이 지난 삶을 반추하고 욕망과 피로 물든 지난 넋을 기리는 일종의 살풀이와 같았다. 핏빛의 붉은 조명과 함께 등장한 태종. 복면으로 얼굴을 감싼 무용수들 사이에서 왕은 고통스럽게 자신의 몸을 긁어내기도 사시나무 떨듯 진동하기도 끝내 쓰러지기도 한다. 피비린내 나는 붉은 빛의 군무는 그를 둘러싼 폭풍 같은 정쟁이며 그 사이로 곤룡포를 입은 태종은 살풀이를 춘다. 이내 살풀이 천을 허공에 뿌리고, 날리는 그의 모습은 혈육과 수많은 목숨에 대한 넋을 풀고, 과거를 회상하며 끝내 자신도 평온함과 평안함에 이르고 싶었음을 느끼게 만든다. 흰색 천으로 쓰러진 넋의 얼굴을 덮어나가고 무언의 울부짓음과 절규하는 ‘용의 눈물’은 한 인간이자 군주, 아비로서의 그의 인생을 떠올리게 했다. 최재헌 연출가는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풀어보고자 했다”며 “가야금, 거문고와 같은 소리를 풍기는 첼로를 사용하는 등 한국적인 것에 서양의 악기를 접목하고 재즈와 전통음악을 결합하는 등 특히 음악에서 여러가지 각도로 시도해봤다”고 밝혔다. 이어 “아들들만큼 평온하길 바랬을 아버지의 마음을 한국무용을 통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며 “자신의 평안함을 위해 욕심도 내고, 후회도 하는 모습은 모두가 공감해봄직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작품은 올해 말 국립정동극장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인천공항 122번 게이트 앞에서 만나는 서예의 멋 [전시리뷰]

공항에서 떠날 준비를 모두 끝낸 여행자에게 비행기 탑승 전 한숨 돌릴 여유가 허락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이런 여행객들을 위해 지난 2021년 개항 20주년을 맞아 인천공항박물관을 개관했다. 제1여객터미널 탑승동에 위치한 인천공항박물관에서는 지난해 6월부터 전시 ‘서예, 일상에서 예술로’가 진행되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서예 문화를 주제로 총 13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한국 전통 서예의 일상성과 예술성을 조명한다. 공항 탑승동이라는 특수성에 따라 이번 취재는 인천국제공항공사 공항운영처 문화예술공항팀 김채린 학예연구사의 인솔하에 진행됐다. 탑승동 122번 게이트 근처에 위치한 공항박물관 초입은 한국의 전통 목가구 전시 ‘전이(轉移): 한국의 가구’로 꾸며져 있다. 김 학예사는 “이 전시에 쓰인 고가구들은 인천국제공항 설립 초기부터 공항 곳곳에 배치하고 전시하기 위해 차곡차곡 모아온 공항공사 소장품으로 2010년대 초반까지 전시됐던 작품”이라면서 “공항 내 미디어아트가 늘어나면서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들을 박물관 개관 무렵 다시 꺼내 보수한 후 전시하고 있다”고 설명헀다. ‘서예, 일상에서 예술로’는 크게 2부로 구성됐다. 1부 ‘삶을 쓰다’에서는 글쓰기의 일상성을 보여주기 위해 진열장 안을 사랑방 공간으로 꾸며 경상과 붓, 먹, 벼루, 연적 등 문방사우를 전시했다. 죽은 벗의 어린 딸을 어떻게 보살필지 논의하는 ‘정약용 편지’(1822)에서는 속도감 있는 편지 글씨에 담긴 학자 정약용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2부 ‘글씨, 예술이 되다’에서는 지난해 10월 말 한 차례 전시품 교체가 돼 단아한 한글체와 주나라·한나라의 글자나 문양을 만날 수 있다. 한글 고체를 탄생시킨 김충현(1921~2006)의 ‘한글로 쓴 소학’, 서화의 수집과 감식, 연구에 힘쓴 근대 대표 문예인 오세창의 ‘오세창이 베껴 쓴 기와, 벽돌, 금속에 새긴 글씨’ 등 부단한 노력 속에 자신만의 서법을 완성한 서예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김 학예사는 “탑승을 앞둔 여행객들이 잠시 들르더라도 공간 자체가 문화적 체험이 될 수 있길 바란다”면서 “온습도, 조명, 공간 구성 등 작지만 여느 박물관 못지않은 관리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시는 2월 28일까지.

“도전은 계속된다” 수원시립미술관, ‘네가 여기에 있어 기쁘다’ [전시리뷰]

“미술관을 방문하던 ‘관람객 고미희’에서 ‘작가 고미희’로 참여한다는 게 굉장히 설레면서도 부담됐습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해보라’고 말해주고, 옆에서 믿어주고 도와주는 멘토와 함께 작업하며 용기가 생겼습니다. 제가 이렇게 해냈듯, 전시를 보러 온 관객분들도 저처럼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범한 시민이 작가가 돼 나만의 예술작품을 만들며 작가의 꿈을 실현하고, 이를 전시하는 특별한 도전이 펼쳐지고 있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네가 여기에 있어 기쁘다’ 전시 이야기다. 이번 ‘2024 문화도시 수원 연계사업’ 하반기 프로젝트인 ‘도전! 아티스트’의 결과 전시는 지난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 10월 4: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선발된 시민 참여자 5인은 현대미술 작가 안성석이 멘토가 돼 2개월간 총 25회가 넘는 워크숍 및 작품 제작 과정을 거쳤다. 전시장에서는 이들의 도전이 담긴 회화·영상·설치 총 10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며 작가들의 도전 이유와 제작기가 생생하게 담긴 인터뷰 영상도 만나볼 수 있다. · 5명의 시민이 작가가 되기까지 도전의 ‘과정’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나이도, 하는 일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만큼은 프로 작가 못지 않다. 지난 2개월의 시간은 이들의 삶에 잊지 못할 순간이자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고 있었다. ‘언제나 꽃은 옳다’라는 시리즈 작업을 펼친 고미희(김고미) 작가는 축하의 순간, 애도의 순간 등 인생의 희로애락에 늘 함께하는 꽃을 주제로 작업을 선보였다. 그녀는 대학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한, 세 아이의 엄마인 평범한 주부다. 학창시절의 꿈을 되살려 다시 미술에 도전하고, 수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전시를 펼쳐보인 고 작가는 자신처럼 많은 이들이 이 경험을 꼭 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5인 중 유일한 20대이자 취준생인 백예빈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에 참여하는 것에 꼭 엄청난 ‘재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도전하기 전까지 그 문턱은 너무나 높아 보였다. 백 작가는 “원래도 미술을 하고는 싶었지만, 스스로 그 정도의 재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공모에 합격하고, 멘토와 함께 작업을 거치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며 “그 간극을 메우도록 도와준 멘토에게 고맙다”고 표현했다. ‘도전 아티스트’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얼마 전 인생에서 꽤나 큰 위기를 겪었던 백 작가는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따온 작품을 선보인 그는 이번 전시에서 매일 아침 거울 속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작성했던 글 등을 작품으로 활용했다. 이처럼 이들은 일상에서 느낀 순간들을 작품에 녹여냈다. 평범한 회사원인 오상미 작가는 ‘남녀 간의 관계’를 주제로 한 미니 드라마를 제작했다. 아이를 돌보고, 회사를 출퇴근하며 새벽같이 일어나 글을 써내려간 그는 작가의 꿈을 되찾게 돼 기쁘다고 말한다. 이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게 곁에서 함께한 안성석 작가는 “자신은 작가로서 ‘과연 해도 될까’라는 생각은 집어넣고, 마음껏 창작하도록 용기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표현했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전시장 한편에 마련된 커다란 벽이다. 그곳에 마련된 작업 도구를 통해 전시장을 방문한 관람객 누구나 자유롭게 글과 그림을 펼치며 또 다른 작품을 완성하는 도전을 펼칠 수 있다. 수원시립미술관 관계자는 “‘네가 여기에 있어 기쁘다’의 의미는 이러한 도전을 펼친 5인의 작가가 있어 기쁘다는 의미와 함께, 이들의 도전을 보러온 관람객인 ‘네’가 있어 행복하다는 뜻”이라며 “또 다른 시민들이 도전을 펼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31일까지.

“시장을 수호하는 어르신(神)” 도시의 틈, 모퉁이에 숨겨진 ‘이스터에그’를 발견하다 [전시리뷰]

“수원의 팔달문·지동·못골·영동시장에는 여러 신이 존재한다. 오래도록 그곳을 수호하고 지켜 온 이들의 이름은 ‘주인장 어르신(神)’, ‘경계-신(神)’이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낯선 작품 너머로 사람들의 쉼 없이 이어지는 말소리와 오토바이 소리가 혼재돼 들려온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란색의 탱화를 연상케 하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낯설지 않은 풍경을 하나둘 발견한다. ‘못골종합시장’의 간판, ‘단체석 완판’이라는 글자 아래 순대곱창 집의 간판, 비워진 뚝배기 그릇과 건어물 상자. 호법신 도상의 일곱 여인은 곧 앞치마를 맨 상인을 떠올리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소음과 같던 소리는 물고기를 파는 어느 상인의 대화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구도심이 된 상권은 변화하는 도시의 유한한 지역성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도시의 생명력을 꺼지지 않게 해주는 존재다. XXX(윤이도,김태희) 팀은 신작 ‘첩첩시상’(2024) 작업을 통해 수원의 네 시장을 오래도록 지켜온 상인에 대한 존경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시장의 수호신으로 형상화된 상인들과 파리퇴치기, 저금통 등 다양한 시장 기물 속에 독특한 유머를 첨가했다. 작품에는 수원 지역 상인들의 문화와 시장에 인접한 사찰과 민간 신앙 문화 등이 절묘하게 뒤섞여있다. XXX의 윤이도 작가는 “작품에 7명의 상인이 손을 내미는 모습을 담았는데, 시장을 방문했을 때 합창단 활동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화와 종교가 균형을 이루며 독특한 모습으로 발전하는 게 수원만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며 “마치 이들이 시장을 지켜온 수호신과 같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 토끼가 심어 놓은 이스터에그 찾아…5팀5색, 각자가 발견한 도시의 숨은 풍경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순항 중인 전시 ‘토끼를 따라가면 달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는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를 발견했듯, 작가들이 수원이라는 도시 곳곳에 숨겨놓은 달걀, ‘이스터에그(게임과 같은 분야의 프로그램 개발자가 사용자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숨겨 놓은 메시지나 기능)’를 발견하는 여행이다. 올해 처음으로 진행된 수원시립미술관의 신진 작가 공개모집 ‘얍-프로젝트’의 결과인 이번 전시는 1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밀레니얼 세대작가 다섯 팀을 만나볼 수 있다. ▲김소라(사진, 설치) ▲신교명(회화, 설치) ▲유다영(사진, 영상) ▲정은별(회화, 조각, 설치) ▲XXX(윤이도, 김태희)(회화, 조각, 설치) 작가가 ‘수원, 장소∙기억∙사람’을 주제로 각자의 시선에서 발견한 도시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사진과 미디어, 설치 작업을 진행하는 김소라 작가는 약 40년 전 아버지가 서 있던 시공간을 지금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서장대, 장안공원 등 1970~80년대 수원화성 곳곳에서 촬영한,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필름 사진을 출발점으로 작가는 온라인 지도와 현실 세계로 발을 옮기며 아버지의 발걸음을 재현한다. 아버지의 유물인 오래된 아날로그 필름 사진과 편지를 단서로 삼아 이미지와 소리를 수집하고, 기존의 이미지와 중첩한 조각은 선명하면서도 어딘가 빛바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흩어진다. 위아래로 올리는 블라인드, 옆으로 문을 여는 커튼 등 다양한 형태로 구성된 커튼 조각과 그 속에 담긴 아버지의 옛 시간, 공간 한 구석에 열린 문을 통해 너머의 공간으로 들어설 때면 마치 작가의 꿈 속 세계로 들어가는 듯하다. 김 작가는 “수원화성을 걸으며 공간을 매개로 자신의 기억을 만들어나가길 바란다”며 “모두의 역사에서 기억되는 건 굵직한 위인일 수 있겠지만, ‘나’라는 개인 역시 지나간 역사의 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정은별은 ‘드리우는 그림자 사이로’(2024)를 통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퉁이 너머의 풍경, 도시의 틈새를 낯선 방식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언뜻 견고해 보이는 사회 속에는 개인이 무력해지는 순간과 불안에 주목한다. 작품은 뒷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전시장 한 공간에 자리한 마치 빨래 더미에 널린 것 같은 종이 조각들. 도시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있는 기둥을 돌아 골목 뒤로 들어섰을 때 비로소 온전한 작품과 만나게 된다. 작가는 수원의 곳곳 재개발, 임대, 폐허의 흔적 등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공간을 빼곡히 칸마다 기록했다. 포크레인으로 갉아 먹힌 조각 등 각 프레임에 담긴 이야기는 마치 영화처럼 펼쳐진다. 작가는 개인의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킨 변화, 한 번의 숨에서 파장된 일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유행에 따른 상권의 이동, 일명 ‘핫플레이스(명소)’의 탄생과 이면 등 우리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도시의 뒷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신교명 작가는 스스로 그림 그리는 법을 학습하는 인공지능 페인팅 로봇 ‘두들러’를 창조해, 장소를 영위하는 인간의 기억을 비인간의 시각으로 추적한다. 신 작가는 수원의 식당가와 관광지, 카페 등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낙서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로봇에게 학습시킨다. 낙서에는 추억, 사건, 현상이 담겨있다. 이때 두들러의 학습은 낙서가 담긴 구체적인 장소의 맥락이 제거된 채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해당 장소에 얽힌 낙서의 의도는 본래와 다르게 해석되는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작가의 의도다. 이미지만으로 세상을 읽어내고, 로봇 메커니즘의 ‘인간스러운 기억’을 새로 만들어낸 인공지능의 결과물을 보며 작가는 오늘날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진철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은 “한국 미술계를 대표해 나갈 신진 예술가들의 시선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수원이 아닌 각자가 바라본 도시의 모습을 담아내려고 했다”며 “앞으로도 ‘얍 프로젝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다양한 작가와 작업 세계를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3월까지.

"명나라 한눈에" 중국 국가 1급 유물 6점 한국 최초공개, ‘명경단청 明境丹靑: 그림 같은 그림’ [전시리뷰]

달은 밝고 별은 희미한 밤, 기다란 배에 앉은 이들이 노닐고 있다. 적벽 아래 유유자적한 이들은 마냥 평화로워 보이기도,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밝고 아름다운 색채, 세밀한 필체가 느껴지는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과 자연의 풍경을 한없이 들여다보면 그날의 밤으로 빠져들 것 같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면 각기 다른 필체로 써 내려간 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경기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명경단청明境丹靑:그림 같은 그림’전에서 만난 구영의 작품 ‘적벽부’는 명나라의 뛰어난 예술가 네 명을 일컫는 ‘명사대가’ 중 한 명인 구영이 송나라 때 학자 소식(소동파)의 글 ‘적벽부’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작품으로 중국 국가 1급 유물이다. 그림 뒷부분에는 명나라 때 지식인(문인) 팽년과 문팽이 쓴 ‘적벽부’와 문가와 주천구가 쓴 ‘후적벽부’가 있다. 도록이나 사진을 통해서만 만나봤던 작품을 글과 그림이 한데 어우러져 더욱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경기도박물관·랴오닝성박물관 공동주관의 ‘명경단청明境丹靑:그림 같은 그림’ 특별전은 지난해 경기도와 중국 랴오닝성 자매결연 30주년 기념 공동선언의 결실로, 경기도와 랴오닝성 대표 박물관 간 교류를 통해 우수 문화유산을 나누기 위해 추진됐다. 중국 선양은 청나라 초기 수도로 이곳에 자리한 랴오닝성박물관은 황실의 유물을 다수 보유한 국가 1급 박물관이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한국에서 전시된 사례가 없는, 국보급에 해당하는 중국 국가 1급 유물 6점을 포함한 명대 서화 53점이 최초 공개됐다. 관객은 ▲명대전기-절파(浙派)의 탄생 ▲명대중기-오파(吳派)의 전개 ▲명대후기-남종문인화로의 집대성(集大成)으로 구분돼, 명대 전·중·후기 각 시대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핵심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그림뿐만 아니라 중국 현지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엄청난 길이의 제발(題跋·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기록을 적은 것)문 등을 원본 그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한 것이 특징이다. 명대 전기 궁정화가였던 대진의 작품이자 국가 1급 유물인 ‘선종의 여섯 조사’는 선종의 1대부터 6대까지의 일화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아냈다. 시대와 장소가 다른 인물을 한 폭의 그림에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은 약 6m 길이에 달하는 글과 그림으로 구성돼 있다. 16세기 전후 명나라에는 기독교와 같은 서구 문물 전래에 따른 사회 대변혁과 함께 ‘성즉리(性卽理)’의 성리학에서 ‘심즉리(心卽理)’의 양명학으로 유가 철학 사조가 전환됐다. 이에 따라 예술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개성이 어느 시대보다 잘 발휘된 때로 평가받는다. ‘명사대가’ 중 한 사람인 심주의 작품 ‘국화감상’은 그가 송·원나라의 산수화 양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으로 그린 대표작 중 하나이다. 특히 동기창은 물아일체의 새로운 경지를 끌어낸 인물이자 조선에는 남종문인화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친 ‘남북종론’을 제창한 인물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남종문인화의 시대를 연 동기창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정치·경제교류와 함께 뜻을 나누는 핵심에는 ‘문화예술’이 있다”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현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물아일체’의 사상이 드러나는 작품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경기도박물관은 ‘명경단청明境丹靑:그림 같은 그림’에 대한 답방으로 내년 랴오닝성박물관에서 도자기와 초상화 등, 도 박물관의 특화 유물 등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이번 전시가 갖는 동아시아 미술사 전개의 중요성을 감안해 내년 2월6일 경기도박물관 뮤지엄아트홀에서 국제학술대회도 열릴 예정이다.

최재혁·앙상블블랭크, 현대음악 매력 발산…‘BBC 프롬스 코리아’서 눈길 [공연리뷰]

음악가 최재혁과 앙상블블랭크가 객석과의 소통법을 연구하는 현대음악의 매력을 선보였다. 지난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클래식 음악 페스티벌 BBC 프롬스 코리아가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올해 한국 공연은 2016년 호주, 2017년 두바이, 2019년 일본에 이은 아시아 네 번째 순서로 마련됐다.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프롬스 공연은 영국에서의 핵심 요소를 가져오면서도 현지 관객의 정서와 여건에 맞춘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구조다. 그 가운데 3일 오후 7시30분 공연장을 수놓은 무대는 음악가 최재혁이 지휘·작곡·예술감독을 맡아 주목받았다. 그가 중심이 돼 2015년 창단한 앙상블블랭크는 국내 최고의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다. 또 이날 무대에는 세계적인 클라리넷 연주자 제롬 콤테도 함께 동참했다. 1부는 조커 분장을 한 트럼본 연주자가 베리오의 ‘트롬본 솔로를 위한 시퀜자 Ⅴ’를 선보이면서 시작했다. 그는 객석 속에서 출발해 통로와 무대를 오가며 경계를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어지는 순서는 독일 출신 현대음악 작곡가 알렉산더 슈베르트의 ‘심각한 미소’. 지휘자,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퍼쿠셔니스트가 모두 손목에 센서를 부착했다. 격렬한 손짓과 몸부림이 소리로 변환되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펼쳐졌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연주라는 행위를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악기를 두드리거나 현을 문질러야만 연주일까. 첼로의 현을 떠난 활이 허공을 가를 때 생성되는 불규칙한 전자음이 관객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번쩍이는 조명, 무너지는 화음, 반복되는 몸짓들을 두고 과연 음악이고 연주라고 할 수 있을까? 음악과 연결되는 여러 감각을 화두로 내세운 퍼포먼스는 다음 무대를 통해서도 그 의미를 확장해 나간다.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10번 B♭장조 ‘그랑 파르티타’ 중 Ⅲ. 아다지오’가 어디에서 울려 퍼졌는지 떠올려 보면 된다. 바로 무대가 아닌 객석 뒤편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음악이 생성되는 곳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객들의 감각 체계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국 최재혁 예술감독과 앙상블블랭크가 마련한 1부 무대는 객석을 향해 익살스런 질문을 던졌다. 음악을 음악답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무대를 무대답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자유롭게 생각해볼 기회를 던져준 셈이다. 이어지는 2부에선 제롬 콤테의 클라리넷이 무대로 합류했다. 에릭 사티의 ‘백사시옹(앙상블 버전, 편곡 최재혁)’, 최재혁의 클라리넷 협주곡 ‘녹턴Ⅲ’, 베르트랑의 ‘스케일’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현대음악의 흐름 속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법을 찾아내고픈 연주자와 예술감독의 열망이 담긴 무대라는 점에서 1부와 연결고리가 느껴졌다. “옛것과 새것의 조화를 모토로, 검증된 작품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분야와 협업하는 방안도 고려한 풍성한 무대를 준비하고자 했다”는 최 감독의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무대였다.

미술관서 열린 ‘빙하 추도식’…수원시립미술관 2024 예술확장성 프로젝트 ‘빙하에게 안녕을’ [전시리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는 빙하 추도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빙하가 물이 돼 떨어지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곧이어 빙하 추도식을 안내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캄캄한 공간에 손전등을 비추자, 전시실 사방에 자리한 여러 형태의 빙하 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빙하는 산에 자리한 만년설이 녹아내려 갈색의 흙이 드러나 있고, 어떤 빙하는 마치 블랙홀처럼 검은 웅덩이가 돼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동굴 탐험을 하듯 랜턴을 벽에 비추자, 벽화와 같은 빼곡한 기록들이 드러난다. 수원시립미술관은 지난달 19일부터 다원 예술 기반의 2024 예술확장성 프로젝트 ‘빙하에게 안녕을’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초, 중, 고 모든 교과에 등장하는 주제이자 우리 세대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인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를 주제로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오크 빙하는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빙하의 지위를 잃었다. 앞으로 200년 사이 아이슬란드의 주요 빙하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우리는 이 추모비를 세움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인식하고 있음을 알린다.” 지난 2019년 8월 아이슬란드에서는 700년의 세월 간 자리를 지키다 소멸한 오크예퀴들 빙하를 추도하기 위한 ‘빙하 장례식’이 열렸다. 카트린 야콥스도티르 총리와 환경운동가, 주민 등은 빙하를 추도하며 추모비를 세웠고 ‘미래로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동판에는 위와 같은 말이 새겨졌다. 아이슬란드를 포함해 스위스, 멕시코, 미국 등 전 세계 5곳에서 기후위기 등으로 사라져간 빙하의 죽음을 추도하는 장례식이 진행됐다. 전시실 벽면에는 이처럼 ‘사망 선고’가 내려진 전 세계 빙하의 목록과 앞으로 사망선고가 내려질 예정 목록 그리고 빙하 장례식에서 오갔던 말들이 기록돼 있다. 소멸하는 빙하를 조각조각의 픽셀로 영상화한 화면을 마주하다 보면, 이윽고 빙하를 기리는 레퀴엠(장송곡)이 흘러나온다. 2024년 12월 지금 이 자리의 관람객들이 흰색 펜을 들고 남긴 한마디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빙하야 인간이 미안해’, ‘우리의 잘못으로 빙하는 피해를 입는다’. 이번 프로젝트는 일방향으로 관람하는 ‘전시’가 아닌 설치, 영상, 음악, 공연, 체험 등 융복합 예술로 기후위기의 현실을 감각할 있도록 구성하고, 이를 관객이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쥐고 탐험하듯 능동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빙하가 깨지는 소리와 기후 위기를 악화시키는 전쟁, 도시화, 산업화를 상징하는 기괴하면서도 날카로운 음악, 훼손된 빙하를 보여주는 픽셀 영상 등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프로그램이 종료된 후 빙하를 위한 추도문을 직접 작성해 보는 시간은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빙하에게 안녕을’ 프로젝트에서 녹아내리는 빙하를 조각조각의 픽셀로 영상화한 모습. 조각의 픽셀은 바다의 모습으로 흩어진다. 이나경기자 프로젝트 컨셉과 연출을 맡은 창작단체 ‘섬우주’의 전강희 작가는 “몇 년 전 강원도에서 일어난 산불 재의 성분이 극지방 빙하에서 발견됐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며 “우리 역시 기후위기와 빙하의 사라짐에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관객이 홀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공간에 있는 타인의 빛과 함께 만나게 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전시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8일까지.

장 문화로 들여다 본…국립농업박물관 기획전 ‘기다림의 맛, 시_간’ [전시리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장(醬)’은 우리의 삶 그 자체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과정과 그 속에 깃든 정성. 가족 간,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한 집안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우리의 밥상을 지켜온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세계무대로 향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다음달 2일부터 열리는 제1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최종 등재를 결정할 예정이다. 국립농업박물관이 선보이는 기획전 ‘기다림의 맛, 시_간’은 장 문화의 유네스코 등재를 앞두고 장 문화를 재조명하고 우리 발효음식을 과학적인 시각으로 조명하도록 구성해 더욱 의미가 있다. 다양한 기록과 문헌을 바탕으로 장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되짚었다. ‘1부 장(醬)의 과거를 보다’는 농경의 시작과 함께 발효음식을 먹었던 우리 선조들의 과거를 돌아본다. 콩 재배와 장(醬)과 관련된 기록과 유물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을 담가 먹기 시작한 때는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이 술이나 장 등을 담았을 거라 추정되는 ‘고구려 항아리’와 우물가에 발효식품을 갈무리한 것으로 보이는 물독과 설거지할 긴 나무통이 그 주변에 있는 흔적이 남겨진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4세기), 장이 전국으로 배송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죽찰’ 등이 전시돼 있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 ‘제민요술’에서는 황고려두와 흑고려두를 통해 고구려부터 콩을 재배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특히 샘표에서 장 발효 과정을 사각 메주 틀과 스피커로 표현한 작품 ‘Ferment(발효되다)’를 통해 장이 익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전시의 묘미다. ‘2부 생명을 만들다’에선 장독대 속 우리나라 장 담그기 문화를 담았다. 숨쉬는 그릇 옹기는 그 속에서 물과 공기, 온도 등 자연과 교감하며 미생물을 키워내고 숙성의 과정을 거쳐 간장과 된장, 고추장을 탄생시킨다. 스크린 앞 진열된 다양한 크기의 옹기는 토끼 등 문양이 새겨져 있어 옹기에 숨겨진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 그 너머 영상에선 계절이 바뀌는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장이 완성되는 과정이 느슨하게 펼쳐지며 쉼을 전한다. 전시장 한가운데 마련된 미디어아트에선 장의 필수요소인 물·소금·메주가 담긴 옹기에서 미생물들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탄생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 발효음식인 장(醬)을 다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곰팡이의 형상을 한 설치물에선 발효의 과학성과 자연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 가정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채록해 저술한 ‘규합총서’에는 장 담그기 좋은 날도 기록돼 있다. 순창고추장을 예찬한 ‘해동죽지’, 왕실에서도 장을 엄격하게 관리했다는 기록과 장고를 관리하는 ‘장꼬마마’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경국대전’ 등의 기록물과 ‘낙선재 주변’ 자료 등도 전시돼 있다. ‘3부 과거부터 미래를 먹다’는 식품 명인들을 통해 과거의 전통 장 문화를 현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시된 조정숙 명인의 ‘씨간장 장석’에선 항아리 속에 생긴 소금 결정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장석은 간장이 증발하면서 보석처럼 생기는 소금 결정체로 발효음식의 신비로움과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한다. 음식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생명을 지켜나간 장 문화를 들여다 본 이번 전시는 클릭 한 번이면 신선식품이 곧장 집으로 배송되는 지금 시대에 들려주는 감미로운 힐링 곡 같이 느껴진다. 전시는 내년 2월 23일까지.

“무가 사라진 2045년, 식탁의 모습은?”…‘발칙한 상상력’ 참여형 교육전시 ‘미래 반찬 연구소’ [전시리뷰]

기후 위기와 이상 기온의 변화는 해마다 우리의 ‘밥상’에도 찾아오고 있다. 환경오염과 폭염으로 꿀벌이 자취를 감추고 더 이상 꽃을 이동시킬 수 없다면, 뜨거운 사막에서 식물이 자랄 만큼의 수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미래의 우리는 무엇을 먹고 있을까, 그리고 식물은 어떤 모습으로 생존하고 있을까. 기발하면서도 발칙한 상상력으로 미래의 식탁을 그려낸 전시가 열리고 있다. 수원시립미술관 수원시립만석전시관에서 다음 달 15일까지 열리는 ‘미래 반찬 연구소’는 현재와 미래의 식문화를 탐구해 보는 참여형 릴레이 교육 전시다. 유행을 ‘말랑’하게 받아들이고 ‘통통’ 튀는 상상력으로 작품을 표현하는 기획전 ‘말랑 통통 미술관’의 2부이다. “스튜디오 1750의 ‘미래 반찬 연구소’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미래 반찬 연구소에서는 어떤 것을 연구하고 있을까요?”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마치 2100년의 지구 혹은 행성에 도착한 것과 같은 ‘생소함’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늘색, 주황색, 초록색 등 형형색색의 작품들이 거대한 모습으로 자리했고, 천장에 매달린 하늘색 꽃잎은 쉴 새 없이 폈다 오므렸다는 반복하며 관람객을 낯설면서도 설레는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구 재료 1번인 ‘흐르는 꽃’은 땅에서 자라나 하늘로 향하는 우리가 흔히 본 꽃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기다란 주황색의 스타킹 모양 같은 이 꽃은 2050년 뜨거운 사막에서 발견됐다.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어 적은 양의 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진화했으며, 뿌리가 위에 꽃이 아래에 있어 물을 비롯한 모든 영양분이 꽃으로 향한다. 맛은 무화과처럼 꿀맛이 난다. 두 번째 연구 재료인 작품 ‘방울 주머니’는 노란 기둥에 마치 하늘색 사람 머리카락이 삐죽 펼쳐져 있는 야자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방울 주머니’는 미래에 무가 더 이상 자라지 않자, 많은 무를 얻기 위해 2045년에 개발된 식물이다. 하나의 기둥에서 잎처럼 자라난 하늘색 기다란 방울 주머니는 지금의 무와 똑같은 맛을 낸다. ‘미래 반찬 연구소’는 2070년 세워진 상상 속 연구기관. 관람객은 직접 흰색 가운의 연구복을 입고 연구소 일원이 돼 미래의 지구에 개량된 과일과 식물을 탐색하고, 이를 식탁 속 재료로 활용한 다양한 요리법을 개발하며 체험할 수 있다. 관람객은 상설 체험장에서 ‘분홍 주름 방울 주머니 김치 레시피’, ‘나만의 미래 샐러드 만들기’ 등 프로그램도 참여 가능하다. 세 돌이 지난 딸과 함께 미술관을 찾은 곽승주씨는 “어린 자녀가 좋아하는 화려한 색감이 많아서 아이들이 보기에 낯설지 않고 재밌다”며 “기후위기 문제를 생각해 보는 메시지도 좋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부부 작가 겸 설치미술가인 ‘스튜디오 1750(김영현, 손진희)’은 “우리가 가장 친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음식을 통해 미래를 생각해 보고, 미술관을 즐겁고 재밌게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겉보기에 작품들은 화려하고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미래는 ‘디스토피아’가 될지, ‘유토피아’가 될지 알 수 없다”며 “자신만의 관점으로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해달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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