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오즈의 마법사’에서 마주한 AI

1900년 출판된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인 작가 라이먼 프랭크 바움이 어린이를 위해 쓴 소설로 출판 직후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책은 아이들이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을 찾도록 이끌었고 더불어 도로시,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착한 마녀 글린다 등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당시 전 연령대 미국인들의 상상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바움은 총 14권의 오즈 시리즈를 더 집필했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 역시 1939년 제작돼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1914년 바움은 자신의 오즈 시리즈를 영화화하기 위해 ‘오즈영화제작회사(The Oz Film Manufacturing Company)’를 설립했다. 그 직후 영화사는 3편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첫 작품은 ‘The Patchwork Girl of Oz’였고 ‘The Magic Cloak of Oz’는 두 번째 작품, ‘His Majesty, the Scarecrow of Oz’는 세 번째 작품이었다. 영화사 설립 목적은 폭력적인 서부영화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가족 친화적인 영화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영화사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Dramatic Feature Films라는 이름으로 재기를 시도했으나 이마저 실패한 후 결국 Metro Pictures에 흡수됐다가 현재는 Metro-Goldwyn-Mayer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즈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서 바움이 가장 좋아한 캐릭터는 허수아비(scarecrow)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His Majesty, the Scarecrow of Oz’를 가장 좋아했고 이 영화의 성공을 확신하기도 했다. 한편 오즈의 마법사가 집필되던 1900년대는 기존 체제와 단절하려는 진보주의가 결국 농경사회의 윤리를 기반으로 태동하게 된 소위 딜레마적인 시대였다. 이런 경향은 무지개 너머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마을을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농촌의 윤리가 현대적인 오즈의 마을에 전승돼 그 딜레마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움은 이러한 설정을 캐릭터에게도 마찬가지로 투사했다. 도로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지만 이를 단순하고 직관적으로만 해석하려는 태도를 고수하고, 허수아비는 자신에게 뇌가 없다고 한탄하지만 실은 가장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양철 나무꾼은 심장이 없다고 하지만 누구보다도 감정에 충실하며 겁쟁이 사자 역시 용기가 없다고 하지만 위기 상황이면 항상 용기를 내어 행동한다. 착한 마녀 글린다 역시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 자로서 블랙박스의 딜레마를 드러낸다. 그렇게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 사회와 역사를 모두 관통해 시대를 보듬는 이야기로 거듭난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포함돼 있는 결핍과 딜레마라는 인간성의 문법은 AI의 특성과 미묘하게 연결된다. 그 시작은 ‘허수아비’에게서 출발한다. 결정적으로 허수아비는 뇌가 없음에도 결국 가장 현명한 조언자로 인정받는다. 거기에 더해 도로시는 메타인지의 가능성을, 양철 나무꾼은 기계화된 감정의 문제를, 겁쟁이 사자는 자율적 판단 윤리를, 착한 마녀 글린다는 딥러닝 구조의 블랙박스 특성을 답습한다. 사실 AI의 초기 연구는 1940년대에 이른바 ‘전자뇌’를 구축하려는 시도에서 시작했다. 그 시도의 실패 이후 기어이 찾아낸 딥러닝 대형 언어모델(LLMs)은 뇌 없이 작동하는 블랙박스 모듈로 완전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보다는 주변의 지식, 감정, 판단, 책임을 끊임없이 보완해 나가는 오즈의 캐릭터들, 그중에서도 특히 허수아비와 같이 작동한다. AI라는 개념조차 희박할 때 허수아비의 딜레마는 우리에게 뜻밖에 AI의 특성과 알고리즘의 은유를 예언처럼 그렇게 마주하게 한다.

[문화산책] 다크투어리즘에서 배우는 교훈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과 하마스,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쟁 소식은 먼 중동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 여파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쟁이 곧 인류의 역사라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있으며, 왜 그 아픈 역사를 반복하게 되는지에 대해 성찰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 명언은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그 방법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바로 다크투어리즘이다. 다크투어리즘은 전쟁, 재난, 대형 참사 등 아픈 역사의 현장을 관광의 대상으로 삼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되새기고 배우는 관광 형태다. 이는 단순한 관광을 넘어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고 반성하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는 중요한 과정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크투어리즘 명소로는 유대인들이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에 조성된 평화기념공원, 전 세계가 놀란 9·11 테러가 발생한 옛 무역센터 자리에 세워진 그라운드제로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다크투어리즘 명소가 많이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고 고문당했던 서대문형무소, 6·25전쟁 중 포로들이 수용됐던 거제포로수용소, 남북 간 극한의 대치 속 접경지역에서 발견된 땅굴과 판문점, 미군의 사격장이었던 화성 매향리에 조성된 평화생태공원 등이 대표적이다. 전쟁 외에도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마련된 안산 단원고의 기억교실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을 보존한 민주화운동기념관, 광주의 전일빌딩도 다크투어리즘 자원이라 할 수 있다. 다크투어리즘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명확하다. 아픈 역사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로 인한 상처와 피해는 오랜 시간 지속되며 회복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철저한 예방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외 정세를 보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자들을 잘 선택하고, 그들의 권한 남용을 감시하고 끊임없이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과 깨어 있는 국민들의 의식이 필요한 것 같다. 언젠가 전쟁을 겪은 세대가 한 발짝 물러서야 우리나라가 더 성장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전쟁세대는 생존을 위해 가족과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했지만 이제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겪었던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혹독한 전쟁을 경험하고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모두 이뤄낸 우리 윗세대의 경험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기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다크투어리즘 명소들이 단순히 현장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진정성 있는 스토리를 담아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크투어리즘은 단순한 관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부디 아픈 역사가 이 땅에 반복되지 않기를,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도 평화로운 일상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문화산책] ‘백성과 함께 즐긴다’... 문화강국의 여민락

작년 7월 제정된 국악진흥법에 따라 올해 6월5일 처음으로 ‘국악의 날’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해 서울 광화문에서는 ‘여민락 대축제’가 열렸다. 6월5일은 세종대왕이 지은 악곡인 ‘여민락’이 세종실록 116권에 최초로 기록된 날(1447년 음력 6월5일)이다. 이후 이달 내내 다양한 국악 공연과 행사, 교육 프로그램, 학술대회가 마련돼 있다. 축제의 주제인 여민락은 조선 세종 때 창작된 궁중음악이며 민간 풍류곡으로 수용된 것까지 포함한 관련 악곡을 총칭한다. 여민락이라는 이름은 맹자에 수록된 ‘백성과 함께 즐긴다’라는 뜻의 ‘여민동락(與民同樂)’에서 따온 것이며 조선 개국의 정당성 그리고 백성과 함께하는 통치 철학이 담겨 있는 ‘용비어천가’의 가사로 이뤄졌다. 백성과 소통하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여민락에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정치사상이 녹아 있다. 당시 궁중음악은 왕과 귀족만의 것이었지만 세종대왕은 음악을 백성과 함께 향유하고자 했다. 여민락뿐만 아니다. 음악을 체계화하기 위해 ‘정간보’를 만들고 중국 중심의 아악을 넘어 한국 고유의 향악을 존중하고 발전시켰다. 문화의 대중화, 문화의 평등을 추구하고 민속음악도 포용하며 문화의 중심에는 백성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음악은 단지 예술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닌 백성의 삶을 어루만지는 수단이자 도덕과 질서를 바로잡는 도구로 여겼던 것이다. 백성과 더불어 음악을 나누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문화를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여민락. 이런 점에서 여민락은 단순히 우리가 지켜 가야 할 전통음악 이상(以上)의, 오늘날 문화정책이 지향해야 할 이상(理想)이라 하겠다. 얼마 전 대학로 소극장에서 시작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극본상, 음악상, 연출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했다. 브로드웨이 44번가에서 일으킨 ‘21세기의 기적’이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BTS는 그래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되며 단독 무대를 선보였다. 그야말로 ‘K-문화’의 황금기다. 그러나 문화의 꽃을 피우기까지 우리나라는 수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일제강점기 억압 속에서도 국악은 사라지지 않았고 광복 이후의 혼란기와 6·25전쟁의 참화를 겪는 와중에도 민속예술은 민중의 숨결 속에서 꺼지지 않았다. 분단이라는 아픔과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전통 단절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문화예술은 시대의 고통을 품으며 조용히 숨을 이어갔다. 문화는 끊기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고 공동체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키는 든든한 뿌리가 됐다. 그렇게 이어져 온 문화의 맥은 지금, 세계로 뻗어 나가며 K-문화라는 이름 아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경제적, 산업적 성과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궁중에서 민간으로, 왕에서 백성으로,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음악을 모두의 즐거움으로 확장시키며 공동체적 문화의 원형이자 ‘함께하는 문화’의 본질을 상기시키는 상징인 여민락. K-문화의 시작에는 모두가 함께 즐기고 공감할 수 있는 문화의 씨앗을 만들어준 여민락의 정신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문화 민주주의의 초석인 것이다. “백성과 함께 즐긴다”. 2025년 6월 새로운 대한민국에 여민락이 울려 퍼진다. 모두의 가슴속 깊은 울림과 함께 ‘글로벌 문화강국’의 내일을 기대해 본다.

[문화산책] 어사 박문수의 양면성

지방자치단체장인 도지사나 시장, 군수는 시의회의 견제를 받으며 제한된 범위에서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수령은 달랐다. 이들은 왕에게 직접 통치권을 위임받아 행정은 물론이고 사법권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하는, 사실상의 절대 권력자였다. 왕조는 수령의 전횡을 막기 위해 암행어사제도를 운용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파견된 암행어사는 총 613회에 이른다. 그중 오늘날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단연 박문수다. 박문수는 책과 드라마 속에서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민초의 억울함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정의의 상징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사로 활동한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수백명의 어사 가운데 박문수만이 ‘어사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것일까. 그 단서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박문수는 왕의 총애를 받았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하지만 동시에 실록에 ‘광인(狂人)’으로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문수는 명문 소론 가문 출신으로 경종 대에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집권 노론에 견제를 받는 처지에 있었다. 이후 영조가 즉위하자 그는 중용됐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에 오르며 입지를 굳혔다. 과거에 급제한 뒤 병조판서까지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5년이었다. 정치적으로 성공한 인물임에도 박문수의 이름 앞에 유독 ‘어사’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박문수는 영조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들이 자세를 바로잡으라 하자 “아첨하는 노예들이 그렇게 한다”고 일축했고 결국 영조는 모든 신하가 얼굴을 들고 말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발언은 거칠었고 때론 다른 신하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정6품 수찬 한현모는 박문수의 모욕적 언행을 문제 삼아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박문수는 오히려 “한마디도 못 하는 신하들이 문제”라며 왕에게 언성을 높였다. 자식마저 희생시켰던 영조조차 박문수에게는 “성질 좀 죽이라”고 타이르는 데 그쳤다. 박문수는 당시 사회의 병폐를 직시하고 그 실상을 여과 없이 진언했다. 법의 형평성은 무너졌고 권세가 있는 자는 죄를 피해 갔으며 경박한 기회주의자들만 조정에 가득했다. 그는 조선 300년의 기틀이 무너지고 있다며 왕에게 경고했고 백성의 삶과 국정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박문수의 발언은 당시 조정에 충격을 줬고 실록은 그런 그를 ‘광인’이라 표현했다. 상식과 양심을 지키는 자가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보이던 시대, 박문수는 그 한복판에서 홀로 목소리를 냈다. 어사로서의 활동은 짧았지만 임무 수행은 인상적이었다. 그는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다녀갔다는 민담이 전해질 정도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영일만 해안에 밀려든 가재도구를 보고 함경도의 수해를 직감해 신속히 지원을 요청했고 왕에게 보고하는 절차도 생략할 만큼 과감했다. 그는 백성의 삶에 실질적으로 다가가려 했으며 용인, 대구, 울산 등에서 부정한 수령을 파직시키기도 했다. 박문수는 직언을 주저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관료였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공직자의 책무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줬다. 실록은 그를 ‘광인’으로 남겼지만 백성은 그를 ‘영웅’으로 기억한다. 요즘 같은 시국에 박문수와 같은 인물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문화산책] 가능성 있는 천재에 투자하라

한국 대중음악은 이제 케이팝을 넘어 세계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눈부신 성과는 극소수에 집중돼 있으며 그 바탕이 되는 창작 생태계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신진 음악인과 소규모 제작사는 창작 초기부터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가능성 있는 콘텐츠가 시장에 진입조차 하지 못한 채 사장되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공이 일정 수준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창작 초기 단계의 음악 프로젝트에 선제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유망한 창작자들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돕고 궁극적으로는 자생적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 ‘뮤지션 투자 사업’은 이러한 필요에서 출발하는 개념으로 단순한 보조금 지원을 넘어 공공이 투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향후 수익 일부를 회수해 재투자로 연결하는 선순환 구조를 지향한다. 현재 대중음악 산업은 높은 초기 비용과 낮은 성공 확률이라는 구조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음반 제작, 공연 기획, 마케팅 등에는 수천만원의 자금이 필요하지만 창작자는 담보도 없고 신용도 낮아 민간 금융 접근이 쉽지 않다. 민간 투자 역시 성과가 검증된 아티스트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크다. 따라서 공공이 먼저 나서 고위험 영역에 투자하고 이를 기반으로 민간 투자를 유도하는 ‘마중물 역할’이 필요하다. 이는 단기 성과 중심의 민간 시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며 창작 생태계 전반을 튼튼히 하기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정책적 책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업은 단순 지원이 아닌 ‘무이자 선투자’ 혹은 ‘조건부 환수’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프로젝트당 약 3천만 원에서 1억원 내외의 금액을 선투자하고 수익이 발생하면 일부를 회수하는 구조다. 정산은 반기 또는 분기 단위로 진행하고 음원 플랫폼이나 공연 데이터를 연동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투명하게 운영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특히 민간 음악 투자사 또는 제작사와 공동 투자하는 구조로 설계함으로써 공공이 먼저 시장성을 검증하고 이후 민간의 후속 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공공 단독 사업’이 아닌 시장과의 접점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모델로 진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해외에서도 유사한 사업모델이 존재하며 그 효과는 이미 입증되고 있다. 영국 PRS파운데이션의 ‘모멘텀뮤직펀드’는 신진 음악인에게 제작, 마케팅, 투어 등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면서도 수익 일부를 회수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 통해 지난 10년간 수백명의 글로벌 아티스트를 배출했다. 미국의 ‘사운드로열티’는 창작자의 저작권 수익을 기반으로 미래 수익을 선지급하는 민간 모델로 창작자가 지식재산권(IP)을 담보로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공 혹은 민간이 창작 초기의 리스크를 감수함으로써 다양한 음악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편 음악은 지역 정체성을 담은 콘텐츠이자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따라서 ‘뮤지션 투자 사업’은 한 명의 창작자 지원을 넘어 지역문화재단 및 글로벌 유통 채널과 연계돼 창작 프로젝트의 전국적 확장, 나아가 세계 시장 진출을 돕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당 사업은 문화예술 분야에만 한정된 정책이 아니라 지역 산업정책, 청년 일자리, 콘텐츠 수출 전략과 맞물리는 중장기 투자로 해석돼야 한다. 현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예산 사업이 아니라 창작 생태계를 구조적으로 바꾸는 공공 투자 시스템이다. 공공이 먼저 움직이고 민간이 이어받아 함께 키워가는 구조. 이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음악 산업의 미래 모델이 돼야 한다. 가능성 있는 창작자가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공공이 책임 있게 지원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문화강국의 출발점이며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약속이다.

[문화산책] 문명화된 끈질긴 야만

1492년 실수투성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중국 동부 해안의 황금 도시 그랜드 칸을 찾으려다 또다시 예상 목적지에서 8천마일 이상이나 한참 벗어나 있는 카리브해에 잘못 상륙한다. 콜럼버스의 이런 실수는 곧 우리에게 왜곡된 신화를 주입하기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두 집단이 서로 살벌하게 싸운다는 이야기는 가장 치명적이다. 그것이 선과 악의 이분법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아라와크족과 전투적인 카리브족의 대립. 그 편견의 직격탄을 맞은 부족은 카리브족이다. 유독 그들은 잔인하고 호전적인 부족으로 인식됐다. 콜럼버스가 카리브족 사람들의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전쟁광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카리브해라는 이름이 카리브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유도 그런 오해가 한몫했다. 그러나 후에 밝혀지지만 그들의 상처는 전쟁이 아니라 이웃 섬 주민들과의 교역에서 얻은 흔적이었다. 당시 부족 간 거래는 제안이 거절되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였는데 그것을 전투로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이 오해는 유럽 왕실이 부족들을 노예로 삼으려 하면서 더욱 왜곡됐다. 노예화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원주민들은 인간 이하의 야만적인 존재여야 했다. 결국 카리브족은 아이들을 살찌워 잡아먹는 집단이 돼 버렸다. 수세기 동안 유럽인들이 카리브족에게 부여한 이런 고정관념은 식인종을 뜻하는 카니발(Cannibal)이라는 단어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카니발 역시 카리브(Carib)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9년 잉카의 역사를 기록한 저자이자 페루와 스페인 혼혈 작가인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아이는 물론이고 아이의 엄마까지 잡아먹는 잉카 부족의 식인풍습과 적을 많이 잡아먹을수록 천국에 갈 자격이 생긴다고 믿는 어느 잉카 부족의 믿음에 관해 언급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가르실라소의 태도는 카리브족을 향한 유럽인들의 태도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메스티소라는 인종 혼혈의 정체성 탓인지 그는 부족민들을 원시 형태의 종교인으로 묘사하고자 했고 반대로 스페인인이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분쟁을 일으키는 존재라고 폭로했다. 그때부터 식인풍습은 더 이상 노예제도를 위해 희생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정신이나 문명사회에 자리 잡은 은폐된 야만성의 상징으로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1690년 인간지성론에서 정치철학자 존 로크는 카리브족의 식인풍습을 그런 차원에서 인용한다. 여기서 카리브족의 식인풍습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실천적 진리, 이를테면 왕권과 부권의 은폐된 자연적 정당성을 반박하는 예시로 쓰인다. 1896년 지크문트 프로이트 역시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아버지를 죽이고 그 육체를 나눠 먹은 아들의 상황을 정신분석 이론의 근간으로 삼는다. 그렇게 식인풍습은 로크의 정치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주석으로 기능한다. 1729년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너선 스위프트는 겸손한 제안이라는 에세이에서 매우 극단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여기서 스위프트는 ‘아이를 잡아먹자’는 식인풍습을 직설적으로 강조한다. 식인풍습을 통해 당시 국가의 착취, 빈곤에 대한 무관심 등을 일갈하기 위해서다. 1492년 콜럼버스 이후 시작된 식인에 대한 오해는 가르실라소의 인식 전환을 거쳐 결국 로크와 스위프트에 이르러 국가가 은폐해 온 야만성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국가라는 합리성이 은밀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잡아먹게 한다는 식의 스위프트 풍자는 그래서 여전히 기시감처럼 반복돼 보인다. 그래서일까. 20세기를 코앞에 둔 1896년 식인풍습을 담아 정립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 역시 식인이라는 야만이 사실은 우리 문명의 본성이어서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는 중이라고 집요하게 말해주는 것만 같다.

[문화산책] 벚꽃 엔딩이 사라지다

올해의 벚꽃은 비바람으로 피날레 없이 사라졌다. 예년에는 평년보다 빠르게 개화해 벚꽃 축제 시기가 당겨졌던 기억이 있다. 벚꽃 축제는 그 시기가 큰 고민 요소가 됐다. 게다가 요즈음 제멋대로 불어오는 강풍과 쏟아지는 빗줄기는 오늘의 일교차마저 상상할 수 없게 한다. 이러한 기후 위기는 단순히 날씨에만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지역 축제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강원 인제의 빙어 축제가 빙판이 얼지 않아 2년 연속 취소됐는가 하면 겨울 체험 프로그램이 겨울철 주요 수익원이 되는 농촌에서는 온난화로 인해 행사가 취소되는 등 지역경제에 큰 타격을 입기도 한다. 기후 위기는 어느새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속적인 문제가 됐다. 위기에 직면한 기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역부족이다. 그러나 기후는 여전히 축제의 콘셉트, 예산 문제, 지역경제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올봄의 사례다. 필자가 스태프로 참여했던 ‘수원 연등축제’는 실외의 제등행렬을 메인으로 하는 축제다. 그러나 축제 당일 비바람 예보가 있었고 현실적으로 유연한 대책이 필요했다. 축제의 본질적 의미, 참여하는 지역민들과 신자들, 그리고 그동안의 축적된 경험을 우선시해 시작점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기획을 재구성했다. 그리하여 4월의 비바람 속에서 처음으로 실내 연등축제가 진행됐고 다행히 성료됐다. 이처럼 자연, 계절, 그리고 기후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며 이상기후 위기는 더더욱 대비하기 힘든 일이다. 축제의 기획자로서, 지역민으로서, 향유자로서 우리가 대응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환경보호를 실천하며 동시에 변칙적인 기후 상황 속에서 ‘축제를 재구성’할 수 있는 유연한 준비성을 가져야 한다. 축제의 본질을 지키되 상황에 따른 기획적인 측면에서 유연하게 접근한다면 기후 위기 속에서도 지역민 또한 최선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축제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축제의 콘텐츠’ 또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축제의 콘텐츠는 각 지역을 대표하며 다양한 예술적 상상력과 표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지역민 혹은 관광객의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기획과 실행을 통해 지역 축제의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성장시킨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콘텐츠의 유통을 힘들게 하고 때로는 콘텐츠가 사라지게도 한다. 기후 문제로 발생되는 축제의 돌발 상황들은 콘텐츠를 지켜내려는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기존의 핵심 콘텐츠에도 유연한 변화가 필요하다. 때로는 현실을 인지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콘텐츠를 발견 혹은 생산해 내거나 새로운 기획을 통해 콘텐츠를 혼합해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는 등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다만 기획자 또는 지자체에서만 독단적으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동반돼야 한다. 지역 축제는 지역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온 문화이자 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벚꽃 엔딩, 그 후엔 파릇한 새싹이 돋아난다. 하늘을 가득 수놓았던 벚꽃잎들은 기억 속에 담기고 지금은 온 세상이 푸르다.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환경을 보호함과 동시에 기후 위기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현명하게 대처해 지역 축제를 이어갈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또 대응하며 지속가능한 지역 축제를 미래 세대에게 이어줄 수 있도록, 찬란한 봄날의 지혜를 그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문화산책] 이야기의 그림자, 역사를 덮다

“네 말도 옳고, 니 말도 옳다.”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 황희 정승의 일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고려에 대한 충심으로 두문동에 은거하다 마지못해 출사하고 폐세자에 극렬히 반대해 왕의 미움을 사 유배를 떠나기도 했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의 뚝심을 배운다. 반면 세종 시절의 황금기를 함께 이끌어가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거주하며 청렴의 대명사가 됐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조선시대부터 황희는 관후하고 정대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이러한 설화들을 묶어 위인전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완벽하게만 보이는 황희의 이미지는 어디까지 진실일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황희의 기사를 한 줄 한 줄 읽어가다 보면 신선 같은 현자라기보다 현실적이고 때로는 능구렁이 같은 기가 막힌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왕자의난 때 중립을 지켰던 탓에 고려에 충성하며 은거했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졌으며 양녕의 폐세자를 반대해 귀양을 간 것이 아니라 그의 뇌물 수수 및 사사로운 처신을 문제 삼아 탄핵된 적이 많았다. 이뿐만 아니라 자식과 사위의 사건 사고, 국유지를 개인 사유지처럼 행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물론 세종대왕의 국정파트너로서, 왕과 신하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위도 불확실한 야사를 어느덧 진실처럼 믿게 됐고 도덕적인 완벽한 인간, 흠결 하나 없는 성역으로 자리 잡아 그 인물의 진가는 사라지고 왜곡만 남게 됐다. 황희 정승이 말년을 보냈다는 파주 반구정은 이러한 설화들이 마치 검증된 사실처럼 꾸며져 있어 심히 우려스럽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승전보를 남긴 행주산성도 이와 마찬가지다. 부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왜군을 물리쳤다는 설화가 각종 책이나 매체를 통해 역사적 사실처럼 알려졌다. 각종 기록을 찾아봐도 이 같은 내용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이전 기록부터 ‘행주치마’가 이미 존재했고 당시 행주산성은 민간인이 흩어진 터라 민간인을 동원할 여유조차 없었다 전한다. 행주대첩의 일등공신은 치마가 아니라 조선의 발달된 화포 덕분이다. 이 덕분에 최근 행주산성을 방문하면 행주치마에 관한 설화를 안내판이나 설명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예는 전국 각지에서 만날 수 있다. 김포 애기봉처럼 지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케이스도 있다. 강만 건너면 북한이 바라 보이는 이곳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이 평안감사와 애기라는 기생의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녀의 한(恨)과 실향민의 마음과 같다 하여 이름이 지어졌는데 실제로 평안감사는 이곳에 오지도 않았고 애기(愛妓)라는 명칭 자체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생성된 것이다. 그 이름 자체가 워낙 유명해져 불리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김포시는 애기봉 설화를 바탕으로 뮤지컬까지 제작하고 있다. 음식의 간이 심심할 때 양념을 치거나 열을 가해 그 맛을 올리기도 한다. 역사를 어려워하거나 낯선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첨가하면 사람들의 흥미도 얻고 호응도 받게 되니 이만한 유혹이 어디 있겠는가. 검증되지 않은 설화들을 사실처럼 들이밀었을 때 그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객관적 사실과 허구가 섞이면서 역사 인식이 흐려지게 되고 ‘재미’와 ‘감성’만 추구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민족주의나 영웅주의에 경도돼 세상을 단순히 흑백논리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정확한 논리와 사고를 지닌 이야기로 거듭나길 바란다.

[문화산책] 문화강국을 위하여

음악은 시대의 거울이다. 고통의 순간에는 저항의 언어가 되고 기쁨의 순간에는 희망의 합창이 된다. 그래서 음악은 늘 권력과 긴장관계를 보였다. 정치는 음악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하고 음악은 정치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 미묘한 관계를 가장 건강하게 설명하는 말이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 음악은 모든 장르가 동일한 시장 논리로 운영되기 어렵다. 특히 전통음악, 클래식, 인디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실험적인 음악은 상업적 수익보다 예술성과 공공적 가치, 그리고 문화의 지속가능성이 우선시된다. 따라서 이러한 분야에 대한 국가의 전략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은 필수적이다. 지역의 문화축제, 청소년 창작지원, 해외진출 사업 등에도 공공예산의 투입이 필요하다. 예술은 공공재다.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과 사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토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지원이 간섭으로 변질되는 순간 예술은 제 기능을 잃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민국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다. 정치적 비판을 했다는 이유로 수천명의 예술인이 정부 지원에서 배제됐고 이는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 중에는 세계적 명성의 영화감독, 대중가수, 국악인 등도 포함돼 있었고 이 사건은 국제사회에서도 큰 논란을 일으켰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도 음악은 통제의 대상이었다. 김민기, 신중현, 한대수는 ‘청년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이 금지됐고 창작곡은 검열을 받아야 했다. 반면 민주화 이후 1990년대부터 한국 음악은 폭발적인 다양성을 보이며 세계로 뻗어 나갔다. 케이팝의 글로벌 성공은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자율성이 뒷받침된 결과다. 해외에도 유사한 사례는 많다. 미국의 힙합 아티스트들은 인종차별, 총기 문제, 빈부격차 등을 가사에 담으며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켄드릭 라마, 차일디시 감비노, 비욘세 같은 아티스트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정면으로 담은 공연과 음반으로 문화적 충격을 줬지만 미국 사회는 이를 표현의 자유로 인정하고 토론의 장으로 확장했다. 이는 예술을 억누르기보다 사회를 반영하는 목소리로 수용하려는 문화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최근에는 지자체나 공공기관 차원에서도 간섭 논란이 제기된다. 일부 지역 축제에서는 정치적으로 ‘무난한’ 아티스트만을 선호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내는 뮤지션들은 배제되기도 한다. 비판적 예술을 ‘리스크’로 간주하고 무색무취한 콘텐츠만 허용하는 기류는 문화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방식은 장기적으로 창작자의 자율성을 위축시키고 결국 산업경쟁력도 떨어뜨린다. 정책이 창작의 자율성을 보장할 때 음악산업도 성장한다. 자유로운 창작 환경은 독창적인 콘텐츠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이는 뮤지션의 지식재산권(IP) 확장으로 연결된다. 음원, 공연, MD, 영상, 글로벌 협업까지 뮤지션 한 명이 하나의 브랜드가 돼 수익을 창출하는 시대다. BTS 같은 사례는 단순한 스타의 성공이 아니라 창작자 중심의 콘텐츠 IP 생태계가 만들어낸 구조적 성과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제도적 지원이 함께 어우러질 때 가능한 일이다. 국가는 음악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무대에 어떤 노래가 울려 퍼질지를 정해서는 안 된다. 정치의 역할은 창작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것이지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자유로울 때 가장 진실하다. 그리고 그 진실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를 바꾼다. 음악은 정치보다 오래간다. 시대를 넘고 국경을 넘는다. 그 울림을 지켜야 할 책임이 지금 우리에게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 이 한 문장이 문화강국의 출발점이다.

[문화산책] 우주에 새긴 페르소나

1960~70년대는 SF영화와 문학의 인기 그리고 록 음악의 부흥이 만나면서 가장 특별한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던 시기다. 당시 SF는 비디오, 커버 아트, 우주복 등의 테마에서뿐만 아니라 전자 사운드의 음악에서도 혁신을 일으켰다. 영국 출신의 가수이자 배우인 데이비드 보위는 그런 융합을 주도한 인물이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9일 전인 1969년 7월11일 보위는 ‘스페이스 오디티’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노래는 ‘메이저 톰’이라는 상상의 우주 비행 조종사가 우주 미아가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보위는 1968년 개봉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큰 감명을 받았고 노래 제목은 그 제목을 변주해 스페이스 오디티로 결정했다. 보위는 이 우주 영화를 통해 얻은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영감을 평생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겼다. 그 후 보위는 깡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자기의 페르소나, ‘지기 스타더스트’, ‘알라딘 세인’ 그리고 ‘씬 화이트 듀크’ 등으로 변신해 우주에 홀로 버려진 이른바 소외된 존재의 이미지를 쌓는다. 1972년 정규 5집 앨범 ‘화성에서 온 거미들과 지기 스타더스트의 흥망성쇠’에서 지기 스타더스트를 소개한 이후 영화 ‘지구에 떨어진 남자’(니컬러스 로그 감독·1976년)에 출연하기도 했고 1973년 4월 발매된 여섯 번째 정규 앨범 ‘알라딘 세인’에서는 말 그대로 알라딘 세인으로 변신해 새로운 음악적 스타일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1976년 정규 10집 앨범 ‘스테이션 투 스테이션’을 발매하면서 ‘씬 화이트 듀크’를 세상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페르소나들은 록 음악, 드라마,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알라딘 세인은 패션, 젠더의 모호성, 화려한 퍼포먼스가 결합된 글렘 록의 시초가 됐으며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트윈 픽스에서는 보위가 직접 열연한 FBI 요원 필립 제프리스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거기서 제프리스는 현실과 꿈, 시간과 정체성의 경계에서 소외된 존재로 설계됐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프레스티지’에서는 삼고초려로 모셔온 보위가 니콜라 테슬라로 등장한다.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에 등장하는 킬리언 머피의 실루엣은 씬 화이트 듀크에서 따온 것이다. 닐 게이먼 작품 ‘샌드맨’의 ‘루시퍼 모닝스타’ 역시 보위의 페르소나로부터 영향을 받은 캐릭터다. 페르소나와 더불어 그의 영향력은 상상의 세계를 넘어 현실의 과학 세계에도 가닿았다. 2008년 독일의 거미학자 피터 예거는 새로 발견된 사냥거미에게 ‘헤테로포다 데이비드보위’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2015년에는 스페인에서 2008년 발견된 소행성의 이름을 ‘342843 데이비드보위’라고 최종 결정짓기도 했다. 여섯 번째 정규 앨범 알라딘 세인의 표지에는 데이비드 보위의 얼굴이 등장하는데 그 얼굴에는 번개 모양이 그려져 있다. 벨기에 천문학자들은 이 번개 모양을 일곱 개의 별로 구성한 후 그 별자리를 2016년 1월13일 제정해 보위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보위가 타계한 1월10일로부터 3일이 지난 후의 일이다. 2018년 일론 머스크는 스페이스X의 팰컨 헤비 로켓을 이용해 테슬라 로드스터를 우주로 발사했다. 당시 테슬라 로드스터에서는 보위의 스페이스 오디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는 정말로 ‘스타맨’이 돼 자신의 노래와 페르소나를 실제 우주에 새긴 것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은 그렇게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 페르소나에게서 온다.

[문화산책] 다시 봄 ‘벚꽃엔딩’

벚꽃엔딩.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이 노래를 올해는 유독 듣기가 힘들었다. 그간 예상하지 못한 정치적 혼란과 항공기 사고, 대형 산불 등으로 인해 전 국민이 봄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가슴 졸이던 시간이 지나고 진짜 봄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다. 때마침 이번 주부터 수도권은 본격적인 봄꽃 개화기에 돌입한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겪고 있는 아픔을 생각하면 봄 꽃놀이를 논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봄꽃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과 소중한 일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선조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화류, 화전, 화취, 답청놀이로 불리는 봄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화류놀이를 ‘음력 3월 무렵 화창한 봄날,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산기슭이나 산골짜기에서 하루 종일 즐기는 민속놀이, 세시풍속’, 화전놀이는 ‘진달래가 피어나는 춘삼월에 여성들이 인근의 산천을 찾아 벌이는 집단적 놀이활동’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거의 봄놀이는 진달래, 살구꽃, 복사꽃이 필 무렵 절정을 이뤘고 단순히 꽃 감상에 그치지 않고 시와 가무를 함께 즐겼다고 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봄꽃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 시와 노래를 흥얼거리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는 듯하다. 봄꽃을 즐길 수 있는 명소가 많은 수도권에 사는 이들이라면 저마다 나만 아는 봄꽃 명소 한두 곳쯤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좀 더 색다른 봄꽃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두천에 위치한 니지모리 스튜디오는 일본 에도시대로 떠나 봄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종종 왜색문화를 전파하는 곳으로 오해받지만 이곳은 원래 일본 로케이션을 대체하기 위해 조성된 촬영 세트장으로 미스터선샤인 등의 시대물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타 지역의 촬영세트장과 달리 모든 시설물을 카페, 전시장, 숙박시설 등으로 실제 활용해 수준 높은 전시와 일본문화 체험이 가능하다. 특히 봄에는 쇼죠마쓰리가 개최돼 좀 더 색다른 봄꽃여행을 즐길 수 있다. 인천 강화군의 북문길은 인천관광공사가 선정한 10대 봄꽃 명소 중 한 곳으로 벚꽃의 개화 시기가 늦고 야간조명이 설치돼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고려시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강화산성 북문에서 고려궁지까지 아름드리 벚꽃터널 구간을 지나 강화군의 원도심으로 내려오면 용흥궁,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이화견직 담장길, 소창기념관, 조양방직 카페 등 우리나라 근현대의 이야기를 품은 장소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강화군의 이색 먹거리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과 함께한다면 더욱 특별한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삼국시대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연천군의 호로고루는 봄꽃은 아니지만 청보리밭과 주상절리를 함께 볼 수 있는 봄여행 명소로 6·25전쟁 이전 번성했던 고랑포구 일대의 역사와 이후 분단된 한국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또 예부터 복사골로 유명한 부천시는 3대 봄꽃(진달래, 벚꽃, 복사꽃)과 튤립, 장미를 릴레이로 즐길 수 있는 봄꽃관광주간을 운영 중으로 좀 더 오래 다양한 봄꽃여행을 즐길 수 있다. 경기도 곳곳의 수목원들도 수선화 등 봄꽃을 테마로 축제와 이벤트를 운영한다고 하니 인근의 봄꽃 명소를 찾아 치유와 위로의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물론 우리 주변의 상처 입은 사람들과 자연을 돌아보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생각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산책] AI와 인간의 저작권 분쟁

정말 순식간이었다. 명령어 몇 글자(프롬프트)를 입력했을 뿐인데 대하드라마의 OST 같은 웅장한 음악이 완성됐다. 합창까지 더해져 말이다. 며칠 밤을 고민하며 곡을 쓰던 지난날이 잠시 허무하게 느껴졌다. AI를 잘 활용해 인간의 창의성과 합작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최고의 상생 방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AI의 데이터가 만들어진 과정과 그것을 활용하는 과정 그리고 그를 통해 만들어진 산출물 저변에 깔려 있는 저작권 이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시돼야 한다. 앞서 필자는 AI에 프롬프트를 입력해 음악 산출물을 얻었다고 했다. 이 경우 결과물의 저작권이 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AI에게, 혹은 AI 개발자에게 그 권리가 있다고 봐야 할까. 원칙적으로 저작권이란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이 표현된 창작물, 즉 저작물에 대한 권리로서 창작자에게 귀속하는 것이 원칙이며 저작인격권(공표권, 성명표시권, 동일성유지권)과 저작재산권(복제권, 공연권, 공중송신권, 전시권, 배포권, 대여권, 2차적 저작물 작성권)으로 구성돼 있다. 다시 말해 저작권이란 자연인, 즉 ‘인간’의 ‘창작물’에 대해 생겨나는 권리인 것이다. AI는 인간이 아니므로 현행 저작권법하에서 AI의 산출물에 대해서는 그 저작권을 논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AI와 그것의 산출물에 대한 저작권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생성형 AI는 대규모 데이터셋에 기반한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데이터나 콘텐츠 등을 산출해낸다. AI의 학습에 있어 학습 데이터에 포함된 저작물을 무단으로 복제하거나 인터넷에 공개된 데이터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물에 대한 복제권 등의 침해 여부가 쟁점이 될 수 있다. 또 생성형 AI를 사용할 때 사용자의 프롬프트 입력에 따라 학습된 데이터가 AI 모델로부터 확률적으로 도출된 것이기에 그 산출물이 원저작물의 일부와 같거나 유사한 경우 저작권 쟁점이 발생할 수 있다. AI를 활용한 부분에 대한 명확한 표기 또한 중요한 지점이다. 프랑스에서 특별한 예시를 볼 수 있다. 바로 아이바(Aiva)라는 AI가 작곡한 곡이 영화 OST에 사용돼 프랑스 음악저작권협회에 작곡가 ‘아이바’로 등록된 것인데 이는 AI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산출물(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처럼 발전하는 기술에 따라 AI를 창작자로 인정하느냐와 인정 시 저작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며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빠르게 진행돼야 할 것이다. 저작권법은 문화 콘텐츠 산업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AI의 존재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현행 저작권법이 가진 한계를 인지하고 사회적 정책, 법적인 재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술 발전에 따른 법제적, 제도적 재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기술과 예술의 융합적 창작 기반은 제대로 조성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과 대중의 관심이 전제돼야 한다. 기술과 산업이 발전하기 이전에 제작 기반에 대한 정책, 제도적인 것들이 선결돼야 창작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보호받으며 명확하게 AI와의 협업을 진행할 수 있다. 오늘날 창작자들의 권리를 지켜낼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문화산책] 옛 고을 걸으며 경기도 미래를 생각하다

28개 시와 3개 군으로 구성된 경기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행정구역의 변천이 잦았다. 1914년 일제에 의한 부군면 통폐합으로 많은 고을이 작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으며 산업화 이후 서울이 공룡처럼 커지면서 그 영향을 피해 가지 못했다. 양주와 광주는 넓은 고을이라는 별칭이 무색할 정도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에 그 살점을 내줬고 광명과 군포, 의정부 등 새로 태어난 고장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화성시 동부에 자리한 동탄은 신도시의 대명사로 불리며 젊고 활기찬 트렌드를 주도해 하나의 밈(Meme)으로 화제가 됐다. 신도시가 탄생한 만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고장도 적지 않다. 고속도로 터널과 리조트의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양지는 김대건 신부가 유년기를 보낸 마을이며 인천에 속한 부평은 인천, 부천지역을 포괄하는 대도호부로 경기 서부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다. 화려했던 역사는 시대 너머로 사라지고 그 자취를 보여주는 경관도 거의 남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들어 그 이름을 상기시킨다면 옛 고장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해줄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였던 겸재 정선이 현령을 지냈고 천하의 명의 허준이 동의보감을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양천현으로 먼저 떠나보자. 현재 서울 강서, 양천구 영역을 감싸고 있던 옛 고장은 한양과 가까우며 수운을 통해 들어온 물산이 풍부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수령자리를 탐했다. 많은 배들이 다니던 나루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수많은 차들의 행렬로 발이 묶인 올림픽대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겸재의 ‘경교명승첩’을 통해 유서 깊은 고을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화첩은 그가 현령으로 부임하던 시절 오랜 친구인 이병연과 시화를 나누기로 정했는데 이때 한강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여러 폭의 그림에 담아 실은 것이다. 양천관아 뒷산인 궁산 정상에 자리한 소악루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며 달맞이를 즐기던 그는 붓을 들어 한손에 그리기 시작했다. ‘소악후월도’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우리는 예전 양천의 모습을 기억한다. 통진, 부평, 양지, 지평 등 하나의 구나 면, 읍의 지명으로 남은 고을도 있고 적성, 마전, 풍덕, 장단처럼 분단의 비극으로 흩어진 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나 포천시 북부지역에 자리했던 영평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한탄강이 지나가는 이곳은 풍경이 빼어나 수많은 시인묵객이 거쳐가며 글과 시를 도처에 남겼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여덟 곳을 일컬어 영평팔경이라 불렀다. 특히 화적연은 큰 바위를 중심으로 강이 휘감으며 마치 볏단을 쌓은 모양을 하고 있다. 겸재 역시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해악전신첩’을 통해 바라본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록 ‘영평’이란 명칭은 시대 너머로 사라졌지만 경흥옛길을 통해 그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어떤 고을은 쇠퇴를 막지 못하고 작은 동네가 큰 도시로 발전하는 사례를 수없이 만나 왔다. 서울의 팽창과 집값 억제를 위해 탄생한 1기 신도시 이후 경기도는 지금도 수차례 지도를 다시 그려야 했다. 일산, 분당신도시는 기존 원도심과 격리된 채 고양, 성남과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주장하며 광교, 한강신도시처럼 소속돼 있는 고장의 특색을 살려 정비된 신도시도 존재한다. 고령화와 저출산 시대를 맞이해 10년 뒤 경기도의 지도는 다시 그려질 것 이다. 앞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문화산책] 록 페스티벌, 공연 넘어 문화·경제플랫폼으로

록 페스티벌은 단순한 음악 축제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음악을 듣고 즐기는 자리로 여기지만 록 페스티벌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문화·사회·경제적 파급력을 가지며 지역경제와 관광 산업에 기여하는 중요한 플랫폼이다. 또 특정 세대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록 음악의 정체성과 가치를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록 페스티벌은 음악을 넘어 패션, 예술, 라이프스타일까지 아우르는 문화 현상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글래스톤베리는 자유로운 히피문화와 환경 보호, 자선 활동 등 사회적 가치를 내세우며 지속가능성을 강조한다. 코첼라는 현대미술 작품과 조형물을 전시하며 패션과 트렌디한 감성을 내세워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확보했다. 이 두 축제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커뮤니티 경험을 아우르는 복합문화축제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 등이 다양한 하위문화와 결합해 성장해 왔다. 이러한 페스티벌은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역할도 한다. 같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소통하며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공유하는 장이 된다. 우드스톡이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 됐듯 오늘날의 록 페스티벌도 환경 보호, 성 평등 등 다양한 사회적 의제를 반영하며 변화하고 있다. 록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지역은 관광, 숙박, 교통, 식음료 등 다양한 산업과 연계되며 큰 경제적 효과를 얻는다. 유럽 주요 록 페스티벌은 수십만명의 방문객을 유치하며 지역경제 효과를 창출한다. 글래스톤베리는 매년 약 20만명이 방문하며 1천억원 이상의 지역경제 효과를 확보하고 코첼라는 인디오 지역 연간 관광 수익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1조원 이상의 지역경제 활성화 사례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이 관광 패키지와 연계해 지역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페스티벌은 청년 창업과 브랜드 마케팅의 장이 되기도 한다. 지역 소상공인은 푸드트럭과 팝업스토어 등을 통해 경제적 기회를 얻고 맥주·패션·디지털 플랫폼 브랜드들은 페스티벌을 활용한 마케팅으로 소비자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 한편 환경적·기술적 변화에 맞춰 록 페스티벌도 진화하고 있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태양광 에너지를 활용하는 친환경 페스티벌이 등장했으며 가상현실(VR) 공연, 대체불가토큰(NFT) 티켓 시스템, 실시간 스트리밍 등 디지털 기술과의 결합도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음악과 미디어 아트를 접목한 무대, 인터랙티브 전시, 참여형 워크숍 등은 페스티벌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젊은 세대가 페스티벌을 단순한 음악 감상이 아닌 라이프스타일 경험으로 인식하는 만큼 다양한 문화 콘텐츠와 결합하는 전략이 요구된다. NFT 티켓은 암표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팬들에게 디지털 기념품을 제공하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록 페스티벌이 단순한 오프라인 이벤트를 넘어 디지털과 융합된 새로운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록 페스티벌이 문화와 경제의 플랫폼으로 성장하려면 명확한 기획 방향과 차별화된 콘텐츠가 필요하다. 단순히 유명 아티스트를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콘셉트와 시대적 메시지를 강조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페스티벌 콘셉트에 따른 친환경·사회적 가치 접목, 지역 관광·경제와 연계한 패키지 개발, 페스티벌 브랜딩 확장을 통한 IP 가치 강화, 첨단 기술과의 접목을 통한 무대 연출 등의 차별화 전략으로 기업 후원 및 투자 유치를 확대하고 복합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앞으로 록 페스티벌이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어떻게 진화하느냐에 따라 단순한 공연 시장을 넘어 음악 산업과 문화 전반에 걸친 소비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문화산책] 필름의 빛과 그림자

1937년 미국 뉴저지주 리틀페리에 있는 20세기 폭스사의 영화 보관소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의 원인은 나이트로셀룰로스의 자연 발화 현상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영화 필름은 나이트로셀룰로스를 기반으로 한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졌다. 이 화재로 유실된 영화 필름의 규모는 4만점이 넘을 정도로 막대했고 이는 1930년 이전에 제작된 영화의 75%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이트로셀룰로스는 1845년 독일 화학자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쇤바인이 바닥에 엎지른 질산과 황산을 면으로 훔친 후 말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물질이다. 언뜻 보면 솜처럼 생겨 안전해 보이지만 건코튼(gun cotton)이나 면화약이라고도 불릴 만큼 위험한 화약 물질이기도 하다. 나이트로셀룰로스는 특정 용매에 녹이면 젤 상태가 되거나 단단한 고체 상태로 변하는 특성도 있다. 1846년 프랑스 출신의 루이 니콜라스 메나르는 나이트로셀룰로스를 에탄올로 녹여 ‘콜로디온’이라는 젤 상태의 물질을 만들어 냈다. 1847년 미국 출신의 의사 존 파커 메이너드는 이를 피부 상처 보호제로 처음 사용했다. 특히 1851년 프레드릭 스콧 아처는 콜로디온을 사진 감광제를 유리판에 고정하는 도포용 접착제로 사용하기도 했다. 콜로디온이라는 명칭은 접착제라는 뜻의 그리스어 ‘콜로디스’에서 온 말이다. 1869년 존 웨슬리 하이엇은 나이트로셀룰로스를 콜로디온보다 더 단단하고 투명한 물질로 만들어 이를 ‘셀룰로이드’라 명명하고 1870년 미국에 특허를 출원한다. 1888년 존 커버트는 당시 사진 필름의 유리판 베이스를 하이엇의 셀룰로이드로 대체했다. 이듬해인 1889년 조지 이스트먼은 커버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진 촬영 방식을 더 쉽게 롤 형태의 필름으로 감아 쓰도록 만들었다. 초기 롤 필름의 폭은 기술상의 이유로 70㎜였다. ‘이스트먼 코닥 필름’은 그렇게 시작됐다. 1893년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은 이스트먼의 70㎜ 사진 촬영용 롤 필름을 35㎜ 폭으로 잘라 만든 영화용 롤 필름으로 최초 영화를 촬영했다. 이 기록은 상영 방식의 차이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발명에 가려졌다. 하지만 필름의 표준 규격인 35㎜는 딕슨의 필름에서 유래한다. 이런 필름의 운명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마주하면서 급변했다. 이를테면 2차대전에서는 막판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이 백린탄 등의 생산을 위해 수많은 나이트로셀룰로스 필름을 수거해 갔다는 정황이 기록돼 있기도 하다. 1930년대와 그 이전의 한국 영화 필름이 유독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어쩌면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아직도 못 찾고 있는 이유 역시 불행히도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1930년대 이전 영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엄청난 수난을 겪은 것이다. 다시 1937년 미국 뉴저지주 리틀페리. 20세기 폭스사는 재앙에 가까운 그 화재를 처음에는 가벼이 여겼다. 영화들의 사본이 다른 곳에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0년대에 들어 초기 무성영화의 대량 유실이 확인되면서 영화 보존의 중요성이 학계와 영화계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테라 바라(40편 중 34편 소실), 톰 믹스(85편 중 73편 소실), 셸리 메이슨(16편 모두 소실) 등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스타들은 그 화재의 가장 큰 피해자임이 밝혀졌다. 존 포드 감독의 무성영화 역시 60편 중에서 10편만 남아 있을 정도다. 1928, 1929년에 제작된 유성영화는 최소 50편 이상이 사라졌다. 당시 유실된 영화들이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었다면 그들과 그들 작품은 물론이고 영화 자체의 문화적, 역사적 평가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탄생에 일조한 나이트로셀룰로스는 영화의 수난을 안겨준 원흉이면서 영화가 가진 기록문화 유산의 가치를 일깨워준 빛과 그림자라 할 수 있다.

[문화산책] 여행의 계절, 여행의 위대함을 위하여

3월이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날씨만 놓고 본다면 여행하기에 좋은 시절이 다시 찾아왔다. 여행,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더 많이, 더 자주, 더 좋은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며 살아간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여행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여행은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며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여행이 주는 편익은 오랜 기간 다양하게 증명돼 왔으며 특히 청년 세대의 여행은 각자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 과거 유럽의 그랜드투어나 신라 화랑의 풍류도는 청년 세대들의 여행이 자아 발견과 성장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해 5월, 스카이스캐너가 Z세대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기사를 보니 응답자의 약 61%는 이미 부모 없이 해외여행을 경험했으며 대부분 19~21세에 첫 해외여행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들은 ‘새로운 경험과 정신적 충전을 위해, 덜 알려진 여행지보다는 인기 여행지로 떠나고, 스스로 여행경비를 마련해 저렴한 상품을 이용하는 등 가성비를 중요시’한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젊은 세대의 해외여행에 대한 인식, 접근성, 편의성 등이 얼마나 개선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고, 이들의 여행 경험이 그들의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시대에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다. 여행 경험 자체가 문화 자본화돼 해외여행 경험 유무가 또 하나의 스펙처럼 활용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다른 이들의 해외여행 사진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은 매년 3월20일, ‘국제 행복의 날’에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하는데 작년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 수준은 전 세계 143개국 중 52위로 여전히 낮은 수준이고 소득 수준에 따른 행복감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별개로 ‘세계행복보고서’에 나타난 뚜렷한 현상 중 하나가 세계 젊은 세대의 행복감이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연령대별 행복감 그래프가 대체로 ‘U’자 형태로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의 행복감에 비해 중장년층의 행복감이 현저히 낮았다. 그러나 지금은 청년들의 행복감이 중장년보다 낮게 나타나고 있으며 유럽 및 미국 등에서는 이의 원인 중 하나를 SNS 이용률 증가로 보고 있다. SNS엔 여행의 기록이 넘쳐난다. 멋진 리조트와 테마파크, 이색적인 자연경관, 여행지의 맛집과 카페를 배경으로 자신의 여행을 과시하는 콘텐츠도 쉽게 발견된다. 여행의 진짜 묘미와 가치는 그런 것에 국한되지 않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그런 게시물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 사람들도 생각하게 된다. 관광 취약 계층에 속한 장애인, 다문화 및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이 그들이다. 과거에 비해 다양한 지원제도가 늘었다고 해도 더 세심한 관심이 여전히 필요하다. 여행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여행이 주는 위대함을. 그 위대함을 더 많은 청년 세대, 장애를 가진 이들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꼭 해외가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 여행 가기에 좋은 곳이 얼마나 많은가. 학교에서부터 다양한 여행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겨나고 더 쉽게 접근 가능한 정책과 지원사업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이제부터 본격 여행의 계절이니까.

[문화산책] 노당익장, 봄날을 기다리는 청년에게

“신의 나이 비록 62세이지만 아직도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출정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후한서’의 ‘마원전(馬援傳)’에 나오는 마원의 이야기다. 마원은 광무제를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군으로 평소 “대장부가 뜻을 품었으면(장부위지·丈夫爲志) 궁할수록 더욱 굳세고(궁당익견·窮當益堅), 늙을수록 더욱 기백이 넘쳐야 한다(노당익장·老當益壯)”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에서 ‘노당익장(노익장)’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노당익장은 멀리서 찾을 일이 아니다. “육십 먹어도 잘하면 상 주는 거예요. 공로상이 아니라.” 2024 KBS 연기대상에서 ‘최고령 대상’을 수상한 배우 이순재가 한 말이다. 그는 미국의 아카데미를 언급하며 연기는 인기나 다른 조건이 아닌 연기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해 청중의 박수를 받았다. “어쩔 수 없어요. 적절한 배역이 없으면 출연 못하는 거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기회가 한 번 오겠지 하고 늘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라는 말로 기회를 기다리며 늘 준비된 자세로 성실히 임해온 그의 연기 철학을 보여줬다. ‘윤여정 신드롬’을 기억할 것이다. 윤여정은 74세의 나이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다. 윤여정은 자신을 일컬어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tvN ‘현장토크쇼 택시’에서 그가 한 말이다. 생계를 위해 그는 단역도 마다하지 않고, 너무 부끄러울 때는 안경을 벗고 연기했을 정도로 열심히 연기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오스카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엄마가 열심히 일해 이런 상을 받게 됐단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위의 두 노당익장의 사례는 열심히 노력하며 늘 준비돼 있는 자에게 온 기회야말로 천재일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이 시대의 우리 청년들에게 이 두 배우의 삶은 어떤 메시지로 다가갈까. 필자는 현재 대학에서 음악인의 꿈을 꾸며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중 한 학생은 자신이 그동안 만들었던 곡들을 모아 앨범을 제작했다. 자신의 감성이 가득 담긴 곡들을 만들고 직접 연주해 녹음한 다음 아트웍 디자인까지 뽑아냈다. 유통사를 선정해 계약하는 등 모든 제작 과정을 스스로 해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노력의 결과물이 아직은 대중에게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힘든 환경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작금의 청년 음악가가 적지 않다. 그중 대중에게 사랑받을 기회를 얻지 못해 간절히 꿈꿔 오던 길, 그 모퉁이에 주저앉아 포기를 고민하는 이들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문화예술계에 종사하고 있는 선배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나는 반딧불’의 노랫말처럼 지금 처한 현실이 간절히 꿈꾸는 예술을 펼치기에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스스로가 눈부신 존재임을 잊지 말자. 늘 준비된 모습의 우리 청년들이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천재일우로 만들 수 있길 빌며, 위 노당익장의 이야기가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됐길 바란다.

[문화산책] 명품 유물 바라보며 ‘국립경기박물관’ 꿈꾸다

국립중앙박물관 2층, 사유의 방은 이 박물관에서 가장 특별한 공간이다. 수많은 유물이 공존하는 다른 전시실과 달리 오직 반가사유상 두 분이 마주 보며 엄숙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박물관의 미로에 갇혀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도 이곳으로 들어오자마자 벅찬 감동을 느끼며 불상처럼 저마다 깊은 고뇌와 깨달음을 얻고 돌아간다. 이전에는 많은 유물을 관람객에게 선보였다면 이제는 단 한 점이라도 관람객의 마음에 남는 것이 목표라는 학예사의 말처럼 박물관마다 내세우는 유물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해 변모하고 있다. 전국에 산재한 14개의 국립박물관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특성에 집중하며 이곳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통해 마케팅을 펼쳐가며 굿즈를 개발하는 등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부여의 금동대향로, 경주의 금관, 춘천의 오백나한 등 지역마다 자랑하는 명품이 박물관을 넘어 지역의 자부심이자 품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인구 1천400만, 고려 이래 한반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경기도는 아직까지 지역을 대표하는 국립박물관이 전무(全無)한 상황이다. 지역에서 발굴된 국보급 유물 중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이 부지기수이고 지역 정체성에 관한 논의도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품은 도처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길 기다린다. 전곡리에서 발굴된 ‘주먹도끼’는 겉으로 보기엔 한낱 돌덩이일 뿐이지만 우리의 역사를 구석기로 앞당겼으며 더 나아가 세계 고고학계를 뒤흔든 쾌거였다. 고려시대 수도 개경에서 가까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이 불법(佛法)을 널리 행했다. 안성 봉업사, 여주 고달사, 용인 서봉사 등 현재는 터만 남아 흩어진 석조물만 그 자취를 짐작할 수 있지만 회암사에서 출토된 화려한 유물들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명품이라 할 만하다. 특히 왕실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진 금탁과 수막새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다. 조선 이후 수많은 사대부 가문이 이곳에 세거하며 초상화, 글씨첩, 복식 등을 가보로 여기고 후손을 통해 대대로 이어져 왔다.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초상화들은 중앙박물관에 버금가는 컬렉션을 자랑하며 흉터, 점, 수염 한 올까지 상세하게 그 인물의 정신까지 묘사한 그림을 바라볼 때마다 절로 경외를 표하게 된다. 경기도가 자랑하는 명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가 반도체라면 조선이 자랑하는 물품은 단연코 도자기다. 일본의 영주들은 명품 다완을 얻기 위해 성 하나를 기꺼이 바쳤으며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기장들을 데려가 유럽에 수출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조선 도자기의 핵심은 백자인데 왕실백자를 생산하는 전용가마가 자리한 곳이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분원이다. ‘꾸미되 사치스럽지 않고 질박하되 누추하지 않은’ 철학이 담겨 있는 백자들은 특유의 매력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그중 경기도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백자모란넝쿨무늬병은 현대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끼친 천하의 명품이라 할 만하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처럼 수많은 가문이 이 땅에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했다. 회격묘라는 특별한 매장법으로 인해 이장 과정에서 직물이 부패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된 복식들은 고스란히 박물관에 기증돼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왕실 종친 복식은 당대 최고 수준으로 정교하게 수놓인 자수는 수백년이 흘러도 그 자태를 뽐낸다. 현존하는 가장 큰 철불인 하사창동 철조여래좌상을 비롯해 경기를 연고로 하는 수많은 명품 유물을 이 지역에서 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경기도의 안타까운 현실일지 모른다.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을 나열하는 진열장을 넘어 그 지역의 문화산업을 이끌어 가는 중심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루빨리 경기도의 국립박물관 유치가 수면 위로 오르길 기대한다.

[문화산책] ‘조선팝’과 전통문화의 재해석

최근 한국 음악계에서는 전통과 현대가 결합한 새로운 흐름이 주목받고 있다. 국악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조선팝’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며 단순한 전통 계승을 넘어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다. 이날치, 악단광칠, 서도밴드 등의 팀은 국악의 요소를 팝, 힙합,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와 접목하며 전통음악의 대중성을 넓히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음악적 시도를 넘어 한국의 문화 정체성을 세계시장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전통국악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온 예술이지만 대중 접근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하지만 국악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노력이 지속되면서 이제 조선팝은 젊은 세대와 해외 팬들에게도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다. 이 곡은 서도소리 판소리를 현대적 리듬과 결합한 중독성 강한 음악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과 함께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서도밴드는 전통민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뱃노래’, ‘사랑가’ 등의 곡을 통해 국악의 색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도 대중음악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악단광칠은 황해도 지역의 민요와 굿 음악을 전자음악과 결합하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페스티벌에서도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사실 전통과 현대의 결합은 최근에만 나타난 흐름이 아니다. 1990년대 서태지는 ‘하여가’에서 국악기인 태평소를 사용하며 힙합과 결합한 국악 퓨전 음악을 시도했다. 이는 당시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고 국악이 대중음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잠비나이, 동양고주파, 블랙스트링 등 많은 밴드는 국악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운드를 창출하며 활동하고 있으며 2010년부터 국립극장이 매년 주최하는 ‘여우락 페스티벌’은 국악인들의 철학이 담긴 월드뮤직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다. JTBC가 2021년 하반기 방영했던 오디션 프로그램 풍류대장은 젊은 국악인들의 실험정신을 조명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국립국악원은 ‘퓨전국악 프로젝트’와 ‘공감시대, 창작콜라보 플러스’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1990년대 후반부터 전통 국악과 현대음악의 융합을 실험하며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케이팝 아이돌의 실험도 활발해지며 국악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 블랙핑크의 ‘Pink Venom’에서는 가야금 소리를 인트로로 사용했고 방탄소년단(BTS)의 ‘IDOL’에서는 사물놀이 리듬을 삽입했다. 또 BTS 슈가(Agust D)는 중요무형문화재인 ‘대취타’를 힙합에 녹여내며 국악적 요소를 세계시장에 소개했다. 조선팝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은 전통과 현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힘이다.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감각과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젊은층의 관심을 끄는 것을 넘어 전통문화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전략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팝을 모티브로 전통 한옥과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전시도 증가하고 있다. ‘서울라이트’ 행사에서는 전통문양과 디지털 영상 기술이 결합된 작품들이 선보였다. 조선팝은 더 이상 음악에 국한되지 않고 연극, 미술,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예술 영역과 결합하며 새로운 문화적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조선팝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전통음악을 단순히 현대적인 장르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국악 고유의 정체성과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미디어아트, 공연예술, 관광 콘텐츠와 연계해 조선팝이 하나의 콘텐츠 산업으로 확장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조선팝이 해외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연구와 협업이 이뤄져야 한다. 현재 조선팝은 다양한 국가에서 관심을 받으며 해외 공연과 페스티벌에서도 점점 더 많은 무대를 확보하고 있다. 프랑스의 ‘페스티벌 드 몽펠리에’에서는 국악을 기반으로 한 현대적 음악이 소개됐으며 독일 베를린에서는 한국 전통음악과 전자음악을 접목한 콘서트가 개최됐다. 이는 조선팝이 글로벌 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국악과 현대음악이 융합된 조선팝은 한국 문화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새로운 흐름이다. 전통이 단순히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콘텐츠로 자리 잡을 때 한국문화는 더욱 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전통을 새롭게 바라볼 때다. 조선팝은 다양한 예술 장르와 융합하며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문화산책] 얼음의 테마기행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동부의 에트나 화산과 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화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얼음 저장 기술 발전의 시작을 알린 장소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랜 화산 활동으로 고도가 높아진 에트나 화산의 북쪽과 동쪽은 눈과 얼음이 여름철에 더 오래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화산지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자연 동굴은 얼음을 장기간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후 화산암(현무암)의 단열 기능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를 얼음 저장고의 건축 재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자연 상태의 냉각 자원으로 얼음과 눈을 저장해 활용하는 기술적인 기반은 그렇게 마련됐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옛 얼음 저장고는 차가운 온도를 관리할 수 있어 종교적인 음식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이슬람교에서 금주 규율은 대체음료 개발에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술 대신 과일즙이나 꽃을 기반으로 한 시원한 음료가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는 듯한 더위’를 의미하는 라마단 기간에는 (이슬람력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한낮에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무더위 속에 식자재를 차갑게 보관해 둘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런 상황과 함께 할랄·하람 음식문화도 그 필요성에 한몫했다. 기독교의 경우 경건해야 할 사순절 기간에는 생선, 과일, 채소, 견과류 같은 신선한 식자재가 필요했는데 당시 겨울과 초봄에는 이런 신선 식료품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냉장 기술은 필수적이었다. 힌두교의 경우 얼음과 우유로 만드는 전통 아이스크림 쿨피 때문에 얼음 저장고의 역할이 중요했다. 유대인은 코셔 규정에 따라 고기와 유제품을 엄격히 분리해 먹어야 하는 율법 때문에 얼음 저장고가 긴요했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는 금욕생활과 관련된 간단한 보양식을 위해서나 통증 완화라는 의료 목적으로 얼음이 필요했다. 한편 로마인, 특히 귀족들은 에트나 화산이나 베수비오 화산에서 채집한 눈과 얼음에 꿀 뿌려 먹는 것을 즐겼다. 이탈리아 출신의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메디치 가문에 입성할 만큼 기계 발명에 재능을 보인 인물이다. 그는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에게서 회화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서 조각을, 조르조 바사리에게서 건축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여러 업적 가운데 1589년 페르디난도 1세의 결혼식 축하 공연(인터메디)을 위해 우피치 궁전에 재설치하게 된 액자 무대(프로시니엄)와 무대의 특수 효과를 위해 설계한 기계 장치들은 연극사 및 영화사에서도 오늘날까지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부온탈렌티는 회전 운동 시스템을 활용해 무대 배경, 소품의 이동, 등장인물(고대 위인 또는 신)의 등장과 퇴장, 조명 효과 등을 정밀하게 제어했고 이를 위해 기계적 장치의 자동화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1565년 12월, 코시모 1세는 페르디난도 1세의 형 프란체스코 1세의 결혼식을 계기로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스페인 사절단을 팔라초 피티와 보볼리 정원으로 초청해 환영 만찬회를 성대하게 개최하고자 했다. 두 형제의 결혼식에 모두 관여한 부온탈렌티는 만찬회를 위해 얼음, 소금, 레몬, 설탕, 달걀, 꿀, 우유, 와인 등을 균일한 속도로 배합하는 장치를 고안한다. 당시 겨울이었음에도 냉각 시스템과 회전 메커니즘을 결합한 이 방식으로 그는 부드러운 질감과 차가운 온도를 고르게 보전한 디저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1589년의 그 공연(인터메디)에서 사용할 무대장치 아이디어에 창발적인 영감을 준 것은 아닐까. 어쨌든 피렌체의 보볼리 정원에 자리한 얼음 저장고에서 부온탈렌티는 ‘Gelu’(얼음)처럼 차가운 최초의 ‘Gelato’(젤라토)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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