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2차대전 후 나치 부역자를 처단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념분쟁이 없는 순수한 민족정서만이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이 광복후 이념분쟁 속에서도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었던 것은 전체주의 사회이므로 가능했다. 남한이 친일파 처단에 실패한 것은 이념분쟁에 겹친 개인주의 사회인데 연유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과는 국교를 거부할만큼 배일사상이 짙었으면서도 친일파를 등용한 것은 이념분쟁 때문이었다. 즉 공산당 보다는 그래도 친일파가 낫다고 보아 공산당을 잡기위해 친일경찰을 등용했던 것이다. 경찰 경험이 전혀 없는 광복경찰로는 공산당과 적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경찰분야부터 시작된 친일관료 등용이 마침내 행정 사법분야까지 확대했다. 일제 친일관료 등용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새롭게 세력화하여 결국 반민특위가 해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친일파를 구분하는데는 그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학교교육, 사회교육을 망라해 황국신민화한 일제치하에서 일장기를 흔들며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수 없었다. 그들이 친일파라면 일제 때 산 사람은 모두가 친일파로 몰릴 수 밖에 없다.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명단과는 달리 여성계의 김활란 모윤숙 황신덕 박인덕 고황경 송금선, 문화예술 및 학계의 김은호 현제명 홍난파 서정주 이능화 심형구 정만조, 언론계의 김성수 방응모 장덕수, 종교계의 권상로 등 16명을 친일파로 규정한 것은 독단이다.
광복회가 선정한 이완용 등 692명의 명단은 비록 실패했지만 반민특위를 구성했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의 기준이 있었지만 ‘의원모임’이 임의로 추가해 발표한 16명은 객관적 기준을 발견할 수가 없다. 또 ‘의원모임’의 구성원 끼리도 충분한 의견 수렴이 없는 몇몇 사람의 사견을 공론인 것처럼 둔갑한 것으로 전한다. 친일파 규정을 정략화 하는 것은 역사의 도용이다.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못한 과거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친일파를 규정하는 것은 광복 직후보다 몇배나 더 어려운 작업이다. 역사에 맡겨야 한다. 전문가들의 전문적 식견, 확실한 자료에 근거한 판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이 즐거워할 공연한 친일파 시비는 오히려 민족정기 확립에 혼돈만 일으킬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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