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대부분의 사람은 먹고 자는 것 외에 많은 시간을 노는 데 몰입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삶도 놀이 그 자체였다. 산과 바다의 온갖 것들이 나에겐 즐거움이었고, 그 자연의 즐거움에 낙천적 성격이 보태지면서 나에게 재미와 유머는 일상이 됐다. 그러나 놀이가 공부와 일의 여분일 뿐이고 시간 낭비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짙게 깔렸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을 높이고자 인간의 생산적인 효과성을 따져야 했고 비생산적인 놀이는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압축개발성장과 물질문명의 발전은 놀이의 상실을 가속했다.
하지만 천대받은 놀이는 인간을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삶의 질은 나빠졌다. 놀이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놀이의 가치를 접할 기회가 차단된 상황에서 그 빈틈으로 스멀스멀 침투해 들어온 것은 시장의 논리다. 휴식, 즐거움, 재미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타인의 욕망이 투영된 소비문화로 전락한다. 놀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놀이의 상실은 타인의 고통을 즐기고 폭력과 놀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양산했다. 많은 청소년이 타인을 상대로 한 패드립과 혐오발언, 집단 괴롭힘, 불법촬영과 디지털 성범죄 등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싸 문화, 놀이 문화로 소비하고 있다. 학교 내에서 불법촬영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19세 이하 청소년의 디지털 성범죄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경찰청 조사를 통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수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마치 그러한 행위가 용인된 것처럼 죄책감 없이 급속도로 퍼져갔다. 놀이 또한 사회적인 관계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망각한 탓이다.
놀이에 있어 경쟁, 인정욕구와 성취감은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하지만 천대받은 놀이는 잘못된 인정욕구와 성취감을 배태했고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순식간에 효율적으로 응답, 인정,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놀이의 배신을 더욱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노르베르트 볼츠가 <놀이하는 인간>에서 생산과 소비의 시대를 넘어 21세기는 놀이의 시대가 되리라 전망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20세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1930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100년 후인 2030년에는 주당 15시간 일하고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인류의 과제가 되리라 예측했다. 물론 2030년까지 10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주당 15시간이라는 예측은 거의 빗나갔지만, 여가의 중요성에 대한 함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놀이는 일의 여분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로서 설명될 수 있으며 완전한 인간을 추구하기 위한 요소로 인식돼야 한다.
요한 호이징하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천대받은 놀이의 배신은 얼마든지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모른다. 빼앗긴 놀이를 본래 놀이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돌려주고 우리 삶의 일상으로 복원해야 한다. 일하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삶을 불행하게 했던 낡은 기준에서 벗어난 놀이를 창조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 놀이에 대한 반론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오현순 공공의제연구소 오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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