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4일의 일이다.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산불이 시작됐다. 남동풍을 등에 업은 불은 삽시간에 동해안 방면으로 빠르게 번져 갔다. 소나무 숲을 태운 불씨는 날아들었다. 이른바 비화(飛火). 도깨기불의 실사판이었다. 불은 남대천, 가곡천, 국도 7호선을 가볍게 넘어 울진 한울원전과 삼척 액화천연가스(LNG) 비축기지를 위협했다. 산림 소실을 넘어 국가적 재난으로 커질 수 있는 다급한 순간이었다. 산불 진화 인력과 장비 투입의 우선순위는 원자력발전소와 LNG기지 수호였다. 소방과 산림 당국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행히 원전 설비 피해 및 방사능 누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후방산불은 잡히지 않고 계속 동진해 낙동정맥 방면으로 향했다. 소광리 일대 금강소나무 군락이 위태로웠으나 3월13일 내린 비로 비로소 불길은 잦아들었다. 진정한 단비였다. 지난해 울진삼척 산불은 발화부터 진화까지 213시간이 걸린 역대 최장기 산불로 기록됐다. 피해 면적은 2만ha로 서울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대 두 번째 규모였다. 주택 319채를 포함해 643개의 시설물이 잿더미가 됐으며 이재민 337명도 발생했다.
산불 이후 곧장 현장을 찾았다. 나무는 숯으로 변해 쓰러져 있었고 바닥엔 시꺼먼 재가 가득했다. 1천도가 넘는 화염에 바위가 쪼개졌으며 대기는 탄내로 가득했다. 숲에 살던 야생동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화마가 덮쳤던 절체절명의 순간이 떠오르며 짧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산불로 얼마나 많은 야생동물이 피해를 입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산불은 곤충과 양서·파충류같이 이동성이 약한 동물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다. 비행능력을 가진 조류와 재빨리 이동할 수 있는 중대형 포유류는 그나마 피해가 적다.
울진 산불 피해 지역은 멸종위기야생생물Ⅰ급 산양의 전 세계 최남단 집단 서식지이기도 하다. 다만 산양 서식지 일대에는 지표면만 타는 지표화가 발생해 불로 인한 직접적인 산양 폐사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불을 피해 살아남더라도 고난은 이어진다. 겨우내 추위와 먹이 부족으로 체력이 떨어진 산양에게 있어 새순이 돋기 전 3월은 보릿고개에 해당하는 시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까지 나버려 산양의 먹이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이처럼 산불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야생동물 서식지뿐 아니라 임산자원, 토양 영양물질, 숲의 환경기능 손실을 일으킨다. 막대한 양의 탄소배출로 인해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우려되는 것은 최근 들어 대형산불 가능성과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2, 3월 기온이 높아지고 가뭄이 심화돼 봄철 대형산불 위험이 더욱 커졌다. 앞으로 대형산불은 기후 재난 대비 차원에서 관리하고 대응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1년이 지나 다시 산불 위험 계절이 돌아왔다. 대기와 토양이 바짝 마른 봄에는 작은 불씨에도 산불이 발생할 수 있다. 산림청 자료에 의하면 국내 대부분 대형산불은 실화, 방화로 일어난다. 우리 숲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산불 예방에 힘을 보태야 할 때다. 올봄엔 검게 타 버린 침묵의 숲이 아닌, 생명력 가득한 연둣빛 신생의 숲을 맞이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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