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
- 김언희
내 기다림의 지뢰를 밟은
내 그리움의 뇌관을 건드린
……보라, 가청권 밖의 이 폭음
수습할 길 없는 이 참사를
슬로 비디오로 찢어지고 있는
당신 넋의 눈부신 사지를
《트렁크》, 세계사, 1995
모든 풍경은 마음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재구성된다. 같은 꽃을 봐도 느낌이 다른 건 각자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풍경은 ‘모두의 풍경’이 아니라 ‘나의 풍경’이 된다. 마음이란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다. 정념과 충동을 뜻하는 ‘파토스’(pathos)와 분별과 이성(理性)을 뜻하는 ‘로고스’(logos)는 우리 마음을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다. 풍경을 로고스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따분하다. 파토스의 심장으로 바라보는 풍경이래야 마음이 흔들린다. 파토스의 세계는 뜨겁다. 그렇기 때문에 일견 위험해 보인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이 파토스를 ‘병(病)’으로 진단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매력적이다. 파토스로 인해 우리의 삶은 정화되고 고양(高揚)된다. 지독한 독감을 앓고 난 후에 느껴지는 몸과 정신의 가벼움처럼 파토스는 우리에게 모종의 변화를 가져다준다.
김언희 시인의 시 <찔레>는 다분히 파토스적이다. 찔레꽃 핀 풍경에서 느껴지는 봄날의 일반적이고 보편적 서정, 이를테면 무더기로 핀 찔레꽃의 아름다움이나 아찔한 향기 또는 찔레의 새순을 따먹으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런저런 감정의 여림이란 거의 없다. 시인이 바라본 찔레꽃 풍경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점점이 끓어올라 터지기 일보직전에 놓인 기다림과 그리움. 그것은 파토스라는 지뢰일 것이다. 마음에 묻어둔 기다림의 지뢰를 밟고 그리움의 뇌관을 건드려 마침내 ‘가청권 밖’의 폭음으로 시인의 파토스를 폭발시킨 매개물이 바로 ‘찔레’다. 너무도 큰 소리로 터졌기에 자기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폭음’의 격정. 그것이 바로 시인의 내면을 통해 재구성된 찔레꽃 핀 풍경의 ‘참사’이고, 비등점(沸騰點)을 넘어선 그리움과 기다림의 폭발이다. 누군가를 참혹하리만큼 그리워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참사’의 풍경을 오롯이 이해할 것이다. 무더기로 피어있는 찔레들이 어떻게 ‘당신 넋의 눈부신 사지’로 찢어져 ‘슬로 비디오’로 흩날리는지를. “수습할 수 없는 이 참사”의 풍경과 상처, 그리고 눈부신 영혼의 날들. 향기와 가시를 함께 지닌 찔레처럼 한 마음의 두 곳에서 격전을 벌이는 애증(愛憎)의 서사, 그것이 바로 로고스로는 감당되지 않는 사랑의 파토스라는 것을 김언희 시인은 말하고 있다.
아프기에 애절하고, 애절하기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게 사랑이다. 사랑은 파토스다. 사랑의 지리멸렬과 눈부심을 함께 품고 있는 내면의 프리즘이 파토스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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