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에도 흔들림 없던 조선 실학 선구자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유구 사신과 섬라(타이)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했다. 1619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이조참판·공조참판을 역임했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열두 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해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해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의 자세를 지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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