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생명의 무게

전쟁 소식이 끊임없이 들린다. 지난 수년 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침공 소식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더니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전쟁에 미국이 무력으로 이란을 공격하면서 전 세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갔다. 다행히 이스라엘과 이란이 휴전하면서 전면전으로 비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시 시선을 가자지구로 돌려 하마스 해체를 명분 삼아 지난 24일에도 구호물자 배급을 기다리던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총을 난사해 40여명이 숨졌다. 전쟁을 일으키고 또 거기에 개입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이념적, 정치적인 갖가지 이유를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그 명분은 대부분 자기중심적 편견과 우월의식에 젖은 차별의 논리에 기초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명분의 이면에는 침략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이 그렇다. 네타냐후는 자신의 정치적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이스라엘인의 민족적, 종교적 편견을 십분 활용해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Genocide)마저 정당화하려 한다. 세상의 암담함은 이런 전쟁범죄 혐의에 대해 우리 사회를 비롯한 주류 세계가 보이는 무감각한 반응이다. 국제뉴스의 한구석을 장식할 뿐인 이런 소식을 사람들은 대부분 한 귀로 흘려넘긴다. 한국의 경우 우리에게서 너무도 먼 곳에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우리 이웃의 억울한 죽음에도 무심할 때가 많지 않은가.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존이 우선이니 다른 이의 어려움을 돌아볼 겨를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한, 이런 학살에 대한 사람들의 무심함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 사회가 냉혹할수록 사람들은 생명의 가치를 그저 수량으로 헤아릴 뿐이다. 예컨대 사람들의 쌀이나 소에 대한 관심은 그저 쌀값이나 소고기 가격이며 사람도 재산이 얼마나 많고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에 따라 그 가치를 평가한다. 이런 가치 기준은 급기야 인명(人命)의 가치를 헤아리는 데까지 적용된다. 어떤 전쟁으로 몇만 명이, 어떤 사고로 몇백 명이 사망했다고 하면서 그 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경제적 피해가 우려된다고 하는 헤아림이 그것이다. 물론 인명 피해는 수치로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가치가 그렇게 수치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일까.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부른 홍순관은 쌀 한 톨 안에는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 그리고 농부의 새벽 등 우주의 무게가 담겨 있다고 읊조린다. 쌀 한 톨이 응축한 무수히 많은 자연의 자연력과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쌀값으로 결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인간 생명의 ‘무게’를 그 사람의 키나 체중, 시험점수, 재산 등으로는 전혀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저 쌀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무게’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개개의 ‘우주’를 함부로 살상하거나 그 살상을 방관하는 이들은 모두 생명의 ‘무게’를 자각하지 못한 자들이다. 이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함부로 죽여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한 우주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열면서] 더운 여름, 자연이 권하는 식재료

공심채(空心菜)라는 식재료가 있다. ‘속이 빈 채소’란 이름처럼 여백을 품은 이 채소는 동남아시아 기후와 같은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 잘 자란다. 요즘은 국내에서 재배하는 곳이 많아 시금치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마트에서 보인다. 동남아 전역에 걸쳐 김치처럼 많이 사용되는 공심채는 ‘모닝글로리’라는 이름처럼 여름 아침과 같은 생기를 더해 준다. 최근 한국의 날씨는 동남아시아의 열기와 많이 닮아 있다. 푹푹 찌는 더위와 습도 속에서 마치 태국이나 베트남의 골목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고온다습한 기후는 몸을 지치고 늘어지게 만들지만 동시에 여름의 태양은 곡식과 채소 과일을 튼실하게 키워내는 엄청난 에너지의 계절이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멕시코, 브라질, 아프리카, 인도, 이탈리아 남부 등 아열대 기후를 지닌 지역의 음식문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뜨겁고 습한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칠리나 커리처럼 강한 향신료와 신선한 허브를 풍부하게 활용한다. 이들은 단순히 맛을 내기 위한 재료를 넘어 냉한 기운의 채소에 양기를 보완하고 더위에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도록 돕는 역할도 한다. 특히 동남아의 음식은 매운맛, 신맛, 짠맛, 단맛의 네 가지 맛이 균형을 이루는 조화를 중시한다. 더위로 잃기 쉬운 입맛을 되살리기 위해 다른 지역보다 좀 더 자극적이고 생기 있는 맛을 담는다. 여름은 1년 중 양(陽)의 기운이 가장 강한 시기다. 뜨거운 태양, 상승하는 체온, 활발한 생명 활동은 모두 화(火)의 기운을 품고 있기 때문에 몸속 수분과 기운은 쉽게 소모되고 때로는 열독이나 갈증, 무기력으로 나타나 일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때 자연은 채소라는 지혜로운 해답을 내놓는다. 채소는 대부분 음(陰)의 기운을 지니고 있어 뜨거운 여름에 과도한 양기를 조절하고 체내 열을 내리며 수분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신진대사가 가장 활발해지는 여름에는 몸에 노폐물이 많이 쌓인다. 이를 배출하는 데는 섬유질이 많은 채소와 과일이 최고다. 오이, 가지, 감자, 풋고추, 열무, 수박, 참외, 자두 같은 제철 식재료는 무더위에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넣고 노폐물 배출을 원활하게 한다. 상추, 깻잎 같은 잎이 넓은 채소들도 뜨거운 여름에 어울리는 음식이다. 된장과 고추장을 곁들여 쌈으로 즐기면 소화에 도움이 되고 입맛을 되살린다. 여름의 채소는 풍부한 수분으로 열을 내려주고 상열감을 가라앉혀 주며 몸의 균형을 조율하는 식탁 위의 처방전이다. 평소에는 쌈이 끌리지 않다가도 여름에는 우리 몸이 먹고 싶게 만드니 몸과 자연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다. 몸과 마음이 쉽게 흐트러지는 계절, 신선하고 깨끗한 여름의 식재료는 우리 삶의 중심을 잡는 큰 힘이 된다. 싱그러운 쌈 한 입, 상큼한 오이냉국 한 그릇에서 여름을 건강하게 건너는 힘을 얻는다. 여름 식탁에서 채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고 여름이 시원하게 지나가기를 기다리자.

[아침을 열면서] 이 세상 모든 부모를 응원하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것, 자신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이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 그 밖에 자타공인 “진짜 어려운 일인데 그걸 해내다니, 대단해”라는 말을 들을 만한 것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로 손꼽을 수 있다. 각자의 경험과 생각, 처지가 다르므로 그 어떤 것을 유일하다고 말하기 어렵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자식을 반듯하게 키워내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가 된 이들 중 부모 연습을 충분히 해보고 부모 된 이가 누가 있으랴. 누가 바로 옆에서 하나하나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다 처음 해보는 것인데 그 과정이 어떻게 녹록하겠는가. 자식이 여럿인 경우라도 그 존재가 제각기이므로 첫째 키워냈다고 둘째가 쉽고 둘째 키워냈다고 그 아래 아이 키우기가 쉬울 리 없다. 다소 시행착오가 줄어들 뿐 매번 새로운 자식을 맞이해 새로운 육아를 하는 것이기에 부모 역할의 난이도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아이 문제로부터 기인한 가족 상담을 진행할 때면 혼란에 빠진 부모를 만나게 된다. “우리 아이는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우리 아이가 아직 어려 뭘 잘 몰라서”라는 현실 부정에 빠지거나 아이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거센 후폭풍이 예상되는 상황임에도 “우리 애가 잘못은 했으나 책임지는 과정에서 혹여 상처받아 더 비뚤어질까 두려워서”라며 무조건적 보호 본능에만 충실한 부모를 볼 때면 안타깝다. 물론 어리고 몰랐다는 그 주장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어리고 몰랐기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에게도 생채기를 남기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부모 나이대의 어른도 아직 철없이 행동하는 이가 수두룩한데 인격 형성 중인 아이가 미숙한 행동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 분명하게 옳은 가치의 기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온 가족이 아이가 저지른 잘못을 들여다보며 직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매우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상황을 피하려 하면 절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부모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아이도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아이가 괴로워하는 걸 보면 부모의 마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부모가 흔들리면 아이는 바로 눈치채고 모면할 궁리를 하게 된다. 내 아이가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다.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하려 자연스레 방어기제를 펼치는, 지극히 인간다운 대응일 뿐이다. 그럴 때마다 충분히 이야기하고 경청하고 또 관찰하면서 아이의 생각과 마음에 뿌리 내리려는 나쁜 씨앗을 솎아내야 한다. 아이의 행동이나 마음을 깊이 살피며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객관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에 근거한 깊은 반성이 우선이다. 그래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잘못을 발판 삼아 더 반듯한 삶을 꾸려 갈 힘도 얻는다. 내 아이를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단 하나뿐인 정답처럼 명쾌하면 좋으련만. 흔들리지 않고 의지할 수 있는 커다란 기둥 역할과 안전하고 넓은 마음의 울타리가 돼 주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는,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아침을 열면서] ‘개인적’에 대한 생각

“저의 개인적 의견은요....” 흔한 표현인데 볼수록 이상하다. 분명히 ‘저’라고 밝히는 뒤에 ‘개인적’을 사족처럼 붙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개인적’의 상대 개념으로 ‘저의 공적(집단적?) 의견’도 가능한지 새겨보면 어색한 표현임이 확연하다. 그런데 많이 쓰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게다. 그와 비슷이 마주치는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은요...”의 남용처럼. 사실 ‘저’라는 화자(話者)를 밝히면 굳이 ‘개인적’을 넣을 필요가 없다. 앞의 예에서 ‘개인적’을 빼고 ‘저의 의견’이나 ‘제가 좋아하는’으로 쓰면 뜻은 물론이고 전달도 명료한 문장이 된다. 그런 문법구조를 인지하는 글에서는 ‘개인적’의 오남용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일상 대화에서는 ‘개인적’을 조금 겸손히 앞에 두는 표현들을 자주 만난다. 관용적 표현도 아닌 ‘개인적’을 남용하는 것은 우리네 문화와 무관치 않은 말하기 같다. 집단주의 사고방식이나 객관식 위주의 정답 찾기의 귀결로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피력할 기회가 적었던 교육환경의 탓이 크겠지만.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 생각 혹은 모범답안과 상관없이 내놓기를 조심하는 분위기. 여기에는 일찍부터 자기 의견을 조리 있게 펴거나 논박하는 기회가 많지 않았던 환경이 깔려 있다. 과묵을 미덕으로 여겨온 전통과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된 말하기 교육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보통의 가정이며 학교가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대학에 관련 과목인 ‘발표와 토론’ 등이 있지만 많은 학생이 상황에 맞춤한 말하기 능력을 키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사정이 ‘글쓰기’보다 어려운 ‘말하기’ 교육 현장의 실정으로 보인다. 그런 환경에서 논리력이나 설득력 등을 잘 갖춘 언변을 기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말 잘하기로 소문난 대선 후보들 토론에서도 우리네 말하기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지 않던가. 특히 윗사람 의견에 대놓고 반박하기를 거의 금기시해온 데다 아랫사람이 숙여야 한다는 문화적 인자며 정서도 갖고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강자나 윗사람의 ‘갑(甲)질’로 떠들썩할 때 옥스퍼드사전에 ‘갑질(gapjil)’이 올랐던 기억도 있다. 요즘은 ‘을(乙)질’의 등장으로 약자나 아랫사람의 ‘을질’을 겁내는 세상이 됐지만 말이다. ‘저’를 밝힌 뒤의 ‘개인적’은 군말이다. 거기에 여러 생각이 불려 나온 것은 말에 반영된 사회상 때문이다. 그 말을 굳이 쓰는 정황들을 되짚어보니 상대 존중이나 자기 드러내기에 대한 조심도 느껴지는 것이다. 자신의 취향이나 의견의 피력이라면 당연히 집단 및 공적인 것과 다르련만 자신을 조금 낮추듯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느낌이다. 개인주의며 이기주의의 심화를 걱정하는 중에도 여전히 개인의 성향이나 견해 등의 명시는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아니면 잘난 척으로 튀지 않을 표현을 찾다 ‘개인적’을 앞세우는 언어 습관에 편승하는 것일까. MZ세대는 취향이 분명하고 말하기도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 중에도 자기 생각에 ‘개인적’을 얹는 말하기가 자주 나타난다. ‘개인적’을 쓸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상하게 굳은 허례요 상투(常套)다. ‘제가 좋아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아침을 열면서] 고통스러운 노동을 넘어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동 관련 공약이 자못 주목을 받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냐, 노동시간 유연화냐 하는 노동시간 문제부터 정년 연장 문제, 산업재해에 대한 기업주 처벌을 강화하는 문제, 최저임금을 지역이나 국적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문제 등에 대해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진영 후보자가 내건 공약은 선명하게 대립한다. 대체로 진보 진영 후보는 노동자의 각종 권익을 보호, 강화하려 하며 보수 진영 후보는 기업의 경영 여건을 개선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이 같은 노동정책의 대립에는 그 심층에 노동의 의미에 관한 상당히 다른 견해 또한 있는 듯하다. 사람은 왜 일을 할까. 이 물음에 누구든 우선은 ‘먹고살기 위해서’, 그다음으로는 ‘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은 생존의 욕구와 더 나은 삶의 갖가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욕구나 욕망을 채우는 일이 인류 역사에서는 결코 간단했던 적이 없다. 생존 여건이 가장 녹록지 않았던 원시사회에서 채집을 위주로 살던 인류의 조상들은 역설적으로 열매를 따 먹는 평범한 일상에서 한없는 감사와 황홀함을 느꼈고 사회적 관계도 상당히 평등했다. 그러다 한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인간에게 노동은 축복과 고통이 함께하는 일이 됐다. 생활의 안정을 보장하는 부가 축적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축복이었지만 더 많은 수확은 얻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자연 및 이웃과 싸우는 과정은 고투였다. 그리고 근대 이후 더 많은 향유와 전면적인 지배를 위해 자연과 사회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더욱 노골화했다. 그 결과 21세기 인류는 이제 갖가지 지성적인 작업도 함께해주는 훌륭한 비서인 챗GPT를 얻기에 이르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생태계의 질서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하고 말았다. 인류 노동의 역사를 이같이 스케치해 얻는 한 가지 새로운 생각의 실마리는 오늘날 진보 진영은 노동의 고통과 재앙에 주목하고 있는 데 반해 보수 진영은 노동이 가져다준 축복의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노동 방법의 발전, 즉 기술의 혁신은 인간사회에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편의를 가져다줬다. 그렇지만 기술 발전과 노동의 효과적 조직화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사실 재앙 수준의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 고갈의 문제나 지나친 경쟁으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는 사실상 크게 관심이 없고 근본적 해결책도 없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이 행복한 노동이 돼야 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물론 이 일은 쉽지 않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제까지의 노동은 축복과 고통이 교차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노동이 좀 더 즐거운 노동이 되려면 이제까지 노동이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웠던 측면을 개선하는 데 힘쓰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예컨대 첨단 기술이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자연 생태계와 노동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세심하게 도덕적으로 고려하는 쪽으로 말이다.

[아침을 열면서] 미역국으로 기억하는 생일

가정의 달 5월이 숨 가쁘게 지나가고 바람과 적당한 비를 맞고 새롭게 단장한 나무들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5월은 역시 ‘탄생’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달이다. 며칠 전 조용한 생일을 보냈다. 소란스러운 축하보다는 고요한 하루가 더 간절한 날이었다. 미역국도 챙기지 못하고 바삐 출근하던 시절엔 아침부터 축하 메시지가 쏟아지고 케이크와 꽃이 넘쳐 났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가족과의 시간과 마음의 안정을 먼저 챙기게 되는 날이다. 다른 날보다 느긋하게, 천천히 시작하는 생일 아침, 미역을 꺼내 불리면서 부모님에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전하고 미역국으로 따뜻한 하루를 시작했다. 생일은 나이 한 살을 더하고 파티하는 날이 아니라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축복하는 날이라는 것을 중년에야 깨달으니 문득 아쉬움이 감돈다. 이 소중한 의미를 이제라도 깨달아 감사할 따름이다. 한 매체에서 조사한 ‘생일 요리’에 관한 설문에서도 ‘연인을 위한 생일 메뉴’ 1위는 단연 미역국이었다. 생일 아침에 챙기는 미역국은 단순한 생일 음식이 아니라 우리의 지혜로운 음식이다. 언제부터 생일에 미역국을 먹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미역의 영양학적 가치는 고려시대 문헌에도 등장한다. 새끼를 낳기 위해 미역밭을 찾아드는 고래는 미역을 먹으며 몸을 회복한다고 알려져 있다. 영양이 부족하던 시절 미역국은 삼면이 바다인 이 땅에서 산모의 기력을 보하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였다. 미역을 식재료로 먹는 국가는 많지만 생일에 우리처럼 미역국을 먹으며 탄생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생일날, 세계의 식탁에는 어떤 축복의 음식이 올랐을까. 중국에서는 장수면(長壽麵)이라고 불리는 길고 가는 국수를 먹으며 장수를 기원한다. 면을 끊지 않고 먹는 것이 중요하며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복숭아 모양의 찐빵도 장수를 상징하며 생일상에 자주 오른다. 가나의 ‘오토(Oto)’는 으깬 얌이나 고구마로 만든 생일 아침 식사로 풍부한 탄수화물은 활기찬 시작을 상징한다. 네덜란드 남부에서는 생일에 케이크 대신 ‘블라이(Vlaai)’를 낸다. 체리, 살구, 쌀 푸딩 등을 채운 커다란 전통 파이로 한 조각만으로도 따뜻한 축하의 마음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친구나 가족들이 함께 만드는 경우가 많아 유대감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호주의 ‘페어리 브레드(Fairy Bread)’는 버터를 바른 빵 위에 알록달록한 스프링클을 얹은 간식으로 아이들 생일 파티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다. 다양한 생일 음식은 먹거리를 넘어 생일 축하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되새긴다. 생일을 축하하는 건 같지만 생일을 고마워하는 건 어쩌면 우리만의 방식이다. 그 마음은 미역국 한 그릇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온다. 미역국 한 그릇에서 시작된 우리의 생일문화와 세계 각국의 독특한 생일 음식은 단순히 개인의 식사가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나누는 축하 언어다. 생일 음식을 함께 나누며 따뜻한 마음이 음식으로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도 또 하나의 축복이다. 생일은 그렇게 식탁 안에서 우리 모두를 이어준다.

[아침을 열면서] 노인도 자아효능감이 필요하다

5월 초 연휴 중 한나절 시간을 내 부모님과 홀로 지내는 고모를 모시고 근교로 향했다. 아흔 넘으신 고모가 좋아하는 식당과 한강 전망이 탁 트인 카페에 갔는데 때가 때인지라 가족 단위 방문객이 정말 많았다. 특히 아이와 부모, 조부모가 함께인 모습이 평소보다 더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모두 고려한 나들이였으리라. 고모는 아흔 넘은 나이에 혼자 지내지만 독립적이다. 움직임이 예전처럼 가뿐하진 않아도 지팡이를 짚고 혼자 잘 다니고 집안일도 깔끔하게 잘 해낸다. 종종 찾아뵐 때마다 도울 일이 하나 없을 정도다. 뭐든 필요할 때 연락을 주시라 권하지만 고모는 제정신일 때는 젊은이나 이웃에게 되도록 의지하지 않고 혼자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나이 든 사람의 미덕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그 연세에 도달했을 때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참 잘 살아낸 인생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식사 후 담소를 나누던 중 고모가 “늦기 전에 언니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번에 뵌 고모 위로 백세 가까운 고모가 두 분 더 있다. 조부모 두 분 모두 아흔 가까운 나이에 돌아가신 장수 집안이니 별일은 아니다. 놀랄 일은 따로 있다. 시골 고모들은 그 연세에 아직도 밭으로 일을 다니신다. 재산도 넉넉하므로 생계를 위한 게 아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심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촌들도 유심히 살펴보기만 할 뿐 말리지 않는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범위의 소일거리이므로 어머니 스스로 용돈 버는 기쁨을 누리도록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청렴하고 일을 잘해 나라가 주는 상도 받았지만 IMF 외환위기 때 조기 정년 정책으로 몇 년 일찍 원치 않은 은퇴를 했다. 원래 정년을 누리지 못한 아버지는 몇 년간 깊은 우울감에 시달렸고 가족들도 아주 힘들었다. 그러나 원래 하던 일도 아닌 주차 관리 업무로 다시 일을 시작한 후론 웃음을 되찾았다. 사회에서 무언가 자신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자식의 만류에도 거의 팔순까지 학교 숙직 수위 아르바이트를 이어갔다. 진짜 은퇴 후엔 지하철, 버스, 기차로 다니는 전국 여행 기록을 스마트폰 영상으로 만들며 즐겁게 사신다. 어머니도 스스로 일상을 꾸리는 편이다. 하지만 여러 여건상 모든 노인이 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는 건 아니다. ‘2024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전체의 19.2%로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그러나 현재 삶에 만족하는 고령자 비중은 31.9%로 2.4%포인트 줄었고 자신의 사회·경제적 성취에 대해 만족하는 비중도 26.7%로 4.6%포인트 감소했다. 초고령사회의 주요 일원인 고령자가 이같이 불행하다면 큰 사회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미래인 젊은이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초고령사회에서는 노인도 젊은이 못지않은 미래가 될 수 있기에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의존하거나 짐스러운 존재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고령자가 자아효능감을 느끼며 독립적으로 살아갈 방법이나 고령자를 위한 진로 교육, 일터 등 사회적 차원에서 주어지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아침을 열면서] 높임말의 제자리 찾기

요즘 길 잃은 높임말을 자주 만난다. 과용에서 오남용까지 높임말의 범람도 점입가경이다. 높임이라는 특성상 맞춤하게 쓰기 어려운 면은 있다. 높임의 기본 기준은 생물학적 나이지만 관계에 따른 호칭 속의 높임·낮춤도 있으니 복잡한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신분이며 친인척 사이의 구분이 위계나 수직적 질서를 강화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높임말 습속은 쉽게 변하지 않을 듯하다. 최근에 많이 나오는 높임말 문제 중에 ‘분’의 오남용이 있다. 예컨대 ‘팬(fan)분’을 넘어 ‘어린이분’, ‘어르신분’ 같은 과용이 의외로 늘어난 것이다. 어린이만 해도 ‘어린 사람’(아동인권 의식이 부족했을 때는 ‘어린놈’ 취급이 예사였음)의 높임말에 속한다. 사람을 조금 높여 이르는 ‘그이, 저이’ 같은 말의 ‘이’를 붙인 ‘어린+이’니 말이다. ‘젊은이, 늙은이’도 같은 맥락의 말인데 늙은이는 노인 비하로 여겨져 쓰기 어려운 말이 됐다. 그러다 보니 ‘어른’의 높임말로 ‘어르신’을 쓰는데 거기에 ‘분’까지 덧붙여 기이한 말본새가 떠도는 것이다. 높임에 높임을 얹는 말이니 옥상옥(屋上屋)이 따로 없다. 한때 사물 높임말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커피 두 잔 나오셨어요, 큰 사이즈는 지금 없으세요’ 같은 이상한 높임에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넘쳤던 것이다. 꾸준한 지적 끝에 그 비슷한 사물 높임의 오남용은 이제 사라진 듯하다. 무의식중에 잘못 쓰는 말씨를 바로잡은 사례라 하겠다. 그런데 최근에는 또 다른 높임말의 폭주가 거슬린다고들 한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높임말이 헷갈리는지 이상한 자기 높임말들이 빈번해졌다는 것이다. 그중 흔한 예로 ‘제가 아시는 분’이나 ‘저한테 여쭤보시면 돼요’ 같은 말들이 있다. 상대에게 높임말을 쓰려다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말이니 높임의 대상을 혼동하는 데서 나왔을 테다. 틀린 줄도 모르고 쓰는 말을 일일이 짚어줄 수도 없으니 민망함은 듣는 사람의 몫인지. 그저 아는 사람만 속 시끄러울 노릇이다. 사실 우리말은 높임말을 제대로 잘 쓰기 어려운 언어로 꼽힌다. 대상에 따른 높임말 사용도 그렇지만 친인척의 위계에 따른 높임말은 최상급의 어려운 말일 것이다. 그중에도 시가·처가 사이의 호칭과 그에 따른 높임말의 구분은 복잡하고 민감하다. 무엇보다 여성의 친인척 호칭에 깊이 배어 있는 차별성이 명절 기사로 오르내릴 만큼 비판을 초래하는 것이다. 갈수록 여성 자신의 역량으로 바꿔가긴 하지만 여성 쪽 호칭과 관련된 낮춤말은 여전히 쓰이고 있다. 가부장사회 유습 중에도 말에 깃든 의식의 개선이야말로 문화 변화 이상으로 더딘 까닭이겠다. 차별적 표현을 대체할 만한 적절한 말을 새로 만들기도 어려운 데다 생활의 적용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우리말 속의 위계는 뿌리가 깊다. 높임말·낮춤말이 생물학적 나이에서 사회적 신분의 표현에까지 층층이 들어 있다. 높임말 사용이 인성은 물론이고 가정교육까지 운운하는 사회 분위기가 작용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무례와 무시를 넘나들던 높임말 문제로 살인까지 간 사건도 나온 게다. 조심에 조심을 더하는 높임말, 지나치게 높이다 오남용에 걸리기 십상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높임말도 적절히 잘 써야 존중의 교양이 된다.

[아침을 열면서] 불타버린 푸른 숲, 외면당하는 기후 위기

경북에서 역대급 산불이 발생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돼간다. 사건 직후 한반도 동남부의 푸르른 산림은 순식간에 거대한 잿더미로 변했고 소방헬기와 구조대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연일 언론을 장식했다. 이어 언론은 인명과 재산 피해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전국 각지에서 이재민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이 이어졌다는 따뜻한 이야기들도 전해졌다. 최근에는 최초 실화를 일으킨 두 사람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소식까지 뉴스에 등장했다. 그러나 이 대형 산불이 과연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만 소비돼도 괜찮은 일일까.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왜 불이 났는가’보다는 ‘얼마나 탔는가’에 집중된다. 설령 원인을 묻는 이들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시선은 개인의 실수나 부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누군가의 불씨가 발단이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단지 한두 사람이 실화한 결과가 27명의 인명 피해와 축구장 6만개가 훨씬 넘는 산림의 초토화로 이어졌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 이상한 것은 호주나 미국 같은 해외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을 때는 이구동성으로 그 근본 원인을 기후 변화와 생태계의 불안정성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불이 붙는 계기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고온과 가뭄, 불규칙한 강수, 강풍 같은 기후적 조건이 겹쳐야 이토록 거대한 화재로 번지는 것이다. 즉, 산불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기후 위기가 만들어낸 구조적 재난이라는 점이다. 이번 경북 산불은 생태 재난이 이미 우리 곁에 닥쳤고 더 이상 한반도도 안전지대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여전히 이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이 지나치게 개인화되고 치열한 경쟁 체제 속에서 ‘나’와 ‘우리’의 생존과 자기중심적 욕망에만 몰두한 결과 기후 위기 같은 문제는 애초에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일이라며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다. 더 큰 문제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정치적 프레임이 덧씌워진다는 사실이다. 기후 문제를 말하는 사람이나 단체에는 으레 ‘좌파’라는 낙인이 찍히고 그 주장들은 한쪽으로 치우친 이상주의로 몰린다. 물론 이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는 이들 중 다수가 진보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생태 위기를 직시하는 시각에서 보면 정치적 보수뿐 아니라 진보 진영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그리 ‘진보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기후 위기와 생태 재난은 일부 여유 있는 사람들의 ‘한가한’ 걱정이 아니며 정치적 좌우로 갈라치기 해 다룰 사안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의 생사 존망이 걸린 문제이며 지금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대형 산불은 바로 이 위기의 도래를 알리는 경고음이다. 우리는 이제 이 신호를 직시하고 현대사회의 반생태적 정신과 기술, 체제 전반을 근본부터 다시 성찰해야 한다. 지금처럼 당장의 경쟁에서 ‘내’가 살아남는 일이 급하다고 이 문제를 외면한다면 위기는 더 가속화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불타는 숲 너머의 너무도 불편한 진실을 보고 있는가.

[아침을 열면서] 4월, 책과 독서를 기념하는 달

스마트폰 등이 일상화되기 전에는 연말연시에 새 다이어리를 장만한 후 으레 달력 안에 챙겨야 할 중요 행사나 기념일, 꼭 기억해야 할 날들은 색 펜으로 표시하곤 했다. 집중력과 꼼꼼함이 필요한 작업이라 다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지금은 스마트폰 일정표 앱에 한 번 입력해 놓으면 해마다 정보가 연동되니 편리하다. 예전만큼 하나하나 점검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는 않으나 그만큼 기억하고 싶은 기념일에 둔감해져 자칫 중요한 일정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그래서 월말이나 월초에 매달 챙겨야 할 주요 일정을 꼭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4월에도 개인 기념일과 더불어 여러 국가기념일이 있어 정리해 본다. 제일 먼저 4·3 희생자 추념일이 있다. 제주4·3사건에서 참혹하게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고 국가폭력이 국민에게 자행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지게 되는 날이다. 제주 4·3공원을 방문했을 때 위패봉안실에 있던 수많은 희생자 이름을 보며 말문이 막혔던 경험이 있다. 비극의 역사이지만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기에 꼭 기억해야 할 날이다. 4월4일은 57주년이 되는 예비군의 날이다. 예비군 신분임을 증명하면 여러 놀이공원이나 전시 관람 할인 행사가 있었다고 하니 징병제 국가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청춘의 시간을 내어준 이들을 위한 마땅한 혜택이라고 생각한다. 4월5일은 식목일이다. 6·25전쟁 이후 산림녹화 시절에야 식목일이 중요했겠으나 지금은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3월 말 대규모 산불로 산림 소실률이 어마어마했고 이재민도 대량 발생해서인지 이번 식목일을 맞이하는 마음은 남달랐다. 7일은 보건의 날이고 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다. 우리 헌법과 정부의 정통성이 수립된 날이므로 우리나라 민주화의 중요한 기점인 4·19혁명기념일과 함께 매우 중요한 날이 아닐 수 없다. 20일은 장애인의 날이고 21일은 과학의 날, 22일은 정보통신의 날, 25일은 법의 날,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4월 4주 차 금요일은 순직의무군경의 날이다. 모두 국가가 지정하자고 한 이유가 있을 법한 날이니 꼭 기억해 두면 좋겠다. 국가기념일은 아니지만 책이나 책 읽기와 연관해 기념할 만한 날도 있어 마저 정리해 본다. 2021년 도서관법을 개정하면서 도서관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 이용 촉진을 위해 4월12일을 도서관의 날로 지정해 이후 일주일간은 도서관 기반의 다양한 독서 행사가 열린다. 4월23일은 세계 책의 날이다. 책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책 읽기의 중요성을 확인하며 저작권을 존중하자는 의미로 제정된 날이다. 세계 책의 날에는 가족이나 지인에게 책과 꽃을 선물하는 행사가 열린다. 올해도 공공 및 민간 영역에서 다양한 책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니 꼭 참여해 보길 바란다. 독서의 달인 9월 외에 4월도 중요한 책의 달임을 잊지 말자. 이런 기념일들은 지정해도 참여하는 이들이 없다면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그러려니 무심하게 지나치지 말고 진짜 의미 있는 날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즐기고 기억하면 좋겠다.

[아침을 열면서] ‘민들레 홀씨’는 없다

이게 뭐임? 갸웃거림이 많을까, 다 지난 얘기라는 웃음이 나올까. ‘민들레 홀씨’는 무슨 관용구처럼 쓰였던 표현. 그런데 정작 민들레 홀씨란 없다. 민들레는 홀씨식물이 아닌 까닭이다. 그럼에도 ‘민들레 홀씨’가 여전히 많은 것은 단어며 명칭에 대한 돌아보기가 부족한 탓이다. 아니면 동그랗게 멀리 날아가는 민들레 꽃씨 모습을 ‘홀’로 표현해야 더 시적 은유 같고 사랑스럽기 때문일까. 하지만 홀씨는 일반적 씨앗이 아니다. ‘단세포로 발아해서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는 식물의 무성생식세포. 홀씨는 민꽃식물인 양치식물, 이끼류, 곰팡이류 등에 있다. 확 닿지 않는 양치식물은 ‘꽃이나 씨앗을 만들지 않는 관다발의 일종’이니 고사리 같은 식물이다. 이렇게 조금만 살펴봐도 무의식적으로 쓴 ‘민들레 홀씨’가 좀 면구스러워진다. 안 맞는 표현에 대한 반성적 지적이 나온 지도 한참 지났건만 ‘민들레 홀씨’가 도처에서 여전히 피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가수 박미경이 ‘민들레 홀씨’와 관련된 사과를 한 적이 있다. ‘민들레 홀씨되어’(1985년 MBC강변가요제 장려상) 유행으로 잘못 고착된 표현에 대한 가수의 책임감에서다. 그럼에도 이후 기사나 시 같은 전문인의 글에서조차 ‘민들레 홀씨’가 간간이 등장한다. 간판이며 상호에 나붙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을 정도다. 그렇게 쓰는 이들은 틀린 줄 알면서도 안 고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게 뭐 대수냐고 웃어넘기는 것인지. 오히려 지적을 하는 쪽이 좀스러워 보일 지경이다. 부끄러움은 왜 저지른 사람보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몫이냐는 세간의 탄식처럼. 일찍 굳어 버린 표현을 고쳐 쓰기란 어려울 수 있다. 평소의 말이나 글을 정확하게 쓰려면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만큼 우리가 매일 쓰고 읽는 글에서도 의외로 많이 발생하는 오류 표현이 있다. 애초에 잘못 알려진 단어들의 이식도 문제다. 전에 잘못 쓴 말 앞에 화끈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목련을 후박나무로 쓴 기억 때문이다. 잘못 알려진 것도 모르고 여러 글에서 본 이름(나무이름표에도 한동안 후박나무로 있었음)을 그대로 썼던 것이다. 지금은 돌아보기 습관화로 익숙한 단어도 다시 확인, 오류를 줄이려고 애쓴다. 언중(言衆)의 쓰기에 따라 의미 변화나 확장이 일어난 최신 버전 단어가 많아져 확인이 늘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여느 존재의 이름 불러주기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안도현 시인의 다정한 반성처럼.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얼마나 서운했을까요?//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애기똥풀) 한때 ‘이름 모를 새, 꽃, 벌레’ 등을 마구 쓴 시인들은 이 시에 죽비를 맞았다. 미물이라도 이름 제대로 불러주는 일이 말의 바른 쓰임이고 쓰는 자의 소임이다. 이번에 파면 선고를 보며 문장이 참 명료하다 끄덕였다. 단어나 문장이 정확하면 뜻은 자연스레 명징해지는 법. 틀림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소소한 이름이라도 명확히 쓸 때 말도 글도 아름다워진다. 민들레 홀씨는 민들레 꽃씨라 불러주듯.

[아침을 열면서] 무전공 입학 시대, 대한민국의 교육

2025년 봄, 국내 대학가의 풍경은 자못 이채롭다. 전국 대다수 대학가 처음으로 무전공 입학생을 수백명씩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무전공 입학은 작년 이맘때 언론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교육 분야의 이슈 가운데 하나였는데 어느덧 대학에는 특정 전공을 정하지 않은 대학생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문과대학, 공과대학 등의 계열 구분이 전혀 없이 완전히 자유전공학부 학생처럼 입학한 유형의 학생들도 있고 특정 계열은 정하고 들어온 무전공 입학생도 있다. 현 정부가 애초에 이 입학제도를 도입한 목적은 ‘미래 융합형 인재 육성’을 위해서였다. 산업계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융합 기술의 혁신을 주도할 인재를 양성하는 데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치열한 입시 경쟁 교육으로 중·고등학교 때 적지 않은 학생이 전공 탐색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도 이 제도 추진의 또 다른 이유였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제안 당시부터 여러 반론이 있었다. 무엇보다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무전공 입학생들이 결국 특정 인기 학과로 몰릴 게 뻔하고 그로 인해 인문학이나 순수과학 분야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라는 게 가장 큰 우려였다. 그리고 그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입학 직후 무전공 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공 선호도 조사 결과 상경대와 공과대 등 특정 전공으로의 쏠림 현상은 매우 심했다. 또 1년 후 무전공 입학생들이 전공을 정하고 나면 이들은 기존 전공별 입학생들과 학습 내용에 아무 차이가 없어진다. 융합 인재 육성이라는 애초의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질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물론 무전공 입학제도는 잘만 보완하면 좋은 제도로 안착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항이 고려돼야 한다. 첫째, 계열 구분 없이 모집하는 무전공 입학제도의 경우 명실공히 융합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적어도 완전히 다른 두 계열의 학문, 예컨대 철학과 컴퓨터 공학, 국어국문학과 언론학 등을 필수적으로 심화 탐구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둘째, 계열별로 입학하는 학생들도 계열 내의 여러 학문을 두루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특정의 협소한 전공만이 아니라 인접 학문에 대해서도 폭넓은 지식과 소양을 갖춘 인재로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십수년간 끊임없이 제안되는 새로운 교육제도의 시행을 경험하면서 갈수록 깊이 절감하는 문제의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현재의 이런저런 교육 혁신 제안이 과연 정말 우리의 교육을 혁신으로 이끄느냐다. 우리 교육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는 누구나 인지하듯 어릴 적부터 거의 ‘아동 학대’ 수준에 가까운 ‘지옥’ 같은 입시경쟁이다. 이 문제를 상당한 수준에서 완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교육의 혁신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상공업사회에 단지 적응할 뿐인 인간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주된 목표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교육이 현존 경제 질서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지만 시장경제의 ‘노예’가 돼서는 더더욱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최우선 목적은 시장의 융성이 아닌 인간을 인간답게 기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아침을 열면서] 계절의 선물 ‘봄나물’

생각만 해도 향긋한 쑥, 쌉싸름한 맛의 냉이, 달래, 취나물, 참나물 등 싱그러운 새싹들이 봄의 전령사가 돼 우리 식탁에 찾아왔다. 새로움, 시작, 순환의 시작점에서 살랑거리는 봄바람은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봄바람은 겨울잠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것으로 우리 몸도 자연의 변화를 따르니 새싹이 돋듯 기운이 일어나는 시기다. 미각은 계절에 따라 변하는 음식을 통해 자연의 기운을 감지하는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겨울 동안 익숙해진 무겁고 기름진 음식에서 벗어나 봄이 되면 자연스럽게 새롭고 산뜻한 맛을 찾게 된다. 봄에 돋아나는 새싹은 만물을 소생시키기 위한 풍부한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특유의 강한 향을 지닌다. 봄나물이 전하는 맛과 향을 느끼는 것은 몸이 자연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봄나물의 쌉싸름한 맛은 나른한 봄철 피로를 덜어주는 역할을 하니 씁쓸한 맛을 통해 우리 몸에 신선한 힘을 불어넣는 것이다. 특히 쓴맛의 음식은 겨울 동안 쌓인 독소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봄철에 먹으면 좋다.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무의 싹과 잎, 또는 그것을 조리한 찬을 의미하는 나물은 들나물, 산나물, 재배 나물, 바다나물(해초) 등 다양하다. 봄나물은 단순한 제철 식재료를 넘어 자연이 주는 생명력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음식문화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다. 나물(羅物)이라는 단어에서 ‘나(羅)’는 신라를 뜻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나물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진다. 나물문화는 단순한 식재료 활용이 아니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특히 농경사회에서는 봄나물이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음식으로 겨우내 저장한 곡식이 바닥날 즈음 들녘과 산에서 자라난 나물들은 부족한 영양을 채우는 소중한 자원이 됐다. 조선시대에는 산림경제, 규합총서 등의 문헌에서도 봄나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건강과 생명력을 북돋우는 중요한 식재료로 다뤄졌다. 음식의 온도와 질감 역시 미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뜻한 봄볕 아래에서는 가벼운 음식이 더 잘 어울리며 부드럽고 신선한 질감이 입맛을 돋운다. 봄나물은 간단한 양념만으로도 그 맛과 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자연스러운 단맛과 쌉싸름한 맛이 은은하게 어우러져 미각을 한층 더 깨운다. 또 봄나물의 향긋한 성분은 후각을 자극해 식욕을 돋우고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든다. 봄나물의 쌉싸름한 맛을 놓치지 않으려면 조리법도 중요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생으로 샐러드처럼 즐기는 것이다. 신선한 나물을 기름이나 간장을 곁들이면 더욱 풍미가 살아난다. 이른 봄에 만나는 봄나물은 살짝 데쳐 나물 본연의 맛과 영양을 그대로 즐길 수 있도록 최소한의 소금 간이나 겨자초장으로 가볍게 양념하는 것이 좋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된장이나 초고추장을 활용해도 좋다. 봄나물을 볶거나 국에 넣을 때는 너무 오래 익히지 않는 것이 영양소 파괴를 줄이는 방법이다. 우리 생활 속에서 습관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건강한 생활 습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식습관이다. 봄은 몸과 마음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는 계절이며 다양한 봄나물을 맛보는 것은 1년을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통과의례다. 냉이된장국 한 그릇, 달래장을 곁들인 따뜻한 밥 한 공기면 봄의 향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봄나물이 나오는 시기는 매우 짧으므로 자연이 주는 계절의 선물을 받아들여 건강한 미각과 균형 잡힌 식습관을 갖도록 제대로 봄맞이를 해보자.

[아침을 열면서] 연민의 마음으로 서로 바라보고 배려하자

어린 시절, 명절이나 집안 제사가 있을 때면 부모님과 함께 시골 큰댁으로 내려갔다. 여름이나 겨울의 방학 때마다 이어지는 친가 방문도 의례적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장항선 완행열차, 비둘기호를 타고 오가던 길이 어린 시절의 필자에게는 설렘 가득한 기차 여행이었으나 어머니에겐 퍽 고생스러운 길이었을 게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대체로 근무를 마친 후 막차로 내려가셨고 이런저런 명절 준비를 해야 했던 어머니는 고만고만한 아이 셋에 짐까지 책임지고 인파로 미어터지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줄줄이 딸린 애들을 챙기며 자리 선점 경쟁을 위해 달리고 달려 어렵게 기차에 올랐나 싶으면 시끄럽고 담배 냄새 자욱한 완행열차를 몇 시간씩 견뎌야 했다. 시골 작은 역에 도착한 후에도 큰댁까지 가려면 30분 넘게 걸어 들어가야 했는데 타계하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그곳을 매년 수없이 다니셨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에 조용히 참아내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그 시간 동안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머니와 옛 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게는 꽤 낭만적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일화들이 어머니에겐 매우 힘든 기억이었음을 알게 돼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언젠가 이런 어머니의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의뢰받은 어르신 자서전 쓰기 강좌가 있어 어머니께 지난 인생을 대략의 기록으로 남겨보는 게 좋지 않겠냐며 넌지시 권했다. 배움이 길지 않아 글쓰기가 자신 없다며 잠시 주저하던 어머니는 마지못해 수강 신청을 마쳤고 교육이 시작되자 열혈 수강생으로 변신했다. 반년 동안 이어진 강좌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사진과 글로 엮어낸 어머니는 마침내 완성한 인생 사진첩 자서전을 가슴에 품고 매우 뿌듯해했다. 그 뒤로 다른 자서전 강좌를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낸 어머니의 글을 읽으며 80년 인생 내내 얼마나 많은 꿈을 접으며 사셨는지 더 자세하게 알게 됐다. 지역에 중·고등학교 지을 부지가 없다는 말에 선뜻 땅을 내어줄 정도로 교육받을 권리에 깨어 있었고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상으로 농사지어 먹을 수 있는 공용 땅을 내놓았으며 집안 부엌 뒷마당에 누구나 가져갈 수 있는 쌀독을 뒀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던 집안에서 귀히 여긴 하나뿐인 딸에겐 왜 고등교육 기회를 주지 않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 여자에겐 신교육을 시키지 않는다거나 고된 시집살이를 시키는 게 그 시절엔 비일비재했기에 어머니도 군말 없이 감내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 시절을 견뎌낸 수많은 어머니와 여성의 희생 및 인내 덕분에 이 땅의 가정 내 평화가 지켜졌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비단 여성만의 희생으로 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육받은 권리를 누린다거나 사회적 활동에서 여성에 비해 많은 기회를 얻었음은 틀림없지만 남성인 아버지들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격동의 20세기를 가족의 안녕과 국가 발전을 위해 책임감 하나로 버텨낸, 수많은 아버지와 남성의 노고도 기억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서로 힘을 합해도 부족할 판에 요즘 국내 정치·경제적 문제로 세대 간 갈등이 심해지고 남녀 갈라 치기도 횡행하니 안타깝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연민의 마음으로 서로 조금 더 이해하려 노력하고 배려하는 자세를 갖길 바란다.

[아침을 열면서] 아지랑이 너머 ‘봄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이영도·‘내 사랑은’)가 절로 붙는 삼월. 사랑을 왜 아지랑이로 선언했는지 모호하지만 그냥 끌리는 정감이 있다. 새 풀이 막 돋아나는 들길 너머로 아른아른 오르던 아지랑이에 취해본 기억 때문일까. 봄을 부르는 들판의 손짓처럼 아지랑이는 묘한 설렘을 풀어 놓는 봄의 열감이었다. 조금씩 달뜨는 봄바람을 살랑살랑 들여놓는 속삭임이 아릿했던 시절 얘기다. 요즘은 폭염지수 알리는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를 실감나게 맞곤 하지만. 아무튼 도시의 희미한 아지랑이 너머로도 봄은 온다. 전혀 예상 못 했던 폭설이 치고 간 겨울공화국 광장에도 한층 도타워진 봄볕이 내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걸음이 강추위를 헤치고 얼음판을 건너 우리의 봄을 불렀던가. 그러는 동안 서로의 깃발을 휘두르며 광장에 쏟아낸 말들은 우리말의 험한 표현 중 최악의 기록으로 남을 듯하다. 난폭한 언어들의 난무는 이보다 폭력적인 말은 없지 싶을 만큼 연일 상한선을 치고 나갔다. 논리도 근거도 없이 극에 달한 린치 수준의 혐오 선동 표현들은 현실에도 그대로 들어가면서 세상을 더욱 팍팍하게 만든다. 귀를 씻는다는 표현이 무색한 시절. 나쁜 말을 들으면 제 귀를 씻어 치웠다는 옛사람의 이야기가 지나간 전설처럼 박제된 것이다. 귀를 씻어 마음을 바로하거나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 눈만 뜨면 쳐들어오는 광고처럼 폭력적 표현들이 도처에서 들이치므로 귀를 씻을 새도 없어지는 판이다. 거친 말은 더 거친 말을 부르는 법. 갈수록 최신 무기 같은 최강의 언어 장착은 말의 품격이며 표현의 경계 따위 다 없애는 진군이 무섭다. 귀를 닫을 수 없는 청자의 고통은 물론이고 악용당하는 언어의 수난 또한 치료가 필요하다. 매체마다 자극적인 표현으로 구독 올리기 중독 중인데 이번 폭거에서 언어도 피를 너무 많이 본 셈이다. 과연 순화나 되돌림이 가능할지.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으로 자주 회자된다. 말은 사고이며 인격과 정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거친 표현 속에 사는 환경이 그에 따른 인격과 정서를 품게 하는 것이다. 분노와 혐오를 넘어 처단 같은 극한 표현이 범람하듯. 이는 욕을 안 섞으면 또래와의 유대감이 떨어진다는 아이들의 욕설 난무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욕의 내용보다 욕설 자체의 배설에서 쾌감을 느끼는 정서가 더 강한 자극의 추구로 이어지는 것이다. 심심하고 지루하면 못 견디는 정서에 욕설 언어가 끼면 습관이 되면서 때와 곳과 대상의 가림 없이 튀어나게 한다. 그렇게 다름이나 상대에 대한 이해와 살핌, 헤아림 같은 아량의 언어며 정서를 치우게 하는 것이다. 지난날 아지랑이는 봄의 서정적 언어였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말로 밀려나며 무력해진 느낌이다. 너무 미미하고 무미해져 조만간 사라질 것 같은 언어들처럼. 그런데 들녘에 나가 보면 땅 위로 나오려고 애쓰는 어린 싹들을 끌어당기는 아지랑이 행렬이 아직도 그리운 손짓처럼 피고 있다. 생명의 새순을 사물사물 뽑아 올리는 오래된 봄의 미열로. 그렇게 두루 살피고 헤아린 말로 순한 마음을 피워내고 나누는 봄다운 봄을 그려본다. 아지랑이 너머로 연하게 새롭게 피워나갈 봄의 본편을.

[아침을 열면서] 우울과 불안의 세대

최근 일부 2030세대의 탄핵 반대 시위 참여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극우 유튜버나 기독교 목사들이 주도하는 집회를 따라다니는 이 청년들은 더불어민주당 배후에 중국 공산당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만약 탄핵이 인용되면 대한민국 정권이 완전히 반국가세력에 의해 장악돼 우리는 자유를 상실한 채 살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합류에 기존 노년층 태극기부대는 무척 고무된 분위기다. 반면 김누리 교수 같은 이는 이를 후기 파시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청년들이 경쟁과 승자 독식을 사회의 지배적 법칙인 것처럼 교육받은 결과라고 일갈한다. 필자는 이런 진단에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전체주의는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전체 인류를 괴롭히고 있는 보편적인 문제라고 본다. 전체주의자들은 생존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자연과 사회를 관통하는 보편 법칙이라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 ‘신앙’에 기초해 인간 사이의 인종적, 민족적, 계층적 위계화, 서열화와 강자의 약자 지배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런 사회관이 현대사회에서 더는 지배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대다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그런 질서 외에 협력적, 공생적 질서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뿐이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한 인정 정도가 높을수록 전체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따름이다. 경쟁과 투쟁을 통한 강자의 약자 지배는 전체주의 사회만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기본적 특징이기도 하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한국의 2030세대는 이런 산업사회의 요구에 그 어떤 세대보다 충실하게 부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은 공부와 출세를 하나로 연결해 생각하는 오랜 문화 전통이 있다. 현대 한국인은 그 토양 위에서 ‘교육열’이라 칭하지만 실은 생존과 출세를 위해 청춘을 바치는 지옥 같은 체험을 10대 때부터 처절하게 한다. 그런데 현대 상공업 기술의 혁신 속도는 이 경쟁의 강도를 갈수록 더욱 크게 만든다. 현 세대가 살기 위해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기 생존이 가장 문제가 될 때는 누구든 자기중심성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경제의 양극화로 어려운 이웃과 생태계 훼손으로 신음하는 생명은 ‘내’ 관심 밖이다. 심지어 ‘내’ 일자리 마련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예컨대 중국인, 여성 등에 대해서는 쉽게 혐오의 언사를 내뱉는다. 왜 물질적으로 더없이 풍요로운 현대에 혐오의 언사가 범람하는가. 혐오하는 당사자들은 밖에서 그 원인을 찾겠지만 이유는 ‘내’ 안에도 있다. 혐오 감정의 기저에는 과도한 불안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과도한 불안은 주로 과로의 끝에 온다. 오늘날 무한경쟁의 사회체제는 전 세대를 늘 과로하게 만들고 그 고된 노동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오늘날 청년세대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누구보다 더 과로하는 이들임을 고려한다면 최근 2030 태극기부대의 출현 역시 그 극도로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가 낳은 병리적 사회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2030세대, 나아가 대한민국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과로와 그것이 파생하는 과도한 불안 및 우울의 정서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사회적 출구를 모색해야 할 때다.

[아침을 열면서] 건강한 글로벌 음식 ‘한식’

젊은이들 사이에서 마라맛이 유행이다. 낯선 향과 맛에 익숙해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1900년대 초 먹기 시작했던 자장면처럼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자리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최소 50~100년 즐기는 음식을 ‘한식’이라고 정의한다면 서울 사람이 지금 먹는 음식을 ‘동시대의 음식(Contemporary Food)’이라 하고 한식이면서 서울 사람들이 주로 먹는 음식을 ‘서울 가정식’이라 표현하겠다. 전통과 현대가 뒤섞여 우리가 매일 먹고 즐기고 있는 서울의 음식문화를 정리해 본다. 서울이 넘치는 에너지와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매력적인 도시로 알려지면서 한국의 음식 또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한식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으며 한식을 접한 외국인들은 건강한 재료와 깊은 맛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김치, 비빔밥, 불고기 등은 이미 해외에서도 친숙한 음식이 됐고 이제는 한식 안에서도 향토음식, 지역음식을 구분해 관심을 갖는 외국인도 많다. 고려시대 사찰음식의 영향을 받아 건강한 음식을 기본으로 한 궁중음식은 신선로와 구절판, 탕평채가 보여주듯 화려함이 더해져 아름다운 음식문화를 만들었다. 양반가의 음식은 좋은 식재료와 각종 나물류 등이 깔끔한 조리법으로 제례문화와 함께 발전됐다. 의례를 존중하는 궁중과 양반문화의 영향으로 음식의 가짓수가 많고 조금씩 차려냈다. 또 설렁탕이나 꼬리곰탕 같은 서민의 음식에서 유래된 음식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국물음식이다.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수도였던 서울은 단순한 지역 요리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이 응축된 한식의 중심축이다. 왕이 통치하는 곳이니 외국의 사신이 드나들어 각종 향신료와 조리법도 전해졌다. 전국 각지의 식재료와 조리법뿐만 아니라 외국의 식문화가 모여 발전해 궁중 음식과 양반가의 격식 있는 상차림이 있었고 서민 음식과 조화를 이루며 독창적인 가정식을 형성해 왔다. 전국적으로 보면 서울 음식은 간이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지나치게 맵지 않을 정도의 맛을 지닌다. 궁중 음식의 영향으로 재료를 곱게 채 썰거나 다지는 등 정성이 깃들어 있고 상에 낼 때는 깔끔한 백자에 먹을 만큼만 냈던 것도 특징이다.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발전해 온 한국 고유의 음식문화지만 현대에 들어서도 글로벌 흐름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하고 있다. 특히 서울 가정식은 한식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더하고 있으며 이는 글로벌 음식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현대의 웰니스 트렌드, 미니멀 라이프스타일과 맞닿아 있다. 자연을 고려한 식재료 사용, 절제된 양념과 현대적인 조리법은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할 수 있고 김치나 비빔밥 같은 채식 기반의 한식 메뉴는 글로벌 음식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다. 서울 가정식은 단순한 한 지역의 음식이 아니라 한식의 중심이자 글로벌 한식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요소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문화와 결합하면서도 전통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서울 가정식은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 특히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과 맞물려 건강한 음식으로 자리 잡고 글로벌 퓨전 요리로 변화하면서 한식의 세계화를 이끄는 중심축이 될 것이다. 서울 가정식이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지속가능한 음식문화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본다.

[아침을 열면서] 비판적 사고력의 힘

거짓말과 진실 중 인간 문명 발달 과정이나 역사의 흐름 안에서 어떤 것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을까를 가늠해 보면 당연히 진실의 힘이 더 크겠으나 거짓말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방어적 이유가 제일 클 것이다. 인간의 뇌에서 감정 처리를 담당하는 편도체가 자신이 불리해지거나 위험해지는 순간 공포·두려움·스트레스 상황을 인지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상황을 왜곡해 숨기기 위한 태세에 돌입하고 문제 해결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방어책으로서의 거짓말을 만든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인정받기 위해 거짓말을 획책하기도 한다. 이때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다른 이의 반응을 예측하는 두정엽이 나서 타인이 내 말을 믿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이나 자기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측두엽이 상상력에 의해 조작한 기억을 언어적으로 풀어낸다. 거짓말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 이를 긍정 피드백으로 받아들인 뇌가 도파민을 생성하고 이런 감정적 만족을 경험하게 되면 상습적 거짓말에 빠지는 경우도 생긴다. 거짓말이 도덕성·이성에 바탕을 둔 인간다움을 해치지만 여러 복잡한 사회적 현상이나 관계 안에서 상황에 따라 권력 유지, 이익 추구, 안전 도모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권력이나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위정자의 거짓말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있었는데 서양 철학 및 논리학의 근원이라 여겨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를 언급했다. 플라톤은 국가의 지도자가 사람들에게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늘 최선은 아니라며 무지한 백성들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편이 낫다고 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거짓말은 진리를 향해 가는 인간의 본성을 방해하는 요소로 봤기에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사실을 왜곡하는 의도적 거짓말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통해 다른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때는 거짓말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상륙 지점이 노르웨이라는 가짜 군사작전을 펼쳤다. 허위 정보에 속은 독일군의 방어선이 무너졌고 연합군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십계명도 거짓을 행하지 말라 했고 유교나 도교, 불교에서도 거짓말은 사회적 질서를 흐리고 인간의 도덕성을 해친다고 밝힌 것을 보면 거짓말의 긍정 효과보다는 부정 효과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이라면 더욱 거짓말을 삼가야 할 것이다. 자기방어적 태도와 확증 편향에 빠진 가짜 뉴스 신봉자들에 의해 여러 사회적 물의가 빚어지고 있는 요즘,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아는 비판적 능력이 더욱 필요해짐을 느낀다. 책을 읽으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비판적 사고력도 강화된다. 평소 책 읽기를 실천하며 거짓말은 만우절 하루, 서로 유쾌하게 웃을 수 있을 정도로만 즐기자.

[아침을 열면서] 세상을 깨우는 질문 ‘왜’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최근 더 늘어난 ‘왜’를 되작인다. ‘초유’의 범람 속에 연말연초를 보내며 많은 이들이 ‘왜’를 되짚지 않았을까. 도무지 이해도 납득도 불가한 일이 벌어진 데다 이후에도 혼미한 상황의 불안이 가중되니 말이다. 그런 ‘왜 그랬을까’가 점점 ‘왜 그럴까’로 확산 중인데 그 속에는 질문이나 성찰의 자리는 없는 무작정 주장이 불길하게 작동하고 있다. ‘왜’라는 질문은 어디로 치웠는가. 한 음절의 질문 ‘왜’가 새삼 크게 다가온다. 예부터 질문은 많은 것을 찾고 헤치고 이끌어 내는 강력한 표현이었다. 역사를 조금만 돌아봐도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질문으로부터 비롯되고 촉발되고 탄생하지 않았던가. 일상의 단순한 궁금증에서 복잡다단한 학문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무릇 질문이 있었기에 탐구와 발견을 거듭하며 발전했던 게다. 어린아이의 ‘사람은 어디서 오는 거야’ 같은 원초적 궁금증이 고도의 신학과 과학과 철학적 질문으로 심화되고 예술로 더 심오해지는 것처럼. 그런 왜 앞에서 좀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특히 어른들 앞에 ‘왜’를 서슴없이 내놓기란 조심스러운 시절을 거쳐 온 것이다. 순수한 질문도 자칫하면 따지거나 대드는 태도로 판정받는 분위기가 있었던 까닭이다. 윗사람 말이라면 무조건 잘 듣고 받들어야 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문화 탓도 컸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상적으로 건네던 ‘○○○ 말 잘 듣고’라는 당부도 묻기보다 잘 따르라는 말로 들렸다. 유대인 가정에서 하교한 아이에게 ‘오늘 무슨 질문 했냐’고 묻는다는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 요즘 젊은 세대는 아이에게 질문을 적극 권하고 자신도 그러겠지만 이전 세대는 질문 자체가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질문 조심에 익숙해진 탓에 요즘 논리 부재의 억지 주장이 넘치나 싶어 씁쓸하지만. 그런 참이라 왜가 점점 절실하게 다가온다. 특히 ‘쓰는 사람’에게는 왜가 더 필요하고 중요한 시작이다. 시나 소설이나 논문이나 질문에서 시작되고, 질문의 과정과 나름의 추적이 곧 쓰기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상상을 촉발하는 관심이며 호기심에서 생기는 다양한 질문이 남다른 독창성으로 꽃피는 것. 그렇듯 ‘쓰는 사람’군(群)에서도 기자는 현장의 맨 앞에 서서 직접적인 질문과 쓰기를 택했으니 질문을 더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들. 독자를 대신해 묻고 따지고 전하는 업이니 왜의 장착은 기본이겠다. 그런 사람들조차 질문의 수위나 범위에 제한을 받거나 맘껏 쓰기 어려운 여건이 여전한 듯해 그럴수록 질문을 더 주문하고 싶어진다. 질문의 안팎을 짚다 보니 어느 노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에겐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고. 그런 반박 부재의 사회 분위기가 학문의 발전에도 해가 되고 있다고. 실제로 지도교수 논문을 반박하는 제자의 논문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은 지난 일만 아니라 진행형 진단이다. 학계에서도 그러한데 상명하복의 업계는 말할 것 없고 일반 직장조차 반박이 담긴 질문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새삼 ‘왜’를 깨워본다. 내 안에 깊이 든 ‘Why’와 짝이 됐던 ‘Why not’도 불러본다. 더 깊이 들어가는 질문과 더 깊이 쓰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왜? 왜의 탐색과 성찰에서 더 나은 세상을 열어갈 길이 보일 테니.

[아침을 열면서] 지도자의 품격과 나라의 품격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구속됐다. 이 사건을 두고 여당에서는 국격이 무너졌다고 했고 대통령은 법이 모두 무너졌다고 했으며 극우파 목사와 유튜버는 순교를 들먹였다. 물론 그보다 다수의 국민은 대통령의 구속으로 오히려 국격과 법질서가 회복됐다고 여기며 극우 집회 참석자들의 소란에 눈살을 찌푸린다. ‘국격’이란 사람마다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그에 걸맞은 품격이 있듯 나라에도 그 나라의 수준에 부합하는 품격이 있다는 생각에서 쓰이는 용어다. 그런데 현대정치의 측면에서 이 국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민주정치의 성숙도일 것이다. 국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이와 같은데 대통령의 구속이 곧 국격의 추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은 물론 나라와 국민을 대표한다. 하지만 그 대표성은 그가 대표다운 행위를 할 때에만 인정된다. 정치 지도자가 지도자의 위상에 부합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군주제 아래에서도 요청되던 윤리였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했다. 맹자는 공자의 이 사상을 계승해 임금답지 못한 임금은 더는 임금이 아니니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도 된다는 혁명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유교 사회에서도 폭군을 끌어내렸다고 해서 국격이 훼손된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 대통령 구속을 국격의 추락이라 평하는 여당 정치인의 언사는 전근대 유교 지식인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퇴행적이다. 일부 기독교 목사의 행위는 더욱 개탄스럽다. 정치 지도자가 무도한 행위를 일삼고 심지어 군대를 동원해 내란을 일으켰는데도 이를 비판하기는커녕 옹호하고 지지하는 목사가 적지 않다. 이들 목사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띠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혐오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 앞장선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관점이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과 슬그머니 뒤섞어 성경적 관점에 근거한 정치적 견해라 주장하고 신도들을 편향된 길로 오도한다. 교계 내부에서조차 교회가 극우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올 정도다. 무릇 종교다운 종교라면 약자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사회적 정의를 잘 분별하며 사회적 갈등과 싸움이 평화롭게 해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야 기독교인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고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일부 목사는 사회적 혐오와 불의와 갈등을 부추기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밖에 유튜브로 대표되는 개인 미디어 운영자 가운데 극우 유튜버들도 대한민국 언론의 품격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자극적인 언설로 떼돈을 벌겠다는 욕망을 숨긴 채 이들은 극단적인 정치적 편견에 기초해 망상으로 구성한 가짜 뉴스를 매일 쓰레기처럼 쏟아낸다. 이들은 전통 언론매체를 불신하도록 선동하며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깊이 숙고하는 데 미숙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여론을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요컨대 극우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이야말로 오늘날 국격을 추락시키는 장본인이다. 보수정치가 극우에 휘말리지 않고 그 보수주의의 건강성을 회복할 때 국격은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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