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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

2009년은 작곡가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곳곳에서 열릴 터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연주회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였다. 빈 필은 해마다 요한 시트라우스의 왈츠나 폴카를 중심으로 신년 음악회의 무대를 장식했지만 올해만큼은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인지 ‘고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4악장을 연주했고 그것이 전 세계에 위성으로 생방송됐다. 빠른 악장이 느려지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 둘씩 차례로 악기를 들고 무대 뒤로 사라지더니 급기야 바이올린 연주자 두 사람만 남게 되지만 그들마저 사라지면서 음악도 끝이 난다. 이 곡이 작곡된 배경을 모르고 방송을 본 사람들은 어리둥절했겠지만 정작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시종 웃는 얼굴들이었다.

하이든 시대의 음악가들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의 성이나 저택에 머물면서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작곡하거나 연주했다. 하이든을 고용했던 에스테르하치 후작은 여름이면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 기거하면서 더위를 피했는데 이때는 하이든뿐만 아니라 하이든의 책임 하에 맡겨져 있었던 다른 악사들까지도 함께 가야 했고 그들은 그 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니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1772년 여름에는 무슨 일인지 예정되었던 두 달을 채우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도대체 돌아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악사들의 불만은 턱밑까지 차오르게 됐다. 물론 하이든은 조심스럽게 후작에게 이런 사정을 전했지만 후작은 오히려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명을 내릴 뿐이었다. 고심 끝에 하이든은 다른 방법으로 후작의 마음을 돌릴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2주 만에 서둘러 완성한 곡이 바로 ‘고별 교향곡’이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악사들은 하나 둘씩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자리를 떠났고 마지막 두 사람마저 끝내 자리를 뜨면서 음악도 멈추게 된다. 그때서야 하이든의 의도를 알아차린 후작은 당장 떠날 차비를 지시하였고 마침내 그들 모두 기다리는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말년에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치 후작 가문과의 계약이 끝나 자유를 얻게 된다. 후작에게 봉사하던 30여년 세월 동안 하이든의 업적과 명성은 바다 건너 영국에까지 전해졌고 잘로몬이라는 흥행사의 주선으로 영국을 방문한 하이든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영국민들의 거국적인 환영에 놀라게 된다. 영국의 귀족들과 부호들이 비록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십분 이해하고 경청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음악을 즐기기보다는 사교를 위해서, 혹은 남에게 과시하려는 생각에서 연주회장을 찾는 사람들은 그때도 많았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연주회 도중에 조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하이든은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그들을 은근히 골려줄 방법을 생각했다. 느린 2악장을 아주 조용하게 시작하다가 갑자기 팀파니가 가세한 모든 악기들이 동시에 커다란 소리를 내게 했던 것이다. 당연히 객석에서 졸고 있던 수많은 청중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겁을 했을 터지만 결국은 청중들이나 작곡자, 심지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놀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향곡 94번은 그렇게 탄생했다.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역경을 이겼고, 그 시대 다른 누구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늘 성실과 겸손을 잊지 않았던 하이든은 예기치 않은 위기마다 여유와 유머로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하는 2009년, 우리 모두 하이든의 유머를 배워야 할 것 같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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