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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면서] 생명의 무게

황종원 단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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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소식이 끊임없이 들린다. 지난 수년 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침공 소식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더니 최근에는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전쟁에 미국이 무력으로 이란을 공격하면서 전 세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갔다. 다행히 이스라엘과 이란이 휴전하면서 전면전으로 비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시 시선을 가자지구로 돌려 하마스 해체를 명분 삼아 지난 24일에도 구호물자 배급을 기다리던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총을 난사해 40여명이 숨졌다.

 

전쟁을 일으키고 또 거기에 개입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이념적, 정치적인 갖가지 이유를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그 명분은 대부분 자기중심적 편견과 우월의식에 젖은 차별의 논리에 기초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명분의 이면에는 침략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이 그렇다. 네타냐후는 자신의 정치적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 이스라엘인의 민족적, 종교적 편견을 십분 활용해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Genocide)마저 정당화하려 한다.

 

세상의 암담함은 이런 전쟁범죄 혐의에 대해 우리 사회를 비롯한 주류 세계가 보이는 무감각한 반응이다. 국제뉴스의 한구석을 장식할 뿐인 이런 소식을 사람들은 대부분 한 귀로 흘려넘긴다. 한국의 경우 우리에게서 너무도 먼 곳에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우리 이웃의 억울한 죽음에도 무심할 때가 많지 않은가.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존이 우선이니 다른 이의 어려움을 돌아볼 겨를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한, 이런 학살에 대한 사람들의 무심함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 사회가 냉혹할수록 사람들은 생명의 가치를 그저 수량으로 헤아릴 뿐이다. 예컨대 사람들의 쌀이나 소에 대한 관심은 그저 쌀값이나 소고기 가격이며 사람도 재산이 얼마나 많고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에 따라 그 가치를 평가한다. 이런 가치 기준은 급기야 인명(人命)의 가치를 헤아리는 데까지 적용된다. 어떤 전쟁으로 몇만 명이, 어떤 사고로 몇백 명이 사망했다고 하면서 그 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경제적 피해가 우려된다고 하는 헤아림이 그것이다. 물론 인명 피해는 수치로 헤아릴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의 가치가 그렇게 수치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일까.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부른 홍순관은 쌀 한 톨 안에는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 그리고 농부의 새벽 등 우주의 무게가 담겨 있다고 읊조린다. 쌀 한 톨이 응축한 무수히 많은 자연의 자연력과 인간 노동력의 가치는 쌀값으로 결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인간 생명의 ‘무게’를 그 사람의 키나 체중, 시험점수, 재산 등으로는 전혀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저 쌀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무게’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개개의 ‘우주’를 함부로 살상하거나 그 살상을 방관하는 이들은 모두 생명의 ‘무게’를 자각하지 못한 자들이다. 이 세상에는 어떤 이유로든 함부로 죽여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한 우주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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