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습지를 처음 찾았을 때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은 ‘DMZ 중부전선 풍경같다’는 것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초지며 중간중간 박혀 있는 습지가 조화를 이루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둑방길 따라 삵, 너구리, 고라니의 배설물이 나를 반겼다. 경기도에도 아직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과거 갯벌이었던 남양만 지역은 지난 한 세기 동안 큰 변화를 겪었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시행된 화옹지구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메워지고 거대한 방조제와 담수호가 만들어졌다. 한편 화옹지구 바깥쪽 매향리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미군의 폭격장으로 사용됐다. 50년간 동안 포탄 세례를 맞아 갯벌은 황폐해졌다. 이러한 아픔을 딛고 자연은 기어이 되살아났다. 시간이 흘러 농지 수자원 확보를 위해 조성된 담수 지역이 습지의 기능을 되찾고, 각종 개발 영향에서 벗어나 중요한 생물 서식지로 거듭났다. 매향리는 미군이 폭격장 운영을 중단하면서 갯벌 생명들이 돌아왔다. 갯벌, 염습지, 기수습지, 민물습지, 초지, 농지가 어우러져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독특한 자연환경을 지니게 됐다. 방조제를 중심으로 외측은 바다와 갯벌, 내측은 담수인 화성호와 농경지로 구분돼 있다. 방조제 내측 화성호 일부 지역은 기수역이 형성돼 염생식물이 드넓게 자리를 잡았고 일부는 갈대와 물억새 군락이 우점한다. 화성습지는 시베리아와 호주 대륙을 오고 가는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 및 휴식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18년에는 국제적 철새 희귀종 및 바닷새의 경유지로서 보전가치를 인정받아 EAAFP(동아시아-대양주철새이동경로 파트너십)에 등재됐다. 먼 길 떠나는 큰기러기,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알락꼬리마도요들이 화성습지에서 부지런히 배를 채운다. 하지만 습지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 만큼 보전과 개발이라는 이해가 충돌하기도 한다. 생물들에게는 중요한 서식 공간인 한편 누군가에는 거대한 미개발지이자 자본증식 기회의 땅으로 비친다. 따라서 이 소중한 자연자원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 수립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화성습지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공간계획 마련이 필수적이다. 어디를 보전하고 어디를 이용할 것인지, 생물다양성 확보와 지역주민의 삶이 조화롭게 상생할 수 있는 공간 배치는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화성습지는 ‘역사적 아픔’, ‘생태계의 회복력’, ‘의도하지 않은 자연의 재탄생’이 어우러져 복합적 의미를 가진 장소인 만큼 보전을 위해 농민, 어민, 시민단체, 지자체 파트너십 기반의 원활한 소통과 협력이 중요하다. 도시화 및 난개발로 야생동물 자연 서식지가 비가역적으로 감소하는 경기 남부지역에서 화성습지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한편으론 대규모 생물 서식지 기능뿐 아니라 담수지역의 자연 회복 과정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관찰할 수 있는 훌륭한 사례인 점에서 화성습지의 가치를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2022년이 저무는 낙조에 퉁퉁마디 군락은 물론 순백색의 큰고니마저 붉게 물들었다. 이 고즈넉한 풍경을 5년 뒤,10년 뒤에도 아니 우리 후손들도 볼 수 있길 기원해본다.
오피니언
경기일보
2022-12-25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