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박물관 미술관 다시보기] 양평 ‘잔아박물관’
[2020 박물관 미술관 다시보기] 양평 ‘잔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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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장은 세계문학관으로 잔아 김용만 소설가가 그동안 세계 100여 국가를 다니면서 카프카, 도 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푸슈킨 등 대문호 열세명의 기념관을 답사하고, 작가론과 작품론을 <서정시학>에 3년 동안 연재한 내용을 테라코타 흉상과 함께 정리해뒀다. 윤원규기자

‘글과 흙의 놀이터’ 잔아박물관 마당에 들어서자 열댓 명의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온다. 마스크를 썼지만 재잘대는 아이들의 환한 표정이 늦가을 햇살에 눈부시다. 아이들이 가득한 박물관 풍경이 신선하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살짝 들여다본다. 아이들은 “나도! 돈키호테”라는 주제로 마련된 ‘2020년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 수업에 참여했던 것이다.

■ 서리 맞은 단풍잎은 봄날의 꽃보다 더 붉다

양평 서종면 사랑제길 9-9에 자리 잡고 있는 잔아박물관(관장 여순희)은 아이들의 표정처럼 밝고 따뜻한 공간이다. 박물관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글과 흙이 만나 화학 작용을 일으킨 까닭일 것이다. 잔아박물관은 ‘마지막 아이’라는 뜻을 가진 ‘잔아(殘兒)’라는 필명을 쓰는 소설가 김용만씨가 사비를 털어 설립한 문학박물관이다.

양평군 서종면에 위치한 잔아박물관은 세계적인 문호들과 국내 문인들의 테라코타 흉상, 사진, 작품해설, 육필, 도판 등을 통해 문학의 역사와 흐름의 이해를 돕는다. 잔아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충남 부여에서 출생한 잔아 김용만은 명문 중고교를 졸업하고도 가정형편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때 자살을 꿈꾸기도 했던 젊은이였다.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속으로만 불태우던 그는 49세에 ‘현대문학’에 늦깎이로 등단했다. 쉰을 넘겨 대학에 진학하여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박사과정을 수료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대학 강단에 섰던 그는 문학도들이 편안하게 문학을 이야기하는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아내 여순희 작가의 도움이 컸다. 남편의 뜻을 순순히 따라주었고 이날까지 박물관을 함께 가꾸고 있다. 글과 흙의 놀이터에서 ‘흙’은 아내 여순희 작가를, ‘글’은 잔아(김용만) 소설가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전시실에서 한 장의 사진과 마주한다. 잔아는 고인이 된 소설가 박완서와 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교수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다. 세 사람의 등 뒤로 붉은 단풍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니 때는 늦가을이다. 고 김윤식은 생전에 잔아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세계문학기행’을 받고 작가에게 보낸 짧지만 긴 울림을 주는 편지가 사진과의 사연을 감동적으로 연결해 준다. 김윤식은 ‘폭풍의 언덕’편에서 공감을 표시하며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오래전 저도 이곳에 들러 제법 긴 기행문을 쓴 바 있었소. 모든 것이 흘러가는 것. 세월 속에 문학이 살아 있음을 실감하고 있소.” 편지 끝에 “언제가 김사백의 그 박물관을 구경하겠다”고 했던 김윤식 교수는 약속대로 소설가 박완서와 함께 잔아박물관에 들렀던 것이다.
 

2층 한국문학관에선 이육사, 한용운, 서정주, 박경리 등 한국의 작가들과 한국문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윤원규기자

■ ‘애나’는 잔아의 분신이다

잔아 김용만 작가의 안내로 박물관을 둘러보다 떠올린 단어는 ‘열정’이다. 2020년 9월에 펴낸 잔아의 장편소설 ‘애나’(원제 미친 사랑)는 신문에 4년 동안 연재했던 것이다. 연재하면서 박물관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렸다. 2014년 6월에 올린 1회분의 조회 수는 1128회, 12월에 올린 마지막 91회의 조회 수는 1078회다. 신문지면과 인터넷으로 동시에 독자들과 만났던 작품이다. “범죄면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잔인하다.” 소설 ‘미친 사랑’의 첫 구절이다. 경찰전문학교 수사학 강의실의 풍경이 생생하다. 작가의 특별한 이력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젊은 날 그는 범죄현장을 수사했던 경찰관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애나’의 책 표지에 어떤 소설인지를 짐작케 하는 문구가 실려 있다. “사랑에 미친 광녀와 순정한 경찰관 출신 작가의 기구한 악연이 제3공화국 격동기의 수많은 사건들과 뒤엉킨 체험소설, 연재 중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문제작!”

여든 작가의 놀라울 만큼 단호하고 도발적인 말이 이어진다. “행복은 너를 타락시킨다! 악연의 뜻은 인연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찢어버리고 태워버리고 아주 없었던 걸로 하얗게 표백해 버리고 싶은 부정의 추억.”

1층 아동문학관에서는 세계와 우리나라의 다양한 문학세계를 만날 수 있다. 피터팬, 정글북 등 영문 소설 및 삽화. 윤원규기자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애나’에서 인간의 숙명과 비극을 읽었다. “애나는 때로는 아프로디테를 닮은 뮤즈처럼 보이고 때로는 그 그림자인 팜므파탈처럼 보이기도 한다. …욕망의 미끄러짐이라는 숙명으로 인해 인간사의 비극은 얼마나 다채롭게 연출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박물관 전시실에서 이 소설의 전신(前身)인 ‘인간의 시간’에 얽힌 사연을 찾을 수 있는 신문기사가 있다. ‘인간의 시간’은 출판 당시 중앙일간지에 빠짐없이 소개될 정도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동아일보에 ‘한가위에 읽을 만한 책’으로 ‘인간의 시간’을 소개하고 있는데, 함께 소개된 국내 작가의 소설책은 ‘깊은 슬픔(신경숙), 한 말씀만 하소서(박완서), 은어낚시통신(윤대녕)이다. 내친 김에 기사의 일부를 보면 “김용만씨의 장편 ‘인간의 시간’은 한 여성의 이루어질 수 없는 비련을 그린 연애물이다. 우리 문단에서 드물게 보는 경찰출신 작가의 작품답게 한 형사의 생활을 통해 수사 일선의 다양한 풍경들이 묘사된다. 더불어 굴욕외교와 삼선개헌 반대시위, 김신조 사건 등 60~7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이 흑백사진처럼 등장해 읽는 맛을 더해준다.”

‘애나’는 작가가 가장 애정을 쏟았던 작품인 셈이다. 새삼 작가의 얼굴을 본다. 열 살은 젊게 보이지만, 작가의 나이는 올해 여든이다! 그는 여전히 현역 작가이다.
 

잔아 김용만 소설가의 신작소설 ‘애나’. 1964년 6∙3항쟁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시대사 및 풍속사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작가가 경찰로 재직하면서 수행한 경험을 녹여냈다. 윤원규기자

■ 아름다운 인연과 특별한 사연을 만나는 공간

잔아 김용만의 문학관이 잘 드러나는 ‘세계문학 기행’은 1층 전시실에서 작가들의 흉상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불멸의 작품을 남긴 작가들의 집필실과 그들이 살았던 집을 찾은 잔아의 사진과 관련 글이 걸려 있다. 그 아래에 전시된 아내 여순희 작가가 흙으로 빚은 해당 작가의 테라코타 흉상은 남편 잔아의 글과 조화를 이룬다.

1960년대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는 김승옥의 친필원고도 인상적이다. 박물관을 방문한 김승옥은 자신이 외우고 있던 ‘무진기행’의 도입 부분을 직접 써서 남겼다는 것이다. 시인 박두진, 고은, 황동규, 소설가 최인훈, 최인호, 이문열 같은 문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작가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잘 보여준다. 제1전시실 한국문학관은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희귀본 서적,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사진과 육필원고가 전시되어 있다. 작고 문인들은 물론 김연수, 문태준, 함민복 같은 젊은 시인과 작가의 흉상도 전시되어 있다. 책으로 만났던 친숙한 작가들이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제2전시실 세계문학관은 아이들에게 높은 이상과 지성의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 대표적인 국내 작가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카프카, 빅톨 위고, 스타인벡, 에밀리 브론테, 찰스 디킨스 등 세계 문호들의 정신세계를 체험하도록 꾸며져 있다. 제3전시실은 어린이문학관이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아동문학의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윤석중, 권정생 같은 아동 문학가들의 사진과 함께 동화책 속 이야기 장면들이 벽화로 꾸며져 있다. 한국 전래동화 속 이야기를 테라코타로 재현한 것도 재미있다. 잔아박물관은 어린이의 관람을 특히 환영한다.?김작가는 어린 시절에 문학을 가까이해야 하는 까닭을 이렇게 들려준다. “세상사는 수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적 판단보다도 신비나 환상같은 감성적 느낌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 괴테, 헤밍웨이, 도스토예프스키, 셰익스피어?같은 대 문호들의 이름만 외우게 해도 어린 정신에 엄청난 문화충격을 주게 됩니다.”

2층 잔아의 방은 잔아 김용만 소설가의 일생과 문학세계를 다룬 전시 공간이다. 잔아박물관 관장이자 소설가 잔아 김용만. 윤원규기자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고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잔아 김용만의 작품은 TV와 라디오 방송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첫 소설집인 ‘늰 내 각시더’(실천문학)은 KBS 단막극으로 방송되었고, 독서신문에 연재했던 장편 ‘능수엄마’(서정시학)는 KBS라디오 일일연속극으로 제작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그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해설을 달고 출판된 장편 ‘칼날과 햇살’(중앙M&B)은 이청준, 김화영, 정과리 추천을 받아 동인문학상 심사작품에 선정되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금으로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박물관은 이처럼 작가의 작품과 직접 관련된 것은 물론 초등학교 졸업사진과 첫 월급봉투까지 전시하고 있어 80년 거친 세월을 헤쳐 온 한 인간의 역정을 드라마처럼 감상할 수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가까운 잔아박물관의 주변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잔아문학관을 들렀다 근처에 있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도 함께 둘러보면서 만추의 정취에 빠진다면 가을이 떠나가도 아주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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