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 로고
2025.07.04 (금) 메뉴 메뉴
위로가기 버튼

[경기인터뷰] 변봉덕 코맥스 대표이사 회장

“명문장수기업 비결은 ‘신뢰·인재경영’… 100년 기업 도약”

50여 년 전 수학과를 졸업한 청년은 학교 선생님이라는 안정된 길 대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했다. 당시 생소했던 ‘인터폰’ 사업이다. 청년은 직접 가방을 둘러매고 미국과 영국을 다니며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한국 최초로 인터폰을 생산한 회사는 신뢰와 인재경영을 내세우며 홈 IoT기업으로 성장했고, 이제 대(代)를 이은 경영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 1호 명문장수기업으로 선정된 코맥스 변봉덕 대표이사 회장(77) 이야기다. 존경받는 기업인과 장수기업인이 드문 시대에 변 회장은 존경받는 기업문화를 확산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는다. 지난 17일 코맥스에서 변 회장을 만나 기업의 바람직한 롤모델과 기업인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동안 기업인으로서 걸어온 길을 회상할 때는 물론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모습에서 노장의 노련함과 통찰력이 느껴졌다. ‘최초의 인터폰 생산업체’, ‘제1호 명문장수기업’의 타이틀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변봉덕 코맥스 대표이사 회장
변봉덕 코맥스 대표이사 회장

Q 50여 년 전만 해도 인터폰이 생소했다. 어떻게 사업에 뛰어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A 맞다. 당시만 해도 공장에서 가발이나 신발을 생산하는 노동집약 산업이 중심이었다. 청년 시절, 정보통신의 중심지인 세운상가에 자주 놀러 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정보통신 산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언젠가는 정보통신 산업이 국가산업을 선도할 거란 생각을 했다. 전자기기 개발과 제조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인터폰 사업을 구상했다. 기존에 없던 거니 오히려 기회가 될 거란 자신도 있었다. 전화기와 달리 인터폰 같은 구내통신 사업은 국가의 제약이 없었고, 해외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란 판단이 들었다. 그러던 중 1968년 ‘중앙전자공업사’로 시작해 도어폰을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1970년대에는 주택붐이 일면서 1970~80년대의 웬만한 고급주택에는 거의 우리 제품이 사용됐다. 2000년대부터는 인터넷 기술이 접목된 홈네트워크 제품을 개발해 시대를 이끌어나고 있다.

 

Q 정보통신 시장은 변화가 워낙 빠르지 않나. 패러다임을 선도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A 코맥스는 창업 초기부터 해외시장에 눈을 돌려 1970년대 이미 세계 전자박람회에 참가했다. 또 해외광고 등 적극적인 글로벌 마케팅 전략을 펼쳐 시장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 이처럼 미래전망을 볼 수 있는 식견을 갖고자 전문지식과 새로운 기술, 시장을 항상 공부하고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오면서 정보통신 기술이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지 않나.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리면 금세 경쟁자들에게 뒤처지는 경쟁사회가 됐다. 이런 때일수록,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창조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아무리 규모가 큰 회사라고 해도 미래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면 그 회사는 몇 년 안에 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Q 코맥스 역시 위기가 많았을 텐데, 역경을 이겨나간 과정을 알려달라.

A 사업 초반에는 개발한 제품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는데도 제품이 팔리지 않아 파산 직전까지 간 적도 많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찾는데 애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탈출구가 보였다. 한번은 납품했던 제품에 불량신고가 빗발쳤다. 인터폰에 들어가는 스위치가 불량이었다. 당시 판매했던 제품을 모두 새 제품으로 교환하면 회사 경영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불량품으로 고객을 속일 수는 없었다. 기업은 신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제품을 산 고객을 일일이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새 제품으로 교체했다. 현재의 ‘리콜’ 제도인 셈이다. 당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질 거라 생각했는데 고객들이 오히려 감동하면서 우리 제품을 홍보해 줬다. 신뢰가 쌓이다 보니 결국 주문량이 더욱 늘어났다.

위기가 이뿐이었겠는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왜 이런 위기가 왔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잘못한 부분을 고치며 새롭게 성장하자는 마음으로 위기를 이겨내 왔던 것 같다.

Q 대한민국 제1호 명문장수기업이 됐다. 비결은 무엇인가.

A 명문기업으로 선정돼 회사로서는 큰 영광이긴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아 부끄럽다. (웃음) 우리나라 산업의 역사가 짧은데, 장수 중소기업을 독려하려고 준 게 아닌가 싶다. 다만, 한 가지 분야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건 비결이라 생각한다. 또 기업이 오랫동안 사업을 영위하려면 ‘관계’가 중요하다. 협력사, 고객사들과 신뢰를 구축했던 것이 오랜 기간 기업을 운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관계를 맺은 지 40여 년 이상 되는 해외 고객사들도 있는데 이들 회사는 자식·손자까지 우리 회사와 관계를 이어간다. 고객뿐만 아니라 내부 직원에게도 같은 관점으로 접근한다. 회사의 미래는 직원에게 달렸다. 회사 내에서는 인재를 육성하고, 내부에서는 신뢰 관계를 구축한 게 반세기 동안 성장한 힘이었다.

11-2.jpg

Q 100년 기업으로 성장하고자 경영권을 2세에게 승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A 10여 년 전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우리 회사를 거액에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기업을 매각할 것인지, 장수기업으로 끌고 갈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아들에게 가업 승계에 대한 결정권을 줬다. 대기업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이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지만, 중견ㆍ중소기업은 이런 것들이 부족하지 않나. 장수기업으로 가기 쉽지 않다. 아들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들이 이탈리아에 살면서 100년 넘는 중소기업을 많이 봐서인지 아버지가 창업한 회사를 명문 장수기업으로 만드는 것도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하더라. 과거 50년을 넘어 코맥스가 유럽의 존경받는 강소(强小) 제조기업처럼 미래 50년에도 더욱 성장한다면 창업자로서 매우 보람될 것 같다.

 

Q 최근 사회적으로 재벌개혁이 화두가 되면서 반(反)기업 정서도 확대되는 것 같다.

A 안타까운 일이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정치권과 정부는 큰 차원에서 기업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4차산업 시대가 된 만큼 새로운 혁신과 기술, 발전이 이뤄지고 있다. 기업들이 새로운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Q 어려움 속에서도 수출 시장을 개척하며 고군분투하는 중소 기업인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A 도전정신과 성실함이 중요하다고 조언하고 싶다. 1970년대 초반, 해외로 진출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우리나라 대부분 기업들은 수출을 생각하지 않았다. 기반이 없었고 자금도 부족했지만, 우리 회사의 제품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또 앞으로는 해외 수출이 회사의 미래 먹거리라고 생각해 세계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첫 시장이 미국이었다. 초창기에는 물론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전쟁’, ‘분단’ 국가일 뿐이었다. 해외 바이어들은 잘 알지 못하는 국가의 제품이다 보니 신뢰할 수 없다며 퇴짜를 놓기 일쑤였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 바이어들을 만나려고 열심히 뛰어다녔고 현재는 120여 개의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감회가 새롭다. 꾸준히 확신을 하고 개척해 나가면, 언젠가 빛을 볼 수 있을 거다.

 

정자연기자

사진=전형민기자

 

댓글(0)

댓글운영규칙

-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법률에 의해 제해될 수 있습니다. 공공기기에서는 사용 후 로그아웃 해주세요.

0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