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 안으로 봄볕이 스며든다. 책으로 넘쳐나는 꽉 찬 서가는 겨울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답답해 보였다. 책 정리를 하려고 책장 앞에 서서 찬찬히 살펴보니 최근 몇 년 동안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이 수두룩했다. 책에 담긴 내 마음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한 권 두 권 골라내었다. 경중은 있지만 늘 끌어안고 왔던 책들이었으나, 이번에는 매정하게 이별을 고하기로 했다. 그렇게 몇 상자 분량의 책을 걸러내자, 빼곡하니 겹겹으로 쌓여 있던 책장에 빈칸도 생기고 덩달아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 듯 여백의 한가로움이 전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책보고’에 가게 되었다. 2019년에 문을 연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10년간 비어 있었던 한 유통업체의 창고를 공공 헌책방이자 책과 관련한 전시와 특강이 이어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리모델링 된 서울책보고는 일반적인 도서관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독립출판물과 명사의 기증도서를 열람할 수 있어 도서관 기능도 더하고 있다.
헌책방인 만큼 책을 팔기도 하는데, 공공 헌책방으로서 그 운영방식이 독특하다. 청계천 헌책방거리의 헌책 서점을 비롯한 서울시 소재 29곳의 헌책방으로부터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헌책 12~15만 권을 위탁받아 판매하고 있다. 서울책보고는 단순히 헌책을 판매하는 곳이라기보다는 헌책방과 독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서가의 배치도 주제 분류가 아닌 서점별로 되어 있어 도서관이나 기존 서점의 도서분류에 익숙해져 있다면 조금 어수선하게 와 닿을 수도 있는 전시 방식이었다. 그러나 한 발짝 물러서면 주제 분류가 아니기에 전혀 예기치 못한 책들을 불쑥불쑥 만나게 된다. 내비게이션 없이 떠나는 지적 항해를 원한다면 그 낯설고 둔탁한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는 책의 ‘보물창고’인 곳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어떤 서점에서보다도 이 공간에서 헌책을 즐기는 독자들은 편안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잠실나루역 근처에 지상 1층, 1천465㎡의 웅장한 규모로 자리한 서울책보고를 들어서면 책벌레를 형상화한 아치형 철제 통로를 중심으로 높다란 서가들에 책이 가득 차 있다. 터널과도 같은 철제 통로를 따라 맴돌다 보면, 마치 시간여행자가 플랫폼을 서성이며 떠나갈 시대를 찾아나서는 느낌이 든다. 서울책보고에서는 헌책을 ‘시대 정신과 사람의 체온을 품은 유기체’라고 말하고 있다. 1950년대, 80년대, 9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세상에 나온 이 유기체들은 서가 곳곳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품고 가만히 숨만 뿜어내는 것 같다. 그 숨결은 책의 향기를 더 진하게 만들고 향수와 추억의 온기를 전해 마음을 잔잔히 데워 준다. 체온을 품었다는 말이 맞았다.
불과 얼마 전에 추억의 무게가 가볍다 싶어 내쳐짐을 당했던, 한때 나의 책이었으나 지금은 헌책이 되었을 그 책들이 머릿속에서 스쳐갔다. 그들도 어쩌면 이곳에 와서 누군가에게 자신만의 숨결을 전하며 이렇게 향기를 뿜어낼 테지. 버린 책들에 대한 한 조각의 미련일까? 갑자기 공간의 여유를 누리자고 괜스레 다 버렸나 싶은 생각이 휙 지나갔다. 그러나 누군가는 버린 기억이고 시간이지만 그것이 또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색다른 환대를 받을 수 있음을 경험하고 나니, 떠나 보낸 책들에 대해 실낱같이 일었던 미련 역시 완전히 거두어졌다. 나는 책을 떠나보냈지만, 그 책과 함께했던 수많은 이야기와 나날들은 온전히 내 것이기도 하니까.
오승현 글로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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