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경기역사문화유산원장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서울시민 몇몇이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를 찾았다. 그런데 홍콩인으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영화 촬영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한국-홍콩 합작영화를 우리나라에서 많이 찍었던 시절이다. 일행이 장대를 둘러보고 있는데 그들이 세트장치를 하느라 누각 기둥에 마구 못질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즉시 한국 측 제작요원에게 귀한 문화유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요청했다. 그러자 자기들은 문공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촬영 허가를 받았다며 간섭하지 말라며 화까지 냈다. 나오는 길에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알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유사한 일이 2025년에도 벌어졌다. 상황도 거의 똑 같다. 건축가인 어느 시민이 지난해 12월30일 세계유산인 안동의 병산서원을 찾았다가 KBS 드라마팀이 촬영을 위해 만대루(晩對樓·보물) 기둥에 못을 박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주변 관람객들과 함께 항의하자 이미 안동시의 허락을 받았다며 적반하장식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언론매체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KBS는 결국 사과하고 서원 촬영분을 모두 폐기하기로 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 프로그램 촬영 중 문화유산 훼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4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은 195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상 촬영의 단골 장소였다. 정부 주관으로 제작된 대작 ‘성웅 이순신’(1962년), 한국 최초의 70㎜ 컬러 영화로 알려진 ‘춘향전’(1971년)을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영화, TV, CF의 촬영이 이뤄졌다. 수원화성도 마찬가지다. 이 두 곳의 촬영 숫자는 국내 타 세계유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촬영에는 일반 장비 외에 크레인 등 중장비가 동원되고 스태프도 100명이 넘는 경우가 많아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문화유산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훼손 시 복구도 쉽지 않다.
과거에는 아무 개념 없이 촬영이 이뤄졌다. 동래성 싸움을 재현한 ‘성웅 이순신’의 남한산성 로케이션은 당시 사진으로 봤을 때 상당한 성곽 피해를 발생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부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것이 갖는 가치를 잘 알고 있다. 물론 문화유산을 활용해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며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영상 산업’이 가진 자본과 시장의 논리다. 이들은 적은 비용으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문화유산 보호를 후순위로 놓고 있는 듯하다.
이번 병산서원에 못질을 한 KBS측은 향후 문화유산, 사적지, 유적지 등에서 촬영할 경우 전문가에게 자문하는 내용 등의 가이드라인을 새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지침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문화유산에 대한 업계의 인식이 뿌리부터 달라져야 한다. 법 규정도 손봐야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문화유산을 대하는 영상 산업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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