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학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
1937년 미국 뉴저지주 리틀페리에 있는 20세기 폭스사의 영화 보관소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의 원인은 나이트로셀룰로스의 자연 발화 현상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영화 필름은 나이트로셀룰로스를 기반으로 한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졌다. 이 화재로 유실된 영화 필름의 규모는 4만점이 넘을 정도로 막대했고 이는 1930년 이전에 제작된 영화의 75%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이트로셀룰로스는 1845년 독일 화학자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쇤바인이 바닥에 엎지른 질산과 황산을 면으로 훔친 후 말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물질이다. 언뜻 보면 솜처럼 생겨 안전해 보이지만 건코튼(gun cotton)이나 면화약이라고도 불릴 만큼 위험한 화약 물질이기도 하다. 나이트로셀룰로스는 특정 용매에 녹이면 젤 상태가 되거나 단단한 고체 상태로 변하는 특성도 있다.
1846년 프랑스 출신의 루이 니콜라스 메나르는 나이트로셀룰로스를 에탄올로 녹여 ‘콜로디온’이라는 젤 상태의 물질을 만들어 냈다. 1847년 미국 출신의 의사 존 파커 메이너드는 이를 피부 상처 보호제로 처음 사용했다. 특히 1851년 프레드릭 스콧 아처는 콜로디온을 사진 감광제를 유리판에 고정하는 도포용 접착제로 사용하기도 했다. 콜로디온이라는 명칭은 접착제라는 뜻의 그리스어 ‘콜로디스’에서 온 말이다.
1869년 존 웨슬리 하이엇은 나이트로셀룰로스를 콜로디온보다 더 단단하고 투명한 물질로 만들어 이를 ‘셀룰로이드’라 명명하고 1870년 미국에 특허를 출원한다. 1888년 존 커버트는 당시 사진 필름의 유리판 베이스를 하이엇의 셀룰로이드로 대체했다. 이듬해인 1889년 조지 이스트먼은 커버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진 촬영 방식을 더 쉽게 롤 형태의 필름으로 감아 쓰도록 만들었다. 초기 롤 필름의 폭은 기술상의 이유로 70㎜였다. ‘이스트먼 코닥 필름’은 그렇게 시작됐다.
1893년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은 이스트먼의 70㎜ 사진 촬영용 롤 필름을 35㎜ 폭으로 잘라 만든 영화용 롤 필름으로 최초 영화를 촬영했다. 이 기록은 상영 방식의 차이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발명에 가려졌다. 하지만 필름의 표준 규격인 35㎜는 딕슨의 필름에서 유래한다. 이런 필름의 운명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마주하면서 급변했다.
이를테면 2차대전에서는 막판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이 백린탄 등의 생산을 위해 수많은 나이트로셀룰로스 필름을 수거해 갔다는 정황이 기록돼 있기도 하다. 1930년대와 그 이전의 한국 영화 필름이 유독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어쩌면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아직도 못 찾고 있는 이유 역시 불행히도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1930년대 이전 영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엄청난 수난을 겪은 것이다.
다시 1937년 미국 뉴저지주 리틀페리. 20세기 폭스사는 재앙에 가까운 그 화재를 처음에는 가벼이 여겼다. 영화들의 사본이 다른 곳에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0년대에 들어 초기 무성영화의 대량 유실이 확인되면서 영화 보존의 중요성이 학계와 영화계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테라 바라(40편 중 34편 소실), 톰 믹스(85편 중 73편 소실), 셸리 메이슨(16편 모두 소실) 등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스타들은 그 화재의 가장 큰 피해자임이 밝혀졌다. 존 포드 감독의 무성영화 역시 60편 중에서 10편만 남아 있을 정도다.
1928, 1929년에 제작된 유성영화는 최소 50편 이상이 사라졌다. 당시 유실된 영화들이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었다면 그들과 그들 작품은 물론이고 영화 자체의 문화적, 역사적 평가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탄생에 일조한 나이트로셀룰로스는 영화의 수난을 안겨준 원흉이면서 영화가 가진 기록문화 유산의 가치를 일깨워준 빛과 그림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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