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이 눈앞에 다가온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5년이 다 돼간다. 새해 2월 25일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일이다. 노무현 시대의 여명속에 김대중 시대가 저문다. 만유무상(萬有無常),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이치는 지존한 통치권력의 세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목요칼럼’은 지난 5년 가까이 대통령에게 무던히도 듣기싫은 말을 많이 했다. 곧 야인으로 돌아갈 분에게 더 할 말은 없다. 생각하면 지위가 대통령이기 때문에 두려워 않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다만 두가지는 밝힐 수 있다. 하나는 권력부패다. 친족이나 인척, 측근 관리를 잘못해 그들 개인적 권력부패의 지탄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권 차원의 구조적 정권부패 시각을 부정하는 청와대측 이의를 이해하는데 애써 인색할 이유는 없다. 또 하나는 남북관계다. 칼럼자는 지금도 상호주의에 변함이 없지만 어떻든 첫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평가, 그로 인한 긴장완화에 전보다 도움이 된 사실은 동의한다.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일부에서 더 이상 희화화하는 것은 민족자존에 대한 거역이라는 판단을 갖는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대통령의 보행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칠때마다 보는 오리 걸음은 거슬리는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심히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었던 건 독재저항운동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때 자동차 사고로 위장한 암살에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대가가 평생 고생하고 있는 지금 같은 걸음 걸이의 부자유다. 유신정권 당시엔 망명중이던 일본서 납치당해 마대에 담겨 발동선으로 실려 오면서 현해탄에 수장될뻔 했고, 신군부 땐 내란음모죄로 무고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등 숱한 사선을 넘기도 했다. 처음 정치 지망생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고는 부인 차영애 여사가 선거빚에 쪼들리다 못해 자살하는 비운을 맞았고, 재혼한 민주화 동지 이희호 여사와의 가정생활 또한 상당기간 압박과 수난의 세월로 평탄치 못했다.
1961년 강원도 인제 보선에서 가까스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마침 등록하는 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과 더불어 5대에 이은 6·7·8·13·14대 등 6선의원의 오뚝이 정치 역정을 헤치면서, 민주(구)·민중·신민(구)·통일민주·평민·신민·민주당(구)·국민회의 등을 거쳐 1998년 집권할 때까지 야당으로 일관하였다. 최종 공인학교 목포상고 졸업만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박식함은 예컨대 수차에 걸친 옥고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학문적 탐구의 결실이다. 이같은 초인적 열정으로 인하여 대통령이 되기전 미 에모리대 명예 법학박사 등 국외 명예 법학·정치학박사 5개, 미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사회과학원 명예교수, 영국 케임브리지대 평생연구원, 모스크바대 평생명예교수 등을 고졸 학력으로 위촉받을 수 있었다.
‘김대중전집’12권을 비롯, ‘행동하는 양심으로’‘대중경제론’‘독재와 나의 투쟁’‘김대중 옥중서신’등 저서는 영어와 일어로 출간되기도 했다. 1971년 40대 나이에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추대돼 박정희 후보에게 94만여표 차이로 비록 뜻을 이루진 못했으나 3선개헌을 질타한 그의 사자후는 박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당시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에선 김 후보가 69만6천582표를 얻어 박 후보의 68만7천785표를 6천582표 앞질렀다. 40대에 뜻을 세워 이루지 못한 대권의 꿈을 70대 들어 이룬 풍운아 ‘김대중’, 그도 이제 팔순이 가까워지면서 퇴임을 앞두고 있다. 현대 정치사에서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DJ에게 역시 공과가 없을 수 없다.
역사엔 우연이 없다. 아무리 드라마틱해도 역사엔 필연적 사실로 기록된다. 이런 필연적 사실의 연속이 곧 역사다. 정치인 ‘김대중’과 대통령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당장 퇴임 직후에도 있을 수 있고 훗날 역사가 기록할 수도 있다. 간곤했던 민주화 장정의 수난, 고난했던 집권의 영광도 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두달 남긴 임기를 잘 마무리 짓고 편한 여생을 보내시기 바란다.
댓글(0)
댓글운영규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