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기대수명 83.7세 시대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생명표에 따르면 기대수명은 남자 80.8세, 여자 86.6세로 집계됐다. 전체 평균은 83.7세로 전년보다 남녀 각각 0.2년씩 늘어난 수치다. 증가 폭은 크지 않지만 우리 사회가 여전히 건강 수준을 유지하며 장수 국가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과 가난의 시대를 지나 한 세대 만에 ‘평균 80세 이상 사는 나라’가 된 것은 긍정적 변화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통계적 성과를 넘어 앞으로 우리가 어떤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묻는 신호이기도 하다. 기대수명은 이제 오래 사는 시대를 넘어 사회적·개인적 대비가 필요한 다음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대수명은 말 그대로 평균값이다. 평균이 높아졌다고 해서 모두의 삶이 함께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이른바 ‘평균값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90세 넘게 건강하게 살지만 또 누군가는 질병과 빈곤, 사회적 고립 속에서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한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기대수명이 늘었다고 해서 건강 수명이 함께 늘었다는 보장은 없다. 병이나 장애 없이 활동적으로 지내는 기간에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오래 사는 시대라지만 인생의 후반부가 길어진 만큼 아픈 시간도 함께 길어질 수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사회 구조적 과제도 만만치 않다. 기대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은 곧 고령 인구가 늘어난다는 뜻이고 이는 연금제도와 의료·돌봄 체계 전반에 부담을 준다. 특히 기대여명, 즉 현재 나이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으로 예상되는지를 보면 변화가 더 분명하다. 60세 남성은 약 23.7년, 여성은 약 28.4년을 더 살 것으로 전망된다. 은퇴 이후에도 20~30년의 시간이 이어지는 만큼 기존의 사회 시스템은 이런 긴 노년을 충분히 뒷받침할 준비가 돼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장기요양보험 재정, 만성질환 관리, 치매 돌봄 문제는 이미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다. 저출생과 고령화가 겹친 지금은 과거의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런 변화는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준다. 과거에는 은퇴 후 몇 년의 노년기가 뒤따랐다면 이제는 ‘두 번째 인생’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해야 하는 시대다. 경제적 준비뿐 아니라 신체·정신 건강, 사회적 관계, 지속적 배움과 활동이 노년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 더불어 노년기가 길어진 사회 특유의 새로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젊은 세대에서 확산된 ‘파이어(FIRE)족’이 그 예다. 불확실한 미래와 길어진 노후에 대한 부담 속에서 젊을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조기 은퇴로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흐름이다.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장수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부담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기대수명 증가가 과연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통계가 보여주는 숫자와 개인이 체감하는 삶의 질은 다를 수 있다. 의료 접근성, 돌봄 인프라, 경제적 자립, 안전한 주거환경, 노년의 존엄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면 오래 사는 것은 오히려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결국 장수 사회의 목표는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어야 한다.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것은 결국 삶의 질이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사는가보다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기대수명 83.7세 시대에 필요한 것은 통계의 상승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삶의 품격을 높여갈 준비를 하는 일이다. 오래 사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지금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장수 사회의 핵심 질문이다.

[경기시론] AI 시대 창의성·통찰력의 힘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작품 전시가 곳곳에서 열린다. 어느 날 조용한 시간에 학교 전시장을 둘러보던 중 한 학생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을 활용해 며칠 만에 작품을 완성했지만 평가 자리에서 “기술은 뛰어나나 작품의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총장님, 제가 직접 그리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 질문은 한 학생의 고민을 넘어 오늘 교육이 맞닥뜨리고 있는 본질을 드러내는 물음처럼 느껴졌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며 디자인까지 제안하는 시대, 몇 번의 클릭으로 완성도 높은 이미지를 생성해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된다. AI 시대에 인간의 창의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창의성(creativity)은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인간이 살아가고 배우며 일하는 모든 과정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는 창의성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 정도로만 이해하고 통찰력(insight)을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에게 자연히 따라오는 특성’ 정도로 좁혀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두 개념은 훨씬 깊고 넓다. 창의성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마법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익숙함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하며 흩어진 경험과 생각 사이에서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힘에 가깝다. 특별한 순간에만 번뜩이는 재능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장면을 감각하고 해석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과정이다. 다른 이들이 그냥 지나치는 장면을 붙잡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건져 올리는 행위. 그곳에서 창의성은 시작된다. 통찰력은 이러한 창의적 과정에 깊이를 부여한다. 통찰은 단순히 ‘안다’는 상태가 아니라 사물과 사건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도 방향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단서로도 본질에 닿는 사람이 있다. 그 차이를 가르는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본질을 보는 눈, 즉 통찰력이다. 통찰이 있는 사람은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보다 명확한 판단과 단단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창의성과 통찰력은 어느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창의성만 있다면 깊이가 부족한 아이디어에 머무르게 되고 통찰력만 있다면 변화의 힘을 만들기 어렵다. 창의성은 가능성을 넓히고 통찰력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이끌 방향을 제시한다. 마치 나침반과 지도가 함께 있을 때 길을 정확히 찾을 수 있듯이 두 역량은 함께할 때 비로소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준다. AI 시대의 변화는 빠르고 그만큼 세계는 복잡해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개인과 조직, 교육기관은 창의성과 통찰력을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미래를 여는 핵심 태도로 다시 바라봐야 한다. 깊이 보는 눈을 가질 때 새로운 길이 보이고 그 길을 스스로 만들어갈 힘 또한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경기시론] 행복은 바로 내 옆에 있다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3위에 달하는 경제대국이다. 객관적인 경제력만 놓고 보면 분명 선진국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러나 정작 국민들이 체감하는 행복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 세계 143개국을 대상으로 한 행복지수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58위를 기록했고 이는 전년도보다 6단계나 하락한 수치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는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어 경제 성장은 이뤘지만 국민 개개인의 마음 건강과 정서적 만족도는 오히려 황폐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경제적 수준이 높다고 행복이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객관적인 생활 수준과 달리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이 상당히 낮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가진 구조적 특성과 문화적 분위기와도 깊이 연결돼 있다.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기댈 만한 친구나 가족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OECD 국가 평균보다 높게 나타나고 사회적 고립감, 혼밥·혼자 생활의 증가, 과도한 경쟁 분위기, 불안정한 고용 환경,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화려해졌지만 내면은 점점 더 메말라 가는 셈이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운동하기, 돈 모으기, 자기계발 등 다양한 목표가 있지만 사실 그 바탕에는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공통된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막상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많은 사람이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행복을 과정이 아닌 결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치 특정 목표를 달성하거나 어떤 조건을 갖추면 행복이 ‘완성’되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행복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도착해야 얻을 수 있는 목적지가 아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일상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며 과정이다. 필자의 경우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며 따뜻한 대화를 나눌 때 큰 행복을 느낀다. 거창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좋은 이야기와 긍정적인 기운이 오가는 그 순간에 내가 살아있다는 의미와 소중함을 느낀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행복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들은 명품을 소유하거나 비싼 물건을 사는 데 집착하기보다 ‘경험’을 쌓는 데 시간을 쓴다. 낙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현재의 순간에 집중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고 변화 가능한 부분을 스스로 실천하는 태도를 지닌다. 결국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뿐이다.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큰 선물을 보내는 것보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와 눈빛, 진심 어린 한마디 인사를 건네는 일이 더 큰 변화를 만든다. 그 작은 행동 하나가 오늘 하루를 조금 더 포근하게 만들고 마음속에 미세하지만 분명한 행복감을 남긴다. 행복은 거대한 목표나 특별한 사건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작은 감사, 순간의 의미 부여가 쌓일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우리 사회가 자꾸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치열하게만 나아가려 한다면 행복은 멀리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본다면 행복은 이미 우리의 곁에 자리하고 있다.

[경기시론] 노송로를 떠올리며 본 ‘검찰개혁’

어린 시절 서울에서 수원으로 내려오던 옛길을 떠올려 보면 한적한 시골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던 노송들의 자태가 아른거린다. 그 길은 아마 정조 임금이 수원화성으로 행차할 때 지나던 길이었을 것이다. 오래 세월을 버틴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뻗어 있는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던 기억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목동과 정자동 일대에 일부 노송만이 그 시절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서울과 수원을 잇는 국도가 개설되면서 대부분의 노송이 베어 졌기 때문이다. 편리한 도로를 개설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지킬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 검찰의 권력화된 행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검찰개혁 논의가 한창 뜨겁게 진행 중이다. 필자 역시 검찰개혁의 필요성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개혁은 또 다른 문제점을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각적인 검토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이 이뤄졌고 그 결과 수사권 대부분이 검찰에서 분리돼 경찰로 이관됐다. 원론적으로 수사권의 분리와 독립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실행 과정에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이 나타났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은 바로 경찰의 전문성 부족 문제였다. 수사권 독립을 추진하기에 앞서 이러한 문제가 충분히 보완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사기죄나 배임죄처럼 민사 법리가 깊이 얽혀 있는 사건에서 한계가 종종 드러났다. 경찰이 혐의를 충분히 입증하지 못한 채 검찰로 사건을 송치하면 검찰은 보완수사를 요구하며 사건을 다시 경찰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반대로 경찰이 혐의가 불분명하다는 취지로 불송치 결정을 내릴 경우 피해자는 이의신청을 하게 되고 이의신청된 사건은 다시 검찰의 보완수사 명령과 함께 경찰로 내려온다. 이렇게 사건이 양 기관 사이를 오가다 보면 검찰에는 이의신청 사건이 쌓이고 경찰은 보완수사 부담에 시달린다. 양 기관은 업무 과중을 호소하지만 결국 피해를 입는 쪽은 시간만 흘려보내는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는 결국 경찰의 전문성 부족에 기인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 검찰의 주요 기능을 전면적으로 경찰에 이관하는 방안에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첫째, 앞서 언급했듯 경찰의 전문성 부족 문제다. 현재도 경찰의 수사 역량은 검찰의 법리 검토와 보완을 통해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모든 법리적 판단까지 맡게 되면 실무적으로 큰 어려움이 닥칠 가능성이 있다. 둘째, 경찰 권력의 비대화 문제다. 검찰이 과거 권력기관으로 변질된 것처럼 경찰 역시 같은 길을 걸을 우려가 있다. 권력은 언제나 감시받지 않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경찰에 전문가들을 충원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경찰의 권력화를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구가 필요하다. 국민에 대한 본연의 수사 임무를 적절히 수행하기 위한 수사기관으로서 검찰과 경찰이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구조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검찰이 경찰을 지휘하는 구조는 이제 이미 깨졌다. 나아가 이제 이전 모습의 검찰청은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한편 경찰 수사 실무는 아직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경찰에 대한 검찰의 법리적 보완 기능을 이용해 실무에서 전문성을 보충하고 경찰의 권력화를 막는 방책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수원에서 더 이상 노송로는 볼 수 없다. 편리한 도로는 얻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는 잃었다. 좀 더 신중히 고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찬가지로 검찰개혁이 개혁이라는 대의명분과 함께 국민을 위한 공정한 수사가 이뤄질 수 있는 실질적 수사 개편으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경기시론] APEC 경주선언, 인구의 미래를 말하다

인구 문제는 역시 경제 문제와 직결돼 있다. 경주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경제협력체답게 ‘인구’를 전면에 올려 놓았다. 저출산과 고령화, 도시 집중은 더 이상 몇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전체의 경제협력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구조적 위기로 인식된다. ‘경주선언’은 이를 공식 의제로 채택하며 ‘APEC 인구 구조 변화 대응 공동 프레임워크’를 발표했다. 인구의 구조적 변화는 한 국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기에 고령사회 대응 시스템 구축, 인적자원 순환 강화, 의료 및 기술혁신 촉진 등 협력 방향이 함께 제시됐다. 이에 따라 인구 문제는 복지나 출산 장려 차원의 행정을 넘어 노동시장과 교육, 주거, 보건을 포괄하는 거버넌스 과제로 부상했다. 우리는 이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고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한 나라가 바로 이번 APEC 주최국 한국이다. 정상선언문은 “인구 구조 변화가 가져오는 광범위한 경제적 영향이 세대 간 정책을 통한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이는 우리 행정의 현주소를 투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저출산 대책 예산은 수십조원에 달하지만 출산율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원인 중 하나는 명확하다. 출산·보육·청년·고령 정책이 부처별로 나뉘어 추진되는 행정의 분절성 때문이다. 예컨대 출산은 복지부, 보육은 여가부, 주거는 국토부, 일자리는 노동부가 담당하며 정책의 연속성을 단절하고 있다. 인구는 어느 한 부처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 전 분야의 연속선상에 놓인 흐름임에도 우리 행정은 여전히 단기 사업과 예산 중심의 구조에 머물러 있다. 경주선언이 제시한 인구 협력 프레임워크는 이런 분절 행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인구 감소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도시의 기능, 노동의 질, 지역의 존속을 좌우하는 생태적 변화다. 특히 지방 소멸이 가속화되는 현실에서 인구 행정은 지역 균형, 산업, 복지 정책이 맞물려야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선언문이 강조한 ‘세대 간 정책과 협력적 대응’은 이러한 복합 행정을 지향한다. 인구정책이 국제협력 논의의 중심이 된 것은 인구의 구조적 변화가 생산과 소비, 복지와 교육, 세금과 세대 관계 전반을 뒤흔드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인구 문제에 대한 통합적 행정 운영에 있어 해외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싱가포르는 국가인구재능부(NPTD)를 통해 인구·고용·이민·가족 정책을 통합 운영하며 정책 간 시너지를 높이고 있다. 이번 경주선언은 APEC 회원국들이 이러한 통합적 접근을 공유하고 학습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이제 행정은 단순한 지원의 역할을 넘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경주선언의 메시지는 ‘협력’보다 ‘예측’에 가깝다. 인구 이동, 출산, 고령화, 건강, 돌봄 등 다양한 데이터를 통합해 세대별 변화를 읽고 그 결과를 정책으로 환류시키는 인구 데이터 행정이 필요하다. 인공지능(AI) 행정이나 디지털 전환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세대 간 형평성과 삶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인구절벽은 통계의 곡선이 아니라 행정의 방향을 가늠하는 척도다. 인구절벽은 국경을 모른다. 그 현실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출산율 몇 퍼센트’라는 숫자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행정,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정책, 데이터를 읽는 통찰이 없다면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은 예측보다 빠르게 무너질 것이다. 행정의 시간표를 미래로 옮겨 놓는 일, 그것이 경주선언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경기시론] 지역산업이 살아야 대학이 산다

한국 사회는 지금 두 개의 거대한 파도를 동시에 맞고 있다. 하나는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 또 하나는 지역산업의 쇠퇴다. 많은 이들이 이를 별개의 문제로 보지만 냉정히 바라보면 두 현상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 산업이 무너지면 일자리가 사라지고, 젊은이들이 지역을 떠나게 된다. 인구가 줄면 출산율이 떨어지고, 학교의 교정은 텅 비어간다. 학령인구 감소는 지역경제 붕괴가 남긴 사회적 메아리다. 이 문제를 교육정책만으로 다루는 것은 본질을 비켜간 접근이다. 지방대학의 위기는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이 자생력을 잃어가는 구조적 위기의 한 단면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학의 숨 가쁜 개혁이 아니라 지역과 함께 숨 쉬는 생태계의 회복이다. 대학은 지역의 미래 거점으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기업의 시선에서 보면 학령인구 감소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대학은 더 이상 학생 수를 채우는 기관이 아니라 산업과 지역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 기업은 창의적이고 현장감 있는 인재를 원하고 대학은 새로운 협력 모델로 그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위기 속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설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대학의 미래다. 이제 대학은 학생이 줄어드는 곳이 아니라 지역의 변화를 일으키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 지역의 기업, 지자체, 주민이 함께 손을 맞잡고 산업의 방향을 새롭게 디자인할 때 대학은 배움의 공간을 넘어 지역혁신의 심장으로 뛸 것이다. 대학이 지역의 혁신 플랫폼으로 전환돼야 한다. 그리고 대학은 더 이상 강의실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역의 골목으로, 산업의 현장으로, 주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을의 변화가 곧 교육의 변화가 되고 교육의 혁신이 다시 지역을 일으키는 선순환의 파도를 만들어야 한다. 대학이 닫힌 문을 열고 지역으로 걸어 나올 때 배움은 살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청년만을 위한 대학이 아니라 지역민 모두가 배우고 성장하는 평생의 배움터, 그리고 미래를 함께 만드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산업정책의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지역산업, 대학, 지자체가 제각기 따로 움직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하나의 지역혁신 플랫폼으로 묶어져야 한다. 대학이 산업의 실험실이 되고 산업이 대학의 교육현장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산업이 살아야 인구가 늘어나고 인구가 있어야 대학이 존재한다. 대학이 존재해야 지역문화가 피어나고 문화가 있어야 지역이 다시 숨을 쉰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혁신의 순환 고리다. 결국 학령인구 감소는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라는 변화의 신호탄이다. 대학이 지역의 산업을 살리고 산업이 대학의 숨을 불어넣는 그날, 우리는 다시 지역의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지역산업과 대학이 함께 서는 데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예산이 아니라 용기다. 정부와 지자체가 지역 대학을 혁신의 플랫폼으로 인식하고 예산을 단순한 보조금이 아닌 투자의 마중물로 바라볼 때 진정한 변화는 시작된다. 지역산업의 미래는 멀리 있지 않다. 지역산업과 지역 대학이 함께 손을 잡는 그 자리,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희망의 꽃이 피어날 것이다.

[경기시론] 스마트폰 과의존 탈출 ‘마음문해력’

올 한 해도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두 달 후면 우리는 또 한번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4년 우리나라 청소년 10명 중 4명 이상이 스마트폰 사용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과의존 위험군’(잠재위험군 포함)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 역시 22.4%가 과의존 위험군으로 조사됐으며 60대 이상도 11.9%로 나타나 세대와 연령을 막론하고 전 국민이 스마트폰 과의존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일부 세대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반이 함께 마주해야 할 현상이 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틱톡,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등 수십초 분량의 짧은 영상(숏폼)을 손쉽게 접한다. 출퇴근길, 식사시간, 잠들기 전까지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스크롤하며 자극적인 영상에 몰입한다. 짧은 영상의 빠른 전환과 감각적인 언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우리의 뇌는 점점 ‘즉각적인 자극’에만 반응한다. 그 결과 우울, 불안,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외로움 등 다양한 심리적 문제가 나타나고 마음의 허기가 깊어진다. 이러한 심리적 공허함에서 벗어나 평온한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는 ‘마음문해력’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음문해력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타인과 공감하며 건강하게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마음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사고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자신의 내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하다.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잠시 멈추고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짧은 멈춤이 자신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두 번째,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과 생각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스마트폰으로 숏폼을 보고 있네”라고 스스로 말해보는 것만으로도 무의식적인 행동을 자각하고 통제할 수 있다. 표현은 감정을 흘려보내는 통로이자 자기 인식의 도구다. 세 번째, ‘생각과 감정 속에 담긴 의도와 목적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나는 지금 이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이러한 자기 질문은 무심코 반복하던 행동의 이유를 깨닫게 하고 내면의 방향을 바로잡는 힘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를 인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자주 점검하는 일이 곧 성장의 시작이 된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자주 들여다보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스마트폰 과의존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마음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자기 질문의 일상화’를 실천해 보자. 작은 질문 하나가 내면의 평온을 되찾고 일상의 균형을 회복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경기시론] 악의 평범성과 연대성

최근 특별검사를 통해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에 드리워진 충격적인 그림자는 참으로 믿기 힘들 정도다. 법치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련의 사건들, 특히 계엄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의혹들, 편파 수사 등으로 얼룩진 사법시스템, 더 나아가 마약 반입을 묵인한 세관·경찰·검찰의 카르텔 구조까지 거대한 비리와 불법이 조직적으로 자행됐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부패가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실감케 한다. 이러한 거대한 불법과 비리가 가능하려면 필연적으로 그 이익을 향유하는 상부의 지시자와 이를 계획하고 모의하며 최종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하부의 집행자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모두 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금과 봉급을 받고 법과 정의를 지키는 직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비리와 불법을 지시한 상위 권력자가 처벌받고 비난받아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다면 상위권력자 밑에서 그 지시를 받아 직무를 수행한 이들은 어떠할까. 그들은 보통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곤 한다. “위에서 시켜서 했을 뿐 잘 모른다”며 눈을 감는다. 이 같은 변명으로 그들은 과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 중 하나였던 나치 독일의 전범재판에서도 이와 똑같은 변명이 있었다. 학살을 수행한 장교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 맹목적인 복종과 사유의 부재야말로 죄를 면할 수 없는 악의 본질임을 지적한 바 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판단을 멈추고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는 순간 그 행위의 평범성과 일상성은 무서운 악이 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악에 대해 둔감해지고, 악이 일상화되며, 선과 악의 구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몰가치 판단의 심각성을 경고한다. 여기에 더해 공직사회 특유의 폐쇄적인 연대의식은 이러한 심각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거나 ‘대세에 묻어 간다’ 식의 사고가 그렇다. 이러한 집단적 동조 심리는 불법행위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을 무디게 만들고 결국 시스템 전체의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감을 모두의 몫으로 희석시키고 결국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을 소위 ‘악의 연대’라 칭하기도 한다. 이꽃님 작가의 소설 “여름을 한 입 베어물었더니”에는 아이의 불법적인 행위를 동네 사람 전체가 눈감아 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표현하자면 ‘선을 위한 악의 연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선을 위한 경우라도 ‘악의 연대’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사적 이익이나 특정 권력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악을 위한 악의 연대’는 더 말할 이유가 없다. 공직자의 책무를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사익을 위해 악용하는 행위는 국가와 국민 전체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다. 공직자는 국가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그 직무 수행은 법령과 양심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이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요구되는 공직자에 대한 의무사항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 스며들고, 서로 눈감아 주는 불법과 비리에 이제는 보다 냉정해져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 것으로 구전되는 말이 있다. “백성으로 살아갈 때에는 밭을 갈며 살아가면 되나 나라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 공직을 맡은 자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할 경구다. 지시가 부당할 때 침묵하지 않고 불법이 벌어질 때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공직자로서의 최소한의 책무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시대에 올곧은 공직자가 참으로 그리운 요즘이다.

[경기시론] 불꽃 하나로 멈춘 나라... 예방이 곧 보험

9월26일 밤,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서 튄 작은 불꽃 하나가 국가 행정의 혈관을 순식간에 막아 버렸다. 주민등록과 여권 발급, 복지 지급, 부동산 거래 등 정부의 주요 전자 행정이 일시에 멈췄다. 대통령이 말한 “국가 디지털 인프라는 국민 일상을 집행하는 혈관”이라는 표현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었다. 불길은 잡혔지만 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여전히 불씨의 여파가 남아 있다. 이번 마비 사태의 불씨는 무정전전원장치(UPS) 배터리에서 시작됐지만 더 큰 문제는 교훈을 잊은 우리 자신이었다. 2022년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로 카카오, 네이버 등 주요 서비스가 마비됐을 때 정부와 업계는 단일 장애 지점(SPOF)을 없애고 이중화와 백업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약속의 메커니즘은 이번에도 작동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시스템은 정상화되지 못했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행정’은 중대본 회의에서 비난받았다. 반복된 경고를 흘려들은 대가는 국민의 불편과 행정 불신으로 돌아왔다. 위기 대응에서 무너진 것은 속도가 아니라 신뢰였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화재 사고’가 아니다. 노후 UPS 배터리를 고장 징후가 없다는 이유로 교체하지 않고 지하 수조형 설비로 옮겨 계속 쓰려던 공사 도중 불이 났다. 예산과 일정이 빠듯할 때 ‘아직 쓸 만하다’며 교체를 미루는 일은 일상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국가 핵심 인프라에서는 그 판단이 곧 치명상이 된다. 매뉴얼은 지켜야 하는 행위다. ‘아직 작동한다’는 이유가 ‘안전까지 보장된다’는 뜻은 아니며 이는 매뉴얼을 준수하는 일이 아니다. 핵심 인프라의 원칙은 언제나 ‘예방이 곧 보험’이다. 예측 가능한 위험을 미루고 규정을 어긴 대가는 결국 더 큰 비용과 혼란, 그리고 정부 행정에 대한 불신이다. 공중보건의 관점에서도 이 사건은 예사롭지 않다. 전산이 멈추면 진료비 청구, 취약계층 지원, 감염병 신고처럼 시간이 생명인 업무가 흔들린다. 디지털 의존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데이터센터의 실수 하나가 행정의 모세혈관부터 대동맥까지 연쇄적으로 마비시킨다. 전자정부의 성취는 컸지만 예방을 통한 안정성 보장은 여전히 취약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첫째, 권장 사용 기간을 넘긴 전원 설비와 배터리는 의무적·일괄 교체해야 한다. 이상 여부와 무관하게 ‘시간이 기준’이 돼야 한다. 둘째, 데이터센터는 액티브-액티브 이중운영 체계를 핵심 업무부터 단계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단일 장애 지점을 제거하지 못하면 또 다른 ‘예상된 재난’이 반복된다. 셋째,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리튬이온 UPS 작업 표준을 재정의해야 한다. 전동 공구 사용, 방전·격리, 화재 위험 시설 지정 등 안전 매뉴얼을 실제 작업 단위로까지 세분화하고 점검을 형식이 아닌 단절 가능한 절차로 만들어야 한다. 넷째, 위기 커뮤니케이션과 보고 체계를 손봐야 한다. ‘3시간 내 복구’ 같은 낙관은 위기 대응에서 가장 비싼 거짓말이다. 국민에게는 정확한 현황과 대체 수단이 신속히 공유돼야 한다. 디지털 국가는 더 편리한 나라가 아니라 더 안전하게 작동하는 나라여야 한다. 화마가 드러낸 것은 불운이 아니라 비싼 수업에 대한 경각심 부재였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의 문제로 기억해야 한다. 예방 투자는 비용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상과 생명을 지키는 보험이다.

[경기시론] 기초교육 강화가 곧 미래 경쟁력

유학 시절 대학원에서 인공지능(AI) 강의를 듣고 학점을 취득한 지 어느덧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강의실에서 마주한 코딩 중심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수업은 낯설고 까다로웠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때는 단순한 기술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학습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출발점이었다. 오늘날 AI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기술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사회와 산업 구조를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며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개인과 국가는 모두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 역시 이를 인식하고 AI 인재 양성, 디지털 전환 교육, 소프트웨어 교육 의무화 같은 국가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돌아봐야 할 지점은 바로 기초교육이다. 중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 유학생을 대규모로 파견하고 수학·과학·기술 중심의 기초교육을 강화해 왔다. 나아가 2017년 ‘차세대 인공지능 발전계획’을 통해 초·중등 교육 단계에서부터 프로그래밍과 데이터 사고를 가르치며 교사 재교육을 통해 모든 학생이 AI 기초소양을 습득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 차원의 꾸준한 기초교육 강화가 오늘날 중국 AI 경쟁력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STEAM 교육은 그 답이 될 수 있다. STEAM은 과학, 기술, 공학, 수학에 예술을 더한 교육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에 더해 그것을 인간다운 방식으로 풀어내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기반 학습, 디자인 사고, 창작과 실험이 어우러지는 수업 속에서 아이들은 기술을 배우는 동시에 삶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인문학과 STEAM을 아우르는 기초교육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문제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데이터를 해석하며 세상을 논리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길러준다. 이는 전공을 불문하고 모든 청년이 갖춰야 할 새로운 문해력이자 AI 시대의 필수 요건이며 창의적 실무자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다. 과거 도로망과 전력망이 산업 발전을 떠받쳤듯 이제는 기초교육과 국민적 AI 이해 수준이 대한민국 미래를 지탱하는 지적 기반 시설이 돼야 한다. 국민 모두가 AI 원리와 사회적 함의를 이해하도록 교육하는 사회와 단순히 편리한 도구로만 인식하는 사회는 미래 경쟁력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AI를 이해하고 관심을 가질 때 교육과 정책의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떤 교육을 설계하고 누구에게 기회를 제공하느냐가 곧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미래 세대가 마주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길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이들에게 기술을 다루는 지혜와 인간을 이해하는 감성을 동시에 길러주는 것이다. STEAM과 AI 교육은 단순히 교실 속 수업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기초교육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강화하는 것은 단순한 교육정책이 아니라 미래 경쟁력의 설계도다. 우리는 지금 그 거울 앞에 서 있다.

[경기시론] 장애인 고등교육… 국가 책무성이 절실하다

2024년 12월 이후로 국민들이 헌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장애인 고등교육과 헌법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데 대한민국 헌법 제31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다.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동일한 교육권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는 이들의 교육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 장애학생 교육을 위해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하 특수교육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특수교육법은 주로 학령기(초·중등) 의무교육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고 고등교육과 관련해서는 ‘장애학생지원센터’ 및 개인별 ‘교육지원계획’과 관련된 내용만 일부 제시돼 있다. 교육부 특수교육통계에 따르면 비장애학생은 매년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반면 장애학생은 5천여명씩 증가하고 있고 2025년 통계에서 학령기 장애학생의 장애 유형으로 지적장애 학생이 49.3%, 자폐성 장애가 21.2%로 발달장애에 해당되는 학생이 전체 장애학생 중 70.5%로 나타났다. 대학 진학률은 2023년 16.5%, 2024년에는 16.7%, 2025년 18.0%로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렇듯 많은 장애학생들과 부모들은 대학 진학을 통한 고등교육 참여 요구가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대학 또한 비장애학생의 입학 자원이 감소함에 따라 적극적으로 장애학생들을 입학시키고 있다. 최근 많은 장애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지만 실제로 장애학생을 위한 고등교육지원시스템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장애학생들의 학습권과 교육권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애인 고등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시스템의 마련이 절실히 요구된다. 첫째, 대학 중에서 장애학생 100%로 운영하고 있는 학과에 대한 교원과 교육활동 공간에 해당되는 교사(校舍)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다. 학령기 장애학생을 위한 특수교육에서는 특수학교 및 특수학급에 배치되는 특수교육 교사 배치 기준을 장애학생 4명당 교사 1명으로 명확한 기준이 제시돼 있다. 아울러 ‘특수학교 시설·설비 기준령’을 마련해 특수학교의 교지, 실습지, 교육 관련 시설의 종류 및 기준, 안전 및 편의 시설․설비의 종류 및 기준 등을 제시해 최소한의 교육 여건 마련을 통한 특수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고등교육에서는 장애학생에 따른 교원 배치기준이 없어 비장애학생 배치기준을 따르고 있어 제대로 된 교수·학습활동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대학의 교원 기준은 인문사회 계열은 학생 25명당 교수 1명, 공학 및 예체능 계열은 학생 20명당 교수 1명, 의학 계열은 학생 8명당 교수 1명으로 돼 있다. 그러므로 교육의 가장 기본에 해당되는 장애학생만을 선발해 운영하는 학과나 대학에 대해서는 의학 계열 수준보다 낮은 장애학생 6명당 교수 1명을 배치하는 기준을 시급하게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대학의 교육활동 시설에 있어서도 장애유형별 학생들이 불편함 없이 교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물리적 환경개선, 학습지원, 학비 및 재정지원, 심리적 지원 및 상담 등에 대한 법적·제도적 마련이 필요하다. 둘째, 장애인 의무고용 미이행으로 인해 납부하고 있는 교육계 수백억원이 되는 장애인고용부담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 펼쳐야 한다. 우선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산학협력을 통한 실습 중심, 주문형·맞춤형 교육과정에 대한 운영이 필요하다. 아울러 장애학생이 대학에서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생활비, 기숙사비, 학비, 실습비 등을 지원해야 한다. 셋째, 장애인 고등교육 장면에서 공평성보다는 공정성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대학 내 문화 조성이 필요하다. 장애학생들이 비장애학생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내용, 같은 방법으로 교수활동이 이뤄지는 것은 공평할지는 모르나 공정한 것은 아니다. 장애학생들의 특성을 고려한 지원체계와 개별화된 교수활동, 평가조정 등이 이뤄질 때 공정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넷째, 발달 장애인들이 무슨 고등교육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 대학 구성원들의 시각과 관점의 변화가 요구된다. 인공지능(AI) 시대에 따른 대학 교육의 역할도 많이 변하고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점차 떨어지고 있어 평생교육적인 측면에서 대학의 역할이 대두되고 있으며 기업 또한 변하고 있다. 기업에서는 신입사원 선발 시 능력과 태도를 중요하게 바라보고 인성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기업에서 원하는 인성과 태도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비장애학생들에게도 장애학생과 함께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소중한 역량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비장애학생들이 장애학생들과 함께하는 과정을 통해 다름을 알고 존중하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익히고 사회에 통합되는 중요한 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대학은 비장애학생과 장애학생이 더불어 성장하고 통합된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의미 있는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장애인들을 위한 고등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때 장애인들만이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비장애인들 또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성장이 이뤄진다는 것을 확신한다.

[경기시론] X-이벤트, 인간·기술 공존할 시점

최근 인류는 ‘X-이벤트’라 불릴 만한 거대한 기술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단순한 알고리즘의 진화를 넘어 AI는 이제 인간의 사고, 창의성, 판단력까지 모방하고 대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 혁신의 물결은 단순한 기술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 구조와 인간 존재의 의미까지 흔들고 있다. AI 기술의 발전은 눈부시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의 진보는 그 속도와 깊이에서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은 2024년 발표에서 AI 기술의 다음 단계로 ‘멀티모달 온디바이스 AI’, ‘에이전트 AI’, 그리고 ‘로봇 AI’를 제시하며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 이는 클라우드 기반 연산을 넘어 각 개인의 디바이스에서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AI가 등장하고 인간의 요청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에이전트가 일상에 침투하며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고 움직이는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이 흐름은 서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의 AI 기업 ‘딥시크’는 GPT—4 수준의 언어 모델을 자체 개발하며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고 있다. 단순한 모방이 아닌 독자적인 알고리즘과 학습 구조를 통해 글로벌 AI 경쟁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기술의 국경은 사라졌고 AI는 이제 국가 간 패권 경쟁의 핵심 무기가 됐다. 이러한 AI 폭풍은 사회 전반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 기술의 집중이 가속화된다. 소수의 기업과 국가가 AI 기술을 독점하면 정보와 권력의 불균형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둘째, 대규모 일자리 대체가 현실화된다. 단순 반복 업무 및 창의성과 판단이 요구되던 직종까지 AI가 대체하면서 인간의 노동은 점점 더 주변화될 수 있다. 셋째,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인간의 윤리, 인간 존중 사상은 AI 시대에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렇듯 거대한 변혁의 뒤안길에는 무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AI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튼은 AI의 위험성에 대해 심각한 경고를 남겼다. 그의 우려는 단순한 과학자의 경계가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실질적 가능성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리고 그 경고는 곧 현실이 되고 있다. 오픈AI가 출시한 챗GPT는 인간과 유사한 대화 능력을 보여주며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이어지는 기술 혁신의 파장은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역할을 위협하거나 오히려 인간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놓쳐선 안 될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닐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방향성과 목적을 설정하는 것은 인간이어야 한다. AI는 도구이지 주체가 아니다. 윤리적 기준, 사회적 합의, 인간 중심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는 이유다. ‘X-이벤트’는 단순한 기술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기술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거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인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인간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감정, 공감, 윤리, 존중, 배려, 이해, 소통 등 말이다. 가장 기술적으로 발달한 지금이야말로 인간 존중의 철학이 다시 중심에 서야 할 때다. 그것이 우리가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다.

[경기시론] 국민 건강 책임지는 ‘보건의료 개혁’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는 8월1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국민보고대회를 열고 ‘국정운영 5개년 계획(안)’을 발표했다. 국가비전, 3대 국정원칙, 5대 국정목표, 123대 국정과제를 담은 이 계획은 향후 국정 운영의 청사진이다. 국정운영계획은 단순한 행정 문서가 아니다. 국정 철학과 향후 5년간의 우선순위를 담은 설계도이자 사회적 약속이다. 보건학을 전공한 필자의 시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와 보장성 확대의 균형이다. 정부는 국고 지원 확대, 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사무장병원 단속, 약가제도 개선 등 지출 구조 개선을 약속했다. 그러나 보장을 넓히면 지출이 늘고 재정 안정을 강조하면 보장은 줄어드는 구조적 딜레마가 있다. 양쪽을 동시에 잡겠다는 방향은 옳지만 보험료 인상이나 세금 증가 등 국민 부담은 불가피하다. 건강보험 재정 적자가 연간 10조원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 균형이 핵심이다. 건강보험에 대한 국고 지원은 법적으로 보험료 수입의 20%까지 가능하지만 예산 편성 과정에서 이 기준은 지켜지지 않는다. ‘문케어’처럼 보장성이 확대될 때도 국고 지원은 충분치 않았고 재정 불안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정 안정과 보장성 강화를 동시에 이루겠다면 법정 기준을 지키려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공공의료 확충도 눈에 띈다. 수도권 쏠림을 막기 위한 지방의료원 강화, 지역의사제, 공공의료 사관학교 추진 등은 방향 자체로 타당하다. 그러나 의료 인력의 양성과 정착은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는다. 지방의 현실은 단순히 ‘의사 수’ 문제가 아니라 주거·교육·문화 등 삶의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료 인력은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 일부 의료원에서는 의사 재직 기간이 1년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단순한 인력 충원이 아닌 지속가능한 정주 기반 마련이 핵심이다. 이 역시 상당한 재정이 필요하므로 정부와 지자체 간 합리적 분담이 필요하다. 의료비 부담 완화도 중요한 축이다. 간병비 보험 적용, 희귀질환 지원 확대, 생활형 보장 강화는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이에 필요한 재원은 결국 우리 모두가 분담해야 한다. 건강보험 재정이 흔들리면 그 혜택은 미래 세대의 빚이 된다. 건강보험은 사회적 연대 시스템인 만큼 급여 확대와 함께 형평성과 지속가능성이 동시에 고려돼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합리적 균형을 담보한 구체적 실행력이다. 계획이 거창해도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면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응급실 앞에서의 긴 대기, 간병으로 인한 가족의 파탄, 지방의료 공백 문제는 당장 눈앞의 현실이다. 계획이 국민의 일상에서 변화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보건의료’라는 국정 목표가 실현될 수 있다. 특히 홀몸노인, 장애인, 농어촌 주민처럼 기존 시스템에서 소외됐던 이들의 삶에 실제 긍정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공공의료 확충이란 말에는 ‘지방’뿐만 아니라 ‘소외된 사람’이라는 정의가 함께 담겨야 한다. 국정은 정치적 구호에 가려 정책이 소모되는 현실을 넘어 이제는 구체적 실행과 국민 체감을 통한 신뢰 회복으로 나아가야 한다.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은 국가 비전이자 사회적 약속이다. 국민은 거창한 문구보다 작은 변화로 정부를 평가한다. 건강보험 고지서를 받아들 때, 지방에서도 응급실 문을 열 수 있을 때, 간병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줄어들 때 비로소 정부의 약속은 현실이 된다. 보건의료 개혁은 청사진이 아니라 국민의 일상 속에 있다.

[경기시론] 방향신호 켜지 않는 ‘지역혁신 정책’

미국 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 한번은 자동차 방향지시등이 고장 난 줄도 모르고 교차로를 직진하다 경찰에게 적발된 적이 있다. 경찰은 제 차를 보며 고개를 저었고 딱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Unsafe lane changed(불안전한 차선 변경)”. 그날 이후 운전할 때마다 교차로에서 방향지시등을 더 자주, 더 길게 켜게 됐다. 운전을 해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달리는 차량이 얼마나 불안한지. 차선은 있지만 예고 없이 바꾸는 차량, 교차로에서 멈춰 있으면서도 아무 신호도 없는 차량, 뒤따르는 운전자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예고 없는 차량들의 움직임은 곧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 지역혁신 정책을 생각나게 했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지역혁신 정책 변화들이 마치 깜빡이를 켜지 않고 차선을 바꾸는 자동차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지역의 산업 정책, 도시 개발, 교통 계획, 예술문화 공간 변화 등 중요한 지역정책 방향이 어느 날 갑자기 발표된다. 하지만 정작 그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시민들에게는 아무런 방향 신호도 없다. 사전 설명도, 공감대 형성도, 참여 기회도 없이, 그저 “우리가 이렇게 하겠다”는 일방적 선언만 있을 뿐이다. 지역의 정책 담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민을 위해 하는 일이다. 더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결정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기대가 아니라 혼란과 소외감, 때로는 분노다. 왜 그럴까. 시민은 정책의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삶의 시간을 오랜 기간 쌓아온 지역 공동체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고, 은퇴 후 노후를 준비한다. 또 누군가는 평생의 일터를 그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렇듯 삶이 겹겹이 쌓인 공간에서 예고 없는 정책 변화는 누군가의 삶을 갑자기 꺾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민이 바라는 것은 화려한 청사진이나 복잡하고 두꺼운 보고서가 아니다. 예측 가능한 변화, 존중받는 절차, 함께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무엇보다 ‘배려’와 ‘소통’이 담긴 정책이다. 혁신(Innovation)이라는 단어는 늘 멋지게 들린다. 하지만 그 혁신이 시민의 삶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또 다른 혼란의 서막일 것이다. 우리는 깜빡이를 켜지 않는 운전자를 무례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역정책도 마찬가지 아닐까. 방향 신호 하나가 사람들의 안전과 신뢰를 지켜주는 것처럼 지역정책에도 시민을 향한 방향신호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려 한다”는 깜빡이 신호,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신호 말이다. 지역정책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더 빠른 개발이나 더 큰 예산이 아니라 시민과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속도로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신호 하나를 켜는 데 드는 시간은 불과 몇 초일 뿐이다. 그러나 그 신호 하나가 안전을 보장하고 신뢰를 쌓게 된다. 지역정책도 마찬가지다. 시민을 먼저 배려하는 그 작은 신호에서부터 지역혁신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깜빡이를 켜는 행정, 깜빡이를 켜는 지역정책이 기본이 돼야 하지 않을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시민과 행정이 나란히 동일한 방향으로 걸어갈 때 혁신은 비로소 멋진 ‘지역혁신’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경기시론] 외국인의 불법체류로 인한 영향 및 대책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5월 말 기준 불법체류 외국인은 38만1천216명으로 체류 외국인(269만2천729명)의 14.2%를 차지한다. 불법체류 외국인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불법고용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문제를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따라서 이로 인한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용자가 불법체류 외국인을 고용할 경우 4대 보험료를 내지 않고 위법적인 해고와 인권침해의 소지가 크다. 외국인은 단속이 두려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고 건강보험 등의 사회보장을 받지 못한다. 특히 미성년 자녀는 아동으로서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 둘째, 불법고용된 외국인은 소득세, 사회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으므로 국민과 합법 취업 외국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에도 실수령액이 비슷하게 된다. 이는 구직자와 구인자 모두에게 유리하므로 노동시장에서 불공정 경쟁이 발생한다. 셋째, 취약계층의 일자리와 임금 보호, 사회풍속, 안전 등의 공익을 위해 규정한 외국인 고용 관련 법질서가 훼손되고 인권침해와 산업 안전사고 등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공익 보호와 인권침해 방지를 위해 불법체류 및 불법고용 행위 자체를 옹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법체류와 고용 행위에 대처해야 하는가. 첫째, 사용자가 불법고용을 선택하는 것은 그 혜택보다 제재 수준이 낮은 점, 현행 외국인력제도가 산업구조 변화와 노동 수요를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점, 불법고용을 옹호하고 이에 대한 단속을 부정적으로 보는 일부 정서 등에 기인한다. 이는 결국 불법체류와 불법고용 관련 시장을 키운다. 따라서 불법고용에 대한 범칙금 또는 벌금액 부과 시 4대 보험 탈루액을 고려해야 하고 불법취업 외국인도 단속 우려 없이 소득세를 납부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정부가 한시적으로 실시하는 합법화 또는 입국 규제의 유예 대상을 선별할 때 소득세 납부 여부도 중요한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또 정부가 경영계, 노동단체, 연구기관 간의 소통과 협력을 통해 시장의 변화에 부합하는 인력수급체계를 마련하고 불법고용을 줄이기 위한 범국민적 홍보와 캠페인도 함께 실시해야 한다. 둘째, 우리나라의 법제도에 대한 정보 부족을 악용해 불법알선 조직이 외국인의 불법취업을 알선하고 부추긴다. 외국인은 비자심사, 체류 기간과 근무처 제한 등을 피하기 위해 불법체류를 선택하고 사용자가 외국인 근로자의 숙련도, 한국어 구사 능력 등을 이유로 해고함에 따라 불법체류 상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정책에 대한 대내외 홍보를 강화해 합법적인 이민을 장려하고 허위 정보로 인한 불법취업과 착취를 예방하며 주요 국가와의 국제 협력을 통해 불법알선 조직에 대한 단속도 강화해야 한다.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절차와 허용 인원, 근무처 변경 허가 등에 대한 규제가 지역, 산업, 직종별 특성 등에 부합하지 않는 점도 있으므로 이에 대한 개선도 필요하다. 외국인 근로자가 입국한 후에는 산업안전과 기초 법제도 관련 교육을 강화하고 정기적 상담을 통해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용자가 외국인 근로자의 숙련도, 한국어 구사 능력 등을 이유로 해고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 중앙부처와 지자체, 대학, 기업 간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국내 대학은 물론이고 지정된 해외 대학의 졸업 예정자에게 6개월 내지 1년간의 대학 내에서의 직업훈련과 한국어 교육 및 국내 기업에서 인턴십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 과정을 통해 기량과 인성을 갖춘 학생을 기업에서 고용토록 알선하는 프로그램을 구축해야 한다. 이 프로그램의 성공을 위해서는 기업 또는 사용자 단체에서 파견한 전문인력이 직업훈련과 기량 검증 등에 적극 참여하기 바란다.

[경기시론] 에스콰이어-변호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필자는 변호사다. 최근 재미있는 법정드라마가 넘쳐나서인지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법 교육을 하며 “나는 변호사입니다”라고 말하면 제법 관심을 보인다. 거기에 필자는 변씨인지라 변변. 학생들 법률교육을 하는 변호사라 로쌤(lawsam)이라고도 불러주니 감개무량하다. 학생들을 만나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곤 한다. 연봉이 얼마냐, 일이 힘드냐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어떤 사람이 변호사가 돼야 하냐는 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어떤 사람이 변호사가 될 수 있냐는 질문을 하면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에 대해 잘 답변해 줄 작정이었는데 누가 변호사가 돼야 하냐니.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생이 생각하는 거라면 필자도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누가 변호사가 돼야 할까. 법꾸라지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법꾸라지는 ‘법률’과 ‘미꾸라지’가 합성된 신조어다. ‘인맥이나 정보, 지식 등과 결합한 법률 권력 및 기술을 이용해 법에 의한 처벌을 미꾸라지처럼 능수능란하게 피해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해서 모두 올바른 것은 아닌데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하다 보면 “이건 무죄다. 증거 있느냐. GPT에 물어보니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말하며 무례함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낯부끄럽게 당당한 사람들을 종종 본다. 대단히 똑똑하다고 믿는 본인에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려줘야 하는 걸까. 법꾸라지들이 내세우는 정당함이란 ‘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렇다 보니 올바른 행위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크게 틀렸다. 다시 학생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적어도 “불법이 아니라 해도 올바른 행위는 아닐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는 학생들이 변호사가 돼야 할 것 같다. 올바른 행위가 쌓이고 쌓일 때 이 사회가 더 살 만하고 따뜻해질 수 있다고 믿고 그 행위가 갖는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아이들이 말이다. 내가 그 행위를 직접 하지는 못한다 해도 다른 사람의 그런 행동을 깎아내리지 않고 기꺼이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사람.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기왕이면 좋은 학벌과 학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로스쿨에 입학해서도 치열한 3년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제는 반 토막이 나 버린 변호사시험에도 다섯 번 안에 합격해야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더해 이 글을 보는 학생들이 ‘좋은 변호사’가 되기 바란다. 몇 년 전 논란이 됐던 정○○ 변호사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법꾸라지 같은 모습. 좋은 변호사라면 적어도 그러한 법꾸라지 이거나 법꾸라지를 거리낌없이 지원하는 변호사는 아닐 터다. 학창시절의 ‘배움’은 그래서 참으로 중요하다. 도덕이나 윤리를 배우는 때는 학창시절이 유일해 이때 배우고 닦은 가치관으로 평생을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문제가 된 학교폭력이나 교권 침해 역시 결국 ‘배움’, ‘교육’의 문제임은 여러 번 언급한 대로다. 학생들이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이해하고 법적인 소양을 길러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며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행동하는 시민으로 커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법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공교육을 통해서 말이다. 학창시절의 법교육만이 법기술을 배우는 교육에서 벗어나 행복한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한 윤리를 배우는 교육이 될 수 있다. 이때의 배움으로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과 교원들을 배려하며 학교라는 공동체 내에서 조화롭게 생활하는 데 필요한 소양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배움이 사회로 이어진다. 에스콰이어(Esquire). 최근 한 법정드라마에서 에스콰이어를 미국 등 영어권에서 변호사에게 붙이는 공식 존칭을 넘어 변호사로서의 책임감, 윤리적 태도 등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즉, 단순히 자격증을 가진 변호사를 넘어 변호사로서의 정체성과 품위를 가진 진짜 변호사 말이다. 꼭 변호사가 아니어도 된다. 필자는 12년의 학창시절을 보내는 우리 학생들이 모두의 인생에서, 그 어떤 직업에서든, 에스콰이어 ○○○이 되길 소망한다. 힘내라 ○○○!

[경기시론] ‘기본’ 위에 사회를 다시 세울 때

2025년 대한민국은 복합적 위기의 한가운데 서 있다. 장기적인 저성장과 양극화는 경제의 구조적 병목을 심화시키고 사회 곳곳에서는 신뢰의 붕괴와 공동체 해체가 일상화되고 있다. 이제 사회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라는 오래된 슬로건이 아니라 무엇이 사람의 삶을 최소한으로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하다. 그 중심에는 ‘기본’이라는 개념이 있다. 기본이란 한때는 너무도 당연해 말할 필요조차 없던 것들이었다. 주거, 교육, 먹거리, 의료, 돌봄, 지역공동체, 관계망,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 등은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할 삶의 최소한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기본들은 점점 더 운이나 출신 배경, 혹은 시장의 기회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삶의 시작선이 불평등하게 설정되고 그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복지 확대나 시장 개입 수준을 넘는 근본적인 사회 재설계다. 사회의 기반을 다시 점검하고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할 공통의 삶의 조건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이 지점에서 ‘기본경제’와 ‘기본사회’라는 두 축이 중요한 해법으로 제시된다. 기본경제란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인 주거, 의료, 식량, 교육, 돌봄, 에너지 같은 영역에 대해 공공성과 공동체 원리에 기반한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생산과 분배 체계를 구축하자는 제안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구조 자체를 전환하자는 방향이다. 시장의 효율성과 민간의 경쟁만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공동의 기반으로 회복하자는 것이다. 기본사회는 인간 관계와 사회적 의미를 중심에 둔 새로운 사회 질서다. 돌봄, 상호의존, 신뢰, 존엄의 가치를 기반으로 구성원들이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구조다. 이 사회에서 시민은 더 이상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제도의 공동 설계자이며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연대에 기반한다. 기본사회는 결국 공동체로서의 사회 본연의 의미를 되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기본경제와 기본사회는 상호 의존적인 구조다. 기본경제가 없다면 기본사회는 이상적 구호에 머물 뿐이고 기본사회가 없다면 기본경제는 단순한 기술적 조정에 그친다. 두 개념은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범주도 구체화되고 있다. 기본소득, 기본자산, 기본금융, 기본서비스, 사회적경제, 지역화폐 등 여섯 가지 정책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설계돼야 한다. 기본소득은 생계의 불안을 줄이고 시간의 여유를 제공하며 기본자산은 삶을 기획할 수 있는 출발선을 보장한다. 기본금융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누구에게나 열어 주고 기본서비스는 교육, 건강, 주거, 돌봄 등 필수 생활 영역의 접근성을 높인다. 사회적경제는 협동과 관계를 중심에 둔 생산 구조를 만들고 지역화폐는 이를 지역 단위에서 작동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구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과제가 선행돼야 한다. 첫째, 정책과 제도를 사람의 삶의 흐름에 맞게 전환해야 한다. 행정은 지시가 아니라 지원이어야 하며 정책은 단절된 기능이 아닌 통합된 경험으로 설계돼야 한다. 둘째, 공공성과 시장을 재구성해야 한다. 돌봄과 신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공경제와 공동체 기반의 시장이 필요하다. 셋째, 시민을 수동적 수혜자가 아닌 제도의 참여자로 인식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넷째, 삶의 질을 정책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신뢰, 예측 가능성, 시간의 여유 같은 질적 지표가 중요하다. 다섯째, 지역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 지역은 단순한 행정 단위가 아닌 신뢰와 관계의 터전이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라 이미 일부 지역과 현장에서 작지만 의미 있게 실천되고 있다. 필요한 것은 이 흐름을 연결하고 확장할 수 있는 상상력, 정치적 결단, 그리고 시민의 참여다.

[경기시론] 사회적 자본이 ‘생산성∙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

일반적으로 총요소 생산성은 노동, 자본, 기술 등의 투입량 대비 총산출량을 통해 결정되고 경제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1~2005년 우리나라 총요소 생산성 증가율은 2.2%이지만 2016~2020년은 0.9%로 하락했다. 이러한 하락 추세의 전환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개방도상국일 때 저렴한 임금, 높은 교육 수준과 근면성을 갖춘 풍부한 노동력, 선택과 집중을 통한 자본 투입을 기반으로 선진국 경제를 추격하면서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선진국이 되면서 치열해진 기술과 품질의 경쟁, 높아진 임금, 기술 발전에 따른 기업 수요 변화와 근로자의 기술·숙련 수준 및 직업 선호도의 변화로 인한 간극 심화, 고용시장의 경직성, 저출산·고령화, 지역 불균형 등의 과제가 대두됐다. 이 과제들은 사회구성원 간의 이견이 크거나 중장기적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할 과제들로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와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총요소 생산성 향상과 경제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 근본적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사회구성원 간 신뢰와 협력 부족이다. 영국 레카툼 연구소에서 발표한 ‘2023년 번영지수’ 기준에 따르면 조사 대상 167개국 중 우리나라의 사회적 자본 순위는 107위로 하위권이다. 특히 사회적 네트워크는 162위로 사법시스템, 정치인, 정부에 대한 불신 등이 주요 원인이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와 협력 관계를 의미하는 무형의 자산으로 우리 사회 공동의 가치와 목표를 실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 자본을 확충하려면 국회와 정부가 사회구성원과 충분한 토론을 통해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오해를 줄이고 정책 방향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간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정부 주도로 정책을 빨리 결정하고 추진하는 속도전에 기인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관행이 오히려 잦은 정책 번복으로 인해 정책 신뢰도와 효율성을 낮추고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이기도 한다. 따라서 국회와 정부가 경제정책을 수립할 때 이견이 많은 과제일수록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업, 지식 창출을 목표로 하는 연구기관, 좋은 근로조건을 목표로 하는 근로자 간의 충분한 토론을 거쳐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사익과 공익의 조화로움을 실현할 수 있는 협력 모델과 관행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절차를 무시하면 그 정책은 중장기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고 사회구성원 간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또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이민자도 사회통합정책 등 이민정책의 수립 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와 협력을 높여야 한다. 예를 들어 인구감소지역 발전을 위해 중요한 농업 분야에서 농가당 경작면적(2023년 기준 약 1.5㏊)의 확대와 생산성 향상 같은 근본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약 40%에 불과한 네덜란드가 세계 농식품 수출 2위인 것은 농가구당 평균 경작면적을 1950년대 약 1㏊에서 약 32㏊로 확대하면서 충분한 보상을 했고 가구당 직불금 수령액 증가, 농업기술과 시설 개선을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소득 증가는 물론이고 업무피로도를 낮춰 직업 선호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 농업인, 연구기관 간의 신뢰와 협력을 통해 수립된 중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일관성 있게 농업을 개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 산업 전반의 생산성 향상과 지속적인 경제 성장, 출산율 제고와 지역 균형발전 등과 같은 중장기적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자본 확충의 중요성부터 인식해야 할 것이다.

[경기시론] 교육활동 침해행위의 법적 의미

교사들의 정상적인 교육활동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교원지위법이 개정돼 시행된 지 1년4개월이 됐다. 주요 개정 내용은 교육감은 교원의 정당한 생활지도 행위가 아동학대범죄로 신고돼 조사나 수사가 진행되는 경우 수사기관 등에 해당 사안에 대한 의견을 신속히 제출하도록 하는 것, 교육지원청에 지역교권보호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하는 것, 교육활동 침해행위의 유형에 공무집행방해, 무고죄를 포함한 일반 형사범죄와 목적이 정당하지 않은 민원을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행위 등을 추가하는 것 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원지위법 개정으로 교원은 교육활동 침해로부터 적극적인 보호를 받고 있는가. 현장의 의견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지난주 “퇴근 후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교사가 소속 학교의 학생으로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신체 일부가 담긴 사진과 성희롱성 메시지를 받은 사안”(이하 ‘이 사건 행위’)과 관련, 지역교권보호위원회에서 교육활동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위의 행위는 교육활동 침해행위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일단 교원지위법을 살펴보자. 교원지위법 제19조는 ‘교육활동 침해행위’를 고등학교 이하 각급 학교에 소속된 학생 또는 그 보호자 등이 교육활동 중인 교원에 대해 공무집행방해, 무고, 폭행, 협박, 명예훼손, 모욕, 성폭력범죄, 목적이 정당하지 않은 민원을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행위, 교원의 법적 의무가 아닌 일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행위 등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 사건 행위는 성적 욕망을 유발하거나 만족시킬 목적으로 통신매체를 통해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말, 그림, 영상 등을 도달하게 한 행위로서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라는 성폭력범죄에 해당한다. 통매음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로 인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왜 교육활동 침해로 인정받지 못했는가. 바로 ‘교육활동 중인 교원’에 대한 행위로 보지 않은 탓이다. 교원지위법은 ‘교육활동 중’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교육부의 교육활동 보호 매뉴얼에 따르면 학교안전법 제2조에서 정한 ‘교육활동’의 정의 규정을 참고하되 해당 사안의 구체적인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해 교육활동 중을 ‘시간’의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하게 한다. 이에 따라 퇴근시간 후라도 휴대폰으로 자녀에 대한 학업상담을 하던 중 발생한 사안은 교육활동 중으로 SNS에서의 모욕이나 명예훼손 행위 역시 해당 게시물 등이 교육활동 시까지 계속되므로 교육활동 중으로 볼 수 있다고 안내한다. 그렇다면 퇴근 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교사가 소속 학교의 학생으로부터 SNS 메시지를 받은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교육활동 중을 시간의 개념으로 한정하지 않는 점과 통신매체를 통한 침해 유형을 법률에 규정한 취지를 고려할 때 이 사건 행위는 교육활동 중인 교원에 대한 행위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통신매체이용음란행위 등은 일대일 도달을 원칙으로 해 공연성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 점, 일부 SNS에서 사라지는 메시지 기능을 이용하는 경우 침해의 고의성은 더 클 수 있는데 그렇다면 메시지가 삭제된 것을 면책의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 특히 이 사건에서 SNS는 학생들과의 소통을 위해 운영하던 창구라는 점까지를 고려한다면 이 사건 행위는 교육활동 중인 교원에 대한 행위로 봐야 한다. 교육활동 중인 교원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고자 하는 교원지위법의 취지를 고려할 때 교육활동의 의미를 학교안전법에서 정한 교육활동으로 한정해 좁게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 해당 행위가 교원의 교육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실질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장에 부합하는 ‘교육활동’의 범위를 교원지위법에 신속히 규정해야 할 것이다.

[경기시론] 기본소득과 기회소득

최근 몇년간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과 ‘기회소득’은 논쟁적이면서도 중요한 복지 정책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특히 경기도는 이 두 정책을 실제로 도입·운영한 전국 유일의 광역자치단체로 정책 실험의 선두에 서 있다.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 시절의 청년기본소득, 농촌기본소득, 농민기본소득에 이어 김동연 현 지사는 예술인, 장애인, 농어민, 체육인, 기후행동 참여자, 돌봄 종사자 등을 대상으로 기회소득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보통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개별로, 정기적으로, 그리고 현금으로 일정 금액을 지급한다”는 다섯 가지 원칙(보편성·무조건성·개별성·정기성·현금성)을 전제로 한다. 최근엔 생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준다는 충분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부각되기도 한다. 그 개념적 범주가 어떻든 경기도에서 실행한 청년기본소득이나 농촌기본소득, 농민기본소득은 이 원칙에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 첫째, 특정 집단(청년, 농민 등)에만 지급되는 ‘범주형 기본소득’이다. 둘째, 예를 들어 농민기본소득에서 보듯이 대상 선정에 일정한 소득자격 기준이 존재한다. 셋째, 현금 대신 사용에 제약이 따르는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로 지급한다. 결국 경기도의 기본소득 정책은 이론적 기본소득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단, 정책 실험의 의미를 지닌 ‘부분적 제도화’로 평가해 줄 수는 있다. 한편 김동연 도정이 도입한 기회소득은 기본소득과는 철학적 기반이 다르다. 경기도는 기회소득을 단지 저소득층 지원 정책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활동에 대해 사회가 책임지고 정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제도”로 규정하고 있다. 예술인, 장애인, 농어민, 체육인, 돌봄노동자, 기후행동 실천자 등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그 노동과 참여가 시장에서 과소평가되거나 무보수에 가까운 형태로 방치돼 왔다고 보는 것이다. 기회소득은 이러한 사각지대에 놓인 기여에 대해 사회가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상하는 실험이다. 이들 정책은 보통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실제 사회보장심의를 거쳐 채택된 사회보장정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존 복지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제도적 상상력과 사회적 실험의 장을 여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 정책은 복지정책을 넘어 미래 사회를 위한 제도 혁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존엄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보장’이라면 기회소득은 ‘가치를 창출하는 삶에 대한 존중’이다. 둘은 상호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에서 개인의 삶을 지원하는 두 개의 축이다. 그런 만큼 비록 이 양 제도가 현재 병렬적으로 시행되고 있지만 오히려 전략적 통합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통합적 정책 설계를 통해 더 큰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일정한 기본소득(부분적이라도)을 지급한 후 사회적 활동에 따라 추가적인 기회소득을 부여하는 방식은 복지의 보편성과 생산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구조다. 또 양 제도 모두 지역사회 기반의 실천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공동체 회복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개인이 지역 안에서 자발적으로 활동하며 보상을 받고 동시에 안정적인 기본소득을 통해 삶의 불안을 줄일 수 있다면 이는 ‘참여 기반 지역 순환경제’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실제 경기도 농어민기회소득은 그 뚜렷한 흔적을 보여준다. 경기도가 진행해 온 기본소득과 기회소득 정책은 기존 제도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상상력을 확장해 왔다는 점에서 기존 사회정책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이제 과제는 명확하다. 이 두 제도의 실험을 계승하되 더욱 정교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식으로 제도화하는 것이다. 기본소득과 기회소득이 따로 가지 않고 함께 설계되고 운영된다면 우리는 ‘함께 사는 사회’라는 더 근본적인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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