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여행하다 보면 고성과 유적, 박물관과 미술관, 오래된 마을과 전통시장이 단순히 과거의 흔적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일상 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문화유산을 보존의 틀에 가두지 않고 국가 브랜드와 지역경제를 견인하는 핵심 자원으로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관리, 활용해온 결과다. 이러한 접근은 저출산과 고령화, 지역소멸, 관광 다각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영국의 사례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국가, 지방자치단체, 민간단체 간의 유기적인 협력 구조다. 정부기관인 히스토릭 잉글랜드가 법적 보호와 연구, 정책을 담당하고 지방정부는 현장 관리를 맡는다. 여기에 1895년 시민 주도로 설립된 민간 비영리단체 내셔널트러스트가 전국 500곳 이상의 성곽, 저택, 정원, 해안선, 농지를 직접 소유, 운영한다. 이 민간단체는 회원 회비, 기부, 입장료 수익 등으로 재정을 유지하며 정부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했지만 법적 지위와 공익적 기능이 보장돼 국가 문화유산 보존 체계의 한 축을 이룬다. 최근 한국이 문화재청을 문화유산청으로 확대 개편하며 활용도를 강조했다. 영국은 그보다 한발 앞서 이를 제도와 운영에 깊이 반영하고 있었다. 이 구조 속에서 영국은 문화유산을 관광과 콘텐츠 산업과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대표적인 예가 킹스크로스역의 ‘9와 3/4 승강장’과 패딩턴역의 ‘페딩턴 베어’다. ‘해리포터’와 ‘패딩턴’이라는 세계적 콘텐츠를 철도역이라는 교통 인프라와 결합해 관광 명소로 만든 것이다. 방문객은 단순히 사진 촬영에 그치지 않고 기념품점, 테마카페,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며 소비로 이어진다. 문화유산에 스토리텔링과 현대 대중문화를 접목해 경제적 파급력을 극대화한 대표 사례다. 승강장 인증샷을 위해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략은 최근 한국에서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넷플릭스 화제작 ‘케이팝 데몬헌터스’는 서울의 전통 골목과 한양도성 성곽길을 케이팝과 판타지 액션 서사 속에 녹여냈다. 전통 경관과 현대 대중문화가 결합하면 콘텐츠 속 장소가 곧 여행지로 인식되는 효과가 크다. 이미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드라마, 영화 촬영지를 직접 찾는 로케이션 투어가 활발하다. 영국의 킹스크로스와 패딩턴이 그러하듯 서울과 전국의 역사, 문화 공간도 스토리와 체험 요소를 결합하면 강력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문화유산을 어떻게 살아있는 이야기로 만들고 관광산업과 연결할 것인가. 내셔널트러스트가 운영하는 시골 저택에서는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레스토랑, 전통공예품 판매, 계절별 축제를 결합해 사계절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처칠의 생가이자 말버러 공작의 대저택인 블레넘궁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공간을 카페로 활용해 방문객이 귀족이 된 듯한 시간을 즐기게 만든다. 이렇게 문화유산은 지역주민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와 자부심을, 방문객에게는 잊지 못할 여행 경험을 제공한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여전히 아쉽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궁, 서원, 사찰이 있음에도 보여주기식 단발성 행사나 차별화되지 않은 축제가 난립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그램의 깊이나 체험의 다양성, 지역성과의 결합이 부족하다. 영국의 사례와 K-콘텐츠의 가능성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첫째, 역할 분담 구조 확립이다. 중앙정부는 법적 보호와 정책을 총괄하고 지방정부와 민간단체가 운영 및 활용을 주도하면서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둘째, 현대 트렌드와 역사적 사실을 결합한 몰입형 경험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지역적 특색 부여다. 장소가 가진 고유한 이야기와 차별화된 요소를 살려야만 지속가능한 경쟁력이 생긴다. 문화유산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핵심 콘텐츠다. 그 가치를 인식하고 장기적, 전략적으로 활용할 때 한국 여행의 미래는 한층 풍요롭고 지속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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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25-08-18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