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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행복한 회통

얼마 전 미·중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胡錦濤)는 리바이(李白)의 시로 자신의 의중을 전했다. 중국 지도자가 시에 심중을 담아 말하는 건 자주 보아온 모습이다. 그럴 때면 중국 공산당 주석의 딱딱한 이미지 대신 부드러운 여유가 느껴진다. 대화에도 격조가 생긴다.

시문의 중시는 중국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공유한 전통이다. 시를 쓰고 즐기는 게 문사의 당연한 소양이었던 것이다. 중국에선 한시를 쓰지 못하면 지성인 축에 들지 못한다고 한다. 연설이나 대화에 시를 곧잘 인용하는 멋도 이런 전통에서 나온다. 일본은 또 일본대로 전통시 하이쿠를 다양하게 즐긴다. 그 덕에 하이쿠는 세계 현대시사에서 언급되고 있는데다 세계적인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미국 아이들에게도 영어로 하이쿠를 짓게 한다니, 놀랍다 못해 무섭다.

이처럼 중국(한시)이나 일본(하이쿠)은 전통시를 여전히 즐기는데 우리는 전통 시인 시조를 유독 멀리하고 있다. 고려말부터 정제된 형식에 한국적 미학을 담아온 시조는 우리 민족만의 독자적 시가 양식이다. 왕을 비롯한 사대부나 기생 등 누구나 쉽게 짓고 즐기며 삼라만상부터 정치나 사랑, 음담 등에 이르기까지 3장에 싣지 못하는 게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판소리 같은 걸쭉한 입담의 사설로 정치나 양반, 풍속 등을 풍자했고 근대 초기에는 일제의 식민지배 비판으로 국민적 저항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랬던 시조가 이제는 소수자의 문학으로 쓸쓸하기 한량없다.

물론 전통시가 변함 없는 위상을 누리는 일본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자유시는 고작 500부 찍는데 비해 하이쿠는 100만부 이상의 베스트셀러도 나온다). 자유의 확대를 추구해온 현대 예술 정신과 전통시의 정형성이 상충하므로 대부분 자유시 위주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을 보면 세계의 문화 조류와 자국의 문화 흐름이 반드시 같이 가는 건 아니다. 전통시에 대한 자긍이 하이쿠를 현역으로 즐기는가 하면 자국 미학의 세계화까지 이뤄 가니 말이다. 위싱턴의 포토맥 강변에 벚나무를 심듯, 하이쿠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통 미학에 눈감고 온 것만은 아니다. 요즘 영향력이 더 막강해진 영화만 해도 전통의 현재화를 많이 볼 수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들이 한국 전통 미학의 영상화라면,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는 재해석을 통한 전통의 현재화라고 할 만하다. 문학에서도 전통의 현재화는 꾸준히 탐구되고 있으며 음악이니 무용이니 미술 같은 다른 장르들도 그런 고민은 항상 진행형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담아 내느라 모두 진통 속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성공적인 일부를 제외하면, 그 노력들이 아직 생활 속의 크고 깊은 뿌리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없다”는 신영복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전통이 시쳇말로 장사가 되지 않는 건 무엇보다 자긍심 부족 때문이다. 스스로 위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전통을 찾고 존중하겠는가. 우리 자신이 전통을 귀하게 여기며 현재화를 지속할 때 한국 미학을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시조 또한 통섭의 천착을 거듭할 때, 오늘 속의 큰 시로 회통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대화나 놀이에도 즐거운 격조를 하나씩 더 얹게 되지 않을까.

/정수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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