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학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동부의 에트나 화산과 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화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얼음 저장 기술 발전의 시작을 알린 장소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랜 화산 활동으로 고도가 높아진 에트나 화산의 북쪽과 동쪽은 눈과 얼음이 여름철에 더 오래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화산지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자연 동굴은 얼음을 장기간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후 화산암(현무암)의 단열 기능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를 얼음 저장고의 건축 재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자연 상태의 냉각 자원으로 얼음과 눈을 저장해 활용하는 기술적인 기반은 그렇게 마련됐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옛 얼음 저장고는 차가운 온도를 관리할 수 있어 종교적인 음식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이슬람교에서 금주 규율은 대체음료 개발에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술 대신 과일즙이나 꽃을 기반으로 한 시원한 음료가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는 듯한 더위’를 의미하는 라마단 기간에는 (이슬람력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한낮에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무더위 속에 식자재를 차갑게 보관해 둘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런 상황과 함께 할랄·하람 음식문화도 그 필요성에 한몫했다. 기독교의 경우 경건해야 할 사순절 기간에는 생선, 과일, 채소, 견과류 같은 신선한 식자재가 필요했는데 당시 겨울과 초봄에는 이런 신선 식료품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냉장 기술은 필수적이었다. 힌두교의 경우 얼음과 우유로 만드는 전통 아이스크림 쿨피 때문에 얼음 저장고의 역할이 중요했다. 유대인은 코셔 규정에 따라 고기와 유제품을 엄격히 분리해 먹어야 하는 율법 때문에 얼음 저장고가 긴요했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금욕생활과 관련된 간단한 보양식을 위해서나 통증 완화라는 의료 목적으로 얼음이 필요했다. 한편 로마인, 특히 귀족들은 에트나 화산이나 베수비오 화산에서 채집한 눈과 얼음에 꿀 뿌려 먹는 것을 즐겼다.
이탈리아 출신의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메디치 가문에 입성할 만큼 기계 발명에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그는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에게서 회화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서 조각을, 조르조 바사리에게서 건축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여러 업적 가운데 1589년 페르디난도 1세의 결혼식 축하 공연(인터메디)을 위해 우피치 궁전에 재설치하게 된 액자 무대(프로시니엄)와 무대의 특수 효과를 위해 설계한 기계 장치들은 연극사 및 영화사에서도 오늘날까지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부온탈렌티는 회전 운동 시스템을 활용해 무대 배경, 소품의 이동, 등장인물(고대 위인 또는 신)의 등장과 퇴장, 조명 효과 등을 정밀하게 제어했고 이를 위해 기계적 장치의 자동화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1565년 12월, 코시모 1세는 페르디난도 1세의 형 프란체스코 1세의 결혼식을 계기로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스페인 사절단을 팔라초 피티와 보볼리 정원으로 초청해 환영 만찬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고자 했다. 두 형제의 결혼식에 모두 관여한 부온탈렌티는 만찬회를 위해 얼음, 소금, 레몬, 설탕, 달걀, 꿀, 우유, 와인 등을 균일한 속도로 배합하는 장치를 고안한다. 당시 겨울이었음에도 냉각 시스템과 회전 메커니즘을 결합한 이 방식으로 그는 부드러운 질감과 차가운 온도를 고르게 보전한 디저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1589년의 그 공연(인터메디)에서 사용할 무대장치 아이디어에 창발적인 영감을 준 것은 아닐까. 어쨌든 피렌체의 보볼리 정원에 자리한 얼음 저장고에서 부온탈렌티는 ‘Gelu’(얼음)처럼 차가운 최초의 ‘Gelato’(젤라토)를 만들어냈다.
댓글(0)
댓글운영규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