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단일후보인 최계운 인천시교육감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한 도성훈 당선인은 1985년 2월 인천성헌고등학교에서 재단의 파행적 학교 운영과 비리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첫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전교조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해직교사 생활을 하다 1994년 3월, 해직된 지 4년 6개월 만에 다시 교편을 잡았다.
이후 교직에서 종사해오던 그는 지난 2018년 지방선거 인천시교육감 선거에서 당선, 4년간 인천교육을 이끌어 왔다.
■ 충남 천안 산골서 태어난 꿈많은 소년, 느티나무 벗삼아 성장
도 당선인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기도, 버스도 없던 산 중턱의 어느 산골마을이다. 천안까지 가려면 장장 3시간의 산길을 헤쳐가야 했다.
도 당선인은 사찰과 사당 등을 짓는 대목(大木)이던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에서 살다가 산골의 궁핍함을 이기지 못해 강원도 철암의 한 공장으로 향한 부모의 손을 떠나 조부모와 함께 성장했다.
그런 그에게 어른 양팔로 세 번을 둘러야 할 정도로 큰, 고향 입구를 지키던 400살의 느티나무는 부모를 추억하던 공간이자 친구다. 도 당선인은 그곳에서 미래의 꿈과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키워갔다. 봄이면 산에 올라 친구들과 함께 진달래를 따 먹고, 달래와 냉이, 다래, 으름, 머루, 칡뿌리를 간식 삼으며 조부모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 성장했다.
■ 엄격한 부모 밑에서 배운 교사의 덕목
도 당선인이 다시 부모와 재회한 건 10년이 지난 어느날이다. 한없이 그를 사랑했던 조부모와 달리 부모는 어리광만 부리며 살던 철부지 소년에게 한없이 엄격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잘못될까 회초리를 들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묵묵히 바라보며 신뢰를 전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 어머니의 엄격함, 아버지의 신뢰는 그가 교사로서의 삶을 택하는 데 가장 큰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1980년대 초반 민주화 요구 집회와 시위 속에도 그는 베이스기타를 잡던 낭만 대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교사를 꿈꾸는데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줬다. 시골에서 훈장으로 한학을 배워 손자에게 가르쳐주던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는 스승의 보람을 느꼈고,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교사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 낭만 대학생, 사학재단 비리와 맞선 투사로 변하다
도 당선인은 1985년 2월 대학을 졸업한 지 1개월이 지난 뒤 사립학교이던 인천 성헌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이곳에는 재단 이사장의 부인이 교장으로 재직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학재단의 비리는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1987년 새로운 학교재단이 들어섰지만, 재단은 부족한 교사를 임시 강사로 대체해 채용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도 당선인은 고심끝에 동료교사 8명과 함께 1988년 1월 함께 여행을 떠나 서로의 문제를 보듬고 공감할 공동 기구를 만들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렇게 1988년 8월23일, 뜻을 더한 교사 23명이 평교사협의회를 공식 발족했고, 그는 첫 회장을 맡았다.
도 당선인은 첫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결국 교사협의회 결성을 이유로 해임됐다. 청문회를 통해 교사 임용 비리 등 학교 전횡의 폭로가 이뤄졌고, 도 당선인은 교사와 학생·학부모 100여명이 학교로 몰려온 뒤에야 다시 복직했다.
■ 전교조 결성 본격화…해직교사 4년6개월
성헌고의 민주화 투쟁이 끝을 향해 갈 무렵 전국 교사협의회가 교원노조건설특별위원회를 발족하는 것으로 전교조 결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1989년 6월 10일 전교조 인천지부가 800여명의 교사와 함께 결성식을 갖고 정식 출범했다.
그러나 도 당선인은 학교민주화를 주도하고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89년 8월 1일자로 직권면직 조치됐다. 1천500여명의 대량해고 사태에 항의하며 전국 해직교사들과 명동성당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을 때다.
도 당선인은 단식농성을 이어가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부평고 출신 해직교사 6명을 보며 서로를 지켰다. 교육민주화를 포기하지 말자고 서로를 다잡았다. 그렇게 4년6개월의 해직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부인은 묵묵히 남편 곁을 지켰다. 도 당선인은 부모의 생신에 선물하나 건네지 못하는 못난 아들이었다.
■ 학교로 돌아온 해직교사, 교육민주화를 외치다
도 당선인은 1992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후 해직교사들의 원상복귀를 위해 달려갔다. 그리고 1994년 신규 특별채용 형식으로 관교중학교에 부임했다. 이때도 전교조는 불법이었다. 복직은 아니었지만, 선생이야말로 평생을 해볼 만한 소중하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그를 보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게 했다.
전국 최초 여자공업고등학교인 인천여자 공고에서 일하던 1999년, 전교조는 합법노조로 인정받았다. 도 당선인은 1년 6개월여를 전임자인 사무처장으로 일하다 2001년 다시 교사로 복직했고, 2002년 인천지부장선거에서 11대 인천지부장에 올랐다. 이후 도 당선인은 12대 지부장까지 연임하며 교육개방, 교육행정정보시스템(네이스) 도입, 학교급식 지원조례 등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전력질주하는 삶을 살았다.
부개고등학교에 부임한 그는 인천 참교육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반찬가게 사장님도, 정육점 사장님도, 국수집 사장님도 모두 힘을 모았다. 그렇게 4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해 장학금을 모아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이후 동인천고 부임 당시에는 인문계 고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고민하며 다양한 제도개선의 꿈을 갖는다.
도 당선인은 2016년 행복배움학교(인천형 혁신학교)인 동암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교 혁신을 이끌었다. 동암중은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소통하는,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곳이었다. 학부모와 학생도 모두 학교 일에 발벗고 나섰고, 욕설과 체벌이 사라진 자리에 칭찬과 웃음이 가득찼다.
■ ‘삶의 힘이 자라는 인천교육’을 이끌다
도 당선인은 2018년 3번째 직선 교육감에 출마해 당선한 뒤, 혁신학교를 필두로 자신만의 교육 철학을 실현해갔다. 그의 임기동안은 인천교육은 물론 전국적으로 쉽지 않은 일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인천의 적수사태로 학교 급식이 멈춰섰고,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재난 속에서 학교 현장은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개인적으로 불미스러운 일도 겪었다. 보좌관들이 공모제 교장 관련 비리로 재판에 넘겨지면서 그가 지켜온 청렴도에 적색등이 들어오기도 했다.
도 당선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1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학생중심의 교육을 실현한다는 목표로 공약 달성률 97%를 기록했다. 지난 임기 4년간 전국 최초로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했고, 평등교육의 차원에서 무상교복, 유치원 및 초등학교에서의 돌봄교실을 확대했다. 그는 오랜 기간의 낡은 교육행정을 민주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하는 등 새로운 인천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도 당선인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제2의 도약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교사의 자긍심과 전문성은 높이면서도 존중과 공정함이 살아 숨쉬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시민과 학부모를 교육의 동반자로 삼아 나아가겠다는 게 그의 앞으로 4년간의 목표기도 하다.
◇학력
-부평남초등학교, 부평동중학교, 부평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력
-성헌고등학교(현 인제고등학교) 교사
-관교중학교 교사
-부개고등학교 교사
-인천여자공업고등학교(현 인천뷰티예술고등학교) 교사
-동인천고등학교 교사
-동암중학교 교장
-인천호남향우회 특별자문위원
-(사)재인천 충남도민회 특별고문
-인천경영포럼 고문
-인천시민사회단체연대 지도위원
-인천시교육감
-제8대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부회장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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