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대관령에서 생활하면서 비로소 유리창 너머의 세상이 보인다. 유리창 하나를 두고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온다는 말이겠다.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 덕이 아닐까. 그간 생활해 왔던 어디인들 유리창이 없었겠는가 싶지만, 늘 유리창 안에서 살았던 듯하다. 아니, 사실 제대로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유리창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곳 대관령 700고지에서 배워간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는 좋아하나 딱딱한 땅을 뒤집고 씨감자를 심는 일은 힘들어하고, 정부의 정책에 분노하지만 대안 제시에 게으르고, 학생들을 사랑하나 학업에 게으른 것 꾸짖음은 망설이며, 재난당한 사람들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선뜻 나서 작은 실천 하나 하지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남을 보며 나를 반성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는데, 나이 들어 조금씩 배워간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그 안의 나를 함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 육십이 될 때까지 세상과 대화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대화는 어떤 의미에서 일방적이었다. 설득하되 설득당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지만,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함께 두고 살펴보지 못했으니 일방에 치우친 셈이다. 이제 자신과 차분히 대화할 때가 됐다. 그러면서 밖을 보니, 유리창이 보이기 시작했다. 밖과 안을 갈라 놓으면서 이어주는 유리창이.... 나뭇잎 떨어져 뒹굴고 수북이 쌓인 가랑잎을 밟으며 걷는 대관령 700고지 11월 창밖의 여백이 그렇게 다가왔다. 무려 열 달을 공들이다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 피운, 꽃보다 붉은 단풍. 그러나 이내 떨어져 바람에 몸을 맡기는 가랑잎들은, 할 일을 다한 잎사귀의 득도인가. 옅은 바람에 갈색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11월, 지금까지 알던 사람들을 모르는 척 떠나는 발걸음이 아프다. 이태원 핼러윈 압사 참사 희생자의 영면을 빌면서 주말 아침 어김없이 ‘치유의 숲’에서 웅장한 전나무 길을 걷다 보니, 처음 만나는 들꽃들이 말을 건넨다. 안녕, 유리창 밖으로 나왔구나. 어떻게 바람 잦은 대관령까지 왔다니, 가을에도 꽃이 핀다. 단풍의 화려함에 치여 잘 보이지 않지만, 눈여겨보면 여기저기 많다. 눈에 보여야 말귀도 알아듣는 자세라면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 귀엔 들리지 않는 법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고, 총체적 부실을 저질러 놓고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들에게 사회 안전과 질서에 믿음을 다시 맡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치유의 숲 산책길에 고요함과 적막함에는 도시와 다른 질서와 아름다움이 있다. 허공이 있고, 바람이 있고, 울창한 나무가 있고, 바위도 있다. 그러나 전도유망(前途有望)한 많은 젊은이들을 지키지 못한 자책의 마음이 무겁고 발걸음도 힘겹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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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22-11-06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